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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수업 만들기

상상력, 공감 능력 그리고 하나님 #2

양영기의 교실 묵상 10

상상력, 공감 능력 그리고 하나님
#2


긍휼의 하나님

마태복음(18장)에는 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자가 등장한다. 그 빚은 실로 엄청나서 채무자의 몸, 아내, 자식 그리고 모든 소유를 다 팔아도 갚을 수 없는 큰돈이었다. 그런데 주인은 그의 간절한 청을 받아들여 빚을 없던 것으로 해 주었다. 그 주인은 종의 간절한 마음을 공감하고 불쌍하게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 종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가 빚을 갚지 못하자 옥에 가두어 버린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주인은 탕감을 철회하고 그를 감옥에 가둔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은혜를 받은 자의 삶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제시하였다.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이 비유가 ‘하늘나라(천국)’를 비유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곳이다. 따라서 상대방의 고통과 슬픔을 공감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천국이 되는 것이다. 교사는 자신이 맡은 아이들의 슬픔, 분노, 기쁨을 나눔으로써 교실에 천국이 임하게 할 수 있다. 기독 교사는 교실을 하나님의 나라(하늘나라, 천국)로 만드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죽어야 할 우리에게 왜 은혜를 베푸셨는가? 바로 사랑과 긍휼 때문이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 2:4)

  긍휼은 상대방의 고통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내가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을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해 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다음 말씀을 통해 긍휼과 사랑이 넘치는 사람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셨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 10:33~37)

위 장면에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자를 마치 자신처럼 최선을 다해 보살펴 주었다. 이것이 바로 긍휼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긍휼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셨다. 이렇게 긍휼은 죄로 물든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사랑, 긍휼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우리가 성화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이다. 그리고 긍휼은 우리가 꼭 닮아야 할 하나님의 성품의 하나다. 예수님은 율법 교사에게 자비를 베푸는 삶을 살도록 도전하셨다. 그 도전은 현재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것이 우리가 교육에서 긍휼과 자비, 사랑을 실천하고 가르쳐야 하는 이유다. 겉으로는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는 이 시대 아이들의 내면을 잘 살펴보면 사랑에 굶주려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굶주림은 꼭 ‘분노’로 나타난다. 사랑에 굶주린 아이들은 교사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반항한다. 교사와 이 세상을 향해 분노하는 것이다.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없는 것이다. 마음이 지옥인 것이다. 이들에게 진정 무엇이 필요한가?

 

공감 능력과 교육

사랑과 긍휼은 나만의 욕망에서 벗어나 상대의 마음을 공감하는 능력이다. 공자는 “자기를 극복하여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인(仁)”이라고(克己復禮爲仁) 하였다. 공자에게 인(仁)은 자기를 극복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자기를 극복하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극복하는 것이다. 예(禮)는 자신의 욕망을 극복하고 상대에 대한 이해를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이 도덕성이다. 나의 욕망을 극복하고 그 자리에 상대방이 머무를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는 것, 그것이 도덕성이다. 따라서 예(禮)는 공감의 드러난 모습이다. 이것을 통해 공감 능력이 도덕성의 중요한 요소임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이 폭력적이고 비도덕적인 성인으로 자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런데 자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우리는 모두 죄의 방에 갇혀 있다. 그것이 자폐(自閉)다. 우리의 죄가 우리를 가뒀다. 그리고 그 문고리를 우리가 움켜쥐고 있다. 너무나 안락하고 익숙해진 죄의 방에서 나오고 싶지 않은 것이다. 세상의 철학과 종교가 예수님의 가르침과 다른 점은 그 자폐의 방에서 스스로 나올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친히 죄의 방에 들어오시기를 자청하시고 문 밖에서 우리가 그 방문을 열기를 기다리신다.(계 3:20)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시는 것, 그것이 자폐(自閉)에서 벗어나 자개(自開)로 가는 참되고 유일한 방법이다. 공자는 우리의 죄성으로 인해 자기를 극복하는 것이 원천 봉쇄 되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없이 완전한 예(禮)는 회복될 수 없으며 세상에서 인(仁)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자폐를 극복하기 위해

자폐아들의 특성 중 주목할 점은 자폐아들은 비유적인 표현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눈은 마음의 창’ 같은 비유적 표현이 의미하는 바를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원관념과 보조 관념 사이의 공통된 성질을 연결 짓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유적 표현이 많은 시와 같은 문학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A가 가지는 여러 가지 특징을 A와 연결 지어 사고할 수는 있어도 A와 표면상 다른 대상인 B를 하나의 공통된 속성에 따라 연결 짓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자폐아의 이러한 지적 특징은 인간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자폐아들은 자신의 감정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타인도 자신과 동일하거나 유사한 감정과 욕구를 느끼리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보통 자신이 목마르면 상대도 목마를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자신의 상태를 통해 상대방의 상태를 파악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자폐아들은 자신의 욕구만 중요할 뿐 상대방의 욕구를 이해할 수 없고 존중해 줄 수 없다. 결국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한 수단으로 보게 된다. 또한 자신의 욕구 충족 여부에 지나치게 민감해서 타인이 자신의 욕구 충족에 방해될 때는 공격적으로 나오기도 한다.

저학년일수록 싸움이 나면 서로 상대방이 먼저 잘못했다고 주장하며 억울해 하기 십상이다. 늘 상대방이 자신에게 부당하게 대했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자폐적 성향의 사랑을 가진 부모는 자신의 자녀가 학교에서 혼나고 오면 무엇 때문에 혼났는지 그리고 어떻게 교육해야 자녀의 잘못이 고쳐질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의 잘못을 감싸 주고 자녀를 혼낸 선생님을 비난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자폐적 사랑을 드러낸다. 결국 자녀의 잘못에 대해 관대하거나 무조건 옹호해 주는 것은 자녀의 자폐적 성향을 키우게 된다. 이런 학생들은 사회에서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고 주변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

가끔 우리 교사들도 자폐적 성향을 보일 때가 있다. 학급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학생의 탓으로 돌린다. 반을 잘못 만났다고 하거나 문제아들이 자신의 반에 몰려 있다고 믿는다. 문제는 해마다 상황이 바뀌어도 불평의 내용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폐적 성향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확실한 해결 방법이 있는데 모든 문제의 근원이 자신에게 있다고 먼저 전제하고 해결책을 찾는 것이다. 왜?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다. 나는 그것이 세상과 다른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라고 믿는다.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이해를 통해 상대방의 마음을 유추하는 것이 바로 공감 능력이다. 상대방의 슬픔을 이해하고 느끼기 위해선 자신이 먼저 그 슬픔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일종의 공명과 비슷해서 서로의 공통된 특성이 만날 때 감정의 울림이 생기는 것과 같다. 상대의 슬픔이 내 안에 전달되고 이어서 내 안에 잠자던 슬픔을 울리는 것이다. 슬픔, 기쁨, 외로움, 고통, 허무 등의 감정들은 모두 고유의 진동수를 가지고 있어서 서로 다른 두 감정이 만날 때 서로 울리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각각 고유한 감정의 진동수를 가지고 있다. 교사는 학생들이 보내는 고유의 진동수를 파악하여 같이 울어 주어야 한다. 마음의 안테나를 쫑긋 세우고 30~40명의 아이들이 보내는 주파수를 잡아야 한다. 어렵다. 교사 자신의 마음을 지키면서도 함께 울어 주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헨리 나우웬은 그런 고귀한 역할을 감당하는 자의 모습을 ‘상처 입은 치유자’로 비유했다.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며 동시에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할 때 참된 치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처가 많은 사람은 상대의 상처에 냉담하기 쉽고 상처가 없는 사람은 상대의 상처를 이해하기 어렵다.

  긍휼은 은사다. 은사는 사모하는 사람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이 시대 죄로 인해 고통 받는 우리 아이들, 선한 것으로 교육할 수 없는 경쟁과 탐욕의 교육 풍토에서 신음하는 우리 아이들을 긍휼하게 여길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자. 그 마음으로 2학기를 멋지게 시작해 보자.

  “이것이 우리가 선택한 삶, 곧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이니, 그 삶을 그저 머릿속 사상이나 마음속 감정으로 여기지 말고, 그 삶에 담긴 뜻을 우리 삶 구석구석에 힘써 적용하십시오. 마치 우리 가운데 누구는 더 낫고 누구는 모자라기라도 한 것처럼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유진 피터슨 《메시지》갈 5:25~26)

  7년째 출퇴근에 이용하던 자전거를 놓고 학교까지 걸어간다. 걷기가 주는 여유 있는 속도감에 몸을 맡기고 집을 나서면서 기도를 시작한다. 기도는 긍휼의 방을 여는 열쇠다.

“오늘 하루도 아이들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들의 연약함을 위해서, 나의 기준에 모자란 그들을 위해서 그리고 연약한 나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 저는 부족합니다. 오늘 하루도 매 번 같은 기도를 드리지만 변화되지 않는 저를 용서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기도가 끝날 때쯤 정문이 보이고 아이들이 보인다. 또, 새 하루의 영적 전쟁이 그렇게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