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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속도보다 방향을, 나만의 스토리를 (2017.1)



속도보다 방향을

나만의 스토리를



정창규 (군포 둔대초등학교)

 




인터뷰,사진 김현경

 

  

선교사 마인드 교사가 되다

처음으로 교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어요. 비평준화 지역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저나 친구들 대부분이 맹목적으로 공부해서 일단은 점수를 높여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죠. 시험 기간이었는데요. 3일 째쯤에 한 친구가 안 오더라고요. 담임선생님이 오셔서 친구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셨어요. 그런데 장례식장에 30여 명 우리 반 친구들 중에 8~9명 밖에 안 온 거예요. 다음날 시험이 있으니까 공부한다고요. 이걸 보면서 1차로 충격을 받았었죠. 저는 선생님이 어떻게 친구의 죽음 앞에서 이럴 수 있냐고 분명히 노발대발하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별 말씀이 없으셨죠. 저는 그때 2차 충격을 받았어요. 중요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왜 선생님이 이런 이야기를 안 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내가 선생님이 된다면 학생이 여러 일로 힘들 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죠.

3때는 제게 많은 부분에서 영향을 주었던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운동을 무척 못 하시면서도 학생들과 운동하고 놀고, 교사로서도 굉장히 능력 있는 선생님이셨어요. 선생님께 교사가 되고 싶었던 마음을 이야기했을 때, “선생님 되는 것이 정말 의미 있다. 창규 너는 선생님이 되면 적성이나 소질에 잘 맞을 것 같아.”라고 말해주셨죠. 본인 사대 시절 이야기도 많이 해주시고 교사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많이 이야기해주셨어요. 지금은 중학교 교장선생님으로 계시는데 꾸준히 연락을 하고 있죠.

그렇게 사범대학에 입학했어요. 대학에 들어가서는 교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도 하였지만 친누나의 권유로 먼저 선교단체를 찾아보게 되었어요. 많은 선교단체 중 CCC(한국대학생선교회)에 제 발로 찾아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선후배 동역자를 만났죠. 덕분에 학교생활이 더욱 의미 있었던 것 같아요. 대학 시절 선교단체에서 여러 경험을 하면서 선교사를 꿈꾸게 되었어요. 졸업 후에는 실제로 신학대학원 준비를 하기도 했었죠. 그런데 군 생활을 하면서 선교사 비전이 점점 흐릿해져갔어요. 고민 속에 목사님인 매형과 누나에게 기도부탁을 하고 한 달 뒤에 다시 만났는데, 서로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선교도 귀한 사역이지만 교사 역시 황폐한 교육계에 하나님이 저를 보내신다는 것이었죠. 군 제대 후 저는 교육대학교 편입 시험을 보게 되었고, 계획에 없던 두 번째 대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2년간의 대학생활을 졸업하고 초등교사가 될 수 있었죠. 남들에 비해 돌아온 만큼 교사로 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첫 발령 때 선교사적인 마인드로 하루하루를 살겠노라 결심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학급운영의 묘미, 가정방문

교사가 된 후 2006년 기독교사대회에 처음으로 참석하게 되어 참 많은 은혜를 누렸어요. 개인적으로 말씀들으며 회개하고 회복되는 시간이었어요. 물론 기독교사로서도 은혜를 누렸죠. 기독교사라는 정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고 교사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구체적으로 꿈꿀 수 있었어요. 그 때 알게 된 안양 기윤실 모임은 저에게 여전히 참 귀한 모임이에요. 당시 좋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나게 되면서 기독교사로서 자부심을 갖게 되었어요. 결혼과 육아로 잠시 모임을 이어갈 수 없었지만 작년부터 안양 기윤실이 부활하여 현재 10여 명의 선생님, 20여 명의 자녀들과 함께 귀하게 모임을 갖고 있죠.

좋은교사운동 회원이 되어서 경험한 학급운영의 묘미가 있다면 바로 가정방문이에요. 지금 학교에서는 교무부장을 맡게 되면서 못하고 있지만 신규 시절부터 쭉 가정방문을 실천했어요. 특히 첫 근무지였던 학교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움 겪는 아이들이 많았어요. 그중에 기억나는 게, 6학년 담임일 때였어요. 한 아이가 유난히 조는 거예요. 그 아이는 4남매였고 형제자매가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물어보니까, 다른 아이들도 다 존다는 거예요. 마침 가정방문이 계획되어 있어서 그 아이 집에 갔어요. 그곳에서 알게 된 것이, 부모님 두 분 다 장애인이었고 밤에 안마시술소에서 일하시는 거였죠. 밤에 아이들끼리만 있다 보니 아이들은 새벽 3~4시까지 오락에 빠져있고요. 이런 사정을 다른 선생님들과 공유하고 부모님께 양해를 구해서 컴퓨터에 잠금장치를 걸어놓고 아이들 잠을 재우려 노력했어요. 6개월 정도 지나니 아이들이 졸지 않더라고요.

가장 기억에 남는 아이도 있는데요. 부모님이 이혼을 하시고 아빠는 일용직으로 돌아다니며 일하셔서 할머니가 돌봐주시는 아이였어요. 집에서 늘 라면 끓여먹으니까 아이는 비만이었고 형제우애도 안 좋았고 학업도 밑바닥을 달렸어요. 총체적으로 문제가 있었죠. 그런데 가정에 돈이 너무 없는 거예요. 운동복을 살 돈도, 학급 준비물을 살 돈도 없었죠. 한 달에 시에서 나오는 10만원으로 생활하는 수준인데, 아버지 형제 중 한 분이 환경미화원(공무원)이라 지원을 못 받는 상황이었어요. 그나마 폐지를 주우셨던 할머니는 허리를 다치시고요. 그때 좋은교사운동과 유스투게더가 함께 하는 일대일결연에 사연을 적어 보냈어요. 덕분에 1년 동안 지원을 받을 수 있었죠.

가정방문의 목적은 그저 아이 집이 어떻게 사는지 보러가는 게 아니고 아이에 대해 알아보고자 하는 거잖아요. 한 아이의 가정을 방문할 때마다 1시간~1시간 반 정도 충분히 시간을 보내려고 했어요. 가서 아이들이 사는 모습을 직접 보고 이야기를 듣다보면 아이에 대해 미처 몰랐던 것을 알게 되고, 전과 같은 아이의 모습을 보더라도 이 아이 이면에 이런 게 있었지하고 이해할 수 있었죠. 아무튼 신규교사 때는 가정방문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시기였어요. 특히 첫 발령지에서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하나님이 왜 저를 그 학교에 처음 부르셨는지 생각하게 되죠.

 

내가 왜 교사가 되려고 했지?

점차 경력이 쌓이면서 주변에서 남자 교사는 승진 준비를 미리미리 해둬야 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선배교사의 조언대로 스카우트, 영재학급, 연구학교 점수도 받아놓고 1급 정교사 점수가 중요하다고 해서 맹목적으로 공부한 결과 97점을 받기도 하고 그랬죠. 승진 구조에서 중요한 것이 지역점수잖아요. 그래서 언제 이사를 가야하나 고민을 하던 중에 경기도에서 시작한 혁신교육에 눈이 갔어요. 그러면서 내가 왜 교사가 되려고 했지? 승진하려고 교사 했나?’ 하는 반성이 들더라고요. 때마침 2013년도에 저에게 여러모로 영향을 준 김성천 선생님을 만나게 되어 고민을 털어놓았어요. 그 때 정창규 선생님만의 스토리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공부를 꾸준히 이어갔으면 좋겠다.”라는 대답을 듣게 되었죠.

우선 공부를 더 해야겠다 싶어 경인교육대학교 교육전문대학원 초등교육방법전공 박사과정을 공부하게 되었어요. 지금은 4학기에 다니고 있고요. 그때 당시 경기도교육청에서 평가지원단 일을 꾸준히 하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지금까지 교육과정에 대해 공부하고 초등학교의 평가 변화와 관련된 일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죠. 고민하는 지점이 서로 통했던 강대일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고, 둘이 같이 평가와 관련된 공청회나 워크숍 쫓아다니면서 모르는 거 묻고 다녔어요. 알아갈수록 평가에 대해 손댈 데가 너무 많더라고요. 평가 문항에서 시작해서 평가의 정책과 법령, 훈련 지침, 평가 패러다임, 평가에 대한 인식 등이요. 둘이 만나서 토론을 많이 했죠. 그러다보니 도교육청에서 이야기를 할 기회도 몇 번 생겼어요. 그 이후로 정책을 세우는 데에도 참여하게 되었죠.

강대일 선생님과 평가와 관련된 공부를 계속 하다 보니 책을 집필할 기회도 생겼어요. 먼저는 등수 없는 초등학교 이기는 공부법(공저)이라는, 학부모를 위한 책을 썼어요. 어찌됐든 학교현장에서는 정책이 도입되면 안 따를 수 없거든요. 그런데 오히려 학부모가 걸림돌이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예를 들면 정책적으로 점수화.서열화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학부모님이 우리 애가 몇 등인지 궁금하다, 초등학교 때 이렇게 해봤자 중.고등학교 가면 다시 서열화 시킬 것 아니냐, 수능도 선다형평가인데 논술평가 하면 수능에 적응 못하는 것 아니냐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실질적으로 선생님을 힘들게 하는 건 이런 부분이었던 거죠. 그러다보니 학부모도 인식을 같이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왜 평가가 변해야 하는지, 평가의 구체적인 패러다임 동향이 어떤지 학부모들이 알아야겠다, 그리고 선생님들이 어떻게 해서 시험을 출제하고 어떤 기준에 입각해서 평가를 치러왔는지 알아야겠다고 생각해서 먼저 책을 썼죠.

다음으로 쓴 책이 초등 교사를 위한 평가란 무엇인가(공저)예요. 문항을 출제하고 채점을 해야 하는 등 실질적으로 평가의 주체는 선생님이잖아요. 사실 우리 선생님들이 교.사대 다니면서 평가에 대해 배운 적이 별로 없어요. 평가에 대한 철학 같은 다소 따분한 이야기는 들었을 수 있겠지만요. 저 스스로도 평가에 대해 공부하며 교실에서 평가하는 것이 많이 달라졌어요. ‘우리가 교실에서 가르친 게 뭐지? 우리가 가르친 내용을 평가하기 위해 어떻게 출제를 해야 하지?’ 이런 고민을 가지고 문제를 출제 해보는 거죠. 다음으로 점수를 내고, 그 후에 아이들과 피드백 하는 시간을 갖는 거예요. 평가는 그저 점수를 알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내가 뭘 모르는지를 알고, 모르는 것을 제대로 알기 위해 평가를 하는 거니까요. 아이들과 왜 이런 답을 썼니? 어떻게 어려웠니?’ 물어보면서 다시 알게 하는 것이 피드백인거죠. 생활지도도 해야 하고 업무도 많고, 선생님들 참 바쁘죠. 여기에 시간과 노력을 두 배 세 배 들여야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책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창규 샘이 말했다더라...!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교사가 되고 싶어요. 공부하는 시간동안 이론을 위한 이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배운 것을 실제 교육현장에서 실천하는 교사가 되고 싶어요. 연수를 통해 많은 선생님들을 만나는데, 그럴 때마다 아는 것 이상으로 실천력 있는 교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그래서 더욱 겸손해야한다는 생각도 함께요. 감사하게 올해 전문연구년으로 1년을 보내며 현장 연구 또한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어요. 의미 있는 한 해가 될 것 같아요.

다음으로는 학생을 교육의 중심에 두는 교사가 되고 싶어요. 그동안 학교가 행정상 편리하게 돌아가는 관행이 많았고, 개인적으로는 제 입장이 학생보다 우선이었던 적이 많았어요. ‘학생중심, 현장중심이런 말을 들으면서 진짜 학생을 중심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교직에 있는 동안 나름대로 1년을 10년처럼 살려고 부단히 애썼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말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어요. 저 스스로도 한때 내가 교사가 왜 되었는지를 생각하기보다 승진을 준비하면서 지냈던 적이 있잖아요. 그때 공부를 더 하고, 나만의 스토리를 만들고, 왜 교사가 되려했는지 사명을 기억하라는 말을 들으면서 방향을 다잡을 수 있었어요. 후배 선생님들, 정말 열심히 사는 분들 많거든요. 제가 감히 그분들이 가는 방향이 옳다 틀렸다 말할 수 없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많아요. 그런데 교사가 된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교사라는 자존심이랄까, 최소한의 성직자와 같은 마음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누군가가 불을 조금만 붙여준다면 그래, 맞아! 내가 교사였지!’ 이런 마음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후배교사에게 우리가 왜 교사가 되었느냐, 어떤 교사로 살아야 하느냐,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고 꼭 말해요. “우리가 만나는 학생들 한 명 한 명의 돌아올 수 없는 시간에 우리가 담임을 하고 있는 거다.” 라고요.

그런 면에서 좀 욕심을 낸다면, 주위 교사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싶어요. 막 이름이 알려지는 걸 바라는 게 아니라요. 학교 안에서 누군가 정창규 샘이 이런 말 했다더라.” 했을 때 뭐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을 수 있지.” 이렇게 묻히는 게 아니라 정창규 샘이 한 말은 뭔가 곱씹어볼 필요가 있어. 고민해보자.” 이렇게 동료 선생님들에게 울림을 줄 수 있기를 바라죠. 주변에 그렇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멋진 선생님들과 실력을 두루 갖추신 선생님들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우리 교육의 미래가 밝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저도 더 정진해서 기독교사로서 하나님이 나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있음을 확신하며 살아가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