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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수업 만들기

상상력, 공감 능력 그리고 하나님#1



양영기의 교실 묵상 9
상상력, 공감 능력 그리고 하나님#1


아름다운 시골 마을의 잔혹사

 초등학교 시절 나는 동네에서 소문난 장난꾸러기였다. 말썽을 일으키지 않고 넘어가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학교 정문을 이용하기 보다는 담을 넘어 등교하는 것을 좋아했고, 반 아이들을 괴롭혀 학기 초면 같은 반 학부모들 여러 명이 우리 집을 찾아와 항의하기 일쑤였다. 또 1층에서 고무줄 하는 여학생들을 향해 3층에서 물을 뿌리면 밑에서 올라오는 여학생들의 비명 소리를 듣는 것이 그때는 무척 즐거운 놀이(?)였다.

 우리 집은 시골의 작은 동네 어귀 반대편에 산을 등지고 있었다. 산으로 이어진 길가에는 개망초 꽃이 피고, 집과 산 사이는 계단식 논이 산을 향해 이어져 있었다. 여름밤이면 그 논에서 개구리 우는 소리가 온 세상을 가득 채울 듯 울려 퍼지고 논둑 가득 반딧불이가 형광색 불빛을 반짝거리며 날아다녔다. 그래서인지 우리 집 담장 밑에는 뱀이 많았다. 하루는 살모사 한 마리가 담장 밑구멍에서 나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얼른 주먹만 한 돌을 꺼내 던지자 구멍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며칠 후 담장을 지나던 나는 그 뱀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런데 뱀의 옆구리가 터져 보기에 너무 흉측했다. 벌써 30여 년이 지난 일이지만 그 모습이 쉽게 잊히지가 않는다. 그날 나는 재미로 한 일이 상대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될 수 있는지 깨달았다. 그 일이 있은 후 재미삼아 개미를 밟는 일, 개구리를 높이 던져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일, 잠자리 머리를 떼는 일을 그만 두었다.


공감 능력과 자폐

 일반적으로 ‘공감 능력’은 타인의 감정을 파악하는 능력인 공감적 정확성(empathic accuracy)과 그 공감적 정확성에 의해서 파악된 타인의 감정에 영향을 받아서 그와 유사한 감정을 느끼는 정서적 전이(emotional contagion)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즉 공감 능력이란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하고 느끼는 능력을 말한다. 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것, 경기장에서 함께 흥분하며 응원하는 것, 함께 기도할 때 더욱 뜨겁게 기도하는 것, 이 모두가 공감능력과 관련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그의 저서 《역사의 종말》에서 인간의 역사를 ‘타자에게 인정(認定) 받기 위한 투쟁’의 역사로 보았다. 역사의 흐름을 ‘인정’이라는 변인으로 파악하는 관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더라도 ‘인정’이 얼마나 우리 삶에서 중요한 요소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하루도 우리 모두가 어떤 상황에 있었든지 인정받기 위해 얼마나 많은 힘을 쏟았는지 되돌아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정받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감정을 파악하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공감 능력은 원만한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은 대부분 상대의 생각과 감정을 잘못 파악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특히 남녀 간의 문제가 그렇다. 사랑하는 관계일수록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끼는지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성공적인 연애의 지름길이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해결의 지름길은 설득보다는 인정과 공감이다.

 타인의 감정과 생각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을 자폐 환자라고 한다. 자폐는 현실과 동떨어진 자기 내면세계에 틀어박히는 정신 분열증이다. 자폐 환자는 타인의 내면세계를 인식하지 못한다. 당연히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거나 느낄 수 없다. 자폐 환자가 대인 관계에서 보이는 어려움을 고려할 때 대인 관계에서 공감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거울 뉴런과 교육

 이탈리아의 신경심리학자인 지아코모 리졸라티(Giacomo Rizzolatti)는 원숭이의 행동과 뉴런과의 관련성을 연구하던 중 특이한 현상을 발견한다. 즉 한 원숭이가 특정한 행동을 할 때 나타나는 뉴런의 반응과 그와 유사한 행동을 하는 다른 원숭이를 관찰할 때 나타나는 뉴런의 반응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거울에 비친 모습과 같다고 하여 ‘거울 뉴런’(mirror neuron)이라 명명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직접 행동을 하지 않고 단지 행동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행동을 할 때와 같은 부위의 뉴런이 활성화된다는 사실은 인간의 공감 능력에 많은 것을 시사한다. 즉 특정 행동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관찰 대상자와 동일한 뉴런이 활성화되어 동일한 생각과 감정을 느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뇌는 단일 뉴런의 독자적인 활동에 의해 작동하기보다는 뉴런과 뉴런 간의 복합적인 상호 작용(mirror neuron system)을 통해 활동하는 특징이 있다.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라는 말도 거울 뉴런 이론에 비추어 보면 일리가 있는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아이는 ‘가정’과 ‘사회’의 거울이다. 결국 ‘요즘 아이들’의 문제는 요즘 사회 문제의 한 현상일 뿐이다.

 남녀가 처음 사귈 때는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과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늘 상대의 언어적 비언어적 행동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모든 신경이 상대방에게 집중된다. 그리하여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다양한 정보를 수집, 해석, 반응한다. 시선의 방향, 머리 모양, 옷차림, 말투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 결국 사랑하는 연인끼리는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초절정의 내공이 혈맥을 따라 흐르게 되는데 이때가 두 남녀가 가장 뜨거울 때다. 상대의 생각과 감정이 곧 나의 생각과 감정이 되니 나와 너의 구분이 모호한 경지에 이른다. 즉 혼연일체가 되는 것이다.

 한편, 남녀 관계 못지않게 상대에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관계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엄마와 아기와의 관계다. 엄마는 언어를 사용할 수 없는 아기로부터 다양한 정보를 얻기 위해 한정된 시그널을 정확히 해석해야 한다. 배가 고픈지, 오줌을 쌌는지, 아픈지, 아이의 모든 상태가 울음 하나로 전달된다. 시끄러운 공간 속에서도 엄마는 이제 막 잠에서 깬 아기의 나지막한 울음소리를 즉각 알아차린다. 공감 능력은 아기가 아플 때 최고조에 달하는데 대부분의 엄마들은 아이의 고통을 자신이 대신해 느끼길 원할 정도다. 이 또한 혼연일체의 경지다.

 맹자는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놀라고 불쌍한 마음을 갖는데 이는 본능적인 마음이라고 주장했다. 이 마음이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이를 뇌 과학적으로 설명하면, 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는 순간 우리의 뇌는 내가 우물에 빠지는 것과 같은 상태로 거울 뉴런 시스템이 활성화된다. 즉, 내가 우물에 빠지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동시에 위험한 상황에서 무기력한 존재인 아이의 자아와 나를 일치시켜 측은한 마음이 극대화 되는 것이다.

 한편 우리가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장면을 본다면 우리의 뇌는 어떻게 활성화되겠는가? 피가 튀는 게임에 빠지거나 선정적인 춤과 가사의 대중가요를 즐겨 듣고, 부모의 불화로 늘 불안에 떨어야 하고, 입시 경쟁을 부추기며 끊임없이 불안을 조성하는 교사의 훈화에 우리 아이들이 노출된다면 그들의 뇌는 어떻게 활성화되겠는가? 아이들을 키워 보거나 학생들을 가르쳐 본 사람은 안다. 그들은 부정적이고 자극적인 말에 빠르고 강하게 반응한다. 아이들이 사용하는 욕의 전염성이 강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은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이 우리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일찍부터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태어나지도 않은 뱃속의 아이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해 ‘태교’의 개념이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좋은 것을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등의 모든 활동이 아이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다음 말씀은 뱃속의 아이가 의식이 있음을 보여 준다. 의식이 있다는 것은 외부의 자극에 지적, 정서적으로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눅 1:41~44)


 이런 의미에서 학생을 교육하는 것은 태교의 연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나의 말과 행동이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근신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교사도 학생들의 언어와 행동을 닮는다. 학생들과 소통하기 위해 또는 학생들과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기 위해 그들의 저급한 언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구닥다리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나도 너희의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언어적 타협을 감행한다. 이렇게 될 때 교사는 학생들이 만나는 또 하나의 대중문화가 되고 세상이 된다. 따라서 우리가 또 하나의 ‘세상’이 되지 않기 위해, 기독 교사는 말씀과 기도로 성령 충만해야 한다. 갖가지 업무, 학생들의 사고 뒤처리, 학부모들의 민원 등 어떤 것으로부터도 우리의 성령 충만을 잃어 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싸움에서 지면 우리의 영혼이 다치고 우리의 학생들의 영혼이 다치는 것이다. 입으로만이 아닌 영혼으로 공감하기 위해 나의 얕은 기도가 더욱 깊어졌으면 한다.





앞으로 연재되는 이 글이 좀 더 풍성하게 열매 맺기 위해서는 선생님의 기도가 더 많이 쌓여 있어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만날 죄를 밥 먹듯이 짓고, 배신하고, 원망하는 등의 한심한 모습을 보일 때도 “그래 너희들 됐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인간의 육체를 입고 함께 고난을 짊어져 주신 것이 제게는 최고의 공감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수많은 판단을 해야 하는 학교에서도 저희가 판단을 버리고, 그 교사가 되어 보고, 그 아이가 되어 보는 것 그리고 실제 그 사람의 죄를 나의 죄처럼 싸매고 기도하고, 그 고통도 함께 짊어져 주는 것이 우리가 고민해야 할 기독 교사의 공감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우리의 기도가 더 깊어지면 우리의 공감도 더 깊어지겠죠.

-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공감하길 원하는 선생님의 동역자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