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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오 칼럼

교회란 무엇인가? (2010년 3월호)

왜 할 말이 없겠는가? 그러나,

“형! 우리 교회 제직 수련회에 와서 교회와 관련된 강의 한 번 해 주세요?”

대학 시절 신앙 훈련을 받았던 선교 단체 멤버이자 한 1년 정도 공동생활도 같이 했던 후배 목사의 부탁을 받고 한참 머뭇거렸다.

교회! 왜 할 말이 없겠는가? 교회는 지금까지 내 삶에 있어서 가정, 기독교사운동과 더불어 내 인생의 제일 중요한 주제였고, 지금도 그렇다. 돌아보면 교회로 인해 많이 행복하기도 했지만 교회로 인해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도 많이 겪었다. 그러기에 그 아픔을 부여잡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씨름해야 했으며, 교회와 관련된 성경과 여러 책을 읽으며 교회의 본질을 파헤치기 위해 노력했으며, 여러 교회를 돌아다니며 여러 목사님, 성도들과 논쟁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강의 부탁에 응낙하지 못한 것은 ‘교회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보면 목사님들을 비판하는 이야기도 많이 해야 될 텐데, 이렇게 하는 것이 혹 후배 목사님의 목회에 누가 되지는 않을까?’, ‘교회와 관련해서 목회자나 신학자가 아닌 일반 성도가 이야기하는 것을 교인들이 얼마나 신뢰하고 받아들일까?’ 하는 염려가 앞섰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이런 표면적인 염려의 이면에, 나이를 먹으며 교회의 덕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나 스스로 교회에 대해 설정해 놓은 어떤 ‘성역’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면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모습과 현실에서 존재하는 교회와의 괴리를 넘는 노력을 하다가 지쳐 이제 더 이상 교회에 대한 꿈을 잃어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하여간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뭇거리는 나에게 후배 목사가 정곡을 찌르며 들어온다. “형! 나는 목회를 하고 교인들을 가르치면서 내가 공부하고 소화해서 가르칠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을 구분해요. 현재 우리 성도들에게는 신학교 교수님들에게 들을 수 없는 성도의 입장에서 본 교회 이야기가 필요해서 형을 부르는 거예요. 그리고 목회자를 배려한 어떤 요구도 하지 않을 테니 형이 가지고 있는 생각 그대로를 이야기하면 돼요.”


‘보이지 않는 교회’와 ‘보이는 교회’

하나님을 떠나 어둠과 죄 가운데 살아가던 사람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연합하는 순간 그 사람은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로 접붙임을 받는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을 신학에서는 ‘보이지 않는 교회’라고 부르는데, 이 교회에는 모세, 아브라함, 다윗 등 이전의 모든 믿음의 선배들이 포함되어 있고, 지구상 모든 곳에서 주를 믿는 이들이 다 포함된 하나의 교회이자 거룩하고 영원한 기관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와 의미는 개별적인 윤리적 완성에 있지 않고, 역사를 통해 완성되는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의 한 지체로서의 책무를 다해 가는 데 있다.

‘보이지 않는 교회’의 한 지체로서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영원한 나라의 역사 가운데 잇대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다른 한편에서 현재 자신이 몸담은 시공 속에서 ‘보이는 교회’를 ‘보이지 않는 교회’의 원리를 따라 세워 가며, ‘보이는 교회’ 가운데서 지체의 원리를 따라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가는 구체적인 훈련을 하며 살아가야 한다. ‘보이는 교회’는 거기에 참여한 인간의 죄성과 연약성만큼이나 분명한 한계와 아픔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보이는 교회’에서의 수고와 땀, 눈물 없이 ‘보이지 않는 교회’를 이야기하는 것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참된 목회자와 성도의 조건

교회의 본질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볼 때, 개신교회가 공통으로 신봉하는 참된 교회의 3가지 표지인 ‘참된 말씀의 선포, 성례의 올바른 집행, 제대로 된 권징의 시행’은 보완되어야 한다. 참된 말씀의 선포는 강단에서 말씀이 바로 선포되는 것뿐 아니라 그 선포된 말씀이 성도의 삶 속에서 역사하여 나타난 열매로 고백되는 말씀까지를 포함해야 한다. 성례의 올바른 집행은 세례와 성찬이라는 의식이 그 의미를 잘 드러나도록 시행되는 것뿐 아니라 세례를 받는 사람의 신앙 고백이 교인들 가운데 충분히 공감되는 과정을 거치고, 교회의 교제와 행정 가운데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아 각 지체가 은사를 따라 함께 일하고 지어져 가는 과정이 포함되어야 한다. 제대로 된 권징의 시행은 교인들의 죄에 대한 공동체적인 제재와 책임 이전에 교인들이 서로의 사정을 충분히 알고 기도하며 함께 자라가는 과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교회가 말씀 위에 세워졌고 말씀으로 자라는 공동체라고 할 때 말씀을 맡은 자인 목회자의 역할은 참으로 중요하다. 무엇보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부분이 분명하되, 내적 부르심뿐 아니라 은사로서의 외적 부르심까지 분명해야 한다. 그리고 충분한 검증과 훈련을 받아야 하며, 성도를 돌보는 목회에 대한 소명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가는 교회에 대한 체험과 이해가 충분해야 한다.

성숙된 성도의 존재는 교회의 건강성을 좌우하는 또 하나의 축이다. 성도 역시 목회자에게 의존적인 존재를 벗어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가는 지체로서의 자신의 삶에 대한 분명한 자각과 아울러 가정과 사회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드러내며 날마다 자라 가는 삶의 본을 보여야 한다. 교회의 직분을 사회에서 얻지 못한 명예를 얻는 수단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고 삶을 통해 성도들로부터 받는 존경 없이 단지 직분에 의한 행정적 리더십을 행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교회의 의사 결정 구조를 운영할 때,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교회가 기도 가운데 지체의 원리를 따라 함께 듣고 인도를 받아 가는 부분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훈련해 가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가기 위한 움직임

이렇게 강의를 준비하면서 다시 한 번 교회와 관련된 내 생각과 경험들을 정리하다 보니, 교회와 관련하여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장로교 주류 교단에 속한 교회를 섬겨 왔다. 물론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의 본질적 역동성을 훈련하기에는 큰 교회는 그렇게 좋은 구조가 아니란 생각을 젊을 때부터 했기에 의도적으로 작은 규모의 교회를 선택해 다녔다. 하지만 작은 교회조차도 대부분의 목회자나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보다는 관행화된 교회 조직의 틀을 잘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진 것은 분명하다.

그러기에 주류 교단의 틀을 벗어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본질에 좀 더 충실하고자 몸부림치는 여러 작은 규모의 움직임들에 대해 많이 관심을 가지고 기웃거리기도 했다. 형제 교회, 공동체 교회, 평신도 교회, 가정 교회, 개혁교회의 본질을 더 강화하는 교회 등. 물론 이런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의 본질에 좀 더 접근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면에 주류 교회가 갖는 신학적 전통이라는 유산을 잃거나 때로 지나치게 폐쇄성을 보임으로 인해 ‘하나의 교회’라는 ‘보이지 않는 교회’의 속성에서 조금 멀어질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려는 이들의 움직임은 너무도 귀하다는 생각을 한다.


교회로의 부르심과 내가 서 있는 자리

일단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주류 교회의 전통과 틀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기 위해 몸부림치는 다양한 작은 교회나 교단들의 생명과 역동성을 접붙여 보려고 애쓰는 자리다. 어찌 보면 균형과 온전함을 추구하는 자세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붓는 어리석은 작업 같기도 하다.

하여간 교회와 관련된 이상과 현실의 이 어정쩡함 가운데 나는 ‘교회사’와 ‘하나님의 인도’의 관점에서 나를 제어하려고 애쓴다. 온갖 인간의 불완전함 가운데서도 수천 년간 지탱되고 흘러온 교회사의 흐름과 이 가운데 교회를 다시 본질 가운데 세우려고 노력했던 개혁자들의 노력, 어찌 보면 나의 고민과 수고도 이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 행동의 종적 원칙이라면, 횡적 원리는 지금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인도에 대한 분별이다. 어떤 상황이든 절대적인 선이 있다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 자리에 있고, 지금 하라고 하시는 그것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