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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징검다리 같은 삶을 살고 싶어요(2013.09)

어릴 적 동네 아주머니들과 친구들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마음을 갖게 해 주었어요. 저도 생활 속에서 복음을 자연스럽게 전하려고 노력합니다. 아이들이 나중에 신앙을 선택하는 순간에 저를 생각하면서 교회로 향하는, 징검다리가 되고 싶습니다.


 

 

포항 용흥초등학교 박미경 선생님

징검다리 같은 삶을 살고 싶어요

 

 

 

 

/ 사진·김정태

 

 

 

 

 

매년 여름방학마다 영덕 SU 어린이 캠프장에서는 23일 동안 100명이 넘는 아이들이 예배하며 물놀이 하면서 친구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캠프장에 찾아온 아이들을 먹이는 일 전부를 SU 교사들이 직접 하고 있었습니다. 영덕 어린이 캠프장에서 국자를 쥐고 아이들 먹이는 일을 책임져 온 박미경 선생님을 만나 보았습니다.

 

왕복 20리 길을 매일 걸어 다녔던 학교

저는 포항시 청하면에서 태어났어요. 청하면은 포항에서 가장 구석진 곳인데 그 청하면에서도 우리 마을은 제일 골짜기였어요. 지금도 버스가 아침과 오후에 한 번씩 밖에 다니지 않아요. 그래서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때까지 왕복 20리 길(8km)을 매일 걸어 다녔어요. 동네에서 대학에 가는 학생이, 특히 여학생은 전혀 없었어요. 중학교를 졸업하면 대부분 취업을 하거나 실업계로 진학했지요. 제 친구들 대부분이 그렇게 진학을 했는데 저는 중학교 때 만난 한 은사님(김현주 선생님)을 통해서 인문계고 진학의 꿈을 키우게 되었어요. 그 선생님은 실업계고 출신이셨는데 억척스럽게 직장 생활하면서 공부하여 대학 진학을 하고 교사가 된 분이셨어요. 저는 그분에게 도전을 받아 인문계인 포항여고로 진학을 하게 되었지요.

 

별 보며 등하교 했던 고교 자취 생활

고등학교 때부터 자취를 했어요. 지금은 운전하면 30분 만에 도착할 거리이지만 당시엔 청하면에서 포항 시내까지 가는 것이 쉽지 않았거든요. 우리 어머니는 여름철 풋고추를 내다 팔 때가 되면 제 자취방에 오셨어요. 죽도시장에 자리를 차지하려면 새벽에 나가야 하는데 보통 낮에 고추를 따서 저녁 늦게 와서 주무시고 새벽 일찍 일어나 죽도시장에 가서 파시는 거죠. 부지런한 아버님 덕분에 경제적으로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새벽 3~4시 정도면 이미 나가고 안 계시는 엄마의 자리를 보면 시장에 앉아 계시는 엄마의 모습이 계속 눈에 밟히는 거예요. 그렇게 벌어서 주시는 용돈이 너무 미안해서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생각했어요.

 

교회에 대한 따뜻한 기억

어릴 적 우리 마을 입구에 광장이란 넓은 터가 있었어요. 동네 아이들이 그곳에 늘상 모여 놀았는데 하루는 옆 동네 아주머니들이 오셔서 전도를 하셨어요. 친절한 아주머니들의 호의에 교회(칠포교회)에 따라가서 국수도 먹고 설교 말씀도 듣곤 했어요. 트럭의 짐칸에 앉아 돌아오는 길이면 산속의 짐승들이 내는 눈빛에 겁을 먹곤 했던 것이 기억나요. 워낙 험한 길이고 또 어른들이 교회를 싫어하셔서 계속 다닐 수는 없었지만, 그 기억 때문에 교회라는 곳이 참 좋고 편안하다는 생각이 제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것 같아요. 우연히도 지금 아버지는 그 칠포교회에 출석하고 계세요. 학교에서 사귀게 되는 친한 친구들 대부분도 예수 믿는 친구들이었어요. 고등학교 때도 친구들이 틈만 나면 부흥회나 전도 집회에 초대해서 잘 따라다녔어요. 학업 문제도 있고 또 주말에 부모님 집으로 가야 해서 지속적으로 교회에 출석하진 못했지만 항상 기독교에 대해서 좋은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공부하다 힘들거나 외로울 때면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는 잘 몰랐지만 제 안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조금씩 자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학 1학년,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믿게 된 것은 대학생 때부터입니다. 신입생 환영회 때 옆자리에 앉은 지금의 남편이 저에게 내기를 했어요. 어떤 친구가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소개할 때 제가 환호성을 크게 지르면 제 남편이 밥을 사준다고 했어요. 그래서 환호성을 크게 질렀죠. 다음 날 남편이 밥 사준다면서 저를 데리고 간 곳이 SU 동아리방이었어요. 그곳에 가니 한 선배가 저와 남편을 데리고 가서 밥을 사주셨어요. 그리고 그 선배님이 다음에 또 동아리방에 오면 밥을 사주겠다고 하기에 그 다음 날에도 또 찾아갔고, 그렇게 동아리방을 편하게 드나들다 입회 원서에 사인을 했어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도 1학년 때 SU(오각에서 ECM으로, 다시 SU로 명칭 변경) 모임을 통해서였어요. 하루는 체육과 행사가 있어서 참석하려 했는데 SU 조장 언니가 SU 전체 모임을 빠지면 안 된다고 꼭 참석하기를 요구했어요. 과모임에 가지 않으면 선배들이나 친구들에게 입장이 좀 난처해지는 상황이었는데 결국 SU 전체 모임을 선택해 참석했어요. 그날 모임을 마치고 제 방으로 돌아와 요한복음을 읽었는데, “너는 하늘에 있는 양식을 구하라라는 말씀을 읽는 순간 갑자기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왔던 제 삶이 보이면서 눈물이 터지는 거였어요. 그동안 저 스스로를 어떤 틀에 가두고 살아왔음을 인정하면서 하늘 양식을 구하는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그 자유함이란. 그 밤은 제 인생에 정말 새로운 길이 열린 순간이었지요. 밤새 눈물 흘리고 감격하면서 아침을 맞았던 기억이 나요. 마르지 않는 생수를 발견한 우물가의 여인의 마음을 조금은 알 수 있었어요. 그 이후 저는 누가 SU모임으로 권유하지 않아도 스스로 고정적으로 참석하는 핵심 멤버가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SU는 제 대학 생활의 중심이었어요. 지금도 그 전통이 남아 그렇게 하는데 매일 아침 모여서 큐티와 기도회를 하고 하루를 시작해요. 점심 후에 동아리방에 와서 함께 찬양하고 저녁에는 조별 모임을 하거나 일대일 양육, 전체 모임을 갖고요. 금요일은 잠포지움(잠을 포기한 심포지움)이라고 해서 교회를 빌려 밤새 기도(?) 하기도 하구요.

대학 1학년 때부터 수련회, 농어촌 캠프 등에도 따라 다녔어요. 그때 수련회는 정말 빡셌는데요. 월요일에서 토요일,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성경 전체 속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강의를 듣는 수련회였어요. 백암산 기도원에서 직접 밥을 해 먹어 가면서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강의를 들으며, 세상이 열리는 것 같은 깨달음의 기쁨을 누렸어요. 정말 길가의 꽃처럼 웃을 수 있는 변화가 당시 제게 찾아 왔어요. 그러니 지금의 저를 형성한 것은 대학 시절 SU였다고 말할 수 있어요.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어요. 그때 말씀을 전하신 목사님께 나중에 주례도 부탁드렸어요.

 

다정다감한 남편과 SU에 푹 빠졌던 대학 시절

대학 생활을 이야기할 때 제 남편과 SU를 빼고는 대학 생활을 이야기할 수 없어요. 남편과는 같은 과 친구였어요. 거기에 같은 기독동아리 활동도 함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로의 삶에 스며들었어요. 공식적으로 사귀기 시작한 것은 1학년 때 남편이 병영 훈련(RNTC)에 갈 때였어요. 그때 환송회 후에 남편이 조용히 제게 부탁을 하면서 고백했어요. 병영 훈련 기간 동안 매일 제 편지를 받고 싶다고 말이에요. 그래서 병영 기간 동안 편지 쓰고, 부치고, 편지지 사러 가고 그게 일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단 한 번도 좋아한다, 사귀자 그런 식으로 교제하지는 않았어요. 그냥 옆에 있는 것이 좋았어요.

 

매일 밤 울었던 신규 교사 시절

경북 울진 벽지에서 정말 힘든 초임 시절을 경험했습니다. 제가 초임 발령 나고 선배 교사들 앞에서 수업을 공개해야 했어요. 그래서 멋진 연극 수업을 계획했지요. 의기양양하게 수업을 마쳤는데, 수업 반성회 후에 교감 선생님이 저를 따로 부르셨어요. “박 선생! 한 아이에게 같은 질문을 두 번씩이나 하는 이유가 뭐였나?”라는 질문부터 시작해서 칭찬이나 격려 한 마디도 없이 판서 위치와 글씨 등등을 지적하면서 제 기를 확 죽이는 거였어요. 그때를 시작으로 저의 고단한 신규 시절이 시작되었어요.

어느 날은 한 학부모가 반 아이들 중에 힘든 아이의 급식비를 대신 내주고 싶다며 한명 추천해 달라고 해서 순수한 마음으로 추천했는데 나중에 그 학부모가 사석에서 교감 선생님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했더군요. 교감 선생님이 저를 부르시더니 관리자와 일절 상의 없이 그런 일을 담임교사가 독단적으로 처리하는 게 어디 있냐면서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모습으로 저를 심히 꾸짖고 분노를 폭발하셨어요. 저는 제 행동이 그렇게까지 교감 선생님의 분노를 폭발하게 하는 심각한 위법 사항인 줄 몰랐어요. 그 일로 모든 교사들이 교무실로 소집되고 제 행동에 대한 인민재판 수준의 비난을 당했어요. 그렇게 첫 근무 학교에 있는 동안 퇴근 후 자취방에서 거의 매일 밤 울었어요.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직원 여행 문화였어요. 여행지에 가서 1박을 하거나 밤늦게까지 회식 자리를 갖게 되면 처녀 교사들이 교장, 교감 선생님에게 술을 따라 드리고 춤을 추는 등 여흥을 돋우는 역할을 해야 하는 분위기였어요. 그런데 저는 일절 거기에 참여하지 않았어요. 그러자 선배 여교사가 저를 부르더니 너는 뭐가 그리 잘났고 고귀하냐?” 하면서 함께 어울리지 못하는 저를 비난하셨어요. 다른 지역은 잘 모르겠는데 90년대 초반까지 학교 교직원 문화가 그랬어요. 아마 지금의 젊은 교사들은 상상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 모든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제게 힘이 되었던 사람은 저와 같은 신규 교사로 고생하던 제 남편이었어요. 매일 울면서 통화하고 그러면서 위로 받았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힘 주시는 것을 느끼며 다음 날 새로운 마음으로 출근했지요. 겨우겨우 버텼던 것 같아요. 하지만 첫 근무지였던 울진에서 순수하고, 선생님을 좋아해 준 고마운 아이들을 만났어요. 아이들 중에 불우하고 가정이 어려운 아이들도 많았어요. 기억에 남은 한 남학생이 있는데 그 아이는 도벽이 심한 아이였어요. 저금이나 급식비를 훔치는 일이 잦았죠. 그 아이의 집을 방문해서 알아보니 무너져 가는 사글세방에 형이랑 둘이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배를 타고 멀리 고기를 잡으러 가셔서 한참 동안 집에 오시지 않는 겁니다. 그 아이는 아버지가 주신 돈이 떨어지면 물건이나 돈을 훔치는 거였어요. 그래서 반찬을 해 주거나 옷을 구해 갖다 주곤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더 잘해줄 수 있었는데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선배 선생님들의 그 아이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나 그 아이를 처벌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이 정도의 친절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스스로를 괜찮은 교사라 생각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부끄럽고 미안해요.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 알았다면 그 아이를 보다 깊이 있게 돌봐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많아요.

 

생각만큼 쉽지 않았던 좌충우돌 결혼 생활

초임 교사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결혼을 빨리 하고 싶었어요. 양가에 어서 결혼시켜달라고 떼를 썼고 결국 남편이 24, 제가 25살 때 결혼을 하게 되었어요. 첫 아이를 가질 때까지 3년의 신혼 생활은 정말 행복했어요. 그러다 아기가 태어나면서부터 경산에 계시던 시부모님이 울진으로 오셔서 같은 아파트에 살게 되었어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시부모님과 같이 사는 것이 제 생각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뼛속 깊이 경험으로 알게 되었지요. 그러던 중 남편이 큰 교통사고를 냈어요. 알뜰살뜰 시부모님 생활비를 드리며 살던 중에 남편의 과실로 인한 사고라 신혼 때부터 모아온 적금을 몽땅 피해자 측에 합의금으로 주게 되었지요. 남편이 저에게 너무나 미안해했어요. 그 적금이 어떻게 모은 돈인지 잘 알기 때문에 더 그랬지요.

하지만 저는 그 순간에도 감사할 수 있었어요. 사고가 난 날, 남편의 동료 선생님이 전화를 주셨는데 교통사고가 났다고, 놀라지 말고 후포경찰서로 오라는 거였어요. 경찰서까지 가는 10여 분 동안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는지 몰라요. 처음에는 제 남편에게 큰일이 났을까 겁이 났어요. 남편이 크게 다쳤을까봐 걱정이 되는 거예요. 떨리는 마음으로 경찰서에 들어서니 제 남편이 건강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어요. 그래서 남편이 건강하니 이제는 그 어떤 일도 다 감당할 수 있겠다는 평온함이 생기더군요.

집으로 돌아와 남편과 함께 밤새워 기도하면서 서로를 위로했어요. 힘든 일을 겪으면서 오히려 저희 부부 사이가 더 돈독해졌어요. 그 일 외에도 다른 경제적인 어려움이 늘상 우리 부부를 힘들게 했지만 지금까지 남편과 함께 기도하면서 견딜 수 있었어요. 그리고 결혼 초에 전혀 믿음이 없으시던 시부모님은 지금 울진에서 집사님이 되셔서 교회와 마을 주민들을 너무나 아름답게 섬기는 분들로 변화 되셨어요.

 

20년 방학 생활의 중심, SU 어린이 캠프

저에게 SUT는 힘든 일이 있어도 어떤 일도 주저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이죠. 제 안에 소명의 불길이 잦아들 때, 세상의 가치관이 저를 흔들 때, 그런 저를 다시 세워주는 역할을 하는 곳이 SUT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승진과 재테크와 온갖 행복하게 사는 이야기를 할 때 SUT 선생님들은 세상을 거꾸로 살아가는용기와 도전을 주세요.

대학생 때부터 늘상 SU 일을 우선에 두고 참여하다 보니 결혼, 출산, 양육 등 많은 것들을 함께 공유하고 살았어요. 2세대인 자녀들도 또래들이 많아 친형제자매들처럼 사이좋게 지내고 있고요. 우리 집 아이들은 정말 많은 이모와 삼촌들이 있어요. 교대 SU와는 캠프, 연합 예배, 선후배 체육대회 등 여러 경로를 통해 만나다 보니 20여 년 어린 후배들과도 친하게 지내고 있어요.

SUT는 제가 가진 달란트가 무엇인지 확실히 자리매김을 해주었어요. 캠프에서는 연극을 통해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초창기부터 연극을 참 많이 했지요. 삼손을 유혹한 드릴라, 이집트 여왕 등, 정말 재미있었고 신난 일이었어요. 나중에는 서울지부 캠프의 연극 스텝으로 참여할 정도로 캠프 연극에 재미를 들였지요. 또 보통 34, 100여 명 정도의 캠프를 하는데 몇 년 전부터는 직접 밥을 해야 하는 일이 생겼어요. 식단을 짜고, 시장을 봐서 조리하는 과정까지 맡게 되었는데 그게 또 그렇게 신나는 일이더라고요. 7인승 차에 두 사람만 겨우 탈 정도로 시장을 봐서 식사 준비를 하는데 육체적으로는 힘들지만 마음은 참 뿌듯한 일이었어요. 우리 아이들에게 식당 음식이 아닌 엄마 마음으로 만든 좋은 음식을 먹인다는 자부심이라고 할까요?

SUT를 이야기하면 캠프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네요. 20년 가까이 방학의 최우선 스케줄이었어요. 캠프 사역을 처음 할 때는 캠프장까지 밥그릇, 국그릇을 둘러매고 시외버스를 타고 가서 다시 시내버스로 갈아타는 고생을 했었어요. 조금 형편이 나아지면서부터는 트럭에 집기를 싣고 아이들을 위해 전세 버스를 대절해 다녔지요. 그러다 캠프장을 가지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고 마침내 캠프장을 갖게 되었어요. 캠프장이 생긴 후 가장 행복했던 건 더 이상 캠프 가기 전에 짐을 싸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 캠프 끝난 후 짐을 다시 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어요. 이제는 많은 역할을 교대 후배들이 하고 있지만 여전히 SUT 캠프는 여전히 제 방학 생활의 중심이지요.

 

학생들이 자라서 신앙을 결정할 순간에 생각나는 선생님이고 싶어요

제가 자식을 둘 키우다 보니 많은 교사들을 경험하게 되더군요. 아이들의 입으로 아이 선생님의 모습을 전달 받으면서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교사로서의 제 모습을 성찰하게 되었어요. 아이들이 필요로 할 때 교사들이 생각보다 친절한 말이나 인정하는 말을 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어요. 어느 날 제 큰 아이가 선생님과의 관계가 힘들어 학교 가기 싫다며 운 적이 있었어요. 그런 일을 겪으면서 아이에게 좋은 선생님은 어떤 분인가?’ 다시 생각하게 되었지요. 아이들의 말을 들어주는 교사, 수긍해주는 교사가 필요한 거였어요.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특별한 존재로 인정받고 사랑받아야 하는데 그냥 뭔가 잘해야지 인정받는 존재라면 못하는 아이는 설 자리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가정방문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가정에서 아이가 밥 먹고 눕는 자리에서 부모님과 눈을 마주하고 아이를 만난 후에는 학교에서 절대 그 아이를 함부로 대할 수가 없지요. 아이들이 저를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고요. 가정방문을 한 해와 하지 못한 해는 아이들과의 친밀도가 정말 차이가 나는 걸 느껴요.

그리고 아이들이 학교에 올 때 교사 때문에 발걸음이 무거워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해요. 우리 교사들도 교장 선생님이 억압적이지 않고 교사들의 수고에 애쓴다고 말씀만 해 주셔도 힘든 일을 견딜 수 있어요. 그런데 나름 잘하려고 하는 데도 마음에 안 들어 하거나 그 수고에 고마움을 표현할 줄 모르는 관리자 분들을 만나면 교사들은 정말 힘들어지잖아요? 아이들도 자기 나름대로는 열심히 하고 있는데 교사가 과하게 욕심을 부리면 아이들의 자신감도 떨어질 뿐더러 교사에 대한 신뢰감도 낮아지는 것 같아요. 우리 선생님이 우리에게 행복을 주려고 노력하신다는 것을 아이들이 알고 그것에 고마워하는 눈빛을 서로 교환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제가 과거에는 정말 욕심이 많아서 어떤 대회에 나가면 반드시 상을 타야 직성이 풀리곤 했어요. 10, 12시까지 아이들을 데리고 훈련을 시키고 옆 반과 비교하며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하면서 살아왔어요. 많은 엄마들이 저를 꼼꼼한 선생님이라고 말했어요. 채점하고, 체크하고, 불러내어 고치게 하고, 검사하고, 남기고. 그런 걸 책임감 있는 교사라고 생각하면서 정말 열심히 했지요.

하지만 제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서 제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지요. 처녀 교사 때는 빈틈없이 완벽한 엄마 모습이 당연하고, 숙제나 준비물을 챙기지 못하는 엄마들을 아주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가 학부모가 되어 보니 교사인 제가 아이의 숙제와 준비물을 놓치더군요. 그러면서 엄마들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많이 너그러워졌죠. ‘학교가 아이들의 삶인데, 내가 아이들의 삶을 고단하게 만들었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정상적인 아이들은 20분에 한 번씩은 웃어야 된대요. 그래서 지금은 수업 중에 한 번씩 아이들을 웃게 하려고 많이 노력해요. 아이들의 즐거운 초등학교 생활을 위해 학급 캠프, 영화 같이 보기, 선생님 집 초청하기 등의 특별한 경험을 통해 학생들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려 해요.

제가 어릴 적에 옆 동네 아주머니들과 중고교 시절에 만난 친구들이 자연스럽게 교회는 좋은 곳이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마음을 갖게 해 주었어요. 그래서 제가 경험했던 것처럼 생활 속에서 복음을 자연스럽게 전하려고 노력합니다. 캠프 등을 통한 특별 활동 속에서, 교과 속에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된 것 등을 이야기하며 아이들이 하나님을 가까이 만나기를 기도하고 있지요. 그래서 이들이 나중에 신앙을 선택할 순간이 올 때, 어릴 적 박미경 선생님을 생각하고 그들의 발걸음이 교회로 향할 수 있게 하는, 징검다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경북 지역에서 기독교적인 학교를 꿈꾸며

나이가 들어 거의 할머니 교사가 되더라도 학기 초, 담임교사 발표 때 제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교사가 되고 싶어요. 그리고 지금은 주중에 SU 캠프장을 관리할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시설 관리에 부족한 게 많은데, 지금 당장은 어렵지만 제 아이들이 커서 대학에 가고 나면 SUT 사람들과 같이 캠프장 근처에 집을 짓고 캠프장 관리 집사가 되자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요. 캠프장 근처에 있는 학교에 출근하면서 반 아이들을 데려 와 캠프를 여는 것도 생각하고요. 또 특별히 요즘 대안학교 이야기도 하는데 하나님께서 그쪽으로 이끄시는 것 같아요. 다른 지역에는 좋은 학교들이 많지만 경북은 지역적으로 낙후한 부분이 많아요. 그래서 우리가 하고 싶은 교육을 할 수 있는 학교를 한번 해 보고 싶어요. 기독교적인 학교를 자라는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바람이 있어요.

 

인터뷰 후에 박 선생님이 대학생 때부터 그렇게 좋아했던 첫사랑이자 지금은 남편인 배대순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맺어진 두 분을 보면서 처음에는 SU를 통해 두 분이 만나 가정을 세우게 되었지만 두 분의 사랑과 협력으로 인해 이제는 수많은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그 복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났을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두 분을 통해 참 많은 열매를 만들어 내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으로 인한 또 어떤 좋은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