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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평택 한광중학교 김재균 선생님


 



김재균 (평택 한광중, 기독국어교사모임)

10년 전부터 공교육 안에서 기독교적 가르침 운동을 시작해 왔다.

기독국어교사모임의 개척자이면서 이번에 새로이 대표로 임명받았다.

평택 기윤실교사모임을 섬기고 있고 협동학습연구회 전문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모이는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수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해야 하는 기독 국어 교사의 소명이라면
제가 순종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을 했죠.”

평택 한광중학교 김재균 선생님

묵묵히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순례자

글/사진 김 태 현


무엇을 하더라도 참 더디게 가는 사람들이 있다. 빨리빨리 성큼성큼 가고 싶지만, 기질상 돌다리를 두드리면서 느리게 느리게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수많은 실패 속에서도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 천천히 걸어가는 신앙의 사람들. 이런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에이브러햄 링컨이다. 수많은 낙선과 실패 속에서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 된 에이브러햄 링컨.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천천히 갑니다. 그러나 절대! 절대 뒤로 가지는 않습니다.”


이번 〈좋은교사 좋은만남〉에서 만난 사람도 참 더디게 가는 사람이다. 거북이만큼이나 한 걸음, 한 걸음 소심하게 내딛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절대 뒤로 가지 않았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조용히 걸은 사람, 그 사람은 김재균 선생님이다. 

2000년 그는 기독국어교사모임을 시작했다. 기독 교사 운동 처음으로 교과 모임이 만들어지던 때였다. 지금이야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수업 운동이 일어나고 있지만, 당시 기독 교사들의 주된 관심은 ‘학급 운영’ 혹은 ‘학원 복음화’에 있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그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택해 걷기 시작했다.

‘공교육 수업 속에서 기독교적인 가르침을 구현하자!’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기독교적인 수업이 반드시 해야 할 기독 교사의 사명이라 생각하고, 수업에서의 기독성을 열심히 파헤쳐 갔다. 모임이 시작된 지 5년이 되어도 두세 명밖에 모이지 않았지만, 그는 끝까지 이 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기독국어교사모임을 중심으로 ‘행복한수업만들기’라는 교과 운동이 꽃 피고 있다. 그의 작은 순종이 지금은 수많은 기독 교사들에게 수업에 대한 꿈과 희망을 주는 마중물이 되었다. 끝까지 한 길을 외로이 걸어온 사람, 김재균. 그의 이런 저력이 어디서부터 나왔는지 그의 삶을 되짚어 보기로 했다.


소심한 아이, 교회에 발을 들여놓다 !

부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6학년 때부터 교회에 다녔다. 수원에서 전학 와 외로웠던 그에게, 반장은 수요일마다 자기를 자전거로 교회까지 태워달라고 했고, 그는 반장을 교회에 태워다 주면서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 후, 그 친구가 무려 2년 동안이나 주일 아침이면 꼭 저를 데리러 왔고, 당시 한참 인기 있던 TV 만화 프로그램인 〈은하철도 999〉를 보고 싶었으나, 친구가 집에까지 찾아왔는데 그냥 보내기가 미안해서 교회에 나갔죠. 원래 무엇을 시작하면 끝까지 하는 성격이라서 복음이 뭔지도 몰랐지만 그냥 계속 다녔어요.”

그는 중학교 3학년까지 그저 교회 생활이 즐거워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일생에 절대 잊을 수 없는 회심을 체험하게 된다. 소위 말하는 ‘성령의 불’을 받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 수련회였어요. 아직도 저는 그때를 잊을 수가 없어요. 기다리던 수련회에 갔지만 고등부 임원 활동 때문에 굉장히 피곤했어요. 그래서 첫째 날 밤에 그냥 잠을 자려고 하는데, 문득 마음속에서 ‘기도를 해야 한다’는 간절함이 막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사실 3년 동안 신앙생활하면서 제 신앙에 대한 의구심이 많이 있었거든요. 뜨뜻미지근하고 기도도 찬양도 잘 못해서 어떤 열등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나도 오늘 밤만은 형들처럼 뜨겁게 기도해야겠다. 나도 방언을 받아서 불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기도하러 예배당에 올라갔고, 기도가 시작되는데 정말 신비한 체험을 했어요. 어릴 적부터 지었던 죄들이 영화 필름처럼 눈앞에 막 떠올려지고, 나도 모르게 방언이 터지는데, 가슴이 얼마나 떨리던지…. 그러면서 제 마음속으로 이 방언 기도가 내 죄를 고백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왜냐하면 제 마음이 너무나 아팠거든요. ‘예수님, 제가 이렇게 벌레만도 못한 놈인데 왜 저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나요? 목사님같이 훌륭한 분들을 위해서는 돌아가셔도 되는데, 저를 위해서는 죽지 마세요’ 하고 울부짖으면서 기도했죠. 그렇게 30분 정도 기도한 거 같았는데, 나중에 눈을 떠 보니 벌써 서너 시간이 지나 새벽이 되어 가더군요. 참회의 기도를 마치고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참, 그때의 기쁨과 감격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다음 날부터 말씀이 꿀송이처럼 달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불 일듯 일어나더군요. 성령 세례를 받은 거지요.”

이렇게 회심의 체험을 하고 나니 그의 삶은 달라졌다. 외모에 대한 열등감이 많아 사진을 찍을 때 웃지도 않고 찍었는데, 이제는 ‘나는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라는 높은 자존감이 형성되어, 오히려 호탕하게 웃는 모습이 매력적이라는 이야기까지 듣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등학교 야간 자율 학습이 끝나 밤 11시에 귀가할 때면 반드시 교회에 들러 기도를 했고, 금요 철야와 새벽 기도에 열심을 내어 교회 어른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기독 교사로의 부르심

  

그러던 중, 고 2때 다시 수원 변두리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집 근처 개척 교회를 섬기게 되었는데, 여기서 그는 거의 전도사 역할을 하게 되었다. 주일 학교 교사, 학생회 임원, 수요 예배 찬양 인도, 성가대 등 교회 모든 봉사 활동을 도맡아 했고, 심지어 대학 진학 후에는 타 교회에 집회를 가신 목사님 대신 수요 예배 설교도 했다고 한다. 그 때 가르쳤던 몇 명 안 되던 시골 주일 학교의 제자, 후배들이 지금은 목사로, 선교사로 성장하였고, 기도와 물질 후원을 통해 지금도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이렇게 열심히 교회와 사람을 섬기다 보니 마음속에 교사라는 꿈이 조용히 싹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국어 교사의 꿈을 품고,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한다.

  대학 시절은 ‘CCC 골수분자’로 살았다. 순원에서 시작하여 순장으로서 캠퍼스 곳곳을 누볐다. 특히 후배들을 가르치는 교육 순장 직분을 통해 교사에 대한 꿈이 더 견고해졌다. 교회에서 경험했던 주일 학교 교사에 이어, 사람을 키우고, 그들을 의미 있게 양육하는 제자 양육의 기쁨을 맛본 것이다. 그는 꼭 교사가 되겠다고 마음먹고 제대 후 복학해서 열심히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임용 고사 준비는 만만치 않았다. 사실 공부 자체에 대한 어려움보다는 교육학 공부가 주는 무의미함과 지루함이 너무나 싫었다. 복학을 앞두고 CCC 원단 금식 수련회에 참석해 교사의 꿈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묻는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교사로 불렀다. 걱정하지 말라”는 음성을 들려주신다. 결국 그는 과감히 임용

고사 준비를 접고 대학 마지막 4학년임에도 오히려 캠퍼스 선교부터 일본 단기 선교까지 더욱더 열정을 불태운다.

졸업이 다가와 유수한 미션 스쿨에 지원서를 넣었지만, 좀처럼 합격 통지가 오는 곳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서 준비해 두신 학교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과연 주님은 신실하셨다. 하나님은 그를 평택에 있는 한광여자중학교에서 교사로서의 첫발을 내딛게 하셨다.

  “사실 처음에는 조금 실망했어요. 평택에 있는 시골 학교라 솔직히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요. 교만했던 거죠. 하지만 하나님의 분명한 부르심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뜻을 찾아보기로 했어요. 초창기 3년은 제가 교사인지 목사인지 모를 정도로 열심히 선교 사역에만 매달렸던 거 같아요. 몇몇 선생님들과 《파인애플 이야기》라는 소책자에서 이름을 딴 ‘나눌파’라는 기독 교사 모임을 만들었어요. 매주 한 번씩 모임을 가지고, 기독 학생반을 만들고, CCC에서 배운 대로 점심시간마다 학생들 순모임을 했지요. 방학 때는 기독 학생회 수련회를 개최했는데, 거의 70~80명의 학생들이 참여했어요. 믿지 않는 선생님들의 견제도 있었지만, 참 신나게 사역했죠.”


수업 속에서 하나님을 찾다 !


  그는 5년차에 갔던 1정 연수에서 큰 충격을 받는다. 그것은 교사 본연의 임무에 대한 자각 때문이었다.

“1997년 겨울 방학 때 1정 연수를 가야만 했어요. 사실 조금 귀찮은 마음이 있었죠. 그런데 1정 연수에 계속 참여하면서 옆 선생님들을 보니, 내가 교사 생활의 방향을 선교 사역에만 집중했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 당시 전국국어교사모임(이하 전국모)이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분들의 수업 열정이 정말 대단하더라고요. 기독 교사로서 부끄러웠죠. 선교 활동은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국어 교사로서 국어 교육에 대한 전문성이 너무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1정 연수를 끝내고 2월 한 달 내내 수업 준비에 매달렸어요. 이때 1년 동안의 수업 준비를 다 끝냈어요. 그리고 1998년 중3 아이들과 1년 동안 수업을 하고 문집을 만들었는데, 제목을 《활어 같은 아이들의 작은 비상》이라고 했어요. 그 때부터 우리 반 급훈이 ‘사어(死魚)는 유수(流水)하고 활어(活魚)는 역수(逆水)한다’가 되었고, ‘활어 두레반’의 전통이 시작되었지요. 얼마 전, 그 당시 제자의 결혼식 주례를 서 주었는데, 그 해 국어 수업에 대해 대안 학교 출신 친구들과 나눠 봐도 전혀 뒤처지지 않은 다채롭고 의미 있는 활동들이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는 그렇게 열정적이고 전문성 있는 수업에도 불구하고 정작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한 느낌이었다고 한다. 곰곰이 짚어 보니 그것은 자신의 수업에 기독 교사로서의 관점이 거의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좋은 활동, 좋은 글, 좋은 영상 자료를 썼지만 그곳에 하나님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전국모에서 구한 자료는 내 것이 아니다. 남의 옷을 억지로 입은 것 같다.’ 그 자료들은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은 많았지만 대안이 없는 것 같았어요. 무언가 마음속에 공허한 느낌, 알 수 없는 허전한 느낌이 계속 드는 거예요. 그러면서 저는 고민했죠. 수업에서의 기독성은 무엇일까? 전국모에 계신 선생님들은 그들 나름의 세계관으로 수업을 하고 있는데, 크리스천인 나는 어떤 수업을 해야 하는가?”

그러나 자신이 대학 시절부터 훈련받았던 CCC 나사렛(CCC 졸업생 모임)은 물론이고, 신우회나 기독 교사 단체 중 어느 곳도 그의 이런 고민에 대한 명확한 답을 주지는 못했다. 사실, 역사적인 98 기독교사대회에 불참한 것도 ‘기독 교사들의 연합 모임이라고 뭐 새로울 것이 있겠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그에게 드디어 하나님께서 길을 보여 주시는 전환점이 오고야 만다.

2000년 1월, 기독교사연합(당시 기독교사대회 조직위원회, 현재 좋은교사운동)에서 기독 교사의 전문성 계발을 위한 교사 캠프를 열게 되었는데, 그는 여기서 드디어 ‘기독교적 교과 지도’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리고 성서교육회 이춘근 선생님의 《기독교적 국어교육》 논문에 은혜(?)를 받고, ‘연장자’라는 이유로 엉겁결에 기독국어교과모임(기독국어교사모임의 전신)의 대표를 맡게 되었다. 이 우연의 역사가 훗날 행복한수업만들기 운동으로 이어지게 되니, 하나님의 역사는 실로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놀라움 자체가 아니겠는가.


기독교적 가르침, 그 길을 우직하게 걷다

 하지만 모임을 꾸려 나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모임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자 서너 명의 선생님만이 모였는데, 2년 정도 지나면서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경북 포항에서 한 달에 한 번씩 기차를 타고 열정적으로 참석했던 손지원 선생님(구미 TCF)이 결혼으로 인해 올라올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좋은 동역자가 돼 주었던 엄화정 전도사님(산울 어린이학교 교장) 또한 개인 사정으로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어려워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내를 가지고 모임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 여겼고, ACTS 교육 대학원 졸업을 전후하여 기독교사대회 강의와 드림 교사 연수 등을 통해 동역자를 기다린다.

마침내 하나님은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셨다. 차성도 교수님(강원대 물리학과, 춘천 V스쿨 교장)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학교 교재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시키신 것이다. 이를 계기로 그는 곽미경(휴직하고 태국 선교 활동 중), 염지선 선생님(목동 신목고)을 만나 다시 ‘기국모 시즌 2’를 꾸리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모임은 서너 명이었다. 솔직히 김재균 선생님도 마음이 어려웠다고 한다.

“사실 모임을 할 때마다 늘 두 마음이 갈등을 했어요. ‘과연 내일 기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가야만 하는가? 어차피 모여 봤자 세 명인데, 동일한 비전을 소유한 크리스천 국어 교수를 찾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나에게 그만한 전문성이 있는 것도 아닌데, 모임은 해도 그만이고 안 해도 그만이 아닌가?’ 그런데도 제 마음 가운데 이 모임을 어떻게 해서든 운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모이는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수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해야 하는 기독 국어 교사의 소명이라면 제가 순종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을 했죠. 매번 모임 전날 밤이 되면 마음속으로 이렇게 기도했어요. ‘주님, 내일 염 선생님과 곽 선생님 두 분이 다 빠진다고 하면 모임을 그만두라는 사인으로 여기겠습니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모임을 할 때 두 명 다 빠지는 경우는 없더라고요.(웃음) 둘 중 한 명은 꼭 모임에 참석하는 게 아니겠어요. 그렇게 세 명이 2년 동안이나 모임을 꾸려 갔지요. 그러다가 2005년에, 광야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생수와 같은 김태현 선생님(기국모 전 대표, 좋은교사 상근 휴직 중)이 합류했고, 최지현 선생님(독수리 기독중), 이시원 선생님(분당 샘물중), 2006년에는 류한나 선생님(일산 백석고)을 하나님께서 보내 주셨고, 2007년부터는 봇물 터지듯 많은 선생님들이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우리 모임에 오셨죠.”

김재균 선생님을 중심으로 세 명이 간신히 모임을 유지한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독국어교사모임을 귀하게 사용하셨다. 기독국어교사모임이 2008년부터 좋은교사운동이 시작한 행복한수업만들기 운동의 거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행복한수업만들기 초등 모임, 중등 사회, 중등 음악, 중등 한문 등 많은 교과 모임들이 기독국어교사모임을 통해 ‘기독교적 가르침’이라는 거대한 벽을 서서히 넘기 시작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서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고전 1:25~29)

세상에는 잘난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이런 잘난 사람들을 잘 선택하지 않으신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해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신실한 사람을 좋아하신다. 어떤 상황에서도 한 우물을 끝까지 파는, 신실한 그 한 사람. 하나님은 비록 인간적인 기준으로 잘나지 않았더라도, 그 한 사람을 통해서 수많은 열매를 맺어 가신다. 김재균 선생님이 바로 그런 분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소명을 붙들고 그저 천천히 걸어가는, 그러나 뒤로 가지는 않는 사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성실하게 모임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을 쳤던 그의 고백이 아직도 귓가에 울린다.


“혼자서는 할 수 없지만, 누군가가 온다면 몇 명이 오더라도 저는 이 자리를 지킬 것입니다. 기독교사대회나 좋은교사연수 때마다 수업에 대한 목마름을 가지고 참석하는 선생님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비록 숫자가 적더라도 지금 이 모임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도 서울 기독국어교사모임은 네 명이 모인다. 하지만 모임을 꾸려 나가는 대표의 모습은 여전히 힘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