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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수업 만들기

상상력, 공감 능력 그리고 하나님 #4

양영기의 교실 묵상 12

상상력, 공감 능력 그리고 하나님 #4

 

 

 

예수님, 그 공감의 자세

지난 세 달 동안 막연하게 하나님의 마음을 공감하는 삶을 묵상하며 글을 엮어 보고, 그 글에 나 자신을 비추어 보았다. 그리고 한 문장, 한 문장 써 나갈수록 더욱 선명히 드러나는 나의 자폐적 모습을 보았다. 내 글과 내 모습과의 간극 때문에 글을 쓰고 다듬는 과정은 자학하는 시간이 되었다. 한 독자는 자폐아를 가진 부모가 내 글을 읽지 않았으면 한다는 의견을 보내왔다. 전혀 예상 밖의 의견이었지만, 그 말들과 그들의 상처를 헤아리지 못하는 나 자신의 실존 사이의 간극이 어두운 심연처럼 놓여 있는 듯 괴로웠다.

2년 전 일이다. 제자 한 명이 시간이 지났는데도 교회에 오지 않고 있었다.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으로 전해지는 멋울림(컬러링)에 귀가 예민해져 살짝 짜증이 났다.

“여보세요?”

“은지(가명)야! 지금 예배 시간 다 됐는데 왜 아직 안 오니?”

“지금 엄마랑 싸워서 속상해서 아직 출발 못 했어요.”

“예수님은 너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돌아가셨는데 그런 일로 교회에 늦으면 되니?”

“….”

은지는 나의 책망에 속상했는지 말을 잇지 못했고, 나는 퉁명스럽게 빨리 오라며 말하고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 통화 이후로 다시는 은지를 교회에서 볼 수 없었다. 나도 나대로 실망해 다시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 제자를 위해 전도하고, 기도하며 함께 했던 시간들이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엄마와 싸운 일로 속상하던 차에 나의 꾸지람이 몹시 서운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 마음을 공감하기 어려웠다. 따뜻한 한마디 말이 듣고 싶었을 텐데 내겐 그 작은 따뜻함마저 없었던 것이다. 은지의 속상한 마음을 공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은지에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돌아가실 만큼 너를 사랑하고 희생하셨는데 왜 그 마음을 이해(공감)하지 못하냐?’고 쏘아 붙인 것이다. 은지의 침묵이 말하는 것 같다. ‘제자의 속상한 마음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선생님이 예수님의 큰 사랑을 안다고 말할 수 있나요?’라고.

〈위험한 아이들, 1995〉은 한 교사(루앤 존슨)가 문제아로 구성된 학급을 맡으면서 겪는 일들을 그린 영화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반항심 많은 학생들이 차츰 변화되기 시작한 것은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려는 교사의 노력 때문이었다. 진심으로 학생들과 공감하기를 원하는 교사의 마음이 상처와 불신으로 굳어진 학생들의 마음을 연 것이다. 그런데 그 학급의 에밀리오라는 학생이 살해 위협을 받게 되자 루앤 존슨은 에밀리오를 설득해 교장에게 모든 사실을 알리도록 한다. 그러나 그는 교장에게 자신의 상황을 말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교장이 노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학생을 돌려보낸 것이다. 물론 그 후 에밀리오는 살해된다.

규칙과 질서를 끊임없이 위협하며 교사가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지 시험하는 학급의 제자들의 행동 속에서 그들의 상처와 고민을 분별해 내기란 쉽지 않다. 분명한 것은 반항이 거셀수록 그들의 상처가 크다는 것이다. 어릴 적 겨울 산에서 덫에 걸린 들개를 본 적이 있다. 산짐승을 잡기 위해 놓은 덫에 조그만 들개가 걸려든 것이다. 덫으로 찢기고 꺾인 한 쪽 다리에서 떨어진 핏방울이 흰 눈 여기저기를 붉게 물들여 놓았다. 안타까운 마음에 덫에서 꺼내 주려고 다가갔지만 흰 송곳니를 뿌리까지 드러내고 자신을 지키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에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산을 내려와 동네 어른들을 대신 보내야 했다.

교사의 말에 빈정거리는 학생들은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준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꾸중에 쉽게 우는 학생들은 슬픔과 억울함이 마음에 가득 차 쉽게 넘치는 것이다. 걸핏하면 주먹을 휘두르는 아이는 부모에게 맞고 자란 경우가 많다. 자신의 여린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은 학생이다. 제자들이 보내는 다양한 눈빛과 몸짓 속에서 그들의 마음을 읽는 것, 그것이 교사의 전문성 아닐까? 의뢰인의 무릎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의뢰인의 고민을 맞춘다는 ‘무릎팍 도사’ 정도는 아닐지라도 다가가 한마디 따뜻한 목소리로 마음을 두드릴 수 있는 교사가 될 수 있다면 우리 교실이 한마음으로 더욱 따뜻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귀신은 사람 몸속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교사는 제자들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의 마음을 깊이 공감할 때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선생님 어떻게 제 마음을 아셨어요? 선생님은 귀신 같네요.”

교사에게 반항하거나 반항할 힘조차 없는 무기력한 제자들의 마음을 열 수 있는 것은 교사의 따뜻한 말 한마디일 것이다. 덫에 걸린 짐승을 풀어 주기 위해 물릴 각오를 해야 하는 것처럼 그들의 마음을 열다가 우리의 마음이 다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조금씩 열어 간다면 언젠가 우리가 들어갈 넉넉한 자리라도 비워 줄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예수님을 초청하는 것이다. 그렇게 전도가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십자군의 깃발에 십자가를 달고 무력과 무식으로 상대를 점령하는 것이 아닌, 따뜻하고 조심스러운 ‘공감’의 손길로 시작하는 것이다. 문을 열어 줄 때까지 두드려 보는 것이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위 말씀을 보며 문밖에 서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본다. 누구보다도 강한 분이지만 그 분은 그 힘으로 문을 부수는 대신 스스로 문을 열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리신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문을 열면 마치 사랑하는 가족처럼 식사 자리에 함께하신다. 가족의 비슷한 말로 ‘식구’(食口)가 있다. 말 그대로 가족은 식사를 같이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가족처럼 따뜻하게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복음을 들고 문밖에 서서 기다려 본 적이 있는가? 물론 우리는 제자들이 우리를 초청할 때까지 막연하게 기다려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문밖에 서서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셨듯이 우리도 제자들의 마음을 두드려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안테나 되기

비록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전부 이해하고 공감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공감한 작은 조각의 사랑을 동료 교사와 제자들에게도 전하면 어떨까? 어릴 적 가난한 우리 집에 낡은 라디오 하나가 있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라디오를 듣는 시간이 내게는 무척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 라디오가 낡아 주파수를 잘 잡지 못해 소리가 선명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안테나를 이리 저리 움직여 보고 손으로 라디오를 탁탁 치며 듣곤 했다. 어떤 때는 안테나를 손으로 잡고 있어야 소리가 잘 들릴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손 저림을 참고 안테나를 잡고 들어야 했다. 예수님을 전하는 나 자신의 모습도 어릴 적 그 낡은 라디오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예수님의 온전한 뜻과 사랑을 그대로 전하진 못하지만 나를 탁탁 쳐 가며 부족하나마 그분의 음성을 전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전하기 전에, 기독교적인 수업을 고민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마음을 공감하기 위해 겸손해지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님을 찾아 헤매지만 늘 내가 발견하는 예수님은 나의 생각보다 훨씬 낮은 곳에서 기다리셨다. 이만하면 ‘됐다’ 싶어도 예수님은 더 낮은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자꾸 게을러지고 높아지려는 나를 죽이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을 더욱 날것 그대로 느끼고 싶고 전하고 싶은 마음으로 ‘공감’을 소재로 글을 썼다.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님의 마음,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공감한다면 누구도 그분을 거부할 수 없을 거라는 기대를 품으며 글을 썼다.

 

 

상상력, 공감 능력 그리고 수업

공감은 마음들의 공명(共鳴)이다. 내가 교육을 통해 제자들에게 참으로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느끼는 것이고, 그 고통의 공명을 통해 예수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가슴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 너머에 있는 하나님을 또 하나의 실체로서 상상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교육에 깔려 있는 무거운 냉소와 서로에 대한 조롱, 불신, 분노를 걷어 내고 대신 우리가 잃어버린 따뜻함, 재미, 기대, 희망, 사랑 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실패의 가능성이 많아서 오히려 신비스럽고 누구도 쉽게 잘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교육일 것이다. 교육을 예술로 보든 기술로 보든 결국 그 열쇠는 성령의 알 수 없는 계획 아래에서 움직인다고 믿는다. 우리가 교육을 위해 무엇을 하든 먼저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이 최선이고 겸손이며 인간에 대한 예의다.

이제 기도로 준비되었다면 수업을 통해 강요된 학습과 경쟁 등으로 지친 우리 아이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심어 주자. 그래서 그들의 마음 밭이 ‘배움’을, ‘우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면 조심스럽게 씨앗을 심어 보자. 그들의 마음 밭이 세상의 온갖 쓰레기로 황폐해지지 않도록. 교육의 거대한 이상 아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지극히 소박하고 하찮은 것임을 고백하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 3:6-9)

 

전 거창고 교장 전성은은 “기독교 교육의 핵심은 하나님만이 인격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 인간이 인간을 바꾸지 못하는 것은 축복이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면 이제 우리 교사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레슬리 뉴비긴의 이야기로 그 대답을 갈음할까 한다.

“우리의 몫은 그 이야기(복음)를 들려주고 그것을 신실하게 살아 내는 일이다. 나머지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중요한 문제는 내가 성공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 것이다.” -『누가 그 진리를 죽였는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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