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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오 칼럼

고전읽기와 세상읽기

 

고전읽기와 세상읽기


사회학 고전 읽기

지난 10월과 11월 오마이뉴스가 개설한 “김호기 교수의 사회학 고전 읽기” 강좌를 수강했다. 매주 교수님이 제시한 책을 읽은 후 그 책의 내용이 오늘 한국의 현실 가운데 주는 시사점에 대해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질의 응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강좌는 모처럼 좀 더 넓은 안목으로 우리 시대와 우리 운동을 되돌아보게 하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8주 동안 에밀 듀르케임의 『자살론』, 막스 베버의『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변동』, 미셀 푸코의『감시와 처벌』, 이매뉴얼 월러스틴의『근대세계체제1』, 마뉴엘 카스텔의『네트워크 사회의 도래』, 울리히 벡의『위험사회』, 앤소니 기든스의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 이렇게 8권의 책을 읽었다. 물론 엄밀한 개념과 탄탄한 논리 구조를 가진 책을 읽어낸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책들이 왜 ‘고전’의 반열에 올라와 있는지, 이 학자들이 변화하는 우리 시대의 본질을 읽어내기 위해 얼마나 정직하게 고심했는지를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이 책들이 말하는 내용에 다 동의가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자들의 사고의 지평을 따라 현대 사회의 아주 깊숙한 곳까지 뒤지고,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방식과 틀을 가지고 우리 사회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그 때 읽지 않았으면 평생 못 읽을 책

대학 시절 들었던 많은 강의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강의는 손봉호 교수님의 “사회와 철학”이다. 그 과목은 숙제가 많고 수업 시간을 정확히 지키며 학점이 짜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그 과 학생들로부터 외면을 받기도 했지만 그래도 제대로 공부하기를 원하는 손봉호 매니아들이 있어서 폐강은 겨우 면하곤 했다. 내가 그 강의를 들을 당시 과제는 교수님이 제시하는 책 10권을 읽고 서평을 제출하는 것이었는데, 그 책이라는 것이 사회과학계의 고전들이었다. 지금 그 책의 제목들이 기억에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플라톤의『국가론』, 아리스토텔레스의『정치학』, 아우구스티누스의『신국론』, J.S.밀의『자유론』, 마키아벨리의『군주론』, 홉스의『리바이어던』, 루소의『사회계약론』, 베르그송의『창조적 진화』등의 책을 읽은 것 같다. 이렇게 많은 숙제를 내면서도 “작년에는 15권 읽기 숙제를 냈었는데, 그래도 너희들은 많이 봐 준 줄 알어!” 라며 웃으시던 교수님의 얼굴이 지금도 떠오른다.

돌아보면 대학생 때 고전을 읽지 않으면 평생 읽을 수 없다는 현실인식과 더불어 인문 사회 공부는 고전 속에 다 들어 있고, 결국 학문이라는 것이 고전의 인식을 재해석하고 현대 사회에 적용하는 것이라는 학문적 확신이 있었기에 인기에 연연해하지 않고 학생들에게 고전 읽기를 강요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그 과목을 신청한 사람들은 교수님의 숙제 방식을 알고 신청했기 때문인지 몰라도 대체로 그 숙제를 묵묵히 해냈던 것 같다. 특별히 나는 교수님을 단지 한 강좌의 교수님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내가 활동하던 기독교 동아리의 지도교수로 즉, 신앙의 멘토로 만났던 사이인지라 더욱 요령을 부릴 수 없었다. 그래서 잘 이해되지 않는 내용들을 이를 악물고 읽었고, 나름 충실하게 서평을 써 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지금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그 때 읽었던 내용들이 지금의 나의 중요한 지적 자양분으로 작용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다

일반 학생들에게도 명강으로 인기가 있었던 그의 강의에는 좀체로 기독교의 ‘기’자가 들어가는 법이 없었다. 다만 그는 인류 사상사를 관통하면서 핵심을 짚어내어 그것을 쉽게 설명해주었고, 각 사상들의 강점과 약점을 잘 드러내주었고,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기계적 중립이 아닌 약자에 대한 짙은 애정이 담긴 실천적인 대안들을 제시해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의 강의 속에는 인류가 역사 가운데서 인간과 사회와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몸부림쳤던 그 흔적들과 그러한 몸부림들이 갖는 의미와 한계들이 잘 정리되어 전달되었고, 나는 그 강의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지만 타락으로 인해 수많은 한계 속에 갇힌 인간 실존과 그들이 만들어가는 역사를 읽는 눈을 키워갈 수 있었다.

그의 강의를 들으며 나는 이 세상과 세상의 지혜가 두려워 미리 내가 이해한 좁은 범위의 교리의 틀에 나를 가두고 그 한계 내에 세상을 가두고 세상의 지혜를 단도질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하나님의 자녀에 걸맞지 않는 행동인가를 많이 생각했다. 오히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이고 지금도 역사를 다스리는 분이라는 큰 믿음에 기초해 담대하게 세상과 부딪힐 필요가 있고, 세상이 만들어놓은 지혜라 할지라도 그 가운데 그들이 잘 알지 못하는 가운데 발견해놓은 하나님의 흔적을 취하고, 또 겸손하고 애정어린 마음으로 그들의 한계를 품고 조언하는 태도를 가져야 함을 많이 느끼곤 했었다.


“성경만 읽지 말고 소설도 읽어라”

기록된 계시로서 성경의 권위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권위지만, 하나님의 계시는 성경을 넘어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와 인간, 그리고 사회 가운데 새겨져 있다. 우리는 성경의 기준을 가지고 이 일반은총 속에 새겨진 하나님의 계시를 잘 분별해야 하지만, 동시에 창조 세계 속에 새겨진 일반은총을 충분히 궁구함을 통해 성경의 계시를 실증하고 더 풍성하게 드러내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대학 시절 같은 기독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함께 하숙을 했던 한 친구(최근 『행함없는 구원?』『네가 읽는 것을 깨닫느뇨?』『로마서 산책』등의 저서를 연속해서 내면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와 ‘올바른 성경 읽기’와 관련해 활발한 저술 및 강연 활동을 하고 있는 안양대 신학과 권연경 교수)는 “병오야! 성경만 읽지 말고 소설도 좀 읽어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 물론 당시 ‘오직 말씀’을 외치며 단순한 믿음 가운데 눕자말자 바로 잠을 자며 하나님의 사랑을 마끽하던 내가 보기에 소설을 읽다가도 울고 김현승의 시 한 편을 읊조리며 한 밤 거리를 배회하고 성경 한 절 한 절에 걸려 밤잠을 자지 못하고 괴로워하던 그는 믿음 없는 사람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박완서의 소설을 읽으며 그 속에 드러나는 인간 본성의 실제적인 모습을 생생하게 느낄 줄도 알고, 박경리나 조정래의 소설을 읽으며 시대를 살아가는 인생의 다양한 모습을 애정 어린 눈으로 볼 줄 아는 눈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동 시대의 철학과 역사와 사회학의 고민들과 틀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이러한 시대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구현되어가고 있는지를 고민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


“공부하십시오. 또 공부하십시오”

칼 바르트가 “한 손에 성경을, 한 손에 신문을”이라고 했을 때, 이 신문은 세상과의 접촉점을 말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내기 위해서는 말씀과 기도, 교회가 기본이 되어야 하지만,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고 세상의 학문과 담론, 생각과 흐름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는 단지 그들을 구원하고 전도하기 위해서 필요할 뿐 아니라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과 지혜, 계시가 숨어있기 때문이고, 그것들이 하나님 안에서 온전히 회복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중요한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 또 한 명의 기독지성인의 사표라고 할 수 있는 이만열 교수님은 젊은 시절 우리만 보면 “공부하십시오. 또 공부하십시오.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공부하십시오.”라는 말을 자주 했다. 물론 그가 말하는 공부가 학자가 되어 학문을 전공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살기 위해서 더 사랑하기 위해서 틈나는 대로 성경 뿐 아니라 이 세상의 학문과 지혜를 배우는 일에 게으르지 않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