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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수업 만들기

한문을 가르칠 이유


열혈 아줌마의 좌충우돌 수업 이야기 7

한문을 가르칠 이유

 

 

김주화

(행복한수업만들기 한문 모임 대표)

 

중요하고 어려운 질문

‘기독교적 가르침’이라는 말을 알고, 그게 무엇인지 궁금해 하고, 나도 한번 해 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늘 마음속에 무거운 짐처럼 남아 있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가장 근본적이라 할 만큼 중요하면서도 쉽게 답을 얻지 못했던, 과연 ‘한문’과 ‘하나님’이 어떤 상관이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제가 처음에 ‘기독교적 가르침’을 접했을 때, 그 전제는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시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길 원하신다’였습니다. 여기서 ‘만민’은 물론 사람뿐만 아니라 피조 세계 전반, 곧 모든 제도와 문화와 가치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 세상의 지식과 교과 안의 ‘왜곡’과 ‘타락’의 지점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이분법적이고, 우리의 지식이 얼마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벗어나 ‘이익과 실용’이라는 합리화로 가려져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 안에는 인간의, 아니 저의 끝없는 교만이 아직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과거형으로 쓸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한문 교과를 보면 道와 德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가치인데, 한문 교과서 속에는 계속 등장하지요. 물질주의와 개인주의로 무너져 가는 이 세대에 참으로 필요하고, 학생들에게 전하기 좋은 가치입니다. 왜곡된 이 시대에 道, 德을 살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로 보아 이 시대를 회복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수업을 재구성하고 아이들과 함께했습니다. 그래도 늘 마음속에는 숙제처럼 남아 있는 물음이 있었습니다. ‘兄弟投金(형제투금-금덩이 때문에 형제의 우애가 상하게 될까 봐 강물에 금덩이를 던져 버렸다는 이야기)’을 가르치면서 현재의 왜곡된 경제관념이나 물질주의를 이야기하며 올바른 경제관을 갖자고 주장할 수 있었지만, 그 ‘이야기 자체’, 한자로 쓰인 그 문서 자체로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을까 답답했습니다.

저는 기독한문교사모임에 생기기 전 기독국어교사모임(기국모)에 잠시 나가 ‘기독교적 가르침’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때 “언어는 하나님께서 교제를 위해 주신 선물이며, 언어를 통해 나, 너, 세계와 교제하는 교제자로 학생들을 세워 가자”고 이야기하는 기국모 선생님들이 마냥 부러웠습니다. 『기독교세계관으로 가르치기』에 제시된 각 교과별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유와 목적에 대한 안내도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습니다. 과학처럼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공부하고, 역사처럼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고, 예술처럼 하나님의 창조성을 다루는 교과라면 참 명쾌하고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한문’을 보면 대체 이 교과는 하나님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3,000~5,000년 전에 중국에서 만들어졌고 동아시아 지역에서 주로 쓰였던 문자. 우리나라에서도 한글 창제 전까지 모든 자료를 기록했던 도구. 그러나 지금은 ‘한문’만으로 된 창조물은 더 이상 나오기 어렵고, 알면 좋지만 몰라도 생활에 크게 지장 없는 과목. 더구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쓰다가 이제는 맥이 끊긴(?), 기독교와는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이 과목을 기독교적으로 가르친다는 의미가 제게는 참 어렵고도 중요한 화두였습니다.

 

말씀에 대한 믿음의 부족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1:3)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 1:16)

말씀에는 매우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나옵니다. 말씀을 믿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온전히 믿지는 못했습니다. 제 무의식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보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를테면 한문이요. 그래서 한문과 하나님의 연관성을 생각하며 고민하고 다른 교과를 부러워했겠지요. 그럼에도 끊임없이 고민하고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하나씩 알려 주셨습니다. 책을 통해, 동역자를 통해, 이런저런 방법으로요. 제 믿음의 부족을 일깨우시며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한문’은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임이 분명했습니다.

‘한문’ 역시 언어여서 소통과 교제의 도구로 쓰였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모르던 시대의 사람들이 쓰기는 했지만, 하나님은 사람들 안의 창조성을 바탕으로 글자를 만들고 서로 소통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하게 하셨습니다. 한문 안에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동일하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붙들고 계셔서 유지하고 계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저는 한문을 공부하며 한문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겠지요. 하지만 여전히 믿음이 부족한 저는 왠지 억지스럽다는 생각을 떨쳐 버리기 어려워 괴로워했습니다.

 

‘一以貫之’를 아세요?

《논어》에는 좋은 문장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중 ‘一以貫之’라는 표현을 소개할까 합니다.

吾道 一以貫之(오도 일이관지)

나의 도는 하나로 꿰어져 있느니라.

공자가 제자들에게 한 말입니다. 자신의 도는 하나로 꿰어져 있다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 나가자, 궁금해 하는 제자들 사이에서 그 말을 알아들은 증자가 설명을 해 줍니다. 선생님의 道는 오직 忠(충)과 恕(서)일 뿐이라고 합니다. 忠은 中心, 남을 속이지 않고 정성을 다하는 마음입니다. 恕는 마음을 다해 남의 입장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忠과 恕는 곧 仁(인)입니다. 스승인 공자가 많이 배워서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제자들에게, 그는 ‘아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도는 하나로 관통할 뿐이라고 합니다. 이 구절을 읽으며 무릎을 쳤습니다. 공자의 말이 맞습니다. 어디 하나로 꿰어진 것이 공자의 道뿐이겠습니까.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외아들을 주신 우리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이 세상을 하나로 꿰뚫었지 않습니까. 이 땅을 창조하고, 인류를 구원하며,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道야말로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꿰뚫어집니다.

모든 원리를 설명하고도 남을, 이 하나로 꿰뚫는 道를 표현한 ‘一以貫之’라는 표현을 좋아하는 저는 항상 뒤에 혼잣말로 덧붙입니다. ‘하나님의 道로.’라고요. 그런데 이 반가운 표현을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났습니다.

 

모든 도덕관들을 관통하는 동일한 법칙

C.S.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를 읽었습니다. 저자의 명성에 걸맞은 훌륭한 책이었습니다. 그중 제 숙제를 풀어 준 부분만 간단히 소개합니다. 저자는 상식과 인간의 본성을 들어 기독교의 정당성을 풀어 갑니다. 그중 흥미를 끄는 내용은 ‘옳고 그름에 대한 규칙’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굳이 따로 배우지 않아도 어떤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 마음으로부터 안다는 것입니다. ‘모든 도덕관들을 관통하는 동일한 법칙’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라지요. 그 무언가가 내 안에서 옳은 일을 하도록 재촉하고 그릇된 일에는 책임감과 불편을 느끼게 하는 하나의 법칙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기독교를 이해하려면 이 ‘도덕률’이 사실이고, 그 법칙의 배후에 ‘어떤 힘’이 있고, 우리는 그 법을 어기면서 ‘그 법과 잘못된 관계’를 맺게 되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데서 출발한다고 보았습니다.

모든 도덕관들을 꿰뚫는 한 가지 법칙! 기독교인들은 압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이며, 그 법칙의 배후에 있는 어떤 힘은 당연히 ‘하나님’이심을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꿰뚫어지는 도덕관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나니 한문 교과 안에 계신 하나님을 분명히 보게 되었습니다. 깊은 고민의 터널에서 빠져나오는 듯했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한문은 분명히 지금 우리 시대와는 조금 멀리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문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옛날의 한문 문장을 접하며, 하나님을 아는 민족이든 모르는 민족이든 동일하게 베푸신 은혜를 봅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그들에게조차 허락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분명히 봅니다. 때로는 그 절대적인 옳고 그름에서 벗어난 인간의 교만과 허세,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들의 미련함을 보기도 하지만,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계속 꾸려 오셨고 결국 복음을 듣게 하시는 은혜를 봅니다. 이제는 ‘기독교적 가르침’과 한문이 무슨 연관이 있을까 하던 고민을 더 이상 하지 않습니다. 한문을 가르칠 이유, 충분하지 않습니까?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롬 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