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만나고 싶었습니다

교사는 학교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사람입니다(2012 기독교사대회 주강사 문춘근 목사) 2012.08

교사는 학교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사람입니다





2012 기독교사대회 주강사 문춘근 목사

20, 30대를 기독학생운동에 몸과 마음을 헌신했다. IVF 부산지방회 대표를 역임했고, Regent College를 졸업한 후 목회자가 되었다. 그 후 작은 교회, 소통하는 교회를 꿈꾸며 부산에서 '사귐의 교회'를 개척했다. 2008년부터 한국기독교사회(TCF)의 협동간사로 섬기고 있다.



 


인터뷰∙정병오 / 사진∙박숙영


 

 

문춘근 목사님이 누구지? 2012 기독교사대회 주강사로 문춘근 목사님이 결정이 되자 많은 분들이 던진 질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학생 선교단체의 간사로 부산에서 사역을 하다가 작은 개척교회를 섬기는 목사를 일반 회원들이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명성을 보지 않고 삶과 메시지를 검증하고 특별히 기독교사들의 영혼을 만져줄 적임자를 찾는데 까다롭기로 유명한 기독교사대회의 강사 검증 방식에 대한 신뢰가 있겠지만, 그 전에 목사님의 살아온 길과 생각을 먼저 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목사님을 미리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떻게 주님을 만났습니까?

저는 저희 집안에서 첫 번째로 교회에 나갔고, 또 대학에 들어갔고, 목사가 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배경이 전혀 없는 환경에서 자랐죠. 제가 처음 전도를 받은 것은 부산공고 재학 중이던 고2 때였어요. 당시 전기과 전공이 저와 잘 맞지가 않아서 답답함을 많이 느끼고 있었고, 또 병을 앓고 있어서 인생의 답이 보이지 않는 상태였어요. 어느 날 노방 전도를 하던 초등학교 친구 하나를 만났는데, 그 친구가 저한테 아주 열정적으로 다가와 이야기를 했는데, 골자는 다음 주에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서 총동원 주일을 진행하는데 오라는 거였어요. 그 때 그 친구의 열정에 감동이 되어 교회 가겠다고 약속을 했어요. 그 과정을 통해 그 전까지 단 한 번도 교회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던 제가 교회에 발을 내딛게 되었어요.

처음에 교회로부터 받은 인상이 참 좋았어요. 그 전까지 집과 학교만 오가면서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지냈는데, 교회 와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좀 더 나은 삶에 대해 들으면서 매우 즐겁게 다녔어요. 또 교리나 말씀도 기쁘게 받아들여져서 고2와 고3 생활을 즐겁게 보낼 수 있었어요. 또 저는 인문계가 아닌 실업계 고등학생이었기에 시간적 여유가 많아 더 많은 시간 교회 봉사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어요.


그러면 고등학교 시절에 교회 생활을 통해 신앙인으로 거듭났습니까?

고등학교 시절에는 교회 생활을 재미있게 한 것이고, 구원의 확신이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해 눈을 뜬 것은 대학에 들어온 이후 IVF 활동을 통해서였어요. 고등학교 졸업 후 부산대학교 공과대학에 81학번으로 입학을 했어요. 그런데 적성이 맞지 않아 1학년때 F학점 4개를 받고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어요. 재수를 하면서 하나님께 한 번 더 대학생활의 기회를 달라고 했던 기도가 응답이 되어 부산대학교 사범대학교 교육학과에 83학번으로 다시 입학을 했어요. 이렇게 내가 원하는 학과에서 새로운 대학 생활의 기회가 열렸지만 내 마음 속에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있었어요. 바로 그 때 IVF라는 선교단체가 생겼으니 그곳에서 훈련을 받아보라는 제안을 받고 IVF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여기에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구원의 도리, 그리스도의 주 되심, 그리스도인의 사회 참여, 학문과 신앙의 관계, 기독교 세계관 등에 눈을 뜨게 되었지요. 그래서 IVF 활동에 심취해 학생 리더로 열심히 뛰던 중, 부산 경남 지역 1호 개척 간사로 자연스럽게 활동하게 되었지요. 그 때가 1988년도였어요.


당시 대학 IVF 분위기는 어땠나요?

제가 학생으로 활동할 당시에는 활동하는 학생들이 20명 정도 되는 작은 단체였어요. 그런데 제가 간사가 되어 부산대학교를 맡았을 때는 120명 이상으로 성장을 했어요. 그러니까 학생들이 몰려오듯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학생들에게 열심히 활동하지 않으려면 그만두라고 배짱을 부릴 정도였으니 지금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죠. 물론 이러한 부흥은 제가 열심히 해서 온 결과는 결코 아니었어요. 오히려 하나님이 캠퍼스 사역의 부흥기에 저를 부르셔서 그 부흥의 현장에 있게 하시고 사용을 하신거죠. 이러한 캠퍼스 사역의 부흥을 경험하면서 대학 졸업할 즈음에 교사로 나갈 것인지 대학원에 진학할 것인지, 캠퍼스 간사를 할 것인지 고민을 많이 했죠. 당시 집에서는 교사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죠. 가난한 집안에서 처음으로 대학에 진학한 장남이 취업을 하지 않고 간사로 남는다는 것을 부모님들이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렇지만 이렇게 밀려오는 후배들을 돌볼 사람이 필요했고, 또 선배들과 간사님들의 격려와 도전도 있고 해서 집안의 격한 반대를 무릅쓰고 간사로 헌신을 했어요. 그렇지만 부모님께 미안한 마음에 울면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어요. 캠퍼스 간사 사역이라는 것이 젊을 때 단기간 헌신을 하는 것이 보통이고 이후에는 교회 사역으로 많이 옮겨 가잖아요? 재정적인 면이나 안정성의 면에서 교회 사역보다 훨씬 열악한 캠퍼스 간사 사역을 장기 사역으로 감당하려면 무언가 특별한 부르심이 있었을 것 같아요. 간사 사역은 1998년에 시작해서 2003년 말까지 했습니다. 다른 영역도 그렇지만 캠퍼스 간사 사역도‘하나님이 주신 부담’때문에 하는 것 같아요. 즉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각자에게 부어주시는 그부담에 이끌려 사역을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대학 시절 IVF 활동을 통해 붙들었던 것은 하나님이 보내셔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선포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그 신앙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고등학교까지 정신없이 공부만 하다가 갓 대학에 들어온 이 학생들에게 자신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캠퍼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선포하는 삶을 살아낼 수 있도록 훈련시켜주는 일이 그 어떤 일보다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캠퍼스라는 곳이 학생들로 자신이 부름 받은 바로 그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인정하고 살아내는 훈련을 시키고, 그리스도인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심어주기 위한 가장 좋은 기회이면서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저를 캠퍼스의 간사로 서 있게 했던 것 같아요.


사역의 열매도 많이 있었을 것 같아요

대학생들 사역이 너무 즐거웠어요. 전도하고 양육하고 훈련하고 헌신시켜 파송하면, 다시 신입생이 들어오고…. 당시 제가 IVF 초창기 멤버였기에 후원을 받을 학사들도 없었고, 교회들도 선교단체에 대한 인식이 없어 재정적인 어려움은 많았지만, 훈련을 받고 사회에 진출하기 시작한 후배들이 후원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훈련받은 학생들이 신앙인으로서 사회 가운데서 자기 삶의 영역을 개척해가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참 감사한 경험이었어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 때는 하나님이 은혜를 쏟아 부으시던 시기였기 때문에 많은 사역의 열매를 맛볼 수 있었지요. 환경이 많이 바뀌어 요즘 힘들게 사역하는 후배 간사들을 볼 때 참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해요. 이전에는 제가 잘 해서 사역의 열매가 많았다고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돌아보니 제가 사역의 상승 무드 가운데 부름을 받고 거기에 있는 은혜를 누렸던 것 같아요.


사역의 한계를 느낀 적은 없나요?

대학 생활은 책임이 없잖아요. 졸업하고 나면 승진, 체력, 책임의 문제 등 많은 문제가 주어지잖아요. 그런데 공동체 안에서 충분한 지원을 받을 때 신앙이 좋아보여도 졸업 후 세상 한 가운데 들어가게 되면 이러한 신앙 공동체가 해체되기 때문에 본인의 신앙 체질이 그대로 드러나는 거죠. 그러다 보니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선포하며 살아남는 사람이 많지 않고 위축되기도 하고 심지어 신앙을 떠나는 경우도 가끔 드러나더군요. 그래서 이들을 독립군처럼 홀로 있게 하면 안 되고, 지역별 영역별로 서로 돌아보고 격려하는 모임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기독교사운동은 이런 차원에서 볼 때 모델이 되는 모임이라고 생각을 해요.


1970년대부터 시작을 해서 1990년대 중반까지 캠퍼스의 학생 선교단체들이 크게 부흥했었고, 지금은 약간 퇴조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캠퍼스 선교단체 사역이 한국 교회 가운데서 어떠한 역할을 했다고 보나요? 그리고 한국 교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기여를 해야 한다고 보나요?

선교단체별로 철학과 방향이 조금씩 달랐어요. 그런데 제가 활동했던 IVF의 경우를 보면  교회와 함께 가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기 때문에 4년 캠퍼스 훈련을 받은 가운데도 교회에 속하게 했기 때문에 졸업 후에 교회와 잘 연결이 되었다고 생각을 해요. 졸업생들을 교회로 보내지 않고 계속 붙들고 있었던 선교단체의경우 재정과 인력이 풍부한 것처럼 보였고, 우리는 교회로 다 파송했기 때문에 남는 것이 별로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선교단체의 건강성을 유지했고 한국 교회에도 더 많이 기여했던 것 같아요. 교회와 선교단체 사이에는 어느 정도 긴장이 있을 수 있지만 각자의 한계를 인정하고 서로 존중해주면서 같이 가야 할 것 같아요. 하나님 나라 차원에서 서로를 인정해주고 서로의 한계를 보완해주는 관계로 가야 할 것 같아요.

선교단체는 훈련받은 학생들이 교회로 다 들어가 남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자신의 역할을 다 하고 있는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이고, 교회는 교인들이 선교단체나 기독전문 모임에서 활동하고 훈련받는 것을 교회의 활동으로 인정해주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지금 교회 목회를 하면서도 교회 안의 사역과 교회 밖의 사역이 둘 다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교인들에게도 교회 활동만 전념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교회 밖의 활동 가운데서 대학생 선교단체나 기독 전문인 모임들의 경우 교회보다 훨씬 더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 단체들에서 훈련받는 것을 인정해 줍니다. 잘 배우고 훈련받는 것이 결국 교회를 풍성하게 하는 것이거든요. 교회가 단기적인 시야를 가지고 교회 모임만 만들어 가면 세상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내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으로 자라기가 힘들어집니다.


IVF 간사 사역을 17년 정도 하시고 교회 개척을 하셨는데요. IVF 장기 사역을 했기 때문에 IVF를 떠나 교회 사역으로 옮기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IVF의 경우 6년 사역을 하고 나면 사역 심사를 해요. 그래서 이 심사를 통과하고 나면 장기 헌신자가 되요. 그리고 3년간의 신앙 연수를 기간을 줍니다. 저는 어차피 목회를 하거나 교회 지도자가 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국내에서 신학을 하는 것을 택하지 않고, 벤쿠버에 있는 리전트 칼리지에서 평신도 신학과 영성 신학을 공부했어요. 당시 제 마음 속에 간사로 살든 뭐로 살든 구약과 신약에서 얘기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 정체성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리전트 칼리지에서의 공부는 이런 제 문제의식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후 간사 두 번째 기간 사역에도 큰 도움이 되었고요.

IVF 간사 두 번째 6년 사역을 끝낸 이후에도 IVF에 계속 남아서 전문 사역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제가 생각하던 것과 IVF 리더십의 구상이 맞지 않아 IVF 사역을 그만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더군요. 처음에는 IVF를 떠나 못 살 것 같았었는데, 하나님 나라 차원에서 교회를 다시 보게 되었어요. 제가 IVF 사역을 하면서 가졌던 영혼에 대한 사랑과‘하나님 나라’의식, 그리고 리전트 칼리지에서 배웠던 평신도 신학들을 바탕으로 한국 교회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는 기여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리버티 신학교에 편입을 해서 목회자 양성 과정을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고 한국에 들어왔죠. 한국에 들어와서는 제가 교회 사역 경험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영광침례교회에서 부목사로 2년 정도 사역을 했는데, 사역을 하면서‘아! 교회가 이렇게 돌아가는구나!’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교회 내에서 열심히 사역을 하면서 제가 생각하던 교회의 모습을 향해 개혁(reform)을 해보려고 노력했는데 잘 안 되더군요. 그래서 처음부

터 새롭게 시작하자(form)는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를 시작하면서 했던 생각은 교인들과 똑같이 일을 하면서 그들이 겪는 갑과 을의 세계를 경험하는 가운데 교인들의 삶과 고민을 이해하는 목회를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대학 졸업 이후 바로 간사를 해서 직장 경험이 없는 저로서는 이런 경험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야 경제적으로도 자립을 하면서 교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자비량 목회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보니, 에니어그램 등 상담 사역과 리더십 훈련을 하는 것이었는데, 제가 가진 이런 재능이 교회나 선교단체 뿐 아니라 일반 기업에서도 필요하더군요. 그래서 일반 기업이나 사업체를 대상으로 리더십 훈련과 상담일을 하면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교회의 형태면에서는 자비량 목회를 선택하신 것인데, 내용적인 면에서는 어떤 지향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처음에 교인 2가정과 저희 가정 이렇게 3가정이 개척을 시작했는데, 부산 지역에 예수 믿는 가정이 우리 3가정밖에 없다면 어떻게 예배해야 하고, 어떻게 자녀 양육을 해야 하고, 어떻게 사역해야 하는가 하는 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의 인도를 받아가자는 마음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하나님 나라를 받드는 교회가 되자. 교회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도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는 그런 교회의 위치를 지켜나가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생각한 것은 모든 교인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전체적인 개념 하에 목회자와 신도가 건전한 방식의 협력을 하는 모델을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교회안의 사역과 교회 밖의 사역이 공의,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서로 인정하고 함께 가는 교회를 만들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희 교회의 로고를 보면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를 형상화했는데요, 성부, 성자, 성령 손을 잡고 춤을 춘다는 뜻이거든요. 삼위일체 대한 설명을 하다 보면 자꾸 1위, 2위, 3위 로 서열화하기 쉬운데 사실은 원의 개념이거든요. 교회에 여러

기능이 있지만 본질적으로 성삼위 하나님의 사귐과 일하심과 어울리심을 항상 본으로 삼고 남자가 여자가 서로 협력하고, 서로 다른 지체들이 서로 다름 안에서 더 다채롭고 활발한 사귐이 이루어지도록 환영하고, 그런 사귐에 계속 들어오게 만들고 그 사귐이 하나님으로 향하는 그런 관점에서 교회 사역을 움직여간다는 의미를 담았어요. 그래서 전통적인 교회가 하던 사역들에 대해 교회 본질에 비추어 계속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질에 맞지 않은 군더더기는 떨쳐 버리고 본질에 맞는 새로운 것을 입으려고 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교인들이 충분히 이해하고 동의를 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매우 천천히 가고 있습니다.


TCF 협동간사를 하면서 기독교사들의 영적 상황에 대해 많이 접했을 텐데, 어떤가요?

처음에는 제가 선생님들을 돕는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들이 일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제가 도전을 많이 받습니다. 교사 역할만 해도 힘든데, 기독교사 모임의 리더로서 헌신적으로 섬기는 모습을 보면서 저게 진짜 자비량 사역자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독교사운동에 참여한 선생님들의 경우 마음이 잘 열려있고 배우려고 하고 들으려는 자세가 잘 갖추어져 있어서 저로서는 사역하기가 참 쉽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훈련받은 선생님이 사역해야 할 학교 현장에서 만나는 학생들이나 동료 교사, 학부모들은 그렇지가 않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만만치가 않은 학교 현장 가운데서 낙심하고 침체되어 있는 선생님들에게 세상 가운데로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고 영적 힘을 전달해 드리려고 노력을 많이 합니다. 그렇지만 교사들의 모임에서 교사가 아닌 목회자가 사역을 하는 것이 쉽지 않은 면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TCF 사역을 시작하면서 제 스스로에게도 다짐을 했고, 선생님들에게 분명하게 이야기했던 것은 이 운동에서 선수는 기독교사들이고, 간사로서 나는 큰 판에서 상황을 짚어주고 도와주는 역할만 할 뿐이지 선수 역할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코치 역할만 하는 것이죠. 그런데 코치가 답답하다고 선수 역할을 하면 선수들이 코치를 의지하게 되면서 선수의 자발성이 떨어지는 것이죠. 이러한 것은 제가 IVF 간사를 하면서도 많이 경험한 것이죠. 간사가 다 해버리면 학생들의 리더십은 없어지는 것이죠. 더군다나 기독교사모임은 성인들이기 때문에 책임을 질 수가 있기 때문에, 간사는 어떻게 할지 잘 모르는 부분에서 조언만 해야 하고 결정은 교사 리더십에서 해야합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전혀 간여하지 않습니다. 일 하는 사람이 주인공이 되어야 하고, 일하는 사람의 입장이 항상 반영되어야 좋은 결정도 되고 오래갑니다. 이런 면에서 저와 TCF는 궁합이 잘 잘 맞는 것 같습니다.


2012 대회 주강사를 맡으셨는데, 현재 기독교사들의 상황에 대해서는 어떻게 파악하고 계시고, 어떤 메시지를 던지려고 하시나요?

저는 기독교사대회에 참석하는 분들을 크게 두 부류로 봐요. 학교 현장에서 기독교사로서의 정체성이 없이 지내면서 막연히 힘든 학교 상황만 느끼고 있다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붙들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오시는 분, 그리고 이미 기독교사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고군분투하다가 지쳐있는 분들이죠. 그래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는 분들에게는 학교 현장에서 기독교사로서 산다는 것의 의미와 정체성에 대한 성경적 확신을 주고 싶고, 기독교사로서 고군분투하다 지친 분들에게는 성령의 위로를 전해드리고 싶어요. 저의 메시지의 핵심은‘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임했지만 그 구체적인 구현은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세상 곳곳으로 나아가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어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사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이 부름 받은 학교와 교실, 아이들이나 동료 교사들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선한 통치를 온 몸으로 구현하려는 몸부림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지 몰라요. 혹 실수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지만 기독교사는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사람으로 서야 하고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도전을 드리고 싶어요.


목사님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더 이상의 이야기는 기독교사대회 때 직접 설교 말씀을 통해 듣기로 하고, 이 인터뷰는 목사님이 누구시고,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를 드러내는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고자 한다. 대학 선교단체 간사로 시작해서 개척교회 자비량 목사, 기독교사단체인 TCF 협동간사로 철저하게 현장을 지키며 사역해온 사람답게 그의 메시지에는 바로 내 문제를 이야기하는 듯한 구체성과 실제성이 느껴졌다. 이번 기독교사대회 때 하나님이 그의 삶의 궤적을 통해 기독교사들과 기독교사운동을 향해 해 주실 메시지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