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병오 칼럼

다시 역사 앞에서(2016.12)

정병오 칼럼


다시 역사 앞에서

어찌 이런 일이!

허망하다. 그래도 민주공화국의 헌법 위에 구축해온 국가 시스템이 사이비 종교의 성격을 강하게 띤 한 여인에 의해 이렇게 허무하게 농락을 당할 수가 있는 것인가? 단지 한 개인이나 집단이 권력을 활용해 치부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개성공단 폐쇄, 역사교과서 국정화, 사드 배치 등 국가의 미래를 결정하는 주요 정책들까지 좌지우지했다니. 이는 왕조 시대에도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들은 여당.검찰.언론을 손에 쥐고서 영원히 권력을 이어가고 거짓을 숨길 수 있을 것처럼 행사했지만, 진실의 작은 구멍이 하나 뚫리자 거짓의 댐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마태복음 10:26)는 말씀을 넘어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시편 7318~19)라는 말씀이 실현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저들이 완전히 몰락한 것은 아니다. 저들은 꼬리에 꼬리를 자르면서, 찔끔 양보로 국면을 전환하면서 어찌하든지 권력을 이어가고 전열을 정비하여 반전을 꾀하고 있을 것이다. 저들의 전략은 국민들의 깨어난 의식과 민주주의의 힘과 싸우면서 국민을 속이려고 할 것이다. 이 싸움에서 어떻게 정의를 세우며 민주주의를 성숙시켜갈 것인가는 국민들에게 남겨진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 향수'의 몰락

저들이 온갖 모략과 술수를 사용해 정권의 생명을 이어가고 기득권 세력을 보호할 수는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일로 인해 박정희 향수는 기반이 흔들리는 타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사실 박정희 향수는 우리 역사가 그동안 쉽게 넘어서지 못했던 역사의 짙은 그늘이었다. 박정희 군부 독재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억누르고 남북분단을 고착화하고 분쟁을 강화하면서, 농촌과 노동자의 저임금 희생에 기반한 대기업 중심의 경제정책을 추진했다. 다행히 이러한 경제정책은 단기적인 성장을 가져왔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물질적 혜택을 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그의 통치는 경제적으로도 더불어 함께 잘 사는 경제가 아닌 대기업 중심의 양극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체제였고,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반칙과 특권, 권위주의와 물질주의의 뿌리를 깊게 내리게 했다. 이후 IMF 외환위기를 정점으로 박정희식 개발독재의 한계가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는 상황에서도 많은 국민들은 박정희와 같은 강력한 개발독재 체제를 소망하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박정희 향수는 그의 핏줄인 박근혜를 아무런 검증도 없이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으로 역사를 후퇴시켰다.

이렇게 박정희 향수의 후광을 입고 대통령이 된 박근혜는 단지 국민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하거나 정책적으로 무능한 존재인 것 이상으로 자기 정신조차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고 사이비 교주에 끌려다니는 존재임이 온 천하에 드러나 버렸다. 그럼으로써 박정희와 그 가문에 대한 신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조차도 박정희 향수가 얼마나 허망하고 실체가 없는 신기루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는 박근혜-최순실 사태가 그나마 역사에 기여한 가장 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 정신은 아직도 건재하다

물론 이번 박근혜-최순실 사태를 통해 그 기반을 잃은 것은 혈연적 의미의 박정희 향수일 뿐이고, 정신적 의미의 박정희 향수는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로 표현되는 박정희 정신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가치를 배제하거나 희생하더라도 오직 물질적으로만 더 풍요해지면 된다는 것이었다. 이웃과 약자를 배려하면서 더디더라도 더불어 함께 잘 사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이야 어찌되든 혹은 다른 사람들을 밟고 희생시키더라도 나만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지면 된다는 무한경쟁, 승자독식 정신이었다. 법은 물론이고 도덕과 종교적 계명을 지키는 올바름에 대한 추구가 아닌 온갖 편법과 반칙을 사용하더라도 결과물만 빨리 만들어내면 된다는 결과주의였다. 환경과 미래, 다음 세대에 대한 고려 없이 아니 이들을 희생하더라도 당장 좀 더 많은 물질적 풍요를 축적해서 이를 내 자식에게 물려주면 된다는 근시안적인 자세였다.

그 결과가 현상으로 드러나고 있다. 정경유착과 권언유착으로 대표되는 온갖 편법과 비리, 작은 권력과 기득권이라도 있으면 이를 활용해 약자를 쥐어짜고 그들을 착취해 자신의 더 많은 이익을 취하려는 갑을관계, 흙수저 금수저로 표현되는 갈수록 심화되는 양극화, 부동산 투기로 대표되는 불로소득에 대한 광적인 집착, 사회적 책무성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는 기득권 세력의 공고화, 조세와 복지를 통해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정치적 세력과 의식의 부재, 젊은 세대의 절망. 이 모든 현재의 모습이 박정희 정신의 결과가 아닌가.

 

또 다른 박정희가 우리의 탐욕을 자극할 때

이렇게 박정희 정신이 우리 사회를 회복 불능의 절망으로 몰아넣고 있지만, 다수의 국민들은 여전히 박정희 정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회 전체가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든 말든 내 집값을 올려주고, 내가 속한 집단의 기득권을 흔들지 않고 보호해줄 수 있는 또 다른 박정희를 찾고 찾았다. 그 결과가 이명박이었고, 또 박근혜였다.

박근혜-최순실의 국정 농락이 워낙 어이없는 형태로 드러나자 대다수 국민들과 보수언론, 여러 기득권 세력이 등을 돌렸지만, 이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고 나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이들은 또 다른 박정희를 내세워 박정희 정신혹은 박정희 향수를 자극할 것이다. 또 다시 당신의 집값을 올려줘서 잘 살게 해 주겠다.” “당신 집단이 가진 기득권을 더 공고히 해서 잘 살게 해 주겠다.” “당신과 당신 가족들이 경쟁에서 좀 더 유리한 조건을 갖도록 특권을 주겠다.” 등의 욕망을 부추길 것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 동안 박정희 정신이 가져왔던 온갖 불의와 부작용을 잊고 다시 욕망의 길을 따를지도 모른다.

 

박정희 정신의 극복, 나는? 교회는?

박근혜-최순실 사태라는 어이없는 상황 앞에서 일차적으로는 사태의 진실을 밝히고 거기에 합당한 책임을 묻는 일에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쳐서는 안 되고,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박힌 아니 내 속에도 존재하는 박정희 정신을 찾아내어 이를 제거하는 운동과 실천에 나서야 한다.

물질적으로는 더 이상 잘 살지 않아도 된다. 이제 물질적으로 조금 덜 풍요하더라도 정신적이고 영적인 풍요로움을 함께 추구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또한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나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있는 이웃들과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내가 속한 집단의 작은 기득권들을 내려놓으면서 다른 집단들의 기득권도 내려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나부터 반칙과 특권의 유혹을 떨쳐내면서 우리 사회를 보다 공정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운동은 개인의 실천으로 그쳐서는 안 되고, 집단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정치적인 힘으로도 결집되어 이러한 가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정당이나 후보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해야 한다. 그리고 구체적인 정책으로 만들어지고 제도화될 수 있도록 선한 압력을 가하는 운동을 지혜롭고 지속적으로 감당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 일에 교회가 앞장서야 할 것이다. 한국 사회가 이렇게 오랫동안 박정희 정신에 사로잡혀 헬조선으로까지 치닫게 된 것은 교회 역시 박정희 정신을 내면화하고 이에 근거한 성장을 추구해왔기 때문이다. 교회가 예언자적 자세로 박정희 정신속에 있는 물질주의와 탐욕 추구를 제대로 비판하고, 이를 넘어선 대안적 가치를 제시하고 실천해왔다면 한국 사회가 지금과 같은 비참한 상황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상황에 대한 더 엄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박정희 정신극복과 기독교적 대안 제시와 실천에 앞장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