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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캄보디아에서 붙드는 교육의 소망 (2016.12)



캄보디아에서 붙드는 

교육의 소망


유태종 (캄보디아 프놈펜 좋은학교 교사선교사)







정리 김현경

 


은혜로 운영되는 학교

프놈펜 좋은학교는 현지에서 교육에 어려움을 겪는 MK(Missionary Kids, 선교사 자녀)를 지켜보며 기도하던 중 현지에서 뜻을 함께 하는 선교사님 몇 분을 만나 함께 세운 학교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워갈 다음 세대 하나님의 선한 일꾼을 양육하려는 목적으로 캄보디아 프놈펜에 설립된 기독교학교이며 MK학교이죠. 저희 가족이 MK 사역을 하기 위해 캄보디아에 파송된 건 20083월이었고, 20103월에 학교가 설립되었어요. 첫 해 7명의 MK8명의 교사로 시작해서 지금까지 중등 4, 초등 5, 유치원 2회 졸업생이 나왔고 현재도 MK와 기독 가정의 자녀들 20명이 배워가고 있습니다.

프놈펜 좋은학교가 일반 학교와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시장경제의 구조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기반으로 운영된다는 것입니다. 설립 초기부터 지금까지 반복되는 어려움이 있다면 늘 교사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재정을 내어 교사 월급을 줄 수 없기에 교사선교사가 스스로 선교후원을 받아 와야 하는 구조로 지금까지 왔습니다. 우리 학교는 마치 하늘에서 비가 내려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천수답처럼 교사선교사들이 학교로 파송되어 오셔야 교육이 가능하죠. 설립 후 매 해 어려움을 겪었고 특정 교과목 교사가 없는 경우도 있었지만 감사하게도 학교로서 기본적인 것을 채울 수 있어서 지금까지 이곳에서 MK 교육을 감당해 가고 있습니다.

 

밭을 사는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다

교사선교사로 사는 삶, 시작은 2000년 기독교사대회 때인 것 같아요. ‘MK’라는 말을 처음 듣게 된 것도 그때예요. MK 사역에 대한 선택특강을 들으면서 스쳐가듯 제 마음 속에 일어났던 생각 하나를 기억합니다. ‘교직의 십일조’. 삼십 년 이상을 교직에 있는다면 삼사 년 그런 일을 하면 좋겠다. 정말 그냥 그런 생각이 제 안에서 일어났었습니다.

그 후 2005년 기윤실교사모임의 여름 수련회에서 선택특강으로 꿈사랑배움터를 소개하는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꿈사랑배움터는 기윤실교사모임에서 캄보디아로 2주 동안, MK 단기선교를 가는 전문모임이죠. 강의에 참석한 몇몇 선생님들과 마음이 모아져서 3기 캄보디아 꿈사랑배움터로 가기로 하였습니다. 한 학기 동안 부지런히 준비하여 다음 해 1월초 캄보디아에 가게 되었죠.

갔다 온 이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인생을 뒤바꿔 놓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해 봄 어느 아침 기도하는 중이었어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이 납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말씀하시는 사도행전 169절이 생각났지요. 그러면서 마음에 너는 환상을 본 게 아니라 가서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지 않았느냐?’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저에게 그 순간은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순간이었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태복음 13:44) 밭에 감추인 보화를 보지 못한 사람들은 쓸모없어 보이는 밭을 사는 사람보고 미쳤다, 어리석다.” 할 겁니다. 그게 당연하죠. 하지만 보화를 발견한 저는 그 밭을 사기 위해 소유를 다 파는 것이 하나도 안 아까웠습니다. 저는 마음속 음성을 들려주신 분이 주님이심을 믿고 바로 순종했습니다. 저는 20072, 17년간 몸담았던 인천의 한 사립중학교에서 교사직을 사직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MK를 위한 교사선교사로 살아가고 있죠.

 

집 떠난 자식을 기다리신 아버지

고등학생 시절엔 술, 담배에 본드까지 했던 학생이었어요. 2학년 말에 이러다가 완전 양아치 인생이 되겠다는 생각에 공부를 하기 시작했죠. 그래도 공부한 것이 도움이 되었는지 1982년 인하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했습니다. 대학 땐 문학적 낭만과 사회 변혁에 심취했었죠. 19884학년 2학기 때는 대한항공 특채를 받기도 했어요. 그때 사람이란 참 이기적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회 변혁적 문학을 표방하며 한국 재벌을 천박한 자본주의라고 비난했는데, 취업의 문턱에서 특채라는 선물(?)을 받아들인 거죠. 스스로에게는 이 일이 기가 막힌 모순이었나 봅니다. 정체성의 혼란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면접 이틀 전에 술에 잔뜩 취해 길병원 앞 남동대로 중앙분리대 풀밭에 쓰러져 잠들었어요. 지쳐버린 눈에 잠시 비친 푸른 병원 십자가가 마치 병원의 차가운 수술 칼처럼 제 마음 깊은 곳을 절제하는 듯했습니다. ‘이제 그만 돌아가고 싶다.’ 어디로 돌아가야 할 지 몰랐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제 영혼은 이제 그만 쉴 곳을 찾아 돌아가고 싶었죠.

대한항공 특채의 기회(?)를 떠나보내고는 편집전문회사 한 곳에서 편집 기자로 사회생활을 했습니다. 일을 한지 8개월 만에 그만두고 실업자로 있을 때, 정말 싫었지만 어머니 소원 들어드린다는 생각으로 함께 기도원에 갔습니다. 그때 기도하고 회심하며 스스로 생각해도 놀랄 정도로 아버지의 나라로 복귀하게 되었어요. 어제와는 완전히 달라진 삶으로 말입니다. , 담배 하던 삶이 바로 정리된 것은 아니었지만 회심한 이후 세계관이 달라진 것만은 분명했죠. 하나님께 점점 가까이 나가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검정고시 학원 강사 자리를 얻게 되고 나중에는 모교의 중학교 국어교사로 가게 되었어요. 그렇게 교사의 삶이 시작된 거죠. 그곳에서 주님의 은혜로 학교 클럽활동에서 이미 조직되어 있었던 기독학생반 교사를 맡게 되었고, 신우회 총무로 섬길 수 있었어요. 감사하게도 두 일 모두 퇴직할 때까지 할 수 있었어요.

 

인생의 중심에 자리 잡은 부끄러움

제가 처음으로 교직을 하게 된 해인 1990년은 교사로서 최악의 사건을 겪은 해이기도 합니다. 교실에서 제가 학생을 팬 거예요. 그때 저는 특별한 교육철학도 없이 되는 대로 가르쳤고, 혈기가 뻗쳤던 28살이었어요. 3학년 21교시 수업을 진행하는 중이었습니다. 수업에 열중하고 있는데 한 학생이 문을 열고 들어왔죠. 지각하면서 문을 쾅 닫는 게 여간 속을 뒤틀리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묵과할 수 없어 그 학생을 불렀는데 반항하는 듯 반응하는 거예요. 그 모습에 순간 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아이는 제 앞에서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잘못을 빌 때가지 맞았습니다. 주먹을 사용했고 심지어 발길질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할 뿐이죠.

그 시간 이후 얼마나 자책했는지 모릅니다. 기도하다가 문득 그 생각이 나면 부끄러웠습니다. 하나님께 잘못했다고 회개했지만 그 아이에게 잘못을 사과하지 않으면 제대로 뉘우친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가끔 교사 체벌 건이라든지 비슷한 얘기를 듣게 되면 어느새 그 경험이 제 인생의 중앙에 떡 버티고 저를 쳐다보는 느낌이었습니다. 나름대로 교사로서 바로 가르쳐 보겠다고 하면서 십여 년 세월을 보내고 나서도, 누군가 제게 참 좋은 선생님이라는 말을 해줄 때에도 전 결코 속으로 저를 좋은 교사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전 한때 폭력 교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10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고, 저는 그 아이를 찾아 지난날의 제 행동에 대해서 꼭 사과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제 의지는 확고했습니다. 앨범을 뒤져 바뀐 전화번호를 수소문해보았지만 결국 만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습니다. 바쁜 시간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점차 그 생각도 거의 하지 않게 되었죠.

 

10년이 걸린 회개

어느 날 저는 청소기 부품을 사려고 한 대리점에 들어갔습니다. 들어가자마자 한 직원이 눈에 익었는데 저와 눈이 마주치자 제 시선을 피하는 눈치였어요. 저는 굳이 다가가 저를 아느냐 물었죠. 흔들리는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던 그 직원은 머리를 긁적이며 선생님께 무지하게 맞은 적이 있어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름을 물었고, 그의 입술 밖으로 나오는 대답에 순간 저는 놀람과 반가움에 전율할 수밖에 없었어요.

오정모(가명)입니다.” 참 오랫동안 만나고 싶었던 아이였습니다. 저는 정모의 반응에 상관없이 손을 잡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정모는 무안해 하는 표정이 역력했어요. 전혀 예측도 못했던 일을 갑자기 당하는 정모에게 짧은 시간 동안 그 때 그 일을 사과한다는 것이 무리라는 생각을 했죠. 일이 바빴던 정모와 그날 이후 어렵사리 약속을 정해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어요. 정모는 근무 때 입는 점퍼를 걸치고 나왔고 속에는 넥타이와 셔츠로 단정한 차림이었어요.

식사를 하면서 정모가 중학교 때 어려운 때를 보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부모의 이혼이 가져온 가정의 약화가 정모의 삶 가운데 꽤 오랜 기간 동안 어둔 그늘을 드리웠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알게 되었죠. “그랬구나.” 우리는 서로에 대한 동질감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직장에서의 비전도 들었죠.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정모가 신앙을 가졌다가 지금 떠나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주 떠난 것이 아님을 느꼈던 기억이 나요. 그러다 우리는 제가 가져간 카메라로 식당 직원에게 부탁을 해서 사진을 찍고 헤어졌어요. 지난 시간을 어느 정도 정리하며 회포를 풀 수 있었고, 무엇보다 정모가 저를 이해해준 것이 감사했습니다. 지난날의 악연이 오히려 좋은 인연이 된 점에 대해 서로 감사했던 시간이었어요. 지금은 소식이 끊기기도 하고 선교지에 나와 있어서 정모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앞으로 꾸는 꿈

비록 규모는 작지만 우리 학교에서는 하나님 말씀을 신뢰함으로 영혼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인격적인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교육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에서 소망을 보게 돼요. 그 바탕 위에 학문을 세우고 이웃과 세계를 섬기는 청지기로 우리 아이들이 자라나기를 꿈꾸죠. 장차 우리 아이들이 가는 곳마다 주님과 함께 그곳을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해갈 것을 믿어요. 오늘 제가 만나는 아이들을 요셉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로 바라봅니다.

어려운 학교 현실은 물론 여전합니다. 몇몇 장기 교사선교사를 제외하고는 단기로 오시는 선생님이 대부분인지라 매년 교사 이동이 잦아요. 올해도 학기가 끝나는 12월 말이 되면 15명 가운데 9명의 선생님이 그만두십니다. 그래서 우리 프놈펜 좋은학교 학생과 교사와 학부모는 늘 기도하죠. 여전히 내년 학교 운영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최근 학교에서 큰 결정을 했어요. 교사선교사로 파송받고자 하지만 후원이 어려운 분을 위해 학교에서 1년 비자비와 원룸을 얻을 수 있는 정도의 숙소비를 제공하기로 했죠. 사실 학교의 재정 상태로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믿음으로 결정을 내렸고 기도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프놈펜 좋은학교가 온 길을 돌이켜 보면 주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었음을 절로 고백하게 돼요. 우리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지나고 소망이 다 사라진 것 같았을 때도 주님께서는 늘 프놈펜 좋은학교를 붙들어 주셨죠. 우리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점점 어려워지는 교육적 상황이지만 오늘도 프놈펜 좋은학교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주신 교육의 소망을 붙들고 기도하며 한 걸음씩 믿음의 걸음을 옮기고 있습니다.

지금은 부족하지만 아이들을 사랑과 정의의 손길로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인애로우신 전능자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살아계신 분임을 오늘도 저는 믿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저는 우리 주님을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