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한국사회에서 ‘가치’가 더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김근주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학술부원장)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구약을 가르쳤고 현재는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학술부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공평과 정의가 구현되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온백성을 위한 신학, 현실의 삶과 연결된 신학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사야가 본 환상>, <특강 예레미야>, <구약의 숲>, <구약으로 읽는 부활신앙> 등이 있다.
인터뷰 / 글·임종화, 사진·김효수
2014 기독교사대회 주강사로 김근주 교수님이 결정되자 많은 선생님들이 그에 대해 궁금해 했다. 아직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인지도가 높지 않지만 기독 대학생과 청년들에게 뜨거운 지지를 받고 있기에 교수님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안정된 제도권을 벗어나 재야 학자의 길로 들어선 교수님의 삶과 등록비를 받지 않고 평신도 신학 교육을 하는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에 대한 궁금증도 풀고 싶었다.
많은 선생님들이 2014 기독교사대회 주강사로 교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에 기대와 함께 어떤 분이실지 궁금해 합니다. 고등학교 때 신앙생활을 시작하셨다고 들었는데 교수님의 신앙생활과 함께, 대학 때 경제학을 전공하셨는데 어떻게 신학을 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고1 때 가장 친한 친구의 권유로 처음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집안 전체에 교회 다니는 사람이 없었고, 그때까지 교회를 같이 가자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교회 처음 간 날 사영리를 듣고 영접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열심히 교회를 다녔습니다. 고등부 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기도와 전도를 열심히 하며 지냈고, 대학 1학년 때는 네비게이토 선교회를 스스로 찾아갔습니다. 제가 85학번인데 어두운 시대였고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때여서 당시 대학생들은 학생 운동을 하느냐의 여부와 관계없이 시대적 고민으로 견디기 힘들었고 정의, 자유라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뛰던 시대였습니다. 놀 시간도 없었지만, 그마저 죄책감이 들던 시기였죠. 그래서 현실과 세상을 공부해 보자는 취지로 선배들과 함께 사회과학을 열심히 공부하며 현실문제에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89년 말부터 은평구에 있는 은광교회 담임목사님을 만나면서 신앙을 새롭게 시작하게 되어 기도하기, 성경읽기 등을 다시 배우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경제학과 대학원을 준비하다가 신학교에 갈 것을 권유하시는 목사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91년 장신대 대학원에 진학하였습니다. 은광교회는 15년 정도 섬겼는데 60-70명 정도의 작은 교회라 주일학교, 성가대, 봉고차 운행 등을 하며 열심히 섬겼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대학 시절 사회과학을 공부하고 운동하며 노동운동하던 분들에게 배웠던 가난한 이웃에 대한 관심과 성령 안에서 뜨겁게 기도하며 순종하기는 지금까지도 제 삶에 남아 있습니다.
크리스천에게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라는 두 영역이 여전히 구분된다는 느낌이 듭니다. 교수님이 강조하는 ‘하나님 나라’ 라는 표현도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분들이 주로 쓰는 용어처럼 느껴져서 이 둘을 통합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대학 때는 로잔언약에서 제시한 ‘복음전도와 사회정의’ 개념이 괜찮다고 생각하다가 운동을 하면서는 ‘사회정의가 복음이다’라고 생각한 적도 있고, 2차 회심(은광교회 목사님을 만난 때) 후에는 기도와 말씀 묵상에 집중하면서 하나님 중심, 성령의 음성에 충실하기를 훈련한 셈이었고, 구약을 배우며 이 두 영역이 통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기가 신앙생활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죠.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로 나눠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구약을 아무리 봐도 그렇고 신약도 그러지 않습니다. 이 표현이 우리의 사명을 둘로 쪼개어 버리지만, 이 둘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 하나입니다. 레위기 19장에 보면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이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나타나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밭 한 귀퉁이 남기기와 같은 자선에 해당하는 일로도 나타나고, 그날 고용한 노동자의 품삯을 해지기 전에 지급하는 것과 같은 노동문제로도 나타납니다.
이 모든 것을 레위기 19장은 ‘거룩’으로 표현합니다. 곧 월급을 제대로 지급하는 것도 ‘거룩’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수직과 수평을 나누어서 수직적 차원이 있고 수평적 차원이 있다고 말하는데, 저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거룩입니다. 우리 중 누구는 평생 복음전도를 위해 드릴 사람이 있겠고, 어떤 사람은 노동문제에 자신을 헌신할 사람도 있을 것인데 이 모두가 하나님 앞에 온전한 거룩이지만, 각각이 전부는 아닙니다. 이 둘을 모두 하려고 하면 버겁습니다. 우리가 부르심 받은 대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충실하게 하면 됩니다. 그러니 전체적인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거룩이 있고 그 가운데 내 몫의 삶이 있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으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거룩이요, 하나님 나라 사역이라는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주어진 사명을 모두 잘 감당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습니다.
선생님들도 교사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하나님 나라이니 교사로서 주어진 과목을 잘 가르치고, 아이들을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다니엘서 말씀처럼 세상 학문을 절대 경시하면 안됩니다. 수학, 과학이 세상 학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도 할 것이기에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목사라는 직분에 대해서만 특별하게 생각합니다. 만인제사장은 알지만 여전히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생각이 약합니다. 전도하는 것에 열정이 있다면 다른 것이 약간 소홀할 수밖에 없고, 학교생활을 열심히 하다보면 다른 것은 내려놔야 할 수도 있습니다.
저도 역시 느헤미야 사역을 행하면서 아주 전문적인 학자의 길을 동시에 가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탁월함을 내려놓고, 제가 깨닫고 발견한 구약의 말씀을 우리 시대의 교우들에게 잘 풀어서 전하는 것으로 제 사역의 범위를 좁혔습니다. 이것은 교사 선생님들에게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분야가 있고 내려놓을 것이 있습니다. 제가 어디 가서 겁나 뛰어난 학자인 척 하면 안 됩니다. 반대로 아주 전문적인 공부에 대해 함부로 말하고 무시해도 안됩니다. 그분들의 전문 공부 덕분에 저는 그 토대 위에 말씀을 풀어갈 수 있으니 그것도 존중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서로 인정만 하면 하나님 나라 안에서 서로 지체가 되기 때문에 만물 안에서 이를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 나타나겠다 싶습니다.
유학 후 신학교에 계셨던 것으로 아는데 기독연구원 느헤미야를 시작하게 된 계기와 더불어, 제도권이 아니라 재야 학자의 길을 가고 계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기독연구원 느헤미야는 어떤 교육을 지향하는지요?
2006년 귀국해서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에 왔을 때 구약을 연구하러 왔고, 실제로 글도 열심히 써서 저널에 냈습니다. 그러다 신학교 운영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다 파면되었고, 졸지에 학교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그전부터 ‘하나님의 온백성을 위한 신학교육’을 깃발로 ‘기독연구원 느헤미야’를 시작한 상태여서 이번 기회에 느헤미야에 집중하자라고 생각하고 행동에 옮기게 되었습니다.
기독연구원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온백성을 위한 신학, 현실과 성경이 접목되는 신학, 사회문제에 대해서 응답하는 신학, 그리고 한국 기독교의 재구성을 지향합니다. 한국 기독교의 재구성이란 목회자와 평신도의 구분을 없애는 온백성의 신학, 그리고 현실에 대한 응답과 실천을 말합니다. 느헤미야에서는 구약신학, 조직신학, 교회사 등 다채로운 강의들이 펼쳐지지만 이 모든 강의가 공통적으로 하나님의 온백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 문제에 대한 초점, 교회의 새로운 변화에 대한 초점, 인문학적 관심은 어느 강의든 기본 전제로 깔려 있습니다.
지금까지 수강료를 받지 않고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의를 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올해부터 정식 신학연구과정을 개설하면서 논란도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조직이 시간이 지나면 관료화되고 변화보다는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느헤미야는 초기의 개혁성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우리도 처음에 신학교를 할 생각이 없었는데 강의를 하다 보니 목회자가 되고 싶어하는 학생도 있고 목회자가 안되더라도 더 깊은 신학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분들도 있어서 3년 과정의 신학연구과정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18명 정도가 공부하고 있는데, 인생의 3년은 투자하여 성경을 조금 더 알고 싶다는 마음으로 직장을 접고 들어와 주말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하는 학생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신학교는 교권과 금권에 영향을 받았는데, 느헤미야는 앞으로도 특정 교단에 속하지 않을 것이고, 대형교회 지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이런 신학교가 시작되었다는 자체가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사회 변화에 대한 하나님 나라, 한국 기독교 재구성을 내건 학교도 없었다 싶기에 느헤미야는 존재 자체로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가다가 더 이상 못 가게 되면 그만큼 남는다는 생각으로 갈 때까지는 가보자라는 마음입니다. 캐나다 리젠트 칼리지의 경우 하나님 나라 평신도 신학을 가지고 맨손으로 시작했어요. 지금은 명망 있는 학교가 되었지만 그 정신을 잘 지키고 있습니다.
교수님의 저서나 말씀 중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표현이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인데 그 의미와 함께 특별히 구약에 관심을 가지시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제가 구약에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에는 먼저 평생의 선생이자 존경하는 목사님인 은광교회 목사님이 구약을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두 번째로는 강원도 철원에 있는 대한수도원 초대 원장님이 마지막 설교 가운데 이사야서를 설교하신 적이 있는데, 너무 좋아서 신학교에 가서 공부한다면 이사야서를 공부해야겠다 했던 것이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그 후 유학을 가서 구약을 공부하면서 이사야서를 보는데 ‘공평과 정의’란 단어가 툭툭 튀어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계속 공부해 보니 공평과 정의라는 말이 구약 도처에 널려있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귀국 후 성토모(성경적 토지 정의를 위한 모임, 지금의 희년 함께)에서 매년 여름에 개최하는 토지학교에서 공평과 정의에 대해 강의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같은 시기에 ‘복음과 상황’에 공평과 정의에 대한 글을 준비하면서 ‘아, 이게 하나님 나라였구나’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 나라가 구체화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이 일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는 삶이라는 것을 깨달은 후 성경에서 개념과 용례를 찾아보니 ‘정의’는 바로 올바른 관계, 공감이었습니다. 이번 세월호 사건 이후 많이 언급되었듯이 나의 이웃과 시대와 끊임없이 공감하기, 함께 슬퍼하고 함께 울기,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기본적인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공평의 의미는 재판이었고 재판으로 대표되는 제도, 구조, 틀이었습니다. 같이 슬퍼하는 것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이죠. 개인적으로는 함께 슬퍼하고 제도적으로는 가난한 자, 사회적 약자의 억울함이 해결되는 길이 있어야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시대에 공평이 의미하는 것은 제도입니다. 사회에 보호받지 못하는 약자들이 보호받을 틀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자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인한 공감이나, 재난으로 고통당하는 자에 대한 공감이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복음이 전해져야 하고, 삶의 질곡으로 고통당하는 노동자에 대해서는 정당한 보상이 이루어지도록 제도로 해결해 주는 것이 공감인 것인데 이것을 하나는 복음전도, 하나는 사회참여로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현대 국가에 오면서 중요한 공평 영역은 투표와 시민단체 참여입니다. 현실적으로 교회가 투표에 대해서 정말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교사운동, 사교육걱정없는세상, 희년함께, 참여연대 등과 같은 시민단체 활동도 틀을 바꾸려는 활동이니 중요한 하나님 나라 사역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디를 가든지 교우들에게 투표할 때 기도하고, 성경적 원칙에 따라 투표할 사람 고르고, 일상에서 시민단체에 속하여 후원하고 활동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교수님께서는 구약 특히,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서를 연구하시며 ‘무너질 것은 철저히 무너져야 한다’, ‘새로운 회복이 있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 사회와 교회, 교육을 바라보실 때 어떤 부분이 철저하게 무너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어려운 질문이네요. 저는 최근 세월호 참사 이후 정부에서 여전히 경제를 강조하며 안전장치만 바꾸면 된다는 인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기업의 목표가 이윤극대화인데 이것이 바뀌지 않으면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이제는 한국사회에서 ‘가치’가 더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교회조차도 ‘가치’를 가르치지 않고, 교회가 성장하면 가치가 입증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교회도 가치보다 편의를 중시합니다. 교회를 통해 얻게 되는 혜택을 누리기 위해 교회에 온다면 그것은 이익집단이지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 나라라는 단 하나의 가치인데, 이 가치로 인해 가난도 괜찮고, 핍박도 괜찮다는 것인데 더 이상 한국교회는 가치가 최우선인 집단이 아니라 여전히 교인 수 늘리기에 집중하고 있고, 교회 건물 짓느라고 정신없습니다. 현재 교회는 가치 공동체이지 않습니다. 교회의 근본적인 타락이죠.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교육, 가치교육을 소홀히 하는 학교는 학교가 아니고 단지 기술자 양성소일 뿐입니다. 학교가 정말 가치에 대해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올바른 삶이 무엇인지 가르치고 있는가 묻고 싶습니다.
결국 교육과 교회도 가치를 소홀히 하는 사회 속에서 왜곡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가치의 핵심이 ‘공평과 정의’인가요?
교회라면 가난해도 괜찮고, 직업이 무엇인가에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중요한 가치입니다. 세월호 참사가 우리에게 알려 준 것이 국가와 감독관청의 부실, 그리고 관행적으로 이루어진 인원과 화물 초과 등이 동시에 일어나니 큰 참사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누구 하나만이라도 잘했어도 참사를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예수 믿기 때문에 관리 감독 잘하기, 예수 믿기 때문에 인원 수 잘 세기 등이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전도와 자신의 일 바르게 하기를 완전히 분리시켜버렸습니다. 일상이 거룩이라는 것이 교회 안에서 회복되어야 합니다.
국가는 적어도 말로라도 가치의 중요성, 인간의 중요성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일상에서 어떤 의미인지를 가르치는, 일상을 회복하는 신앙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신학의 틀이 바뀌어야 합니다. 목회자 중심이 아니라 정말로 만인제사장,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는 일이 성직이구나라는 관점이 자리 잡아야 합니다.
잘못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회와 학교현장에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가치대로 살려 하다보니 기독교사들이 많이 힘들어 합니다. 이러한 기독교사들에게 한마디 해 주세요.
왜곡된 가치로 물든 사회 속에서 힘들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고 좋은 것입니다. 힘들지 않은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이 땅에서 기독인으로 살아간다면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이 정상이겠다 싶습니다. 기독교사대회에 가서 기독교사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런 저런 걸 나누며 함께 답을 찾아가고자 합니다.
교육과 관련하여 방과 후 대안학교를 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시작하게 된 배경과 운영하면서 경험한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예전에 교회를 같이 하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찾다가 사회적 필요를 알게 되어 푸른씨앗학교라는 방과 후 대안학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11명 정도의 학생들이 있는데 대부분 수급자, 한부모, 조손가정입니다. 현재 두 명의 상주 교사와 자원봉사자들이 2년째 아이들과 긴밀하게 만나고 있습니다. 마음껏 놀기만 해도 좋겠다 싶어 시작했고, 이왕이면 공부하는 기회가 차단된 아이에게 공부도 가르치자 싶어서 영어와 독서, 예능 교육을 집중적으로 가르칩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기도 하고 일주일에 한 번 교사들과 회의하며 방향을 함께 나누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교수님의 삶을 보면 안정된 제도권 신학교를 나와 다른 길을 가고 계십니다. 어찌보면 불안한 삶인데 타매체와의 인터뷰 중에 신학생들에게 다른 길에 대한 상상력을 강조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인지요?
목회자의 경우 신학교를 졸업하고 어느 교회에서 부교육자를 시작하느냐가 평생의 목회를 좌우합니다. 대형 교회에 부교육자로 가게 되면 안정적인 길이 열리는 것이죠. 저는 그러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줄서지 말고 일찍부터 다른 길을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선생님들의 상황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남들이 다 가는 길을 걸어가는 것은 재미없겠다 싶습니다. 남들 가는 길 못 가더라도 일체 패배감 가질 필요 없고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우리는 제한된 주류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있겠다 싶습니다. 이것은 목회자, 교사뿐 아니라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고 상상력을 위해서는 독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과 이야기하는 내내 좋은교사운동이 떠올랐다. 안정된 길을 가지 않고 자신의 삶을 드려 기독교사운동을 시작했던 선배 교사들의 헌신, 깨어진 학교 안에서 다른 교육, 다른 가치를 지향하며 고난을 감내하고 있는 선생님들이 생각났다. 하나님 나라 가치를 붙잡고 다른 길을 가는 교수님과 기독교사들의 만남… 8월 기독교사대회가 기대되고 기다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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