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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오 칼럼

피할 길, 감당할 힘(2017.2)

정병오 칼럼


피할 길, 감당할 힘

선생님은 여러 일로 인한 스트레스를 어떻게 해소하시나요?”

글쎄, 이이제이(以夷制夷)라고 할까요? 새로운 일로 이전 일을 제압하는 것이죠.”

그냥 농담 반 임기응변 반으로 한 이야기지만 지금의 현실이기도 하다.

 

내 한계를 넘어선 일들을 맡으며

좋은교사운동 대표를 사임하고 학교로 복직하면서 학교 일과 좋은교사운동 회원으로서의 역할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우선 좋은교사운동 본부에서는 정책위원으로 정책위원회에 계속 참여했고, 좋은교사운동 대표를 하기 전 참여했던 지역모임인 기윤실 교사모임 강남모임에 다시 참여했다. 그리고 기윤실 교사모임의 리더 훈련과정인 꿈꾸는 섬김이 학교에 월 11박 모임에 참여해 말씀을 전하는 역할을 했다. 이렇게만 해도 일이 많고 벅차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하여 한 가지씩 일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우선 2015년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당선자 인수위원으로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공약사항 중의 하나인 오디세이학교 운영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오디세이학교 업무 자체는 일반 학교의 일보다 더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새로운 일을 만들어가야 하고 새로운 교육의 틀을 정착시켜가야 한다는 정신적 부담이 많이 늘어났다. 그리고 내가 대학 때 활동했던 선교단체인 SFC 동문회에서 개혁신앙이란 잡지의 창간에 간여하게 되어 결국 편집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이 일도 실무자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최종 책임을 져야 하는 부담이 주어졌다. 또 하나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본부의 상임집행위원으로 참여를 하고 있었는데, 내부 여러 일에 점점 더 깊게 관여하고 더 많은 책임을 맡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리고 지난 해 9월에는 교회에서 장로 장립을 받았다.

 

삶의 힘듦을 좌우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여러 일에 관여하고 책임을 맡으면서 느끼는 것은 사람의 시간이라는 것이 물리적인 한계가 정해져있긴 하지만 동시에 물리적인 한계를 초월하는 면도 있다는 것이다. 나만 해도 여러 일들이 밀려들어오면서 평일 저녁 시간은 한계에 달하니 토요일로 밀려들어오고 조찬 모임이 생기기 시작하고 심지어 인터넷 화상회의를 하는 경우까지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참 신비로운 것이 이렇게 물리적으로는 빈틈없이 돌아가는 상황으로 인해 정신적인 여유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의 여유를 뺏어가고 정말 힘들게 하는 것은 일의 분량이나 책임의 무게가 아니라 일상의 사소한 관계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학급이나 수업에서 아주 작은 아이일지라도 나의 지도에 지속적이고 의도적으로 반항할 때, 매일 얼굴을 맞대야 하는 동료나 상관 혹은 후배들과 관계가 틀어졌을 때, 가정 내에서 배우자나 자녀와 불화할 때, 교회에서 목회자나 성도들에게 실망할 때 우리는 삶의 의욕을 잃게 되고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이 시달리게 된다. 이러한 힘듦은 내가 맡고 있는 일의 분량과 책임의 크기와 무관하다.

물론 여러 일을 많이 맡게 되면 당연히 그 일 가운데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갈등할 일이 많아 진다. 또 어떤 책임을 맡는다는 것은 결국 그 일과 관련된 여러 갈등들을 조정하고 최종 의사결정을 내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인간관계의 아픔에 노출될 확률이 더 많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그야말로 확률이 높아질 뿐이지 반드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이 그렇듯 사람에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확률에 의해서가 아니라 원인과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연 혹은 신비의 모습으로 오는 경우가 더 많다.

 

감당할 만했기에 감당했다

최근의 내 삶을 돌아보면서 나 스스로 생각해도 어떻게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일과 책임을 동시에 감당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반대로 감당할 만했기 때문에 감당을 했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이 많은 일들로 인해 건강이 심각하게 손상됐다면 당연히 모든 일을 그만두었을 것이다. 실제로 2016년 내내 오십견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이는 심각하게 불편할 뿐 전체적인 몸을 손상하는 병은 아니었다. 그리고 지난여름에 심한 구토 증세로 위와 대장 검사를 받기도 했지만 다행히 암은 아니라는 진단을 받았다. 또 내가 맡은 일들이 서로 충돌을 일으켜 어떤 일을 심각하게 펑크를 낸다면 내 의사와 관계없이 몇 가지 일은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일에 심각한 무능력을 드러냈을 경우에도 당연히 그 일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족스럽지는 않고 때때로 소소한 펑크나 무리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일들을 감당하며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늘 피할 길을 열어주셨고 감당할 힘을 주셨기 때문일 것이다. 사소한 일이든 큰 일이든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거기에는 늘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폭탄이 존재한다. 그 폭탄은 외부 환경일 수도 있고 가까운 사람일 수도 있고 심지어 나 자신일 수도 있다. 우리가 그 폭탄을 제거하기 위해 인간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씨름할 때 하나님이 언제 어떻게 개입하셔서 그 폭탄을 제거하고 피할 길을 열어 주시느냐에 따라 우리 에너지의 소모량이 결정된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감당할 힘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가진 힘만으로는 어떤 사소한 문제 앞에서라도 넘어질 수밖에 없다. 그 분이 주시는 힘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지 않으면 아무리 경험이 많고 열정이 있어도 금방 소진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존재다.

 

본성을 거슬러 살아온 삶

돌아보면 나는 늘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는 일을 감당해왔다. 최근 몇 년 동안 좀 더 심해진 것뿐이다. 그런데 나는 성향적으로는 일과 책임을 맡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나는 보통 남자들에 비해서 권력욕이나 명예욕이 좀 약한 편이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보다는 혼자 있는 것을 더 편하게 여긴다. 그리고 일을 벌이기 보다는 책을 읽고 정리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다른 사람이나 시대의 아픔을 느끼고 공감하는 감각도 무디다.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몰려야 겨우 나서는 편이다.

이러한 나의 성향과 맞지 않게 일과 책임을 맡으며 살아왔으니 내적으로 얼마나 갈등이 많고 힘들었겠는가? 하지만 이러한 일과 책임 가운데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주시고 감당할 힘을 주심을 늘 체험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전에 내가 전혀 감당하지 못했던 새로운 일이라 할지라도 내게 주어진 일이라는 것이 분명하다면 여러 계산을 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감당해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날이 속히 오리라

50대에 접어들면서 조금씩 몸에 이상이 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일과 책임을 맡아 일선에서 일할 시간도 10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음을 느끼곤 한다. 내 건강이 불시에 나빠지지 않는다 해도 10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이선으로 물러나 돕는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볼 때 이 10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길지 않을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일할 수 없는 밤은 그야말로 속히 올 것이다. 이 일을 생각하면 한편으로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 때는 내 성향으로 돌아가 마음껏 혼자 있고 책 보고 기도하면서 게으른 삶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설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