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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사람이 적게 간 길 (2016.11)

사람이 적게 간 길


전재영 (대전하기중학교, 행복교육실천운동 대표)

 



인터뷰 주종호 정리 김현경

 


 

문학소년

어릴 때는 책을 정말 좋아했어요. 어머니께 밤에 어두운 게 무서우니 방에 수면등을 달아달라고 했는데 사실 진짜 이유는 책 보고 싶어서였어요. 큰고모가 서점을 시작하실 때 아버지는 큰 맘 먹고 문학전집 사오셨는데 그것을 매일 한 권씩 읽었어요. 그 정도로 늘 책을 끼고 살았죠.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학교 대표로 백일장이나 독후감대회도 늘 나갔죠. 대회 시즌이면 한 달에서 두 달 동안 방과후에 따로 남아 쓴 글을 지도받곤 했어요. 그런 생활을 했었던 것이 힘들면서도 좋았어요. 무표정으로 제 원고를 빨간 펜으로 고치던 선생님 기억이 나네요.

중학교 2학년 때 국어선생님께서 시를 쓰려면 밖으로 나가야 한다면서 중2 남학생들을 데리고 화창한 가을날에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서 시를 쓰라고 하셨어요. 그날 기억이 생생해요. 제가 그때 쓴 시의 제목은 낙엽 뒤로였어요. 얼마 전까지도 서랍에 보관하고 있던 것을 이사하면서 잃어버린 것이 아쉽지만 조금 기억에 남는 구절은 낙엽 뒤에 무엇이 남는가 (중략) 낙엽 뒤엔 그리움만 남았다이런 내용이었어요. 당시 작은고모가 선물해준 명시낭독 전집 테이프를 들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시를 흉내 내서 쓴 거지요. 선생님께서 저의 시를 낭독 해주시면서 중2가 쓴 시라기에는 아깝다고 말해 주셨어요. 오랜 기간 그 말씀이 기억납니다. 그때는 정말로 시인이 되고 싶었어요.

그 때의 추억 때문인지 지난 학기에는 수업 전에 시를 한 편씩 낭독했어요. 저와 같은 공동체의 임진묵 선생님이 지족고 학생들과 함께 출판한 동물원 야간개장을 활용했어요. 수업 전에 아이들과 함께 나누는 시 한 편이 참 좋더라고요. 학생들이 수업에도 집중하게 되고요.

 

교사가 되기까지

사실 담당교과는 과학이에요. 시인이 꿈이었던 문학소년이었지만, 어른들의 의사에 따라 당시 시골에서 제법 인기였던 공업계로 진학하려 했어요. 중학교 3학년 담임이셨던 복미화 선생님은 공고 가는 것보다 공대가면 더 낫지 않겠냐고 하셨고, 어른들께 문과가 아닌 이과로 가는 조건으로 인문계에 가는 것을 허락받았죠. 그런데 이과 공부는 저한테 정말 안 맞았고 성적도 계속 떨어졌어요. 오기가 생겨서 한 우물을 팠는데 그 과목이 물리였어요. 처음엔 힘들었는데 계속 하니까 조금씩 익숙해졌죠. 어느 날 주위 친구들을 보니 다들 물리를 포기하는 거예요. 그러다보니 점점 두각을 보일 수 있었죠. 대학교 진학할 땐 순수 물리학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그보다는 물리교사가 되기로 하고 교원대학교에 입학했어요. 사실 그러고도 교사의 길은 제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죠.

3학년 교생 실습에서 한 학생을 만나면서 교사로 살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어요. 교생 첫날 얼떨결에 들어간 교실에 그 학교 가장 심한 문제 학생이 있었어요. 반 친구들보다 두 살 많은 아이였어요. 그 아이는 제게 먼저 말도 걸고, 저와 제법 친하게 지냈어요. 그러다 실습 3주차가 되던 날, 학교에 경찰이 왔어요. 폭력배들 간의 싸움과 연루되어서 조사를 온 것이죠. 경찰에게 조사받는 아이의 모습을 보았어요. 그런데 이 아이 눈빛이 포획된 사슴 같은 눈빛이었죠. 조사를 마치고 복도에서 마주친 저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숙이면서 한 말이 저 아니에요.”였습니다. 그 날이 교사로 살겠다고 결심한 날이에요. 그때 교사라는 게 뭘까, 그런 뜨거운 마음이 들었어요.

사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대학 때까지 마치 1,2월의 긴 겨울을 지났다고 생각해요. 고립의 시간이었고 우울감에 삼켜들었던 시간을 보냈어요. 그런 어두움을 지나왔기 때문에 그 아이가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아요. 아이의 그때 눈빛에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런 아이들과 같이 길을 걸어주는 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신규시절

첫 발령지는 충남기계공고였어요. 발령 두 달 후에 군대에 다녀와, 2년 뒤에 2학기 복직을 했습니다. 복직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제 말을 듣지 않는 학생들을 보면서 저는 권위를 세우려고 애썼어요. 하지만 아무리 심하게 혼을 내도 비웃는 아이들의 표정을 보면서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하는 자괴감이 일었죠.

같은 해에 발령 받았던 과 후배와 만나 그런 고민을 함께 이야기 한 적이 있어요. 그날 내가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저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뭘까?’라는 새로운 고민을 하게 되었어요. 다음날 저는 뿅망치를 들고 교실에 들어갔어요. 열 가지를 가르쳐봤자 단 한 가지도 듣지 않고 자는 아이들, 수업을 거부하는 아이들과 실랑이하지 말고 그냥 하루 정도는 같이 놀자는 마음이었죠. 한 시간 내내 게임만 했습니다. 다음날에는 칠판에 그림 하나 그린 다음 또 게임을 했어요. 한 가지 수업 내용을 반복하면서 기억하도록 하는 게임이었죠.

첫 발령지에서의 여러 경험은 이후 교사로 사는데 많은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한편으로 충남기계공고 우리 반 아이들 중에 밥을 제대로 먹고 다니는 아이가 3분의 1밖에 안되었거든요. 사연도 어려움도 많은 아이들이었죠. 다음 발령지는 신탄진고등학교였는데 그곳에서도 어려운 아이들 많이 만났어요. 지금 하기중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가운데는 경제적인 어려움 겪는 아이는 많지 않지만, 영적인 빈곤함이 많이 보여요. 신규시절부터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지 고민했던 경험이 쌓여, 지금도 아이들의 어려움을 보게 되는 것 같아요.

 

기독교사?

신탄지고로 근무지를 옮기면서 지금 다니고 있는 교회에 정착하게 되었어요. 지금의 목사님을 만나며 제 삶이 많이 변하게 되었어요. 마음에 오랜 쓴 뿌리가 있는 제게, 내 안을 보지 말고 예수를 바라보라는 말씀을 전해주셨죠. 그러던 중에 맹학교에 근무하시던 형수님의 소개로 아내를 만나 180일 만에 결혼했어요. 아내는 과거의 내가 어땠든지 현재의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해준 사람이었죠.

초등교사인 아내는 CCCTIM의 전신인 JEMO 모임에 참여하고 있었어요. 첫 아이 임신 중에 JEMO 겨울수련회 강의를 맡았었는데, 별안간 강의를 제게 맡기는 거예요. 몸이 불편해서 수련회 때 강의를 하기 힘들고, 강의주제가 창조과학이니 물리교사인 제가 더 잘 할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결국 수련회 한 파트 강의를 맡아 처음으로 기독교사모임인 JEMO 겨울수련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조금은 어리둥절한 가운데 한 시간짜리 강의를 했고 그곳에서 전국적인 기독교사 단체가 있다는 것과 좋은교사운동이라는 연합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기독교사와의 두 번째 인연은 바로 2006 기독교사대회였어요. 아내가 대전지역 후배들에게 기독교사대회 참석을 권하며 저까지 덩달아 대회에 참석하게 되었어요. 저는 이렇게 많은 선생님들이 모여서 기도한다는 사실이 충격이었고 한편으로 도전을 받았어요. 같은 방에서 GBS를 하며 만난 김태윤 선생님이 2006 대회를 계기로 대전지역에 기독교사모임을 만들었어요. 그 모임이 이어져 지금 제가 속해 있는 행복교실실천운동이 된 것이고요. 그 후로도 기독교사대회는 참석했지만 기독교사모임에는 참석하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전에도 교사단체가 아닌 다른 선교단체에 있었고 선생님들과 모임을 갖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죠.

 

교사로서 고민이 깊어지는...

2006 대회 후에 첫째와 둘째 아이가 태어나며 육아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던 때가 있었어요. 그 즈음 한 제자의 자살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교회에 다니는 제자가 제게 조용히 다가와 선생님 ○○이 기억하시죠? 얼마 전에 자살했어요.”라고 말하는 거예요. 대략 한 달 전 교회로 가던 육교 위에서 저벅저벅 걸어가는 그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저 녀석이 왜 이렇게 힘없이 걷지하는 생각에 친구와 함께 불러 이야기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는 잊고 지냈는데, 바로 그 아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거였죠. 어려운 환경에서도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고, 교원대 제 후배로 입학한 녀석이라 항상 마음한편에 관심이 있었던 제자였습니다.

그날 고향 친구와 저녁식사를 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이 결국 대학입시 문제 하나 더 풀게 해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못 찾겠다고 하소연 했어요. 그러고 나서 그동안 유령회원으로만 지내던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찾기 시작했고 입시교육에 마음을 빼앗긴 고등학교를 떠나 중학교로 갈 결심을 했습니다. 하지만 겪어보니 중학교에 왔다고 해서 입시교육에서 멀어진 것도 아니었어요. 고등학교 경력이 있는 저는 중34년간 맡아서 고교입시를 담당하였고 각종 스펙을 위한 업무들을 많이 하게 되었죠. 이런 학교 현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의 의미를 잃어버리기 시작했어요.

그러던 중에 학교 연구동아리가 만들어지고 제가 총무를 맡으면서 주제를 수업친구로 공모를 했었어요. 공모는 떨어졌지만 그때 인연으로 나중에 박윤환 선생님과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행복한수업코칭연구회(행수연)에서도 함께 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점점 기독교사모임에 발을 담게 되었죠. 모임에 참석하면서 도대체 이 사람들은 뭐지? 나도 이 모임에 함께 하고 싶다는 강한 끌림이 있었죠.

 

행복교실실천운동

대전지역에 기독교사모임이 커지면서 우리들만의 정체성을 갖고 단체를 만들자는 고민이 이어져 2015행복교육실천운동’(행복교실)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모임이 출발했어요. 올해 좋은교사운동과 단체협약을 맺었죠. 정회원이 40여명인 작은 단체입니다. 뜻을 같이하는 40여분의 선생님이 더 계시고 교수선교회, 교사선교회 대전지역모임, CCCTIM 대전지역모임 선생님들과 함께 연합사역을 하고 있어요. 회원 수는 적지만 대전이라는 한 장소에 밀집해 있어서 더 큰 힘을 낼 수 있죠. 행복교실은 이제 막 정비되고 성장하는 때예요. 맞닥뜨리는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저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행복교실에서 내가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일까 고민하면서 제가 감당해야 할 사명은 무엇인가요?”하는 기도를 많이 했죠. 그때 들려온 세밀한 음성은 아무것도 하지마라.”였어요. 나를 대표로 세우신 이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말라니. 이것이 정말로 주님이 주시는 음성인지 다시 기도해 보았지만 같은 응답이었어요. 잠잠히 생각해보니, 생각 많고 스스로 일을 만들고 해내려는 제게 스스로 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게 하시려고 말씀을 주신 것 같아요.

작년에 대전지역 기독교사를 모으기 위해 밴드를 만들면서 300명의 선생님이 모이기를 기도했어요. ‘300’이라는 숫자는 대전 지역의 300여개 학교마다 한 분의 기독교사가 서기를 바라는 마음과 기드온의 300 용사를 떠올리며 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300명의 의미를 잘 살펴보니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사사기 7:2)라는 말씀이었어요. 제 기도에 응답해주신 것과 동일한 말씀이었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기억하라는 말씀이요.

저는 행복교실의 공동체성이 참 좋습니다. 합의를 이루어나가는 과정, 다함께 합의가 된 일이라면 발휘되는 응집력, 그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어요. 이렇게 지금은 행복교실의 기초와 틀을 만들어가는 때라고 생각해요. 더 멀리 가기 전에 준비하는 단계 말이죠.

 

한 사람으로서 내가 살고 싶은 삶?

3년 전까지만 해도 제가 가장 많이 생각한 것은 퇴직이었어요. 그때까지도 교직에 있는 게 싫었죠. ‘교육에 희망을 걸 수 있을까? 다음번 학교가 마지막 학교다.’ 늘 생각했어요. 행복교실 만나고 초기에도 그런 얘기를 많이 했어요. 그런데 행복교실을 만나면서 부터는 교육의 회복을 위해 복음 들고 애쓰는 선생님들을 많이 만나게 돼요. 그러면서 저도 점차 희망을, 희망이라기보다도 소망을 품게 되죠.

지금까지 제가 해온 역할은 깃발을 들고 있는 것이었어요.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지역모임에서도 그렇고, 교회에서도, 학교 신우회에서도, 수업나눔모임에서도 그랬죠. 지금은 행복교실에서 깃발을 들고 서 있는 때 같아요. 제가 이 깃발을 들기 전에는 누군가가 들고 있었고, 저는 건네받은 거지요. 제가 그저 서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 깃발 아래서 동역자를 만나게 해주시고 모임을 풍성하게 해주시는 것을 늘 경험했어요.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믿습니다. 지금까지 외롭다고 생각한 시절이 많았지만 사실 누구보다 하나님이 함께 해주셨죠. 더욱이 요즘에는 든든한 지원자인 아내와 자녀들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한 사람으로서 지금 바라는 것이 있다면, 평교사로 영향력을 미치는 교사가 되고 싶다는 거예요. 주변 사람들이 승진을 많이 권하고 있어요. 관리직이 되면 물론 할 수 있는 일이 많겠지만 실제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어요. 예수님이 평범했던 어부들을 제자 삼으시고 그들이 또 제자삼고 그랬던 것처럼 저도 평교사로 동료 교사들 사이에 섞여서, 그 중에서 좀 더 희망을 주는 사람으로 힘닿는 데까지 살고 싶어요. 그 길이 제가 택한 길이라고 생각해요.

 

가지 않은 길

 

 로버트 프로스트

 

노란 숲 속에 두 갈래의 길이 있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한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거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을 남겨 두었습니다

길이란 끝없이 이어져 있어 계속 가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거라 여기면서요

 

훗날에 나는 어디에선가

한숨을 쉬면서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