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립학교 문제 앞에 선 기독교사
김형태 (서울시 교육의원)
1965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입시학원 강사를 거쳐 서울 양천고교에서 국어교사로 재직 중 재단비리에 맞서 해직되었으나, 2010년 6·2지방선거를 통해 서울시 교육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투명사회상(한국투명성기구), 의인상(참여연대), 의정대상(시민일보)을 수상했다. 시집으로는 《사랑일기》, 《아부지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납니다》, 《물빛 안경처럼 나는 너의 창이고 싶다》, 《아버지의 빈 지게》 등이 있다.
인터뷰 / 사진·문경민
지난 4월 서울시의회에서 교권보호조례 제정에 대한 토론회가 있으니 좋은교사운동 쪽에서 논찬을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요청에 응낙하고, 논란이 되고 있다는 교권보호조례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교권보호조례의 내용은 상당히 학교 현장의 실정과 맞아떨어지는 것들이 많았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조례 제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고맙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그 내용들을 기획하고 입안한 사람, 김형태 교육의원을 만났다. 교육 비리를 ‘공익제보’ 했다는 이유로 보복성 해직을 당한 후 교육 현장을 떠나있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선생님 느낌이 배어났다.
그리스도인 김형태
제 아내는 교사선교회 소속예요. 홍세기 선생님과도 인연이 있죠. 부산교대를 나왔는데, 홍세기 선생님이 아내를 예수님께로 이끌었죠. 저 역시 그리스도인입니다. 저희 집에 기독교 신앙이 들어온 건 증조할머니 때였어요. 할아버지는 유교적 가풍, 특히 제사문제 때문에 믿기 어려우셨고, 아버지는 젊었을 때, 그리스도인이 되었어요. 하지만 제사 문제로 충돌이 일어나자 효도하는 차원에서 할아버지 돌아가실 때까지는 교회 다니진 않았어요. 마을 언덕 위의 교회가 있었지요. 그림 같은 풍경으로 작지만 예쁜 교회……. 저는 여름성경학교 때 가끔 나갔어요.
중학교 2학년 때 만난 선생님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제가 다니던 양촌중학교 여자 선생님 세 분을 잊을 수가 없어요. 음악, 영어, 과학 선생님 세 분이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셨어요. 음악 선생님께서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시면서 가끔씩 성경 이야기를 전해주셨어요. 감동이 됐죠. 영어, 과학 선생님은 토요일에 수업 끝나면 우리들을 모아서 읍내의 교회에 데려가 주셨어요. 일주일에 한번 가는 교회가 정말 꿈처럼 달콤했어요. 그 시간이 몹시 기다려졌지요. 저는 예수님을 자연스럽게 영접하게 되었어요. 예수님은 제 삶에 분수령과도 같아요. 예수님 때문에 눈이 번쩍 뜨였다고나 할까요? 그때부터 이 분처럼 살아야겠다, 예수님을 닮아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지요.
대전에 와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신앙이 더욱 깊어졌는데, 아침에 가장 일찍 등교해서 교실 환기시키고, 성경 한 장 읽고, 기도하고, 그렇게 하루를 시작했죠. 믿는 학생답게 살고 싶었어요. 부모님께서는 제가 은행원이 되기를 바라셨지만, 저는 어느 순간 신학을 꿈꾸고 있었어요. 하지만 부모님께서 반대하셨지요. 번듯한 직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거죠. 시골교회 목사님들의 어려운 삶을 보셔서 그랬는지 특히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어요. 어머니께서는 제가 신학대 가면 아들 하나 없는 셈 치겠다고 까지 하셨지요. 그래서 저는 일단 일반대학을 간 뒤에 신학대학원을 가기로 했어요. 그래서 대학 진학 고민할 때, 기왕이면 제가 좋아하는 분야를 선택했죠. 대학을 신학을 하기 위한 중간 과정으로 여긴 것이죠. 저는 문학을 좋아했어요. 우리 것을 먼저 공부하고, 세상 학문을 수렴한다는 차원에서 지방 국립대인 충남대 국문학과를 다녔어요. 거의 4년 장학생으로(웃음)
하지만 대학 3학년 때 아버지가 뇌종양으로 쓰러지면서 가정이 굉장히 어려워졌어요. 병원비가 많이 들었거든요.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었지만 신앙적으로도 어려웠어요. 저는 아버지의 투병에 마을 이장인 아버지를 통해 우리 마을을 복음화하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다 생각했어요. 중간에 건강이 좋아지셔서, 예배당을 새롭게 짓는 등 열매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녜요. 그러나 끝내 아버지는 1년 만에 돌아가셨죠. 저는 충격에 빠졌어요.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서 금식과 철야를 밥 먹듯이 했어요. 정말 목숨 걸고 기도했죠. 그런데 아버지는 돌아가셨어요. 기도원에서요. 그것 때문에 어머니께서 얼마나 맺힌 게 많은지 몰라요. 서러워하셨죠. 어머니께서는 제게 자기 아버지도 낫게 하지 못하면서 무슨 신학을 하냐고 하셨죠. 저는 일단 우리 가정의 상처와 아픔을 싸매야겠다고 생각했고, 신학대학원 진학을 접었습니다.
목회자의 꿈을 접고 학원 강사로. 학원 강사에서 사립고교 국어교사로
가정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학원 강사를 하게 됐어요. 88년도쯤이었던 것 같은데, 정말 바쁘게 살았어요. 여러 군데 뛰었죠. 새벽에는 송파 쪽 학원, 낮에는 강남, 청담동쪽 학원, 저녁에는 안양 쪽 학원을 뛰었죠. 거기에다 틈틈이 개인 과외도 했으니. 돈도 많이 벌었죠. 적게는 300만원, 많게는 500만원을 벌었죠. 그 당시 기준으로는 대단히 큰돈이었어요.
그런데 굉장히 허탈한 거예요. 남의 옷을 입고 있다는 느낌이랄까요. 연말에 특히 그랬어요. 내가 아무리 열심히 가르쳐도 사제 관계라는 게 없었어요. 대학 잘 갔다고 찾아오는 제자들도 없고요. 돈 많이 버는 것 외에는 좋은 게 없더라고요. 그런 번민 가운데에서 다시 신학에 대한 고민을 했어요. 신대원 진학을 할 거냐 말거나 고민을 하다가 이 세상에 신앙 좋은 목회자만 필요한가 싶더라고요. 세상이 좀 더 좋게 바뀌려면 신앙 좋은 평신도가 많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평신도로, 작은 예수로 사는 일을 선택하기로 했고, 90년부터 양천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습니다.
아이들한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아이들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게 제가 할 일이라고 보았지요. 저는 애들에게 무서운 선생님보다는 형이나 삼촌 같은 선생님이 되려고 했어요. 생일도 챙겨주고 상담도 많이 하고, 수학여행 가서는 발도 씻어주는 등 좋은교사가 되려고 무척 애썼어요.
아이들과 친해지다 보니, 아이들이 저한테 와서 이런 저런 속이 있는 얘기들을 털어놓기 시작했어요. 그중에 학교에 대한 이야기가 적지 않았어요. 두발규정은 왜 이리 짧나, 우리 학교는 왜 0교시 수업 하는지, 왜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을 강제로 시키느냐, 왜 공사는 거의 날마다, 그것도 수업시간에 하느냐, 애들이 저한테 와서 그런 문제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저는 교감, 교장 선생님께 가서 아이들 입장을 대변하려고 애썼어요.(웃음)
저는 수업하는 게 좋았어요. ‘점수 높이는 학원식’ 수업보다는 학생들의 사고력과 창의성을 높이는 학교다운 수업을 해보고 싶었어요. 여러 다양한 시도를 많이 했어요. 그 때 당시에는 이런 열린 수업에 대한 노력을 도와주는 ‘함께 하는 국어교육’ 등의 전교조 계열의 교사 모임이 있었어요. 수업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전교조를 알게 되었어요. 전교조에는 참교육을 실천하려는 훌륭하고 앞선 분들이 참 많았어요. 마침 그때 전교조가 합법화되기도 했고요. 처음에는 이름만 올리고 조합비 내는 정도로 활동했어요. 우리 학교는 사립이었고 전교조 가입자가 많지 않았거든요. 그 당시 사립에서 전교조 가입한다는 것은 목을 내놓는 것과 다르지 않았어요. 가입한 뒤에 이사장에게 몇 번을 불려갔죠. 배신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이런 저런 마음고생을 좀 했죠. 회유와 강압이 이어진 건 당연했고요.
사립학교 문제 앞에 서다
제가 주장했던 건, ‘학생들이 다니고 싶은 학교’, ‘학부모들이 보내고 싶어 하는 학교’, ‘교사들이 근무하고 싶어 하는 학교’를 만들자는 거였어요. 그리고 여러 좋은 사례들을 학교에 제시했어요. 수학여행을 테마별로 나눠서 간다든가,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축제를 기획한다든가, 졸업 앨범도 학생 대표들이 직접 선정한다든가 하는……. 주변에는 벤치마킹 할 만한 사례들이 적지 않았어요. 또, 우리 학교의 인사위원회와 학교운영위원회가 투명하게, 민주적으로 운영되지 않는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어요. 교장이 임명하면 부장들이 거수기 역할을 했죠. 그러다보니 학교에서 교사들 간에 위화감이 적지 않았어요. 조금만 제도를 고치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아무 원칙과 기준 없이 학교가 돌아가는 거예요. 사실상 재단 이사장 마음대로 움직여지는 학교였지요.
또, 예산 사용 내역이 공개되지 않았어요. 이사장이 깊이 관여하고 있는 급식 문제도 심각했지요. 누가 봐도 이사장이 학교를 돈벌이 수단으로 여긴다고 생각했지요. 급식에 대한 아이들의 불만이 정말 컸어요. 점심을 그대로 재탕해서 석식에 내오기도 하고, 애들 먹을 음식에서 이물질들이 나오기도 했죠. 너무 심했어요. 애들이 점심을 밖에서 먹게 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어요. 물론 허락 안됐죠. 학교운영위원회에 올바른 철학을 가진 교사를 진입시켜 불투명하고 비민주적인 의사결정을 조금이라도 막아보고자 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어요. 운영위원 선거에서 교사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선생님이 있어도, 학교에서 위촉하지 않으면 그만이었으니까요. 장사하는 게 나쁜 것은 아니죠. 하지만 이윤을 추구하는 사업가 마인드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학교를 인수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봐요. 학교를 통해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고 봐요. 그런데 당시 우리 학교에는 오전 수업이나, 재량휴업일이 거의 없었어요. 애들 밥 먹는 것 때문에 그랬죠. 학교를 하루 쉬면 1,500명분의 매출이 올라가지 않는 거니까요. 어떤 의미에서 우리 학교는 학사보다 식당이 우선순위를 점하고 있었어요.
저희 주장은 학교운영위원회와 인사위원회를 원칙과 기준에 따라 운영하자는 거였어요. 그런데 학교에서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거예요. 우리가 좀 더 강하게 요구하면 들어줄 줄 알았어요. 학교운영위원회와 인사위원회 정상화하자는 것은 돈이 드는 일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학교는 요지부동이었죠. “내 학교 내 맘대로 하겠다는데, 왜 너희들이 감 놔라 배 놔라 하느냐” 뭐 그런 식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 즈음에 모 고교에 있던 행정실장이 우리 학교로 왔어요. 그분의 제보와 협력이 있었죠. 그분이 봐도 학교가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던 거예요. 언제 터져도 터질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희는 그 분의 도움을 받아서, 지난 잘못은 문제 삼지 않겠다. 그러나 앞으로는 원칙과 기준을 가지고 투명하게 학교 운영을 한다는 뜻에서 민주적인 학교운영위원회와 인사위원회를 구성해 달라고 요구했어요. 하지만 학교 측은 꿈적도 안했어요. 학교는 사실상 이사장의 왕국이었거든요. 정말 초인적인 노력을 했죠. 이사장 집에 찾아가서 머리를 조아리고 말씀을 드리기도 했죠. 하지만 돌아온 건 육두문자였어요. 저는 그런 마음가짐을 가진 분들이 학교를 하시면 안 된다고 봐요. 학교 안에서는 도저히 희망이 보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저희 교사들과 행정실장이 제기한 의혹의 실체를 밝혀 달라고 교육청에 회계 감사를 요청했어요. 교육청에 공익제보를 한 셈이지요.
그러자 정말 감사가 나왔어요. 나오기 전에 감사관이 저희를 부르더라고요. 그리고 감사관이 대뜸 저희에게 “원하는 게 뭐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저희는 솔직하게 학교운영위원회와 인사운영위원회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기를 바란다고 했죠. 그랬더니 그 사람이 “바람이 너무 소박하다”고 하더군요. 잘 될 거라고 하면서 돌려보내더라고요.
2008년 5월경에 감사가 나왔지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일부 시정조치와 벌금 정도로 무마가 됐어요. 그 때 당시에는 사립학교의 교장이나 행정실장은 로비를 잘하는 사람들을 데려오는 경향이 있었어요. 공정택 교육감 때였죠. 사학과 교육청과의 유착관계는 거의 마피아 수준이었어요. 그래서 같은 사학이라도 빈부차이가 심했어요. 로비 여부에 따라 사학에 배정되는 지원금이 달랐죠. 지원금의 일부는 교육청 고위간부, 교육감에게까지 상납이 이루어진다는 얘기까지 들었어요. 로비 못하는 학교는 책걸상이 부서지고, 로비 잘하는 학교는 돈이 넘쳐났죠. 모 고교에서는 현직 행정실장의 공덕비를 운동장 한쪽에 세워주기도 했어요. 제가 교육의원이 돼서 알아보니, 공정택 교육감이 감사실에 “어떤 비리에도 사립 이사장들에게 주의 경고 이상을 주지 말라.”고 했다더군요.
우리 학교의 문제는 결국 교육청의 부실 감사로 무마됐어요. 믿었던 도끼에 발 등 찍힌 셈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우리와 협력했던 행정실장은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그렇다고 부실감사인 것을 다 알면서 그대로 덮기도 어려웠죠. 그래서 저희 교사들을 대신하여 전교조 서울지부가 검찰에 고발을 했어요. 하지만 검찰은 전교조가 고발했다는 이유로 제대로 조사를 하지 않았고, 증거불충분으로 오히려 면죄부를 주었어요.
공익제보의 대가, 파면
학교는 문제없는 학교를 문제 있는 것처럼 고발했다고 하면서 2009년도 2월 말에 징계 위원회를 소집했어요.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 저를 파면했죠. 저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어요. 학교를 위해 쓴 소리 바른 소리했다고 파면이라니……. 사실 그 때 저는 분회장직도 내려놓고 조용히 지내고 있었거든요. 일제고사로 사립에서 선생님 한분이 해직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저를 해직시킨 것이지요.
제가 정말 마음 아팠던 것은 일부 동료 선생님들의 모습이었어요. 양천고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제가 죄가 없고 파면시킬만한 이유가 없다는 걸 다 알아요. 그런데 저를 징계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징계위원회에 들어가 저를 징계하는 것을 도왔어요. 저를 이용해서 또 몇 분이 잘된 것 같아요.(웃음)
저는 사학의 특성상 아이들이 말 못하는 거 대변하려고 했고, 배운 대로 행동했고 가르친 대로 실천했을 뿐이에요. 정의와 양심을 얘기하던 제가 위기 상황에 내몰렸다고 어느 순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버리면 제자들에게 나쁜 교육적 효과를 남기게 될 것이라 생각했지요. 저 개인을 생각했거나 가족들을 생각했다면 학원으로 다시 가든지 꽃집을 하든지 했을 거예요. 하지만 제 제자들이 살면서 불의한 일을 만났을 때, 당당히 맞서도록 하려면, 제가 아무리 힘들어도 이 위기를 정면 돌파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임했지요.
1인 시위로 맞서다
부당한 해직에 맞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 생각하다가, 하게 된 게 1인 시위였어요. 학교에서는 1인 시위를 굉장히 민감하게 받아들였어요. 1인 시위를 못하게 하려고 별별 방법을 다 썼지요. 학교에서 1인 시위 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기도 했죠. 하지만 다행히도 법원에서 합법적인 것이라고 판결을 내주었어요. 그 이후에도 여러 방법으로 1인 시위를 못하게 괴롭혔어요. 매번 사진을 찍기도 하고, 수위 아저씨, 지킴이 아저씨, 행정실 직원들이나 재단 측 교사들이 와서 저나, 저를 돕던 사람들의 멱살을 잡고 실랑이를 하는 일도 있었지요. 저를 다짜고짜 폭행하려던 사람도 있었고요. 그런 일을 몇 번 겪고 나서는 시민단체와 동료 선생님들이 당번을 정해서 제 곁을 지켜주었어요. 혼자 두어선 안 되겠다고 생각한 거죠.
제가 정말 절망스러웠던 것은 국가기관의 무심함이었어요. 교육청에, 교과부에, 감사원에, 국가권익위원회에, 국가인권위원회에, 청와대에까지 제 억울한 상황을 호소했어요. 교육청, 교과부, 다 꿈쩍 안했어요. 교육청은 그렇다 쳐요. 교과부도 그렇다 치고요. 하지만 감사원에서 사립학교는 감사 대상이 아니라고 했던 것은 정말 납득할 수 없었어요. 의지의 문제예요.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립은 사실 거의 준공립이죠. 애들 수업료에다 인건비도 국가 혈세로 지원하는데 사립학교는 감사 대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인권위도 마찬가지였어요. 사립은 대상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돌아가는 상황을 보던 아내가 제게 “아무 것도 모르고 미친 짓 했다”고(웃음) 지금은 공익제보를 하면 포상금도 받아요. 하지만 그 때는 안 그랬어요.
정부도 일제고사나 시국 선언 같은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해직을 시켜서 법정싸움에 가게 되면 결국 다시 복직된다는 걸 알아요. 아는 데도 일부러 고생을 시키는 거죠. 그 과정에서 겪는 고초는 가족들을 고생시키는 괴로움이거든요. 한 번 당해보라는 거죠. 괴롭히겠다는 거예요. 그 때는 저도 벼랑 끝까지 몰렸어요. 그리스도인으로 정말 못할 생각도 했죠. 캄캄했어요. 죽음을 생각하기도 했죠. 나의 억울함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구나, 그 생각이 들더라고요. 전태일씨가 죽은 이유를 알 것 같았어요. 사람들이 왜 목숨을 끊는지 이해가 되더라고요. 이대로 억울하게 살 순 없고, 내가 죽어서라도 결백을 얻고 싶고, 내가 죽어서 교육비리 문제를 드러낼 수 있다면, 내 한 목숨이 헛되진 않겠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죠. 다행히 동료 선생님들이 저의 이런 생각을 눈치 채고 마음을 고쳐먹고 “죽겠다는 각오로 싸워보자” 이렇게 설득을 했죠. 그래서 계란으로 바위를 깨뜨리겠다는 심정으로 학교 앞에서, 검찰청 앞에서, 교육청 앞에서 1년하고도 1개월, 꼭 13개월 동안 1인 시위를 계속했지요.
서울시 교육의원이 되다
그러다 시민단체의 강권에 의해 교육의원 선거에 나가게 됐어요. 2010년은 교육비리가 사회적 이슈였지요. 저는 ‘교육 비리는 아이들의 꿈을 훔치는 도둑질’이라며 교육비리 척결을 가장 큰 공약으로 내세웠고, 해직까지 되면서 교육 비리와 싸우는 저의 진정성을 시민들이 알아주었어요. 전국에서 유일하게 기호 7번 받고도 당선되는 영광을 안았지요.
교육의원의 처우는, 솔직히 말씀드리면 한 학교의 교장 선생님만큼도 못돼요. 그러나 하기에 따라서 영향력은 막대하다고 봐요. 자료를 요구할 수 있고, 보도 자료를 낼 수도 있고, 교육감과 시장을 상대로 시정 질문도 할 수 있고 조례도 제정할 수 있어요. 저는 제가 잘나서 교육의원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아요. 약하고 못난 저를 하나님께서 들어 강하고 잘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뜻인 줄 믿어요. 제가 억울한 입장에 서봤기 때문에 부당한 일을 겪는 사람들을 도우려 애쓰고, 동시에 우리 사회에서 힘없고 소외된 분들을 대변하려 애쓰고 있지요. 특히 제가 노력해서 잘못된 것이 바로잡히고, 학생, 학부모, 교사들이 행복해진다면, 아니 조금이라도 그들의 짐을 덜어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저는 좋은 게 좋은 게 아니고 옳은 게 좋은 것이고, 더 나아가 옳은 게 옳은 것이라 생각해요. 어떤 사람들은 저보고 왜 그렇게 열심히 의정활동 하느냐 그래요. 왜긴요. 하늘과 시민들이 부여한 자리잖아요. 제가 나중에, ‘그때 잘할 것을’ 하는 후회가 없도록 혼신의 힘을 다하려 해요. 사람에게 초심, 열심, 뒷심 3심이 필요하다지요. 초심 잃지 않고 늘 최선을 다하는 교육의원이 되고자 해요. 교육문제가 사회적 화제가 되는 게 나쁘지는 않지만, 그러나 교육문제를 가지고 지나치게 이념적으로 대립하는 것에 저는 정말 마음이 아파요. “무상급식이나 인권조례가 싸울 일인가요?”, “함께 지혜를 모아 어떻게 하면 질 좋고 안전한 급식을 제공할까?” “어떻게 하면 학생들의 인권을 신장시켜 줄까?” 고민해도 모자라요. 아울러 교육문제는 제발 경제 논리나 정치 논리가 아닌 교육 논리로 접근하고 학생을 중심에 둔 교육 논리로 풀어야 한다고 봐요. ‘지금은 잔인한 경쟁교육을 행복한 협력교육으로 성숙해가는 과도기가 아닌가?’ 생각해요.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나라가 아니라 교육 덕분에 행복한 나라를 만들고 싶어요. 이것은 저만의 이상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핀란드 등 북유럽 국가에 가보면 이게 꿈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어요. 저는 우리가 그 나라와 같은 교육 시스템을 갖추지 못할 리가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제도와 인식만 바꾸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경쟁교육에서 협력교육’으로 교육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꿔, 정말 학생들이 다니고 싶은 학교, 학부모가 보내고 싶은 학교, 교사들이 근무하고 싶어 하는 학교 만들어야 한다고 봐요. 이 일을 위해 죽을힘을 다할 것입니다.
김형태 의원과 인터뷰를 하는 것은 무척 편안했다. 그는 일반적인 정치인들처럼 자기 자랑을 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그저 소탈하게 자기 안에 있는 것들을 꺼내놓았고, 그것들을 잘 정리하는 작업은 부담이 없었다. 정치의 영역에서 진정성을 지키는 일은 쉽지 않다. 진정성이 자기 욕심으로 점철되는 것을, 우리는 숱하게 보아왔다. 김형태 의원을 보며, 그가 진정성을 지켜가며 순례자의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를 두고 이와 같은 기대를 보내는 것은 깊은 어둠의 터널을 지나온 그의 삶에 미안함과 고마움이 묻어난 응원을 보내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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