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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좋은 만남(박윤환 선생님)


대전 어은중학교 박윤환 선생님

서른, 잔치는 시작됐다

 

 

 

2012년이 밝았다. 예전에는 나이를 한 살 먹는 것에 아무 느낌이 없었는데, 이제는 한 살 한 살 먹을 때마다 ‘나도 늙어 가고 있구나!’ 하는 인생무상을 느낀다. 이런 느낌은 ‘서른’이라는 시점에 들어왔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불안했던 ‘스물’을 보내고, 이제는 천천히 인생의 정점에 도달하는 ‘서른!’ 이때부터가 ‘내가 똑바로 살고 있나?’ 하는 인생의 책임감을 묻는 나이다. 문득 이때, 좋은교사 선생님들은 나이 30에 어떤 고민이 있을까? 여태껏 좋은 만남에 소개된 선생님들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에 있었던 선생님들이다. 인생 후반전을 준비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런데 인생 전반전을 준비하고 있는 30대 초반의 좋은교사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들의 무모한(?) 도전기를 들으며, ‘그래 우리는 이때 이런 생각을 가졌지’ 하는 마음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만난 선생님이 박윤환 선생님이었다.

박 선생님을 선택한 이유는 그의 무모한 도전 때문이었다. 기자는 그를 지난 2011년에 열었던 행복수업 아카데미에서 만났다. 박윤환 선생님은 서울을 격주로 올라오면서 강의를 들었다. 차비만 왕복 5만 원이 넘는데, 박 선생님은 열정적으로 서울에 있는 모임을 참석하시고, 결국에는 대전에서 수업을 보고 나누는 ‘수업친구만들기’ 모임을 만들었다. 이런 그의 무모한 도전을 보면서, 피 끓는 나이, 서른의 피를 수혈 받고 싶었다.

 

미혼 남성, 무엇으로 사는가?

박 선생님이 집에 들어오는 시간은 평균 밤 9시. 집은 기숙사와 다를 바 없다. 미혼 남성 특유의 열정으로 교회, 대전 좋은교사 모임, 학교를 섬기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이야 열정적으로 기독 교사의 삶을 살고 있지만, 처음부터 그가 신실한 삶을 산 것은 아니었다.

“사실 저는 중학교 때부터 교사가 되고 싶었지만, 기독교사로서 확고한 신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중학교 2학년 때, 수학여행을 갔는데 엄청 즐거웠어요. 그래서 속으로 생각했죠. 평생을 이렇게 수학여행 다니면서 살 수 있는 직업이 무엇이 있을까? 답은 행정실장님과 선생님이었는데, 그중에 교사가 좋겠다 생각하고, 교사가 되기로 한 거죠. 제가 활동적인 스타일이라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것을 진짜 좋아했어요. 그래서 교사가 되서 학생들과 이런저런 활동을 하는 막연한 꿈을 꾸었죠. 그리고 고등학교 때에도 목사님께서 ‘너는 교사가 된다고 했으니, 교원대에 가면 된다’고 해서, 그냥 교원대에 갔어요. 기술교과를 선택한 이유도 원래는 수학과를 가고 싶었는데, 점수가 조금 안 되어서 기술을 선택한 것이죠. 역시 이런 막연한 선택은 대학 시절에 정말 많은 방탕 생활을 가져 오게 했어요. 사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장로 아들로서 모범적인 삶을 살았어요. 저희 집은 아침마다 가족 예배를 드렸어요. 지금이야 은혜롭지만, 이 시절만 해도, 이런 가정 문화는 저를 힘들게 했죠. 아버지는 아버지로서는 무척 훌륭하지만, 신앙적으로는 저와 성향이 달라 다가서기가 힘든 그런 분이었어요. 대학 생활은 제가 이런 삶으로부터 도피하는 아주 좋은 기회였죠. 집은 대전이었고, 학교는 청주, 게다가 기숙사 생활이었으니, 제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해도 되었죠. 그래서 춤 동아리에 들어갔어요. 제가 00학번이었는데, 그땐 춤이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어요. HOT, 신화와 같은 아이돌 그룹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사람들에게 관심 받고 싶은 마음에 마구 춤을 추었죠. 머리도 염색하고, 옷은 힙합으로 입고 다니면서, 세상 문화에 푹 빠져 살았어요. 매일 새벽까지 PC방 가서 게임도 많이 했어요. 게다가 저는 축구를 무척 좋아했어요. 선배들도 축구를 좀 잘하는 저를 무척 예뻐했죠. 당연히 모든 술은, 저에게 몰렸어요.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한두 잔 마시다 보니, 좋은 거예요. 그리고 술에 푹 빠져 살았었죠. 그야말로 허랑방탕하게 놀았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에서는 교사로 섬겼어요. 평일에는 술, 축구, 댄스에 빠져 살았지만, 주일만은 교회 봉사를 한 거죠. 그러면서 저를 정당화했어요. ‘그래도 나는 주님과 멀어진 것은 아니다’라고 말이에요. 이렇게 봉사를 하고 있으니 말이에요. 그래서 열심히 학생들에게 워십 지도도 하고, 최신 CCD를 가르치면서 재미있게 보냈죠.”

“이렇게 이중적인 삶을 살았던 제가 임용 고시를 준비하면서 크게 깨지죠.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었어요. 사실 임용 시험에 금방 붙을 거라 생각했어요. 이때 당시에는 기술과 경쟁률이 4:1, 5:1 정도밖에 안 되었거든요. 기술교육과도 충남대, 대불대, 교원대 전국에 세 군데밖에 없었기 때문에 조금만 하면 붙을 줄 알았는데 떨어지는 거예요. ‘하나님, 내년엔 붙여 주시겠죠’ 했는데 또 떨어진 거죠. 많이 심각해졌어요. 친한 친구들은 다 붙고 학교로 가는데, 저만 덩그러니 남아서 공부하는 거예요. ‘아, 인생이 혼자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죠. 그리고 삼수를 할 때는, 분위기 전환 차 서산에서 기간제 교사를 하기로 했어요. 짐도 옮기고, 방도 잡아 놓았죠. 일 년 동안 기간제 교사를 하면서 현장 경험도 하고 교사의 꿈을 키워 보기로 한 거죠. 그런데 보름 만에 잘렸어요. 선배가 공군에 입대해서 그 자리로 제가 들어간 건데 선배가 몸을 다치면서 다시 육군으로 가게 되어 복직을 한 거예요. 저는 비정규직이어서 보따리 싸고 다시 내려와야 했죠. 방에서 혼자 울기도 하면서 제 인생의 서러움을 온몸으로 느꼈죠.”

“그런데 그때 떠나지 않은 분이 예수님이었어요. 허랑방탕한 삶 속에서도, 위선적인 삶 속에서도 저를 변함없이 기다리셨던 예수님! 방바닥에서 울면서 고백했죠. ‘주님이 저의 구원자시고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이때 처음으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 같아요. 매일 아침마다 말씀을 보고 가정 예배를 드려도 제 삶 속에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고백했던 것은 이때가 처음이에요. 2005년 4월, 인생에서 가장 힘든 때가 가장 복된 날이 되었어요. 그리고 2005년 5월, 조치원에서 기간제 교사를 다시 하게 되었어요. 이때는 임용 고사 공부에 마음을 비웠어요. 사실 시간도 없었고, 꼭 붙어야겠다는 열망도 없었어요. 그저 예수님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해였어요. 그런데 모든 것을 비우니 그때 합격한 거예요. 전혀 예상치 않은 합격이었죠. 그리고 ‘모든 것을 비우니 그분께서 채우시는’ 기독 신앙의 비밀을 알게 되었어요.”

 

기독 교사의 삶으로

우리도 모두 은혜로 교사가 되었지만, 학교 현장의 모습은 그리 녹록치 않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 ‘교사’의 삶은 살지만 ‘기독 교사’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박 선생님도 마찬가지다. 2006년 첫해, 대전 기성중학교에 발령을 받아 근무하지만, 기독 교사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많이 고민했다고 한다.

“대전 기성중학교, 대전에서 제일 작은 학교에 발령을 받았어요. 전교생이 100명인 학교. 그래서 엄청 좋았어요. 애들도 천사 같았죠. 애들과 같이 토끼 키우고, 체육 시간에 토끼 잡으러 다니는 학교였어요. 영화 〈선생 김봉두〉에 나올 만한 학교였어요. 첫 발령지로는 손색이 없는 학교였지요. 하지만 마음속으로 떠나지 않는 질문이 하나 있었어요. ‘기술 교과가 영원한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교회에서는 주일 학교 교사로 주님을 전하는데, 학교에서는 어떻게 이런 사역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어요. 처음에는 무조건 복음을 전하는 것만이 다라고 생각했는데, 매일 수업마다 복음을 전할 수는 없었어요. 가르치는 기술 교과 내용 속에서 영적인 무엇인가를 전하고 싶었는데 그것이 되지 않아서 무척 괴로워했어요. 사실 제 안에 교사하는 것을 그만두고 목회자로 나가야 하나 하는 생각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다행히도 학교 안에 신우회가 있었어요. 그 모임에서 이런 고민들을 풀어내니, 한 선생님이 월간 《좋은교사》를 주면서 ‘그런 고민은 여기서 풀 수 있다’ 하시고 2006 기독교사대회를 권면했어요. 저는 이거다 싶었죠! 그리고 당장 달려갔어요. 예상대로 이곳에서 또 다른 하나님을 만났죠. 교사 박윤환을 부르신 하나님을 만난 거죠. ‘하나님은 당신을 교사로 부르셨습니다.’ 이 슬로건이 제 마음으로 들어오는데, 정말 마음이 뜨거웠습니다. 오죽했으면 이때 방언까지 터졌습니다. 여러 기독 교사 선배들의 모습을 보면서 ‘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부분이 이렇게 많구나 !’, ‘나는 계속 교사를 해야겠구나 !’, ‘하나님께서 나를 교사로 부르셨구나 !’ 하는 것을 정말 온몸으로 깨달았어요.”

“하지만 그 감격도 잠시 2006년 11월 군 복무를 해야 했어요. 큰 뜻을 품고 무엇인가를 이루어 내고 싶었는데, 국가가 저를 부르는 거예요. 그런데 축구할 때 다쳤던 무릎 때문에, 공익 근무 요원 판정을 받았어요. 일명 ‘요원’이 된 거죠. 그것도 학교 행정 요원으로 발령이 났어요. 처음에는 교육청으로 갈 것 같았는데, 대전 어은중학교로 가게 되었어요. 2년 동안 이곳에서 쓰레기 분리수거 하고, 농약 치고, 잡초 뽑고, 운동장 금 그리기 등 수많은 일을 했죠. 그런데 문제는 제대 후에 발생했어요. 제대 후 학교 근무지가 요원 생활을 한, 바로 그 어은중학교로 발령이 난 거에요. 먼저 애들이 난리가 났죠. 쓰레기 줍던 형이, 담임 교사가 되었으니까요. 주사님도 어려워하기는 마찬가지였어요. ‘박 이병’, ‘윤환 씨’, ‘미스터 박’이라고 불렀는데, 어엿한 교사로 나타났으니 말이에요. 암튼 2009년 3월 학교에 출근해서, ‘요원’에서 ‘교사’로 바뀌는 데 꽤 많은 진통이 있었어요.

 

진짜 기독 교사의 삶으로

박 선생님은 2009년부터 본격적인 기독 교사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 본인도 어은중학교 출신이고, 군 생활도 어은중학교! 교직 생활도 어은중학교! 이렇게 된 것은 분명 하나님의 비밀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 학교와 연계한 ‘기독 학생반’ 운영을 반드시 하기로 했다고 한다.

“2006 기독교사대회 때의 은혜를 기억하며, 2009년에 제자들을 그리스도께 이끌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2009년에 밴드 반을 억지로 맡게 되면서 그 계획이 틀어졌어요. 그래서 그 다음해인 2010년에는 기필코 기독 학생 동아리를 만들겠다 다짐했어요. 2010년 3월 드디어 저는 ‘사랑나눔반’이라는 이름으로 기독 학생 동아리를 만들었어요. 첫 해에 하나님의 은혜로, 학생들의 희망을 받아 44명의 학생이 모여 전교에서 세 번째로 많은 학생이 모이는 부서가 되었어요. 인원이 많이 모인 덕분에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나눌 수 있게 된 점도 좋았지만, 교내에 44명의 학생들을 수용할 수 있는 장소가 없어서 외부 장소로 나가 활동할 수밖에 없게 된 점도 감사함으로 다가왔어요.”

“하지만 곧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들의 영혼을 섬기고 돌보는 이런 중요한 일을 부족한 나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를 고민하게 되었죠. 그렇게 고민하며 기도하던 중, 2009년 당시 어은중학교에 장학금을 제공했던 대덕 한빛교회가 생각났고, 2009년에 담임했던 학생 중, 그 교회 목사님의 자녀였던 학생이 있어, 그 학부모님을 통해 중고등부 사역 담당 목사님을 소개받을 수 있었어요. 그렇게 해서 이 지역의 학교를 놓고 기도한 대덕 한빛교회와 만날 수 있었어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대덕 한빛교회에서 모임 장소와 간식을 제공받으며 의욕적으로 모임을 시작했어요. 하지만 첫해에는 저도 경험이 없고, 교회도 경험이 없어서 체계적이지 못했어요. 또한 1학기 동안 토요일에 계발 활동이 다른 활동으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아 정기적으로 모이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어요. 그러던 중, 2010 기독교사대회 때 하나님의 은혜로 학교 사역의 대가인 서헌희 선생님의 선택 강의를 듣게 되었죠. 많은 노하우와 지혜를 배울 수 있었고, 2학기에는 규칙적으로 한 달에 두 번 계발 활동을 가지면서 복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어요.”

“사랑나눔반을 섬기면서 어려웠던 점은 규칙적이지 않았던 계발 활동 시간이었어요. 복음을 나누고 진정한 사랑으로 충만해져 학교와 가정에서 이 사랑을 나눌 수 있기를 원했지만, 연속적이지 않은 활동으로 흐름이 연결되지 않아, 단편적인 나눔으로 그치는 경우가 계속되었죠. 그래서 아침 7시 30분에 사랑나눔반 학생들 중 핵심 멤버들을 모아 일주일에 한 번 목요일마다 기도와 QT 시간을 가졌어요. 하지만 오히려 바쁜 일상을 핑계로 매일같이 훈련하지 않고, 일주일에 한 번씩만 모이기에 시간이 갈수록 점점 모임이 약해지고 힘들어졌어요. 또 하나의 어려웠던 점은 오히려 믿는 아이들이 예상보다 협조적이지 않은 점이었어요. 믿지 않는 학생들은 교회에서 제공하는 장소와 간식에 감사하며 협조적이었던 반면,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 아이들이 ‘이번 토요일에 또 교회로 이동하나요?’ 하며 투정하는 모습에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았었죠.”

“그래서 2011년에는 지난번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더 강하게 학생들과 성경 나눔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3월의 어느 날, 몇몇 학생들이 주일만이 아닌 주 중에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예배자로서의 삶을 살고 싶다고 제게 찾아온 거예요. 그 아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아, 이렇게 부족한 내게도 이런 귀한 아이들을 만나게 하시는 걸 보니, 나보다 하나님께서 더 다급하시고, 어은중학교를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깊은 감동을 받았어요. 그래서 더 의욕적으로 학원 복음화 사역을 했어요. 하나님의 은혜로 대덕 한빛교회에서도 중고등부 모든 교사의 협력이 이루어졌고 지금은 더 은혜로운 시간을 가지고 있는 중이예요. 작년엔 주 중에 한 번씩 모였던 QT 모임도, 주 중에 2회 수, 목요일 오후 3시 50분부터 4시 30분까지 정기적으로 모이고 있죠. 그중 목요일에는 대덕 한빛교회 담당 전도사님께서 들어오셔서 예배도 드리게 되었어요. 그리고 12월 23일 학교 축제 때에는 세상적인 문화로 가득한 축제 가운데, ‘사랑나눔반’의 이름으로 워십을 올리면서 아직 믿지 않는, 곧 믿어야 할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 하나님께 순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된 삶의 아름다움도 나눌 수 있게 되었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작년보다 더 나은, 자신감 있는 복음 사역을 할 수 있었어요.”

 

서른의 피를 수혈 받다 !

사실 박윤환 선생님은 학교 내 학원 복음화 사역 말고도, 대전 좋은교사 모임에서 수업친구만들기 모임, 인도 선교 모임 등 여러 핵심 사역을 하고 계신다. 게다가 교회에서도 청년부 리더로 다양한 사역을 하고 있다. 이렇게 영적인 일에 바쁘게 살고 있는 박윤환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떠오르는 단어는 역시 ‘회심’과 ‘소명’이다.

이 글을 읽는 좋은교사 선생님들은 누구나 다 두 번의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기독인으로서의 삶을 살게 된 ‘회심’의 지점, 또 다른 하나는 기독 교사로서 정체성을 알고 기독 교사의 삶을 살겠다고 결단한 ‘소명’의 지점이다. 박 선생님을 통해 나도 이 두 번의 상황을 다시 떠올려 본다. 나는 1995년 대학교 1학년 때 내수동 수양관에서 회심을 경험했고, 2006년 기독교사대회 때, 기독 교사의 소명을 받았다. 나는 과연 이 두 번의 사랑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가? 뜨거운 삶을 사는 사람을 만나다 보니, 나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좋은교사 선생님들도 2012년 박 선생님처럼 뜨거운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