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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오 칼럼

우리는 과연 사랑의 빚을 갚으며 살고 있는가?


 우리는 과연 사랑의 빚을 갚고 살고 있는가?


“선배님, 이번에 저희가 겨울 수련회를 하는데 선택식 강의 강사로 와 주실 수 있나요?”
시간과 장소를 물어보니, 시간은 오후 1시에서 2시 사이 1시간이고, 장소는 서울에서 2시간 걸리는 장소다. 선택 강의 참여 예상 인원은 10명 내외라고 한다. 순간 갈등이 된다. ‘그래도 나름 유명 강사급인데, 나를 어떻게 보고 고작 10명 대상의 1시간 강의에 왕복 4시간을 투자하라고 한단 말인가?’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대학 시절 내가 그 선교단체 활동을 하던 그 때 우리를 도와주셨던 4명의 선생님이 떠오른다.



뒷모습으로 가르치는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지도교수

제일 먼저 떠오르는 분은 당시 내가 활동하던 선교단체의 지도교수로 계셨던 이후철 교수님이다.(지금은 모교에서 정년퇴임을 하시고 포항공대에서 석좌교수로 계신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학내 동아리 지도교수란 그야말로 이름만 빌려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후철 교수님은 내가 입학하기 전부터 매주 모이는 전체모임에 한 번도 빠짐없이 꼬박꼬박 참석을 하셨다. 당시 전체 모임은 개강 첫 주부터 종강하는 주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 5시부터 7시까지 모였는데, 이후철 교수님이라고 해서 어찌 그 시간대에 아무 일도 없었겠는가? 오직 전체모임에 우선순위를 두고 다른 모든 일정들을 조정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게 4년 동안 전체 모임에 참석하면서 교수님은 한 번도 강의를 하지 않으셨다. 오직 학생들과 똑같은 자세로 강사들의 강의를 경청하면서 학생들의 진행하는 모든 순서에 귀 기울일 뿐이었다. 하지만 당시 학생들은 교수님의 뒷모습에서 너무 많은 것을 배우면서,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동아리 지도교수를 두었다는 자부심 가운데서 신앙의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낮에는 교수 연구실, 밤에는 동아리 모임 방

손봉호 교수님은 내가 대학 1학년에 입학하던 바로 그 해에 우리 대학의 교수로 부임해 오셨다. 그리고 부임해 오던 바로 그 시간부터 우리 선교단체의 지도교수가 되었다. 40대 중반이던 당시에도 기독교 지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철학과 신학 양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정작 지도교수로서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신 가장 큰 혜택은 강의가 아니라 그의 연구실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 것이었다.

교수님은 낮 시간에는 연구실에 계셨지만, 저녁 시간 이후에는 연구실이 아닌 댁에서 연구를 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교수님이 퇴근한 이후 교수님 연구실은 우리 몫이었다. 당시 대학에서는 동아리 숫자는 매우 많고 활동이 왕성했지만 그에 반해 동아리 방은 매우 협소했다. 그래서 큰 방에 6개의 기독교 동아리가 함께 생활을 했다. 그런데 같은 기독교 동아리라고 해도 그 색깔이 달라서 성락교회 출신의 CBA와 순복음교회 출신의 CAM은 모였다하면 방언으로 기도를 했고, CCC와 YWAM은 찬양을 많이 했다. 거기다가 진보적이고 사회참여적 성향이 강했던 총기독학생회의 경우 담배를 많이 피워댔다. 아무리 서로를 배려하면서 모인다고 해도 그 분위기 속에서 조용히 성경공부를 하고 책 읽고 토론회를 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 상황을 잘 아신 교수님은 우리에게 연구실 키를 넘겨 저녁 시간에는 연구실을 마음껏 사용하게 하신 것이다. 그 덕에 우리는 저녁 시간 그 방에서 리더 모임, 조별 성경공부 모임을 했고, 회원들에게 전화를 걸 일이 있어도 교수님 연구실 전화기를 마음껏 사용하곤 했었다.


선배는 강사료 대신 후원금을 내야 합니다

내가 이만열 교수님을 처음 만난 것은 대학 1학년 때였다. 2학기가 거의 끝나갈 즈음이었는데 대학원생 선배 한 명이 우리 선교단체 출신 선배 가운데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면서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찾아간 곳이 숙명여자대학교 이만열 교수님 연구실이었다. 교수님은 전두환 군사 정권이 들어선 1980년 중반에 정권의 미움을 받아 해직을 당했다가 4년만인 1984년 2학기에 복직을 한 직후였다. 당시 서슬이 시퍼렀던 군사독재정권 하에서의 해직 교수 생활을 했던 분이라고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따뜻함으로 처음보는 새내기 대학생을 맞아주셨다.

이후 우리는 선교단체 전체모임이나 수련회가 있으면 교수님을 강사로 초청을 했고, 교수님은 그 몇 명 모이지도 않는 대학생들의 모임에 애정을 가지고 강의를 해 주시곤 했었다. 강의를 하신 후에는 “선배에게는 강사료를 드리지 않고 오히려 후원금을 요청한다”는 우리가 멋대로 만들어 낸 전통을 들이대는 버릇없는 후배들의 요구를 애교로 봐 주시면서 후원금을 내고 가시곤 하셨다.

그는 철저하게 보수적인 신앙과 삶을 견지하고 있으면서도, 시대의 죄와 아픔에 대해서는 예언자적인 외침과 실천을 하는 사람이었다. 이는 보수적인 신앙인은 시대의 죄악에 대해 침묵하거나 야합하고, 시대의 모순에 대해 저항하는 사람은 자유주의적인 신앙관을 보이던 시대 상황에서 매우 드문 신앙인의 모습이었다. 물론 그도 완성된 모습이 아니라 그속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자신을 바꾸어가는 모습을 보이셨고, 우리는 그 분의 모습에서 불의한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델을 볼 수 있었다.


이제는 너희들이 후배들을 가르치면 된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윤종하 총무님은 당시 한국성서유니온 초대 총무로서 성경묵상 사역을 매우 활발하게 전개하는 중이었다. 대학 1학년 겨울수련회, 그는 QT를 가르쳐달라는 우리의 요청을 받고 수련회가 진행되는 4박5일 동안 매일 새벽 6시에 오셔서 2시간 정도 QT의 방법 뿐 실제 적용 부분을 도와주시고 출근을 하셨다. 덕분에 우리는 QT를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그런데 다음 해 겨울수련회 때 또 다시 QT 강의를 부탁했을 때는 “이제는 너희들이 1년 정도 QT를 꾸준히 했기 때문에, 너희들이 후배들을 가르치면 된다”고 거절을 하셨다. 덕분에 우리는 무엇이든 계속 배우기만 할 것이 아니라 부족하지만 자신들이 삶 가운데 적용하고 훈련한 만큼 후배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고, 그렇게 하면서 더 성장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사랑의 허비가 없는 곳에 싹이 나지 않는다

그 시절 우리 선교단체는 지도간사가 없이 순수하게 학생들의 자발적인 모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00명이 넘는 회원들이 있었고, QT와 성경공부 외에도 기독교 세계관과 각 전공영역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 죄악된 현실에 대한 복음주의적인 사회참여 방법론 등에 대해 고민을 했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당시 우리가 그런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대학생들의 자발성과 사회참여 의지가 높았던 시대적 분위기나 당시 활동했던 선후배들의 열심 덕분일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그 시대를 돌아보니 우리 주변에 정말 헌신적이고 탁월했던 믿음의 선배들과 선생님들이 있었다는 것이 새롭게 다가온다.

당시 우리는 철없는 대학생들이어서 그 선배들이나 선생님들에 대한 고려 없이 우리 입장에서 우리의 필요만 생각하고 그 분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또 그 분들의 도움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분들 입장에서는 우리보다 더 많은 인원이 모이는 모임이나 더 영향력있는 모임의 요청도 있었을 것이고, 써야 될 글과 해야 될 사역들이 밀려있는 가운데, 그것들을 조정하고 우리에게 시간을 내 주시고 공간을 내 주시고 강의도 해 주시고 후원금도 주셨던 것이다.

대학생 사역이 많이 약화되었다고 모두가 통탄을 하는 지금, 그 원인을 더 바빠진 대학사회와 개인주의화되고 영적 관심이 약화된 이 시대 대학생들에게만 찾을 것이 아니라 지금 선배 세대가 이전에 자신들이 받았던 사랑과 헌신을 후배 세대에게 쏟지 않는 데서도 찾아야 할 것 같다.

다시 그 후배에게 전화를 걸어 요청한 선택식 강의에 가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사랑의 허비를 하지 않고 어떻게 싹이 나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