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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평범하게, 가장 비범하게(정병오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상임공동대표_2018.5)

 

 

가장 평범하게,

가장 비범하게

 

 

정병오(기독교윤리실천운동 상임공동대표)

우리에게 JBO라는 별칭으로 친숙한 정병오 선생님. 선생님은 서울 공립형 대안학교인 오딧세이학교에서 근무하면서,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상임공동대표로서 교회와 사회를 새롭게 하는 시민운동가로서도 힘을 다해 살고 있다.

 

 

인터뷰 ·사진 한성준, 조창완

 

한반도에 새로이 평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훨씬 빨리 오기 시작한 새로운 평화의 시대 속에 우리 기독교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질문이 생겼다. 우리 사회에 한편에는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닌, 세상이 교회를 걱정해 주는 참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이에 우리 기독교사들은 어떤 삶을 지향해야 하는 것일까?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특히 새로운 평화의 시대 속에 우린 어떤 지향을 가지고 살아야 할지, 누군가 속 시원하게 대답해 주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답을 해 줄 수 있는 분이 의외로 우리 가까운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바로 정병오 기윤실 공동대표님. JBO, 정병오 선생님을 교사가 아닌 시민운동가로서 만나 보기로 했다.

 

선생님, 요즘 좋은교사읽고 계신가요? 사무실 소식에 매월 JBO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인정하시기 어렵겠지만 김영식, 김정태 공동대표 출범 후 적폐청산 TF를 운영하고 있는데 적폐의 끝점에 JBO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구심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웃음)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웃음) , 그런가요! 저는 좋은교사운동 임기를 마치고 건강한 평회원, 건강한 평교사로서의 삶을 살고 있어요. 대표 임기를 마치고 평회원으로 돌아와 현장에서 좋은교사운동 회원답게 살아내는 삶의 모습을 우리 회원들에게 다시 보여 주는 것도 의미 있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올해로 4년째 서울시교육청이 운영하는 1년 과정의 공립형 대안학교인 오디세이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단계에 있는 학생들에게 1년 동안 입시 공부를 벗어나 자신을 돌아보고 세상을 탐색하고 미래를 설계해 보는 시간을 주는 학교죠. 우리 교육의 고질병인 입시 경쟁 구조를 완전히 바꿀 수가 없다면, 그 속에 살아가는 아이들이 입시 경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입시 경쟁 구조와 공부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그 가운데서 주체적으로 자기 삶을 설계해 나갈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길러주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민간 대안학교와 공립학교 선생님들이 협력해서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는데, 민간 대안학교들을 통해 교육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고 공교육이 나아갈 방향을 설계해 볼 수 있어 감사하게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학교 밖에서는 기윤실 공동대표로 2년째 일하고 있습니다. 기윤실은 손봉호, 이만열, 김인수 등 존경하는 믿음의 선배들이 30년 이상 헌신해 온 귀한 단체이기에 제가 대표를 맡기에는 역부족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제 나이가 50대라 어린 나이가 아니고 또 좋은교사운동을 통해 훈련된 부분도 있고 해서 기윤실이라는 한국교회의 소중한 자산이 다음 세대로 잘 이어지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저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맡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윤실과 기윤실교사모임의 관계를 모르실 것 같아요. 두 단체에서 모두 대표를 하셨으니까 간단히 두 단체를 소개해 주세요.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1987년 서울대 기독교수 성경 공부 모임이 모태가 되어 시작되었어요. 그 때가 제가 대학 4학년 때였는데, 그 시기는 전두환 군부독재 상황에서 복음주의 학생들의 고민이 많을 때였어요. 그 때 손봉호 교수님을 비롯한 기독 지성인들이 검소, 절제, 정직 등 건강한 개인 윤리에 기반을 두면서도 교회 개혁과 사회 정의까지 아우르는 기독시민운동을 시작함으로 젊은 기독인들에게 희망을 주었죠. 그 때 기윤실이 의사, 법률가, 건축인 등 각 직종별 전문가들을 묶어 각 분야별로 정직운동을 펼쳤어요. 이러한 전문 직종별 정직운동의 일환으로 기윤실에 소속되어 있던 교사들을 불러 모아 기윤실교사모임을 시작한 거죠. 그래서 처음에는 촌지 안 받기 같은 기윤실 본부가 요구하는 정직운동을 주로 하다가 수업, 생활지도, 학급 운영, 교육 정책까지 다양한 영역으로 관심을 넓혔죠.

 

선생님께서 공동대표로 있는 기윤실의 주요 사역에 대해 소개해 주세요. 시민운동가로서의 정병오는 모르는 분이 훨씬 많을 것 같습니다.

기윤실 초창기부터 검소, 절제, 나눔을 통한 이웃 사랑과 환경 보호, 개인과 직장, 사회 모든 영역에서의 정직과 정의 실현, 교회 재정 투명성과 세습 반대 등 세상의 신뢰를 받는 교회 만들기, 음란·폭력 문화 추방을 통한 가정과 청소년 보호 등의 운동을 펼쳐 왔습니다. 그 가운데 스포츠신문의 음란물 추방 운동은 거대 언론과 싸워 이긴 운동으로 한국 시민운동사에 남는 운동이었고, 공명선거운동도 부정선거를 제도적으로 상당히 개선한 운동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러한 운동을 기본적으로 이어받아 자발적 불편운동’, ‘교회 신뢰운동’, ‘좋은사회운동’, ‘바른가치운동’, ‘청년운동5개 분야로 나누어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특히 2018년도에는 청년부채 zero’, ‘목회자를 위한 세상 읽기 뉴스레터등의 사역도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교회나 사회의 이슈에 대해서는 이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대응을 하고 있고요.

 

기윤실에서는 자발적 불편운동, 교회 세습 반대운동 등을 통해 우리 사회와 교회를 새롭게 하려는 노력들을 계속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두 실천 운동의 취지와 성과 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기윤실은 초기부터 검소, 절제, 나눔을 핵심 가치로 붙들고 실천 운동을 펼쳐 왔습니다. 이를 위해 개인의 삶에서 최대한 소비를 절제하는 것은 물론이고 교회도 화려한 건물이나 치장을 하지 않기,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작은 차 타기, 유산 남기지 않기 등의 운동을 해 왔습니다. 이를 통해 이웃과 약자를 돕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한 노력을 해 온 것이죠. 이러한 실천을 체계화해서 자발적 불편운동으로 정리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해 왔던 실천들을 실천 목록으로 만들어 개인과 교회에 월별로 제시를 하고 있고, 개인이나 가정, 교회의 상황에 맞게 자발적 불편을 통해 이웃과 약자를 돕는 일을 하자는 운동을 펼쳐 오고 있습니다.

교회 세습은 2000년도 이전에도 있었지만 예외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2001년 광림교회 세습을 기점으로 중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세습이 급속도로 늘어나 거의 한국교회의 대세로 자리를 잡고 있는 상황입니다. 기윤실은 광림교회 세습 때부터 이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반대운동을 펼쳐 왔습니다. 하지만 저희의 반대 운동에도 불구하고 세습은 계속 늘어나 무력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몇몇 교단을 중심으로 세습금지법이 제정되기도 했고, 이번 명성교회 세습 국면에서 범교회적인 저항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세습은 안 된다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는 듯합니다.

 

한반도에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평화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기윤실에서 얼마 전에 한반도 평화, 청년의 온도라는 제목으로 청년포럼을 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반도 평화에 대해 청년들이 느끼는 온도는 어떠했나요?

기존 세대는 통일을 당위로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통일하지 말자고 하면 아주 나쁜 놈이 되는 거지요. 그런데 요즘 젊은 세대들은 통일을 이해관계로 받아들여요. 얼마 전에 있었던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구성에 있어 공정성 논란이 있었지요. 어른들은 평화 통일이라는 이 중요한 시대적 문제 앞에서 주전 선수로 나가지 못하는 몇 명이 그렇게 중요하냐는 식으로 말할 수 있지요. 그러나 청년들의 입장에서는 안 그래도 취업난과 취업 비리, 금수저와 흙수저의 차별, 대학 서열화 등 불공정한 사회 구조 속에서 통일이라는 먼 이야기보다 사회적 차별이 해소되고 좋은 일자리가 많이 생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청년들이 통일을 하면 많은 비용이 드니까 통일 하지 말자고 하면 이를 비난하지 말고 차분하게 현재의 분단 비용과 통일 비용을 비교해 주고, 또 통일로 인한 유익에 대해 토론을 해 보는 것이죠. 통일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 하는 청년들을 향해서는 분단이라는 현 상황이 청년들에게 실제로 어떤 제약을 가하고 있고 어떤 걸림돌이 되고 있는지를 잘 설명해 주는 것이 필요한 것 같아요.

더 중요한 것은 다음 세대에게 공부해서 남 주냐? 너 좋으라고 공부하라는 거야.”는 식의 가르침을 중단해야 합니다. 평소에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 공부를 강조해 놓고 북한 주민과 민족적 대의를 위해 희생하라고 하면 먹히지 않는 거죠. 통일 문제뿐 아니라 모든 교육에서 이웃과 약자를 위한 섬김과 나눔의 교육을 제대로 해야 하는 거죠. 그리고 먼 북한 주민이 아니라 내 주변의 나와 다른 친구들, 다양한 약점을 가진 친구들을 돌보고, 여러 갈등들을 평화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교육을 해 나가야죠. 그 바탕 위에서 통일 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한반도 평화 문제도 그렇고 요즘 일부 교회에서는 막말 수준의 가짜 뉴스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여러 모로 한국교회가 위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아무래도 분단이라는 상황과 한국전쟁의 경험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북한에 공산정부가 들어서면서 기독교를 탄압했고, 이 탄압을 피해 남한으로 온 기독교인들이 한국교회의 주류를 형성하면서 한국교회 가운데 반공 의식이 강하게 형성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한국교회 내에 있는 반공 의식을 독재정권이 이용한 것이죠. 독재정권은 자신들의 독재를 합리화하기 위해 반공을 강하게 내걸었고, 기독교를 협조자로 끌어들였던 것이죠. 한국교회가 반공을 지지할 수는 있지만 반공과 독재는 구분해서 독재와 인권 탄압에 대해서는 선지자적인 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보수 기독교는 정교 분리라는 명목으로 침묵함으로 이를 지지한 것이죠.

독재시대가 끝나고 민주정부가 들어서면서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자 독재시대 기득권을 누렸던 세력들이 반공을 고리로 기독교를 행동대원으로 동원하기 시작한 것이죠. 여기에 일부 대형교회 목사님들과 뉴라이트운동 세력들이 연결고리가 된 것이고요. 이들은 반공 이외에도 보수 기독교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몇 가지 가치들을 결합시켜 정치적으로 이용을 했고, 수많은 가짜뉴스들이 강단의 설교와 장로님, 권사님들의 카톡을 통해 퍼져 나가면서 반역사적이고 시대착오적인, 때로는 거짓과 불법에 동원되는 어리석음을 범해 온 것이죠. 당연히 이런 움직임으로 인해 교회는 사회와 지성인, 젊은이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고요.

한국전쟁이 남긴 깊은 상처를 생각할 때 기독교인들이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봐요. 하지만 과도하게 북한에 대한 미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 북한이 예외일 수는 없잖아요? 소련과 동구 공산권을 무너뜨리고 중국을 비롯한 다른 공산권들을 개방시킨 하나님께서 북한의 공산정권을 무너뜨리거나 개방시키는 것을 못 하시겠어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북한을 보고 때로 돕고 때로 그들을 평화와 개방으로 유도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그 어떤 이념도 절대시하지 말아야 하죠. 하나님만 절대 진리와 선이고, 나머지는 다 상대적으로 봐야 하거든요. 그런데 지금 많은 기독교인들이 특정 이념을 신앙 위에 올려놓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념이 맞지 않는다고 미워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이념만 맞으면 그 외 모든 다른 나쁜 것들도 다 합리화하고 받아들이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거든요. 교인들의 카톡을 통해 유포되는 내용들이 정말 그러한가 사실 관계를 확인하지 않고, 내가 싫어하는 정치 진영을 비방하는 내용이면 무조건 퍼 나르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할 일이 아니죠? 정말 회개해야 할 일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념에 사로잡혀 기독교 신앙을 특정 이념의 하위 요소로, 특정 이념 집단의 행동대원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흐름이 쉽게 고쳐질 것 같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한국교회는 향후 10, 20년 동안 사회로부터 더 외면당하고 약화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흐름을 반전시킬 새로운 흐름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젊은 세대는 이념으로부터는 비교적 자유롭지만 불안의 영에 눌려 있거나 탐욕의 영에 사로잡혀 있어, 복음의 능력들이 자신을 넘어 이웃과 세상을 향한 섬김과 변혁의 에너지로 잘 모아지지가 않는 것이죠.

제가 기윤실 대표직을 수행하면서 제일 관심을 갖고 있는 부분도 지금 우리 시대 젊은이들이 갖고 있는 아픔들에 대해 복음의 능력으로 대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리더십을 길러 내고 흐름을 만들어 내는 일입니다. 길이 잘 보이지는 않지만 복음의 능력을 믿고 최선을 다해 보는 거죠.

 

교회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점점 낮아지는 시점에서 기독교사들은 어떤 사회적 책임을 다하며 살아야 할지 고민이 많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기독교사운동에 헌신해 오면서도 교회 개혁이나 세상 변혁에 대한 끈을 함께 붙들고 오셨는데, 벅차지는 않나요?

저에게 있어서 기독인으로 사는 것과 기독교사로 사는 것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기독인으로 경건을 훈련하고, 가정에서 주어진 책임을 다하며, 건강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흐름 가운데 기독교사로서의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기독인의 삶 없이 균형 잡힌 기독교사의 삶은 불가능한 것이죠.

대학 4학년 때 어떻게 살지를 고민하다가 생계에 얽매이지 않고 온전히 나를 주님께 바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어요. 구체적인 것은 아니지만 가톨릭의 수사 같은 삶이나 선교사 혹은 풀타임 사회운동가 등을 생각했던 것이겠지요. 취업이나 결혼에 매여 사는 삶이 아닌 온전히 예수를 위해 나를 불사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한 선배가 네가 직장을 갖지 않더라도 밥은 먹어야 할 텐데 그 돈은 직장에서 힘겹게 일한 사람의 후원에서 나오는 거야. 네가 결혼을 하지 않아도 네 삶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그 사람들과 얽혀서 살 수밖에 없어. 네가 세상을 떠나 고고히 사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세상과 엮여 살게 되어 있는 거야.”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사는 것이 세상을 떠나 사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 거죠. 오히려 직장에 취업해 땀 흘려 돈을 벌고, 그 돈으로 가족을 부양하며 이웃에게 나눠주며, 세상의 여러 부조리들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일부 타협하고 누더기가 되더라도 그 속에서 경건을 추구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결혼해서 한 아내의 남편이자 아이들의 아버지로서 온갖 자질구레한 집안일과 시시콜콜한 일상을 온몸으로 살아내면서 그 가운데서 가장 가까운 사람을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같은 차원에서 가장 평범한 교회의 한 지체로서 내 은사를 따른 섬김을 통해 교회를 세워 나가며,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까 세상을 떠나는 수도원적 거룩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서 가장 평범한 삶을 제대로 살아냄을 통해 그리스도의 비범을 이루어 가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이런 생각의 기초가 있었기에 이 기초 위에서 내가 속한 학급의 한 아이, 매 시간의 수업, 학교의 구체적인 일을 통해 기독교사로서의 탁월성을 드러내고 싶었고, 그 연장선에서 기독교사운동에도 헌신을 한 것이죠. 반대로 좋은교사운동 대표를 그만둔 이후 평회원, 평교사의 삶으로 돌아가는 일에 있어서도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물론 한 사람이 모든 영역을 다 잘할 수는 없습니다. 생의 주기나 주어진 역할에 따라 어떤 일에 더 집중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 일을 열심히 하기 때문에 다른 일에 예외가 주어질 수는 없는 법이죠. 좋은 기독교사라고 해서 좋은 남편, 아버지의 역할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늘 힘들고 벅차지만 그래도 이 길이 맞다고 생각하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의지하고 허우적대고 겨우겨우 살아오지만 그래도 온전함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죠.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이번 기독교사대회의 슬로건이 떠올랐습니다. ‘교육을 새롭게 하는 예수!’ 예수님께서 교육, 교회, 사회 모두를 한 번에 새롭게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웃음) 교육-교회-사회, 이 세 영역에서 우리 기독교사들이 영역별로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좋은교사운동을 하면서 양심적으로 제게 많이 질문했습니다. 우리 운동이 제 3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우리나라 교육에 도움이 되고 있는지 자주 물었어요. 가령 학교에서 기독교사들이 술도 안 먹고, 자기들끼리 신우회도 하고, 일찍 퇴근하고, 일찍 퇴근해서는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하는 것이 학교에 어떤 의미가 있냐 하는 것이죠. 우리가 우리 논리에만 갇혀서는 안 되고 학교든 한국교육이든 실제적으로 필요한 운동,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죠.

예전에 다른 단체 선생님이 우리 모임을 보면서 인간의 정의감에서 출발한 운동은 불처럼 올랐다가도 쭉 내려오는 상하 기복이 심한데 너희들의 운동은 은근하면서도 지속적인 영향력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복음의 생명력만이 우리 운동을 지속적으로 끌고 갈 수 있다고 봐요. 예수의 생명력이라는 게 결국 사람을 사랑하는 힘인데 우리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지속적으로 학교와 한국교육을 섬기는 것이 필요하다고 봐요. 학교에서는 어려운 일, 남들 하기 싫은 일을 하면 대가를 주잖아요. 그러나 우리는 대가를 주지 않더라도 복음의 생명력으로 지속적으로 이웃을 섬겨서 학교 교육활동에 기여를 해야 하는 거죠.

사회 영역에서도 우리가 예수의 생명력 위에 중심을 잡고 한쪽 이념으로 쏠리거나 편파적인 되어서는 안 되는 거죠. 복음의 능력이라는 게 약자를 보듬는 힘, 불의에 대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힘,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해요. 사회적 관행이 하나님 앞에서 맞는지 계속 물어볼 수 있어야 하는 거죠. 사회적 문제에 대해 과연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인가 물으면서 비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하는 거죠. 그러면서 자신이 해야 할 역할들에 대해서는 은근하게 지속적으로 실천해 가고, 실천의 결과들에 대해서는 자기의 몫으로 여기지 않고 항상 겸손해 하는 것이 필요해요. 약자의 편에 먼저 서서 기독 시민으로서의 역할도 다해 갔으면 좋겠어요.

교회를 새롭게 하는 일이 제일 어려운 부분인 것 같아요. 왜냐하면 교회는 목회자 중심으로 돌아가는 구조이고, 교회에서는 말없이 봉사하는 걸 선행으로 생각하고 비판하는 말을 하는 것을 수용해 주는 분위기가 아니죠. 그러나 섬김의 도를 실천하면서도 비판적 목소리를 내야 해요. 비판적 목소리라는 게 부정적이고 헐뜯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나머지는 모두 상대화하면서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온유하게 말하고 무례해서는 안 되겠지만 목사님이든 장로님이든 하나님 앞에서는 상대화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이런 다소 불편한 존재로 사는 것이 학교나 세상에서는 그래도 신선한 존재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교회에서는 이게 참 쉽지 않은 일이죠. 그러더라도 말없이 순종만 하거나 거꾸로 비판만 하고 섬기지 않는 것은 생명력 있는 기독교인이라 말할 수 없죠.

기독교사대회 후에 여러 일이 있었어요. 98 기독교사대회 때 있었던 일인데요. 아는 교회 목사님한테 테이프를 복사하는 기계를 빌린 적이 있었어요. 저녁 설교 말씀을 녹음한 테이프를 복사해서 대회 참석자들에게 나눠 주려고 했던 거죠. 그런데 한 번에 테이프를 많이 복사하다 보니 이 기계가 고장이 난 거예요. 그래서 대회가 끝나고 변상도 하고, 죄송하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목사님께서 크게 화를 내시더라고요. 그런데 2, 3주 후에 목사님이 다시 전화를 한 거예요. 화를 내서 미안하고 그 대회에 우리 교회 성도들도 다녀왔는데 그렇게 안 변하던 사람들이 새 사람이 되어서 왔다고 고맙다고 하시더라고요.

교육을 새롭게 한다는 것이 대회를 참여한 사람들의 삶을 구체적이고도 총체적으로 바꾸어 내는 것이 되면 좋겠어요. 이번 대회에서도 하나님께서 대회에 오시는 분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바꾸어 주실 것을 기대해요.

 

거창하게 교육, 교회, 사회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우리 반에 앉아 있는 작은 아이 한 명도 새롭게 하기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이는 고사하고 내 자신을 새롭게 하는 일도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요. 개인을 새롭게 하는 일과 사회를 새롭게 하는 일은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까요?

자신을 새롭게 하는 일과 사회를 새롭게 하는 일은 분리될 수는 없는 거죠. 또 자신을 끊임없이 새롭게 해 가는 사람을 찾기 쉽지 않고요. 자신을 새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삶의 과제를 발견하는 것에서 시작해요. 하나님께서 주신 과제와 나 사이에서 끊임없이 씨름하고 상호작용하면서 내가 성장하는 것이고 사회가 성장하게 되는 거죠. 안 그래도 학교생활이 힘들고 어려운데 뭘 또 새롭게 하느냐 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대회를 통해 각자에게 주시는 도전은 결국 본인의 성장을 위해 주시는 것이죠. 힘들더라도 문제를 회피하지 말고 문제 앞에 직면해서 그것을 가지고 씨름할 때 얻는 위로가 진짜 위로인 거죠. 대회에 올 때 자신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과제를 달라고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과제를 붙들고 씨름하는 기독교사대회가 되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좋은교사운동 선생님들께 인사를 부탁드립니다.

제가 처음 교직에 들어올 때는 취업이 잘되던 시대였기 때문에 기업에 취업을 하지 않고 교직을 선택한다는 것 자체가 헌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교직의 안정성에 대한 선호가 높기 때문에 교직을 선택한다는 것은 헌신이 아닙니다. 지금은 교직에 들어왔다는 것 자체는 일종의 기득권이 되는 셈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은혜로 교직에 들어온 사람으로서 왜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교직에 있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답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어려운 관문을 거쳐 나로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게 하셨는가?’ 하는 질문을 계속 던지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학교 문제는커녕 교실 문제만으로도 버거운 씨름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교회, 교육, 사회 모두를 붙들고 씨름하는 삶을 살아 온 정병오 선생님이 참 크게 느껴졌다. 더욱이 가장 평범한 삶을 충실히 살면서 그 위에 가장 비범하게 살아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은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의 말보다는 그의 삶을 늘 가까이에서 보아 왔기 때문이다. 가장 평범하게, 가장 비범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