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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오 칼럼

우리에게 신학이란 무엇인가? (2010년 5월호)

야! 도대체 네 전공이 뭐냐?”

대학 시절 같은 과 친구들이 나한테 던지곤 했던 질문이다. 친구들이 이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 내가 주로 듣는 과목이나 들고 다니며 읽는 책, 그리고 좇아 다니는 활동이 전공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전공 과목은 졸업을 위한 최소 이수 학점만 듣고 나머지 학점들은 종교학과에 개설된 신학 사상 관련 과목, 언어학과의 헬라어 과목, 철학과 과목들 가운데서 신학과 연관성이 있는 과목을 들었다. 그리고 전공 과목을 공부할 때도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중세 철학자들, 그리고 칼 야스퍼스나 키에르케고르와 같은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들, 그리고 라이홀드 니버나 에밀 브루너와 같은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의 윤리 사상에 대해서 깊이 공부해서 발표를 자원했고, 졸업 논문도 라인홀드 니버의 윤리 사상에 대해 썼다.


평신도가 신학을 다 공부하면 우리는?

그리고 내가 들고 다니며 탐독하던 책들도 주로 신학 관련 책이었다. 당시 내가 활동했던 기독 동아리는 당시 단순한 복음 제시와 전도의 열정, 좁은 의미의 경건 훈련을 강조하던 기독 동아리와는 달리 성경 본문에 대한 깊은 연구와 개혁주의적인 신학에 기반을 둔 학문과 사회 변혁을 중시했다. 그러다 보니 동아리 내에는 마치 운동권 친구들이 마르크스주의에 기반을 둔 사회과학 서적을 체계적으로 탐독하며 시대를 읽고 자신이 믿는 바에 따라 자기 삶을 드리듯,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학적으로 깊이 있는 연구와 성경의 분석 틀을 따라 학문과 세상을 이해하고 그곳에 자신을 드리고자 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거기다가 우리 동아리를 지도해 주셨던 손봉호 교수님은 외국에서 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한 복음주의 계통의 젊은 소장파 학자들이 귀국 후 인사차 들리는 필수 코스였다. 그리고 그 분들은 매주 1회 열리는 동아리의 전체 모임이나 수련회의 강사로 서시곤 했었다. 그래서 이 분들을 통해 당시 복음주의 신학의 최첨단이라고 할 수 있었던 구속사적인 성경 해석, 성경 신학, 하나님 나라, 개혁주의적 기독교 세계관, 기독교 고전 등에 대한 강의를 듣고 책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는 웬만한 국내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는 책이나 내용을 소화할 정도가 되었고, 절친하게 지내던 교회 전도사님은 “평신도가 이런 책을 다 읽어 버리면 우리는 뭐 먹고 사느냐?”고 농담 반 진담 반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신학이 주는 기쁨과 한계

비록 신학대학이나 대학원의 정규 신학 교육과정이 아닌, 비형식적이고 자유롭게 책이나 강의를 통한 엉성한 공부이긴 했지만, 관심과 열정을 따라 신학의 이곳저곳을 헤매며 한동안 심취했던 경험은 이후 신앙의 과정에 매우 유익했다. 무엇보다 성경을 전체적이고 신학적 역사적 맥락에 따라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과 이후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최신 신학 책의 도움을 따라, 때로 성경 자체만 가지고도 성경을 연구하고 말씀의 깊이에 들어갈 수 있는 기본 역량들을 갖추게 된 것은 QT와 개인 기도 훈련과 함께 내 삶의 가장 큰 영적 자산이 되었다.

대학 시절의 신학에 대한 접촉이 내게 준 또 하나의 선물이라면 약간 역설적이긴 하지만 신학의 한계에 대해서도 알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즉, 신학이 신앙과 영성에 도움을 주고 무엇보다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 있도록 해 주는 매우 귀한 학문이긴 하지만 이 자체는 하나의 지적인 활동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지적 활동이 갖는 그 자체의 논리 구조에 갇히거나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모하게 하게 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이 갖는 다양한 면들을 접하면서 나 개인적으로는 신학은 지금까지 쌓은 기초를 기반으로 이후에도 내 신앙의 필요나 교회에서의 섬김의 필요를 따라 필요한 만큼 조금씩 더 해 나가는 것이 내게 주어진 몫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즉, 학문으로서의 신학에 내 전 삶을 드려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은 내게 주어진 일이 아니고, 내가 이 일을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거나 부족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히 정리되었다. 만약 내가 대학 시절 신학을 제대로 접하지 않았다면 혹 갖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신학에 대한 동경이나 미련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신학과 신학함

하지만 내가 학문으로서의 신학에 내 삶을 던지지 않고, 대학의 전공과 직업적 소명을 따라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리에 섰다고 해서 신학이 내 삶과 무관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비록 성경을 연구하거나 신학 책을 읽고 연구한다는 차원에서의 신학 연구는 내 삶과 시간의 지극히 작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내게 주어진 학교에서의 삶, 수업을 준비해서 가르치고, 아이들을 칭찬하거나 훈계하는 과정을 통해 삶을 지도하는 과정, 행정 업무를 통해 교육 공무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모든 과정 가운데서 하나님을 알아 가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살아 낸 혹은 실패했던 과정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묵상하고, 다시 하나님의 뜻을 묻고, 이 가운데서 내 삶에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해 내며, 이를 교회와 기독교사 공동체 가운데서 나누는 과정을 거치면서 총체적으로 자라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과정이 바로 신학함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정답이 아닌 해석 공동체를 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삶의 주인이시고 우리 머리털까지 세실 정도로 세밀하게 간섭하신다고 고백하지만, 우리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아 이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하기는 정말 어렵다. 우리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그 어느 하나라도 하나님의 허락하심 없이 일어날 수 없다고 고백하지만, 이 고백으로 실제 역사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악행과 억울함, 압제와 고통들을 설명해 낼 수가 없고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현상 앞에서 당혹함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더군다나 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어야 할 성경은 2천 년에서 6천 년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담고 있어 오늘 내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단순하고 명쾌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2천 년 전에 오셨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이슬람의 코란과 같은 명쾌한 행동 지침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삶과 죽음, 부활에 대해 해석하고 증거할 수 있는 제자들의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주력하셨다. 그리고 이 제자들의 공동체가 이전에 주셨던 구약과 예수님의 삶을 새로운 시대 가운데서 끊임없이 해석하고 적용하는 신학적 과정을 거치게 하는 것이 자신의 나라를 이 땅 역사 가운데 가장 효과적으로 세워 가는 길이라고 믿었고, 실제로 이것은 2천년 역사를 통해 위태한 가운데서도 그 진리의 빛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제자들은 4천년 전통의 제사 제도와 율법 준수를 어떻게 새롭게 적용할 것인지를 논쟁했고, 예수님께서 개념만 던지고 간 교회의 제도와 예배의 의식을 만들어 냈다. 삼위일체라는 신학적 개념도 성경으로부터 추출해서 만들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수도원적인 전통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어떤 시대는 현재의 교회와 교리가 성경에 맞지 않다며 종교 개혁을 일으켰으며, 민주주의라는 틀도, 천부 인권이라는 사상도, 노예제 폐지라는 제도 개혁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후 어떤 식민지에서는 성경에서 민족 독립과 민족주의를 끌어내기도 했으며, 압박받는 제3세계에서는 해방 신학을 만들기도 했고, 어떤 분단된 나라의 백성 가운데는 통일 신학을 고민하기도 한다.


지금 여기에 임하신 그 분의 계시를 찾아

물론 이 모든 과정이 인간이 하는 일이라 다 온전하지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신학적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열정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해하기도 했고, 성경적이라고 만든 제도나 의식 가운데도 필연적으로 그 시대 세속의 사상과 문화가 개입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 시대에 적합했던 시대적 진리도 새롭게 변화되는 시대에는 맞지 않는 부분이 생겼지만 이전의 것을 고집하고 새로운 변화를 억누르는 수구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불변하는 몇 가지 규칙과 의식 가운데 자신을 가두거나 모든 변화하는 상황에 맞추어 일일이 자신의 뜻을 계시하는 안전한 방식으로 전환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의 수많은 실수와 연약함에 불구하고 2천 년에서 6천 년 전의 상황에서 그들의 역사에 개입하셨던 인격적인 그 모습, 그들과 함께 기뻐하고 대로 노하셨던 그 감성적인 언어와 표현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께 반응했던 실수 많고 허물 많은 선배들의 모습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고 계신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자기 백성이 자신의 공동체와 함께 이 계시를 변화된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상황 가운데 믿음의 경험과 감수성으로 해석하며 공감하고 고백해 가는 과정을 통해 자신을 늘 새롭게 계시하시는 그 방식을 고집스럽게 고수하고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이 방식으로 옛날 조상들에게 당신의 뜻을 드러내셨던 것과 같이 우리 시대 오늘 나에게 말씀하시고 원하시는 그 뜻을 내가 분별하며 동역하기를 원하신다.


바로 이 과정이 ‘신학함’의 과정이고, 이런 의미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살아 있는 신학자로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나도 기록된 말씀과 기도 가운데서 만나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 그리고 날마다 내게 주어지는 인생의 숙제들과 너무 혼란스러운 우리 시대의 모습을 다 내 영의 그릇 속에 담아 고민하고 아파하고 묵상한다. 그리고 이 가운데서 주어지는 아주 세미한 빛과 음성을 따라 한 발짝씩 떼며 다시 돌아보고, 하나님께 묻고, 형제들과 나눔 혹은 열띤 토론을 펼친다. 어설프기 짝이 없지만 지금 여기를 살아가며 비추는 신학자로, 예언자로 서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