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을 회복시키는 평화교육
이재영 (한국평화교육훈련원 원장)
미국 이스턴메노나이트대학(EMU)에서 갈등분쟁전환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한국평화교육훈련원(KOPI) 원장으로 사역하고 있다. 갈등분쟁 해결과 회복적 정의 관련 조정자 양성 교육훈련을 해오고 있으며, 서울가정법원 화해권고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은혜와 평화 메노나이트 교회를 섬기며 부인 카렌 스파이커와 딸 로미와 살고 있다.
인터뷰·문경민 / 사진·박숙영
좋은교사운동이 회복적 생활지도와 인연을 맺은 것은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월간『좋은교사』에서는 협상훈련 전문가 로버트 해리스(Robert harris)를 인터뷰했다. 로버트 해리스(Robert harris)는 당시 인터뷰에서 “갈등은 우리 삶의 일부분이지만, 폭력은 우리의 선택”이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2009년 6월호 『좋은교사』에서도 회복적 생활지도에 대한 내용이 실렸다. 당시 정책위원회에서는 학교 폭력에 대한 대안으로 회복적 생활지도를 다루었다. 2003년과 2009년에 회복적 생활지도로 좋은교사운동과 잠시 맞닿아 있던 사람이 바로 이재영 원장이다. 이재영 원장은 2003년 로버트 해리스(Robert harris) 인터뷰의 통역을 맡았고, 2009년에는 회복적 생활지도를 주제로 기고했다. 그리고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회복적 정의, 회복적 생활지도라는 개념이 좋은교사운동에 통용되기 시작했다.
이재영 원장은 우리나라에 회복적 생활지도를 도입한 장본인이다. 40대 초반의 나이에 한국평화교육훈련원의 원장, 커넥서스어학원의 원장, 동북아 평화교육 훈련원의 원장이라는 직책을 갖고 있는 평화운동가. 그는 소탈한 차림새와 털털하고 재미있는 말솜씨로 인터뷰에 응했다.
평화교육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저는 원래 평화 쪽에 관심이 없었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60년대 초에 메노나이트1) 선교사들과 함께 일을 한 인연이 있었지요. 당시 메노나이트 분들은 한국에 들어와서 고아를 위한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어요. 메노나이트는 한국에 와서 교회를 짓지 않았지요. 사회복지에 대한 부분, 구제와 관련된 부분에서 일을 했습니다.
메노나이트는 한국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구호와 교육이라고 보았고, 전쟁고아를 위한 직업학교를 세웠습니다. 거기에서 아버님이 농감(Farm manager)로 60년대에 6년 동안 일을 하셨죠. 그걸 하시고 나서 가나안 농군학교로 가셨어요. 아버님은 농촌 계몽에 관심이 있으셨죠. 가나안 농군학교도 김용기 장로님에 대한 신문 기사를 보고 찾아가신 거였어요.
가나안 농군학교는 제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었어요. 그래서 김용기 장로님도 근처에서 쉽게 만날 수 있었죠. 김용기 장로님은 1988년에 돌아가셨어요. 그 때 제가 맡은 역할이 장례식장에 들어온 화환에 물을 주는 것이었죠. 노태우 대통령이 보내온 화환도 있었고, 뉴스에 나오는 유명한 사람들 이름은 거기 다 있더라고요. 그 때 화환 수가 563개였어요. 아직도 그 숫자를 잊지 못해요. 어린 마음에 우리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랑 비교가 되더라고요. 할아버지 장례식에 들어온 화환은 3개였거든요. 두 분이 나이도 비슷했고, 하는 일도 비슷했어요. 두 분 다 농사를 하셨으니까요. 하지만 두 사람의 삶이 화환 수에서 차이를 보였던 것이죠.(웃음)
김용기 장로님과 우리 할아버지의 삶을 보니, 20대에 무슨 생각을 갖고 방향을 잡았나, 하는 것이 중요하더라고요. 김용기 장로님은 20대에 중국을 통일하겠다고 중국으로 떠나신 분이고, 우리 할아버지는 가족들을 열심히 먹여 살리기 위해서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가셨던 분이죠. 두 분 다 치열하게 사셨어요. 하지만 삶의 목표가 달랐죠. 고교생이었던 제게는 우리 할아버지의 삶의 목표보다는 김용기 장로님의 삶의 목표가 더 좋아보였어요.
제가 관심이 있었던 것은 기독교와 사회책임이었어요. 가나안 농군학교 영향을 받았죠. 가나안 농군학교 근처에는 『조국이여, 안심하라』, 『일하기 싫은 자 먹지도 마라』 그런 플래카드가 여기 저기 붙어있었어요. 아버지도 비슷하셨죠. 아버지께선 저희 형제들이 학교 가기 전에 조깅을 시키고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고 난 뒤 학교에 가게 했어요. 그래서인지 어렸을 때부터 우리나라를 위해서 뭔가 해야 한다는, 아무도 제게 주문하지 않은 생각을 하고 살았죠.
그런데 별로 제가 할 일이 없더라고요. 백수로 있다가 제가 조국을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 싶어서 선택한 게 해병대였어요. 해병대 간다고 하니까 교회에서 무척 좋아했어요. 그 때 당시 기독교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랬어요. 해병대 가면 교회에서 칭찬해주는 거죠.
저는 강화도 근처의 섬에서 근무를 했어요. 근무 중에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죠. 비상이 걸렸고, 난리가 났어요. 이러다가 전쟁 나겠다 싶었고, 우리 한국이 분단된 조국이라는 걸 실제적으로 느끼게 됐죠. 북한에서 뭐라도 넘어오면 무조건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죠. 경계 근무를 서면서, 북쪽을 유심히 보니 “우리 민족끼리 평화통일하자!” 뭐 이런 선전 문구가 붙어 있었어요. 남쪽도 역시 마찬가지로 평화통일이라는 문구가 붙어있었어요. 평화통일 이야기하면서 서로 총칼을 겨누고 있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서 고민을 하게 됐어요. 그리고 아버지께 제가하고 있는 고민을 이야기하면서 책을 좀 보내달라고 했죠. 아버지가 보내주신 책 중에는 함석헌 선생님의 책이 있었어요. 그걸 보면서 기독교 평화주의라는 게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저는 당연히 군대오고 나라에 충성하는 게 하나님께 잘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사를 초월해서 보고 있는 함석헌 선생님 책 내용에는 그런 이야기가 안 나오더라고요. 퀘이커 영향을 받은 함석헌 선생님은, 기독교인은 평화주의에 기초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하셨어요. 해병대 근무하는 그리스도인의 삶과는 아주 다른 이야기였죠.
제대 후에 복학하지 않고 그냥 책을 봤어요. 철학, 사회학을 공부를 하면서 먼저 세상에 부딪혀야겠다 싶었죠. 그래서 파인애플 장사를 해보기도 하고…. 아무튼 방황의 시간을 보냈죠. 제가 갈 길 몰라 헤매고 있으니까, 아버지가 저를 데리고 메노나이트 대학을 졸업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고 했어요. 아버지는 그 사람들이 굉장히 좋은 사람들이고 배울 게 많은데, 우리 삼형제 중에 한 놈은 거기서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화천의 ‘아바 샬롬’이라는 곳에 갔어요. 거기에서 이윤식 목사님을 만났죠. 이분은 평화 공동체를 하겠다고 휴전선 근처 화천에 들어가신 분이었어요. 아버님과 한참 얘기하시더니 지원서를 하나 주시더라고요. 와서 펴봤더니 학교 지원서랑 안내책자인데, 다 영어인 거예요.(웃음) ‘아! 내가 갈 데는 아닌가보다’ 하고 그냥 덮어놨죠.
그 뒤로 한 달 정도 지났는데, 갑자기 한국에만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원서를 다시 꺼냈죠. 그런데 영어잖아요. 이름 몇 글자 쓰고 나니까 더 이상 쓸게 없더라고요. 결국 대필을 해서 보냈죠. ‘설마 대학이 그렇게 쉽게 될까?’ 싶었는데, 입학허가서가 온 거예요. 그렇게 유학을 떠나게 됐어요. 가서도 영어 때문에 고생 많이 했죠. 갔더니 담당 교수가 어이없어하더라고요. 담당 교수나 저나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그 때서야 알아차렸죠. (웃음)
영어의 벽을 넘어 기독교 평화주의를 만나다
저는 영어공부를 공원에서 했어요. 이민자들을 위한 영어학원을 가봤는데, 한국에서 배우는 거랑 별 차이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학원 그만두고 5달러 주고 자전거를 샀어요. 그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시작했죠. 그러다가 공원에서 한가롭게 시간 보내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들한테 가서 이것저것 말을 붙여 봤어요. 그분들은 저를 무시하지 않더라고요. 심심한데 누가 와서 말 붙여주니까 친절하게 이야기해준 것이죠. 한 벤치에서 30분 정도 이야기하고 다른 벤치에 가서 또 이야기하고, 그렇게 공원에 두 달을 다녔어요. 그렇게 영어의 문턱을 넘어서게 됐고 대학 과정을 밟기 시작했어요. 다른 학생들은 두 시간 만에 쓰는 리포트를 두 달에 걸쳐서 써야 했죠. 하지만 결국 그 학기 교육과정을 수료했고, B+라는 믿을 수 없는 학점을 받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게 최고 학점이었어요. 1년 공부하고 나니까 이제 공부가 싫더라고요. 제가 거기 가서 정성들여 했던 일은 그 학교에서 힘들어하는 외국인 학생들을 도와주는 것이었어요. 동아리를 만들어서 외국인과 현지인을 연결시켜주는 일을 했죠.
거기에서 공부하면서 본격적으로 기독교 평화주의를 접하게 됐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평화주의가 쉽게 다가오지 않았어요. 한 번은 메노나이트 교회 역사를 공부하는 수업 시간에 예비군복을 입고 들어갔더니 교수님이 좀 언짢아하면서 메노나이트 교회 역사 수업에 군복입고 들어오는 놈은 네가 처음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일로 그 교수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게 됐는데, 이야기의 결론은 “어쨌든 성경이 뭐라고 이야기하는지는 봐야한다”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자세히 뜯어보기 시작했어요.
재밌었던 건, 영어의 ‘Peace’가 우리 말 성경에는 일곱 여덟 개 정도의 단어로 다르게 바뀌어있다는 것이었어요. ‘Peace’는 평안, 화평, 화목 같은……. 완전히 다른 느낌의 단어로 쓰여 있더라고요. 그런 단어들은 내면적이고 개인의 영성과 수련을 강조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어요. 제가 배운 ‘Peace’는 그렇지 않거든요. 영어의 ‘Peace’는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다 같이 갖고 있어요. 추상적이고 내적인 의미의 평화가 아닌, 이 땅이 하나님 나라로 회복되어야 한다는 실제적인 개념의 평화를 조금씩 받아들이게 됐죠. 캐나다에서의 여러 경험들은 기독교 평화주의 공부에 대한 욕심을 키워주었어요.
그래서 평화주의 전통이 깃들어 있는 학교에 가기로 결심했죠.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Summer Peace Building Institute에 갈 수 있게 됐고, 거기에서 석사 공부를 하게 됐어요. 존 폴 레더락 교수님과 하워드 제어 교수님의 회복적 정의 수업, 그리고 히즈키아스 아세파 교수님의 수업을 들으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죠. 하워드 제어 교수님이 저의 지도 교수였어요.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 제가 배웠던 것을 바탕으로 평화교육을 하기 시작했어요. 역삼중학교의 어떤 전교조 선생님이 통일교육이 아닌 평화교육을 해달라는 요청을 제게 해왔어요. 그렇게 처음 학교에 가게 됐죠. 가서 보니 학교에 평화교육에 대한 개념이 없더라고요. 그렇게 평화교육 일을 하게 됐죠. 그 일을 10년 정도 해왔어요. 저는 언젠가는 중립적으로 개입하는 사람들이 필요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평화여성회와 함께 조정자 양성과정을 운영했죠. 5년 정도 그 일을 하다 보니 형사정책원구원이나 소년법원 등에서 저희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됐고, 다른 사역을 펼쳐갈 여지를 얻게 됐어요.
적극적 평화와 소극적 평화
군사교육으로는 동북아의 평화가 이루어질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무기 경쟁하면서 억지스럽게 만드는 불안한 평화는 진짜가 아니죠. 본질적이고 구체적인 평화는 군사교육으로 이루어질 수 없어요. 적극적 평화는 총칼로 균형을 맞추는 게 아니라 총칼을 함께 내려놓는 것이고, 그런 ‘내려놓음’을 위해선 신뢰가 필요해요. 신뢰는 교류로부터 나오죠. 저는 평화교육을 하는 사람들의 교류가 우선적으로 시작되어야 한다고 봐요. 서로 만나고, 교육받고, 돌아가서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평화에 대한 생각을 전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민간교류 차원에서 평화 교육자들을 양성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죠. 군사학교(Military Academy)가 아닌, 평화학교(Peace building Academy)가 동북아에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했고, 동북아평화교육훈련원(NARPI)라는 기구를 만들게 됐죠. 사람들을 조직하고 협의해서 작년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50명 정도의 훈련생을 배출했어요. 그리고 지난달에 히로시마에서 40명 정도 사람들을 훈련시켰어요. 내년에는 중국에서 하려고 합니다. 현재 이 일의 가장 큰 스폰서는 메노나이트 재단입니다. 일본과 대만에도 평화교육훈련원을 만들려고 해요. 평화를 위해 공헌하는 것은 군사훈련이 아니죠. 국가 폭력 시스템은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움직여요. 아주 철저합니다. 하지만 평화훈련은 좋은 게 좋은 거고, 전문적 체계도 없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정말 심각하게, 진지하게 해야 한다고 봐요. 물론 지금은 군사훈련과 평화훈련의 규모를 비교할 수는 없죠. 군사훈련은 국가에서 하는 것이고, 우리는 작은 민간단체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최소한 EU처럼 서로 침략당할 걱정에서 벗어나는 일이 이루어 질 거라고 생각해요.
평화는 국경을 넘는다
저는 국가주의가 좀 싫어요. 학교에 강의 갈 때 가장 부담스러운 게 국민의례예요. 저는 그냥 그 시간에 나라를 위해 기도해요. 그런데 주변에서 좀 걱정을 하더라고요. 부담스러워하기도 했습니다. 얼마 전에 히로시마에서 한국, 일본, 중국 사람들의 훈련과정을 운영하다보니까 국가주의가 걸리더라고요. 센카쿠나 독도 얘기도 사실 그래요. 하나님 입장에서 봤으면 좋겠어요. 학교폭력 문제 일어나서 한 학생을 다른 곳으로 옮겨보세요. 학교 입장에서는 해결일지 모르지만 교육청 입장에서는 문제가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간 것일 뿐이죠. 하나님 앞에서는 독도니 뭐니 하는 건 사실 큰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김일성 주석 사망 때, 우리가 남북 대치 국면에서 서로 총칼 겨누고 있을 때였는데, 새가 하늘 위로 그냥 지나가더라고요. 새들은 그 극한의 긴장 상황을 보면서 우리를 놀리는 것 같았습니다. 50년 동안 대체 뭐하는 거냐. 새가 총을 겨누고 있는 저를 보면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듯 했습니다. 그 새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내려다보시면 정말 안타까워하실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동북아평화교육훈련원(NARPI)의 말씀이 이사야서에 있다고 봤어요. 다시는 국가들이 전쟁을 준비하지 않는 미래, 그 비전이 우리 것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일본도 중국도 북한도……. 서로 죽이기 위해 훈련받고 있습니다. 이 노력을 사람을 살리는 것에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점점 키워가야 가야한다고 봅니다.
평화교육이란 무엇인가요?
사람이 살다보면 갈등이 생기죠. 갈등은 자연스러운 한 부분이에요. 갈등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갈등에 접근하는 방식은 달라져야 한다고 봅니다. 평화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는 게 더 좋습니다. 평화교육은 “갈등에 대한 접근 방식이 선택 가능하다.” 라고 이야기하는 지점에서 출발해요.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해결방법을 선택할 수도 있고, 평화적이고 건설적인 해결방법을 선택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선택 여지가 있다고 말하는 게 평화교육이죠. 갈등은 에너지예요. 이 에너지를 어떤 에너지로 전환할 것이냐, 이것이죠. 갈등에 대한 접근 방식의 선택이 가능하고, 가능하면 평화적인 방법을 선택하도록 도와주자는 것입니다. 갈등을 평화적이고 건설적인 에너지로 바꾸는 것이 평화교육이라고 할 수 있죠. ‘회복적 생활교육’라는 것도 평화교육의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다문화 이해교육, 다종교간의 대화, 이런 것도 평화교육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회복적 정의는 가장 근본적인, 정의를 바라보는 패러다임을 바꾸자는 측면에서 이야기 되는 것입니다. 정의에 대한 개념은 평화를 이루기 위한 큰 틀로 작동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과연, 실제로 정의가 이루어지는가?
복수는 자연적 현상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우리가 복수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에요. 복수도 할 수 있겠죠. 하지만 복수가 의미 있으려면 복수를 통해 피해자가 어느 정도 회복이 되어야 한다고 봐요. 우리나라 사법 체제에 대한 아쉬움이 적지 않습니다. 복수가 의미 있기 위해서는 피해자들과 가해자들의 회복을 위해 국가가 노력해야합니다. 지금은 복수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입니다. 국가에서 쓰는 돈을 보면 국가 사법체제가 복수에 치우쳐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잘못한 사람을 가두고 입히고 먹이는 데 매년 약 3조 정도의 돈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피해자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책정되어 있는 돈은 633억 정도이고, 이 중 피해자가 치료비 등으로 직접적으로 지원 받는 돈은 30억이 채 안됩니다. 30억과 3조의 차이, 1000배의 차이라고 볼 수 있어요. 우리는 복수에 굉장히 큰 의미를 두지요. 하지만 피해자의 필요가 채워지지 않는다면 그 복수는 ‘부족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복수가 맞느냐”, “그르냐.”가 아니라, 복수가 목적하는 정의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느냐?”, “이루어지고 있지 않느냐?”를 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지요.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처벌이, 피해자들이 회복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하잖아요. 피해를 받은 학생에게 물어봤어요.
“너를 때린 저 친구가 네게 저지른 잘못 때문에 30시간 교육을 받고 있는데, 그걸로 속이 시원해지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모님께도 같은 질문을 드렸어요. 부모님들은 더 기가 막혀하시죠. 차라리 우리 집에 와서 30시간 동안 설거지하고 청소시키는 것이 더 낫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사회적 규칙으로는 응보가 맞을지 모르지만,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봅니다.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 평화교육
저는 이 일이 재밌어요. 재미없으면 이걸 하겠어요. 저는 제가 사람들과 이 사회에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나 혼자 잘 살아봐야겠다.’ 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아마 아버님의 영향과 자라온 환경의 영향이 컸던 것 같아요. 아버님과 가나안 농군학교에서의 경험이 사회에 대한 기독교인의 책임의식을 체득하게 한 것 같아요. 제가 공부하고 일해 온 과정에는 메노나이트 분들의 후원, 헌금이 있어요. 메노나이트 분들은 부자가 아니에요. 100년 된 가구를 그대로 쓸 만큼, 굉장히 검소한 분들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아끼고 아껴서 후원한 돈이 세상을 돕고 있습니다. 저도 그 후원을 받아 공부를 해왔고 일을 해오고 있어요. 저는 빚진 사람입니다. 제가 하고 있는 것들이 오늘날 욕먹고 있는 한국기독교를 회복하는 데 일조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짧은 인생을 살면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조금이라도 밀고 가야지, 앞으로 가는 걸 가로막는 돌멩이가 되어선 안 된다고 봅니다. 아무튼, 저는 이 일에 소명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학교에서 교사들을 만나면서 이 일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해요. 생활지도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습니다. 기독교사들은 바뀐 패러다임 속에서 ‘회복적 정의’를 통해 나아갈 방향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좋은교사운동이 저희가 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고, 박숙영 선생님처럼 함께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된 것은 저희에게 아주 기쁜 일입니다. 회복적 정의, 회복적 생활지도가 우리 아이들을 다시 살리는 데 도움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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