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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수업 만들기

소통 + α



열혈 아줌마의 좌충우돌 수업 이야기 2
소통 + α

김 주 화 (행복한수업만들기 한문 모임 대표)


《좋은교사》인기 꼭지 〈박은철의 한문 수업〉 필자인 박은철 선생님께서는 한문 교과의 정체성은 ‘소통’에 있다고 자주 말씀하시곤 합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들을 때마다 가슴 깊이 공감합니다. 우리의 수업이 단절과 분열이 아닌 하나님 안에서 화목해지는, 다시 말해 소통과 화합이 일어나는 샬롬의 공간이 되어야 하기에 공감하고, 또 한문 교과가 주로 과거와 전통을 다루기에 더욱 공감합니다.

 저는 오늘도 ‘한문은 소통이다’는 말을 되새기며 한문 수업을 통해 옛 사람들과 소통하고, 과거와 소통하고, 전통과 소통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옛 이야기가 들려주는 오늘의 이야기 

 저는 주로 마인드맵을 그리며 수업 준비를 시작합니다. 그 단원에서 가르쳐야 할 중심 내용을 가운데 그려 놓고 제 나름의 가지를 뻗어 마인드맵을 그립니다. 교과서나 지도서에 나와 있는 수업 목표도 물론 들어가고, 거기서부터 파생되는 여러 생각들을 거르지 않고 그려 봅니다. 이 수업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도 물론 포함합니다. 마인드맵을 다 그린 후에는 적절히 가지치기를 한 후 수업 설계도를 짭니다.   

 다음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만든 고등학교 한문 교과서에 실린 ‘指鹿爲馬(지록위마)’ 단원에 대한 수업 설계도입니다. 교과서에는 ‘指鹿爲馬’라는 고사성어의 유래만 원문으로 간단히 실려 있습니다.




[1] 指鹿爲馬

- 시대적 배경 알기 (진시황이 죽고 난 후 진나라의 상황)

- 본문 학습 : 한자 학습, 문장 풀이, 문법적 설명, 내용 이해, 본문 쓰기 등

- 본문에 나타난 사회 모습 분석

- ‘指鹿爲馬’ 성어의 속뜻 익히기

- 교과서 본문 이후의 이야기


[2]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 각자의 위치에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음. 고사 속 등장인물의 모습을 ‘역사 속 모습’과 ‘이상적 모습’으로 나누어 살펴보기

- 공자의 ‘정명론(正名論)’을 알아보고 고사 속의 모습 비추어 보기


[3] 옛날이야기가 아니야 !

- 영화〈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앞부분 감상

- ‘정의’가 무너진 영화 속 교실 모습 역시 구성원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임. 각 구성원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보기

- 각자의 위치에서 역할에 맞는 최선의 ‘덕’(德)이 발휘될 때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 보기

-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연결지어 4ㆍ19혁명 소개

- 4ㆍ19혁명과 ‘指鹿爲馬’ 상황의 공통점과 차이점 찾기


[4] 그러면 나는?

- 내 자리에서 내가 세워야 할 ‘德’의 모습은 무엇인가 생각해 보기



 고사성어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자체로도 재미있지만, 재미있게 배우고 언어생활에 적절히 활용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적어도 저는 이 수업이 ‘지록위마 =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함 = 윗사람을 농락하여 권력을 마음대로 함’을 알려 주는 정도로 그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옛 이야기가 현대에도 일어날 수 있음을 말하고 싶었고, 그 이야기를 통해 사회를 구성하는 각 구성원이 모두 직분자임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고, 각자에게 사명을 주셨으며 그 사명이 가정과 직장, 사회와 교회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역할이라도 우리는 직분자의 마음으로 충성을 다하여 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공립 학교이기에 수업 시간에 직접적으로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지는 못 하지만, 고사성어와 영화와 우리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을 연결 지어 돌아보며 아이들 스스로 발견해 내기를 바랐습니다. 더불어 ‘~다움’의 덕을 강조한 정명론을 가르치며 제 스스로 ‘기독인다움’에 대해 생각해 보고 반성해 보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수업이 정답은 아닙니다. 제가 놓치고 있는 부분, 지금은 보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몇 년 후 뼈저린 후회를 하며 아쉬워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옛 이야기와 소통이 잘되면 한문이 단지 ‘死文化’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통해 지금의 나와 지금의 사회를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17세기 선비, 21세기 아이들을 만나다

 한문은 옛 이야기와 소통함과 더불어 옛 사람과도 소통하는 교과입니다. 저는 요즘 ‘속담’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문 교과서에는 한역 속담이 몇 개씩 묶여 한 단원을 이루는 부분이 있습니다. ‘한역 속담’은 우리말 속담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 등의 쉬운 속담을 한문으로 번역한 문장을 익히는 것이지요. 예전에는 교과서에 나오니 별 생각 없이 가르쳤습니다. 한자의 음과 뜻을 알려주고, 문장을 풀이해 주고, 어느 상황에서 쓰는 것인지 알려 주고, 짧은 글짓기도 해 보고. 그러다가 문득 의문이 생겼습니다. 우리말 속담을 굳이 한문으로 배울 필요가 있을까, 21세기 아이들에게 속담을 굳이 한문으로 가르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드니 가르치는 데 힘이 빠지고 가르칠 용기가 없어졌습니다. 교과서에 실려 있으니까 식의 진부한 대답 말고 뭔가 ‘배울 만한 이유’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사실 하나는 대부분의 한역 속담이 17~18세기 실학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속담은 대부분 서민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요. 그래서 부뚜막도 등장하고, 외양간도 등장합니다. 그런 서민 생활에 식자층이었던 양반들이 관심을 갖고 그들의 언어를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다는 것, 서민 생활에 관심을 갖기는 했으나 양반이었기에 한자를 이용하여 기록하였다는 이야기는 제게 하나의 충격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난 후에는 기록자의 마음에서 한역 속담을 바라보게 되고 그 마음을 전하며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속담이라는 것 자체가 재미있는데, 거기에 지금 우리가 접하는 한역 속담의 의미를 알게 되니 가르치는 제가 더 신이 납니다. 어리석은 백성이라 무시하지 않고, 자신보다 낮고 천한 신분이라고 업신여기지 않고, 그들의 생활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 삶의 지혜가 담겨 있으면서도 해학이 넘치는 속담을 기록하는, 갓 쓰고 도포 두른 선비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모습이 묵상거리가 됩니다. ‘내가 만나고 가르치는 이 아이들, 어리다 철없다 무시하지 말고, 아이들의 생활에, 아이들의 이야기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지자, 더불어 이웃도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다, 항상 낮은 곳에 머무셨던 예수님처럼’ 하고 짧게나마 생각해 봅니다. 그 선비들을 아이들에게 소개해 주고, 그들을 만나게 해 주는 것이 즐겁습니다. 더불어 그 시대 서민들을 만나는 것도, 속담을 통해 삶의 지혜를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소통을 위하여

 ‘내가 한문 교사라고 한문만 알아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한문을 통해 소통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잘 알아야 하고, 세상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교과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요. 퍼즐 귀퉁이 한 조각만 알면서 그게 퍼즐의 전부인양 말 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전체 그림을 알아야 이 퍼즐 조각이 전체 퍼즐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만든 사람은 왜 하필 여기에 이런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지 알 수 있겠지요. 그랬을 때 소통과 회복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저 역시 아직도 멀고 멀었습니다. ‘한문’도 제대로 모르겠는데, 다른 것 까지 알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만 듭니다. 다만 바라기는, 의무감에 억지로 알려고 몸부림쳐서, 꾸역꾸역 머릿속에 집어넣기 보다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만든 세상이기에, 아버지의 작품이기에, 만든 분을 사랑해서 그 분의 작품이 정말 정말 궁금해서 즐겁고 기쁘게 알아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단절과 분열의 지식이 아닌, 소통과 회복의 지식을 알아 행복한 만남이 일어나는 수업을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