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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학교, 좋은 공동체, 좋은 마을(조한혜정 전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_2014.5

좋은교사 2014. 7. 4. 11:24

좋은 학교, 좋은 공동체, 좋은 마을

 

 

조한혜정 (전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연세대학교 사회학과와 문화인류학과 교수를 역임하였고 올해 2월 정년퇴임을 하였다. 한국여성학회장,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로 활동하였고, 교육 관련하여 하자센터장, 성미산학교 교장, 서울시 대안교육센터장으로 활동하며 여성, 환경, 교육 분야에서 대안적인 삶을 추구하였다. 현재 하자센터 하자마을학교장과 서울시 마을공동체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마을 공동체 만들기를 위해 애쓰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의 여성과 남성>, <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글 읽기와 삶 읽기 1, 2, 3>, <학교를 거부하는 아이, 아이를 거부하는 사회>, <학교를 찾는 아이, 아이를 찾는 사회>, <가족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마을로 - 돌봄과 배움의 공동체>, <다시 마을이다>, <교실이 돌아왔다 - 신자유주의 시대 대학생의 글 읽기와 삶 읽기> 등이 있다.

 

 

인터뷰.임종화, 김진우 / .임종화

 

 

조한혜정 교수와의 인연은 교수와 학생으로 만난 대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문화인류학 수업 자체의 새로움과 함께 둥글게 둘러 앉아 대화로 진행하는 수업이 당시로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대학원 시절 대안교육운동으로 논문을 준비할 때 대안교육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많은 도움을 받았고, 구로공단지역에서 공부방 교사를 하며 가난한 아이들에 대한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때라 교수님이 준비하던 하자센터(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에 대해 일부 계층만을 위한 교육이 아닌가하며 치기어린 문제제기를 했던 기억도 새롭다. 그 후 14년 만에 교수님을 만났다. 그 사이 교수님은 학교 밖에서 하자센터 뿐 아니라 성미산학교, 이우학교, 서울시대안교육센터(지금의 학교밖청소년지원센터) 등을 통해 청소년과 교육 관련된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고, 일본의 배움의 공동체, 미국의 매트스쿨 등을 한국에 소개하였다. 올해 정년퇴임 이후에도 마을공동체 만들기 활동 등으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오랫동안 학교 밖에서 청소년을 만난 분이 말하는 현재 한국 교육 진단과 해법은 무엇일까라는 궁금증을 가지고 하자센터에서 교수님과의 만남을 가졌다.

 

교수님의 관심의 여정을 보면 여성, 지식인, 교육, 마을 등으로 관심이 변화, 확장되었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요?

여성학자로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제가 여자이고 여자의 입장에서 사회구조를 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평등한 사회구조 속에서 젠더, 계급, 장애 등 약자의 자리에 선다는 것이 사회를 통찰하는 힘을 주는 것이고요. 80년대 여성운동을 하면서 여성에 대한 자각이 생겼고, 그것을 불평등 구조와 연결시키면서 사회를 보는 눈이 생겼고, 동지가 생겼고, 그들과 함께 바꾸어 간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면서 여성학회도 만들고 나중에 여성부도 생기면서 여성문제가 제도화되었습니다. 저의 성향상 제도화되면 흥미를 잃는 것 같아요.(웃음)

그 즈음 청소년 문제가 마구 터져 나왔고, 자연스럽게 그들을 내몰아내는 학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당시 연세대에서 대대적으로 학업중퇴자 연구를 하고 있었고, 둘째 아이가 자기네 반에 할머니랑 사는 아이가 있는데 학교 오면 매일 잠만 자고 계속 놀림만 받는데 동네 주유소에서 알바를 하면서부터 생기가 나고 너무 잘 지낸다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주유소에 가서 주인을 혼내고 공부는 때가 있다고 하면서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고 해요. 그 이야기를 하면서아침에는 공부하고 오후에는 일하면 안 되나요?”라고 묻더라고요.

첫째 아이의 경우는 수업시간에 다른 아이들이 모두 자는데 혼자서 선생님을 보고 수업하다가 무안하니까 자기도 결국 자게 된다는 말을 해요. 그 때가 탈학교 아이들이 막 나오던 시기였고, 그 아이들을 위한 대안교육이 필요한 때였죠. 제가 대안을 만드는데 소질이 있고, 인류학이라는 학문이 현상을 관찰하고 문제를 풀고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혁신적인 면이 있거든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청소년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학업중퇴자, 대안학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죠.

 

그 관심의 연장선에서 하자센터를 시작하게 된 건가요?

그렇죠. 그 당시 IMF 사태가 터져서 서울시 실업대책위원회 여성청년여성 분과 위원장을 하면서 살펴보니 근로청소년회관 같은 청소년 회관이 제대로 활용되지 않고 공무원들만 앉아 있더군요. 그 때 서울시에서 근로청소년회관을 특화센터로 전환하는 계획을 세웠는데, 담당할 사람이 없어서아우성으로 유명한 구성애 씨가 성문화센터를 하고 서울시 근처의 센터는미디어 센터’, 우리는하자센터를 위탁 받게 되어서 생긴 것이지요. 문화적인 작업장을 중심으로 꾸민 하자센터 초기에는 영화감독, 밴드 하는 아이들, 디자인 등 뭔가 하고 싶은 것이 있고 개성이 강한 아이들이 많이 왔어요. 그들에게 자립심을 심어주니 훌륭하게 글도 쓰고 작업도 하고 스스로 유학을 가기도 했어요. 그래서 당시에는 외부에서, 특히 교사들이 하자센터는 무엇인가 하고 싶어 하는 의욕 있는 아이들이 오니까 그런 성과가 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듣기도 했어요.

 

그렇다면 하자센터 초기와 비교하여 지금 아이들이 달라진 것이 있나요?

있지요. 시대적인 상황이 많이 바뀌었어요. 위에서도 말했지만 초기에는 하고 싶은 것이 있는 의욕을 가진 아이들이 많이 왔는데,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화가 진행되면서 전반적으로 사회가 움츠러들고 여기 오는 아이들도 별로 하고 싶은 것이 없어졌다고 하더라고요. 학교는 싫어서 왔지만 그렇다고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는부모가 어릴 때부터 과외를 시키며 양육을 해서 이제는 아이들이 하고 싶은 것도, 의욕도 없어진 거죠. 지금 하자센터는 초중등 대안학교가 늘어나면서 대안학교 출신들이 오기 시작했고, 개별화된 작업자를 키우기보다 서로 협동하고 자기 앞가림하며 사회에 도움이 되는

작은 일이라도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아이들을 키우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시대 변화를 이야기하였는데 책에서도 90년대는 탈식민지 시대라는 표현을 썼고, 최근 책에는 신자유주의 시대라는 표현이 있더군요. 시대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설명해 주세요.

서태지 세대라고 표현되는 90년대는 한마디로 풍요의 시대, 낙관적인 시대가 오리라고 믿었던 시대였지요. 그래서 식민지처럼 스스로 사유하지 못하고 정답만 말하고 조직운동만 하면서 일상적 삶과 문화에 대해서는 무딘 대학생들에게 네 눈을 가지고 세상을 읽어라’, ‘스스로 즐거운 것을 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라’,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세상이 좋아질거다라는 말을 했었고 그런 담론이 형성되었죠. 이 흐름이 2002년 월드컵까지 이어지면서 정치적 민주화에서 문화의 민주화, 일상의 민주화로 이어졌어요.

그런데 실은 물밑에서 신자유주의화가 급격하게 진행되었던 것이고, IMF 이후 88만원 세대로 표현되는 지금 세대 아이들은이 체제에 들어가지 않으면 죽는다’,‘자기 개발은 네 책임이다라는 담론이 확산된 때에 자란 것이지요. 급속도로 시장이 국가와 결탁해서 국민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던 것이지요. 시장이 모든 사유재산을 잠식해 버렸고 국가는 제도적 권력을 독점하고 남용하면서 시장 편을 드는 시대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돈과 지표로 계산을 하면서요. 시민들이 해오던 영역도 복지라는 이름으로 이상하게 개입을 해서 오히려 무력하게 만들었고, 공적영역을 국가가 독점할수록 시민사회와 개인의 자율 영역은 약해지고 있는 것이지요. 제도적인 권력에 기대지 않으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이 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를 먼저 감지한 아이들은 학교에라도 붙어있자고 생각해서 이제는 예전처럼 배짱 있게 학교를 안 나오는 10대들도 별로 없죠. 그저 학교와 타협하고 있어주는 것이지요. 졸업장은 나오니까. 제 표현으로 아이들은 좀비가 되거나 안전을 제일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시대가 된 거죠. 윗세대만 해도 가난도 알고 풍요도 경험해서 세상에 대해 감이 있는데, 지금 아이들은 패닉한 공포의 산물이랄까쫄아 있는 것이고 부모도 학교도 아이들로 하여금 진한 경험을 못하게 관리하고 있지요. 88만원 세대 담론이 만들어질 즈음부터 삶의 문법이 크게 달라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서태지 세대는굻어죽어도 좋아라는 표현처럼, 배짱 있게 가출하고 학교도 안 나갔는데, 지금은 학교에도 붙어있고 집에서도 안 나가요. 사회가 불안해지니 아이들도 불안을 감지하고 안전빵에 머물고 있는 것이죠. 앞으로 이 아이들을 다 먹여 살려야 할 거예요. 문제가 심각하죠.

 

대안교육은 의미 있지만 사회가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상적인 교육을 받은 경우에 사회에서 적응하기 어렵지 않느냐라는 지적도 있는데 하자센터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나요?

기본적으로 하자센터 안에는 사회적 기업도 있고, 인간적인 관계를 풍성하게 하는 5개의 학교[각주:1]가 있는데 각각의 학교에 아이들을 잘 보는 장인들이 모여 있어요. 그들이 디렉터로 3년 동안 아이들과 함께 하는데 하자센터와 좋은 파트너를 이루어온 미국의 매트스쿨의 원리이기도 해요. 매트스쿨은 선생님 한 명이 20명 정도의 학생을 3년 동안 데리고 가고 120명 넘는 학교는 하지 말라고 하거든요. 교장선생님이 학생들 이름을 다 외우고 있는 규모의 학교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하자센터도 담임인 디렉터가 자기 아이들을 확실하게 키워요. 학교들은 다 특성이 있는데, 로드스꼴라의 경우는 청소년들이 1년 동안 한 나라의 모든 것을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2학년 때는 여행을 주선해서 직접 계획하여 다녀오고 삼 년 차에는 그것을 그림과 글, 노래도 짓고 해서 발표회도 하고 다큐멘터리도 만들고 책으로도 펴내요. 그런 과정을 통해 키워진 능력으로 여행사에 취직하거나 대학을 가기도 해요. 이 아이들은 어디를 가도 무엇이나 해낼 능력이 있어요.

작업장학교의 경우는 목수, 기획자, 공연자, 예술가를 키우면서 몸을 훈련시켜요. 숟가락 드는 것, 청소 하는 것 등 기본부터 가르치고, 난민촌에 가서 고생도 하고, 일본 장애인 연극팀이 오면 그들과 함께 하며 그들이 무대 위에 오르는 것을 돕고 삶에 대해 크게 배우는 경험을 하게 되지요. 입학을 하자마자 후쿠시마 사건이 터진 학년들은 탈핵 공부를 집중적으로 하면서 생태 전문가들이 되어 가는데 이 학년은 지속적으로 밀양에 내려가 송전탑 반대하는 주민들을 돕고, 재생에너지에 관심을 가지고 컨테이너로 에너지 제로 하우스도 만들고, 빗물 저장고도 만들어요. 그리고 적정기술 모임도 하고, 땅콩집 건축가와 함께 한평 집도 만들었어요. 아이들이 직접 손으로 장인이 되는 훈련도 하고 글도 쓰고 공연도 하면서 자기의 언어를 가지게 되는 거죠. 이처럼 아이들이 스스로 자기 앞가림을 하고 몸을 단련시키면서 협동하고 더불어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가는 언어와 상상력을 주는 학습의 장을 열어주는 중이예요.

 

이제는 문제를 푸는 방식에 대해서 묻고 싶습니다. 어느 글을 읽으니 교수님을 원탁회의주의자라고 표현했던데 어떤 의미인가요?

저는 원탁에 둘러앉아서 문제를 창의적으로 푸는 것을 좋아하고 잘해요. 어떤 것이 제도화되면 대개 관료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고 법제화 문제로 싸우는 등 창조는 못하고 보수하는 것에 에너지를 쏟는데, 난 그런 것에 재미도 없고 재주도 없고 지금 시대는 그렇게 보수 유지를 할 때가 아니지요. 문제가 너무 심각하고 많아서 많은 이들은 오히려 외면하려고 하고 냉소적으로 되고 있잖아요? 나는 문제 풀고 싶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문제를 푸는 것을 돕는 일을 잘 하는 것 같아요. 교사로서의 중요한 역할이지요. 문제를 푸는 방식은 답을 알아서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모여서 의논하는 것이라는 걸 가르쳐주는 거죠. 총체적 접근은 허망하죠. 구체적인 사람들이 구체적인 문제를 풀면 이것이 조만간 전체 문제가 풀리는 길로 보이는데 다들 큰 문제만 풀고 싶어하면서 제자리 걸음을 하지요. 지금처럼 복합적인 사회문제를 풀 때 조직과 힘으로 밀고 나가면 그 후유증이 너무 커요. 우리나라가 어떤 문제에 대해 자기 삶과 연결시켜서 보다 구체적으로 접근하며 대안을 만들어 갔으면 지금쯤 좋은 학교, 좋은 공동체, 좋은 마을이 많이 생겼을 텐데 그렇게 안 하고 힘으로 권력을 무너뜨리려고만 했기 때문에 난감해졌지요.

원탁은 누가 결론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저는 그것을난감모임이라고도 부르는데 누구나 원탁에 둘러앉아 난감하다고 이야기 하는 모임이에요.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풀지를 각자 성급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모두가 괴로워져요. 그것에 대한 공감대가 만들어져야 하고 각자 충분히 자기 이야기를 해서 서로간의 이해의 장이 열려야 해요. 내 문제로 여기면서 말이지요. 난감모임에서는 난감함을 공유하면 되요. 그 자리에서 해결책을 말하면 쫓아내요.(웃음) 충분히 듣고 공감하다보면 진짜 문제를 깨닫고 해결책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사람들은 생각보다 참 지혜롭거든요.

 

제도를 바꾸려 하기보다 운영을 잘하게 하는 것, 문화적 실천을 통한 변화를 이야기하는데 그래도 제도 변화가 중요하지 않은가요?

남자들은 제도 중심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요. 예를 들어 학교 급식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저도 무상 급식에 적극 동의했어요. 그 때는 친구들이 함께 둘러앉아서 밥을 같이 먹고 선생님은 그 시간에 음악을 틀어주는 등 문화적인 측면에서 생각하면서 찬성을 했어요. 그런데 거대한 돈을 들여 식당을 짓고 아이들은 식사시간이 되면 뛰어가서 줄을 서고 허겁지겁 먹게 하잖아요. 이것은 미친 짓이에요. 토건업자들이나 하는 짓이지 교육하는 이들이 할 짓이 아니지요. 이렇게 할 바에는 안 하는 것이 나아요. 그런 식으로 제도만 만들어놓고 왜 하는지,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논의도 제대로 않으니 학교가 엉망이 되고 있는 것이지요. 문화적 차원에 대한 논의를 배제한 채 제도만 바꾸니 제대로 된 운영이 어려운 거예요.

 

최근 학교에서도 학교의 변화를 위해서 회의를 포함한 교사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는 논의가 있는데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최근 엄기호씨가 쓴 책[각주:2]을 보더라도 예전에는 교무실 문화라는 것이 있었지요. 교무실에 비공식적인 문화가 있으면 아무나 호락호락하게 할 수 없어요. 그런데 이제는 교사들이 잡무도 많아지고 세대 간에 소통도 어려워지면서 각자 자기 구석에 들어가 격무에 시달리고 스스로를 단속하면서 지내지요. 교사들끼리 만나봐야 기운이 살려지지 않고 나쁜 에너지만 나오니까 다들 외톨이가 된 교무실 문화가 만들어진 거죠.

하자센터도 일이 많아지면서 한동안 판돌(여기서는 스텝을 판을 돌린다고 판돌이라고 부름)들 간에 소통이 어려울 때가 있었어요. 그 때 함께 모이는 허브 공간을 만들고 동네 부엌 프로그램을 만들어 각자 반찬 하나씩 가져오고 국을 끓여서 모여 함께 먹고 이야기 하니 분위기도 좋아지고 업무에 대한 소통도 금세 이루어지더라고요. 학교 내에도 이러한 공간과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 필요해요. 그러나 불신과 경쟁의 공간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기가 쉽지 않죠.

 

오랫동안 현대 사회에 대한 대안으로 돌봄과 배움의 공동체로서 마을을 강조하였는데 마을은 어떤 의미인가요?

마을을 이야기 할 때는 지속성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지금 학교는 아이들을 3년만 데리고 있다가 떠나보내는 방식이잖아요. 그것도 제대로 데리고 있는 것이 아니고 단절된 관계들이 대부분이지요. 현재 아이들에게는 선배도 없고 후배도 없고 비빌 언덕도 없어요. 이제 학교는 마을 안에 학교 개념으로 나가야 해요. 아이들이 동네 가게 아저씨와 친해져서 그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하는 거죠. 최근에 서울시가 교육지구를 선정해서 예산을 지원한다고 해서 저는 예산을 학교에 지원하지 말고 마을에 지원하라고 했어요. 마을에 자전거 공방을 만들고 자전거 카페도 만들어서 아이들이 인턴십을 하면서 자전거도 고치고 만들면서 직접 자신이 뭔가를 해내는 존재라는 체험을 하게 하는 거예요. 이처럼 아이들을 마을과 연결해서 배우고 자기 앞가림하는 아이로 성장하게 해야 해요. 거대한 금융체제와 돈이 돈을 버는 체제만 생각하면 망하는 길 밖에 없지요. 이 체제 밖과 위에 사람이 제대로 상부상조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영역을 만드는 일을 해야 하고, 언제 허물어질지 모르는 체제가 아니라 탄탄한 삶의 장이 생겨야 해요. 에너지의 경우를 예로 들면 더 이상 핵발전소를 짓지 말고 재생에너지로 방향을 전환하면서 에너지를 줄이기 위한 교육을 해야 하지요. 그러면 재생 에너지 쪽으로 아주 많은 직업이 생겨나고 지구의 환경문제도 풀 수 있지요. 엔지니어만이 아니라 생태 환경 교육자 등 많은 직업이 생겨나요. 이제는 그 분야에서 보람된 일자리도 만들고 에너지도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해요.

 

최근 언론을 보니 교육감 후보로 거론된 적이 있는데 교육감이 된다면 어떤 정책을 펼치겠습니까?

우선 교육주체에게 자율성을 줘야 해요. 사또 마나부 선생도 배움의 공동체를 적용할 때 학교에서 교장이 하겠다고 할 때만 참여시킨다는 원칙을 세웠지요. 그래서 효과를 봤어요. 자유학기, 혁신학교도 마찬가지인데 자율성이 주어져야 해요. 획일적인 집행은 절대로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아일랜드의 전환학년제를 예로 들면 1978년에 시작할 때 2%의 학교만 실시하다가 30년이 지나서 거의 모든 학교가 하는 식으로 정착이 되었지요.

당사자들이 모여서 우리가 한번 해보자고 했을 때 성공할 확률이 높지만 위에서 내려왔을 때는 성공할 확률이 적어요. 공부를 열심히 해야 겨우 할 수 있는 것인데 위에서 내려오면 될 리가 없어요. 모든 것은 준비된 이부터 하는 것이지 획일적으로 군대식으로 해서는 안 되지요. 특히 교육계는 그렇습니다.

하자센터 같은 경우에 최근 도입된 자유학기제를 활용하여 몇몇 학교에 우리가 하고 있는 컨테이너 박스 에너지 제로 하우스 작업을 할 수 있게 해서 자유학기제가 제대로 시행되는 모델을 만들어볼까 생각중이에요. 먼저 이런 실험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요. 모델이 나와야 변화를 할 수 있는 것인데 이런 실험을 제대로 안하니까 모든 시스템이 너무 찌질해지고 있어요. 실제로 대안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해요.

 

그렇다면 공교육 현장에 있는 교사들은 교육의 변화를 위해 어디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요?

교육’, ‘학교이렇게 생각하기 전에 먼저 내 앞에 있는 아이에게 집중하여 그 아이를 살리라고 말하고 싶어요. 내 앞에 있는 아이를 다 살릴 수 없고, 그저 소수일 테지요. 저도 하자센터를 시작할 때 2-3명의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시작했어요. 행동은 구체적이어야 해요. 저는 지금도 실험을 할 때는 구체적인 사람을 두고 해요. 그래야 헛발질을 안 해요. 마음이 움직이고 애정이 있을 때 문제가 제대로 보이는 것이고 일도 즐겁게 굴러가며, 구체적이기 때문에 복제도 가능한 거예요. 대부분 아이를 두고 제도만 이야기 하니 헛발질만 하게 되는 것이지요.

행동은 구체적이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교사들은 교육에 대한 큰 그림을 갖고 있어야 해요. 시대 공부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최근에 학교 선생님과 대화하다보니 학교에서 열심히 하는데 알아주지 않으니 억울해 하는 경우가 있더군요. 학교에서의 헌신과 함께 시대를 보는 훈련을 해야 효과가 나지요. 구조에 대한 개념 없이 개인적으로 아무리 열심히 해도 별 효과가 나지 않을 겁니다. 지금은 학교 자체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으니 시각을 학교 밖 마을로 확대해야 하는 시점이지요.

예를 들어 교사가 마을에 살면서 동네 부엌도 하고 학교 카페를 하면 마을 사업도 잘 되어 가면서 아이들이 챙겨질 겁니다. 교사들이 학교 밖으로 안 나오니 운신의 폭이 없는 거예요. 이제 교육이 바닥을 쳤으니 아이를 위해서, 또 나 자신과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새롭게 길을 찾아야 해요. 그래서 나는 교사들이 마을을 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선생님들이 자신이 사는 마을에서 동네 사람 몇몇이랑 함께 식사하고 영화를 보고 이야기하는 행복한 경험부터 시작하면 좋겠네요. 아이들과 함께 가면 더욱 좋고요. 너무 바쁘게 지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고 빈 시간을 가져야해요. 그래야 상상과 실험이 가능하고 아이들이 보이지요.

 

인터뷰 당일에도 조한혜정 교수는 하자센터에 있는 5개의 학교가 함께 하는 하자마을학교의 마을인문학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진지하게 강의를 듣고 토론하는 아이들과 둥그렇게 앉아 편안하게 소통하는 교수님의 모습, 다함께 모여 춤으로 마무리 하는 것 모두 인상적인 풍경이었다. 교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 학교가 추구해야 할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면서도 머리가 복잡해졌다. “교육: 꿈이 있는 상상이 필요한 시점이다.

  1. 현재 하자작업장학교, 로드스꼴라, 연금술사, 영셰프, 집밖에서 유유자적 등 학교이기도 하면서, 학교가 아니기도 한, 아주 다른 학교들이 있다. [본문으로]
  2.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따비, 2013)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