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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수업 만들기

상상력, 공감 능력 그리고 하나님 #3


양영기의 교실 묵상 11

상상력, 공감 능력 그리고 하나님 #3

   

영적 자폐

한 인간이 온전한 성숙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폐의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의학적이든 심리적이든 자폐는 결국 ‘자신의 주인’이 ‘자신’이 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자신이 세상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감성이든, 분열된 정신이든, 이성이든 외부의 모든 것을 자아로 끌어들여 분석하고 평가하고 해체한다. 자신이 세상을 통제하는 것이다.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6~17)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창 3:5~6)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시고 한 가지 제한을 두셨는데 그것은 잘 알다시피 ‘동산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그 결과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고 미리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 죽음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은 그 열매가(죽음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대면했던 죽음은 피해야 할 두려운 상황인 동시에 강렬한 유혹이었다. 그중 가장 강렬한 유혹은 ‘지혜롭게 되는 것’이었다. 지혜롭게 된다는 것은 두 가지 결과를 암시하였다.

첫째, 그들이 판단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제 자신들을 창조한 신의 판단에 의지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동시에 그 신의 음성을 기다리고 해석하고 순종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둘째, 자신들을 창조한 신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둘째는 첫째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선악과를 먹은 결과로 맞이하는 죽음은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지만 확실한 것은 그 죽음은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류 최초의 자폐의 시작이 되었다. 신처럼 지혜롭게 되고 싶었던 욕망이 신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최초의 인류는 스스로가 자신의 주인이 되어 세상을 직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세상은 참으로 가혹한 세상이었다. 인류의 역사가 그 가혹성을 증명한다. 뉴턴의 기계적인 자연관은 우주에서조차 신의 자리를 빼앗고 대신 ‘법칙’을 앉혀 놓았다. 최초의 인간들이 전해 준 ‘지혜’는 인간들을 신으로부터의 외로운 독립을 위해 더 견고한 바벨탑을 쌓아야 하는 숙명에 놓이게 한 것이다. 신에게 연결된 무한한 자원의 파이프를 스스로 폐쇄하고 거친 황무지를 향한 외로운 골드러시가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처음 얻은 지혜의 본질에 기인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 지혜는 신과의 단절이라는 항구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불확실성의 돛을 올리고 광활한 어둠의 바다로 나간 것이다. 이 모습이 우리의 실존이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궁극적인 지혜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지혜가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열쇠가 2천 년 전에 제시되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으로 좋은 소식(복음)이다.

따라서 복음이 빠진 교육은 필연적으로 자폐적인 인간을 길러 낼 수밖에 없다. 복음이 없이도 훌륭한 인간을 길러 낼 수 있다는 환상은 우리의 불완전한 지혜로 얻은 왜곡된 착시에 불과하다. 그 지혜는 과거 에덴에서 사단에게 속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얻은 불완전한 지혜다.

영적인 자폐에서 벗어나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나’ 중심의 삶(내가 나의 주인인 삶)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인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은 그 유명한 사영리의 한 쪽을 채우는 선포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내가 나의 주인인 사람(자폐적 삶)은 모든 일을 나 자신이 주관하므로 자주 좌절과 혼란에 빠진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인 사람은(자개적 삶) 모든 일을 그리스도께서 주관하시므로 하나님의 계획과 일치된 생활을 하게 된다. 이러한 삶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하려는 노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해 그의 능력을 전할 때 가능한 삶이다. 이런 측면에서 예수님을 닮아 간다는 ‘진행’의 개념은 나 중심의 삶의 영역을 그분께 이양해 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 이 열매를 우리는 기독교 대안 학교에서만 바랄 것인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인 삶이 낯설고 거부감이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자폐적인 삶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과학의 발달, 계몽주의, 포스트모더니즘, 기계적인 자연관, 율법적 신앙 등은 자폐적 삶을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문제는 그러한 것들이 (공)교육의 내용과 토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공교육이 탈기독교, 반기독교에서 출발한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영적 자폐의 치유

‘영적 자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자폐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거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면서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영적 자폐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이런 사람들은 균형을 잃어버린다. 불균형은 관계의 깨짐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고전 2:12~15)

 

찰스 스탠리는 그의 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을 ‘성경’, ‘성령’, ‘다른 사람들’, ‘환경’으로 분류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도 읽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으며, 성령 충만을 간구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내 경험으로는 거의 영적 자폐아가 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유통 기한이 지난 ‘과거의 은혜’로 사는 사람도 병이 이미 진행되고 있는 사람이다. 과거에 했던 전도, 양육, 기도, 성경 공부 등을 계속 우려먹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간증은 늘 과거형이다.

신앙은 늘 현재의 신앙이어야 한다. 신앙에서 현재가 중요한 이유는 건강한 신앙은 과거의 경력이 아니라 현재의 ‘관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관계는 바로 나와 하나님 그리고 이웃(제자)들을 말한다.

영적 자폐증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첫째,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성경 묵상은 죄를 깨닫게 해 주고, 믿음을 자라게 해 주며, 죄를 짓지 않도록 지켜 주며(특히 학생들에게), 삶을 인도할 기준을 가르쳐 준다. 둘째,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다. 기도를 통해 고개를 숙이고 땅만을 바라보는 삶에서 벗어나 ‘초월’의 힘을 누리게 된다. 하늘의 무한한 자원을 이 땅으로 공급하는 터널이 된다. 또한 기도는 정돈되지 않은 삶을 정리하는 청소 도구다. 셋째,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 하나님과 건강한 관계를 ‘현재’ 유지하고 있는 사람에게 전도란 삶의 ‘+α’가 아닌 단지 ‘개인적 삶의 표현’이다. 넷째, 수업 내용을 통해 하나님을 어떻게 전할지,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학생들의 마음을 통해 임하게 할지 고민해야 한다. 단지 좋은 수업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수업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하는 모든 수업이 기독교적 수업은 아니다. 끝으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참여하는 것이다. 『좋은교사』 잡지에 소개되어 있는 기독 교사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좋다. 다만, 그 모임이 하나님 중심인지 친교와 결과물 중심인지 살펴보아야 한다(C.C.C 10단계 성경 교재 참고). 이상의 것이 내 삶에 자리 잡힌다면 차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영적 자폐증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영적 자폐는 특별한 그리스도인만이 겪는 문제는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영적 자폐자를 살펴보자. 예수님을 버린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와 바울이 옥에 갇히자 그를 버리고 신앙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 데마 등을 떠올릴 수 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 13:2)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 4:10)

우리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치지 않고서는 어떤 교육도 그들의 자폐를 해결할 수 없다. 하나님이 없는 모든 교육은 고통과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환상에 불과하다. 성령 충만하지 않은 교사의 가르침은 소경이 소경을 이끄는 교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