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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오 칼럼

우연이란 이름의 인도 (2010년 1월호)

한국 땅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젊은이가 그렇듯 나도 대학과 전공을 정할 때 난생 처음으로 ‘선택’이란 것을 해 보았다.

당시 대부분의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명문 대학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대학을 통한 신분 상승에 대한 막연한 생각만 있었지 진로에 대한 별다른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나마 내가 다른 친구들과 다른 생각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면 우리 집안이 내 대학 등록금을 대줄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명확한 자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점수면 4년 장학금에 생활비까지 주겠다는 대학의 법학과에 진학해서 고시를 준비하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든지 많은 아이들을 명문 대학에 진학시켜야 한다는 것을 제일 중요한 진로 지도의 기준으로 삼는 지방 사립 고등학교의 진학 방침에 밀려 학교가 원하는 대학에 원서를 쓰게 되었다.

그런데 그나마 내가 희망했던 1지망에서는 떨어지고, “2지망은 선생님 마음대로 쓰세요”라며 관심도 가지지 않았던, 그런 과가 있는 줄 나중에 처음 안 ‘국민윤리교육과’에 합격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도덕’ 교사가 되는 첫 관문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중부교육청으로 오세요.”

대학 입학 후 처음에는 전공에 대한 고민이 없지 않았지만, 곧 나를 향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에 대한 확신과 섬기던 선교 단체에서의 훈련과 친구․선후배들과의 만남 가운데 기쁘게 대학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전공 공부를 비롯한 학문의 세계도 해 나갈수록 그 맛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교사로서의 부르심에 대해서는 깊이 있는 고민을 하지 못했다. 당시 시대적 모순과 아픔 앞에 무기력한 복음과 교회에 대한 고민이 내 생각을 너무 깊이 지배하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 선교 단체 후배들을 돌보고 섬기느라 여력이 없기도 했다.

대학 졸업할 즈음이 되자 대학원이나 유학 준비를 한 것도 아니고, 별다른 취업 준비를 한 것도 아닌 상태에서, 학점마저 좋지 못했던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5월에 군대에 입대하라는 영장 하나뿐이었다.

그 때가 1988년 2월 26일이었다. 대학 졸업식을 마치고 부모님 배웅을 한 후 집에 돌아와 보니 서울시교육청에서 보낸 서류 하나가 와 있었다. 교사 발령이 났으니 다음날인 27일 오후에 중부교육청으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당시는 국립 사범대 졸업생에게 의무 발령을 내던 시기이긴 했지만, 졸업과 동시에 발령을 받는 사람은 1/3 정도에 불과했다. 내 학점으로는 바로 발령받는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놀라움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내가 교직 발령을 받은 그 다음 해부터 교사 임용 고시가 생겼고, 내가 그때 교사 발령을 받지 못하고 군대에 갔었다면 군 제대 후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임용 고시를 치러야 할 상황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당시 내가 교사가 되기 위해 임용 고시를 치렀을 확률은 거의 0%에 가까웠을 것이라 생각하니 내가 졸업과 동시에 학점 한계를 넘어 발령받은 것에는 우연을 넘어선 어떤 뜻이 있음을 지금도 생각할 때가 있다.


난세에 젊은이는 다치기 쉬워

갑자기 주어진 교직 생활은 곧 다가온 군 입대로 인해 중단되었다. 군 입대를 위한 휴직계를 들고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니 당시 나를 아껴 주셨던 교장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지금 군대 간다 생각하니 마음이 많이 힘들겠지만, 잠시 피해 있는다고 생각해. 지금은 난세야. 난세에 자네 같은 젊은이는 다치기 쉬워.”

당시에 이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는데도 이 말씀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그 다음 해인 1989년에 전교조 해직 사태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당시 2,000명 정도의 교사가 해직당했다. 물론 이들 가운데는 대학 시절부터 학생 운동권에 몸을 담았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교의 비민주적이고 부패한 구조에 대해 의분을 느끼던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기독교인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자기가 몸담고 있는 학교의 잘못된 구조와 관행에 대한 분노와 함께 학교 생활하던 동료 교사들과의 의리, 그리고 해직으로 위협하던 교육 당국과 부모와 선배 교사들의 만류 속에서 많은 교사들이, 특히 젊은 교사들이 전교조 가입을 놓고 탈진할 정도로 고민을 하고 상처를 입었다.

나 역시 군대에 있으면서 신문과 방송을 통해 소식을 듣고 또 친구들의 편지를 들으며 같은 고민과 아픔으로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구체적인 그 고민의 현장에서는 벗어나 있었다. 당시 내가 군대 있지 않고 학교에 있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알 수가 없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와 관계없이 얼마나 많은 생채기를 입고 그 가운데 눌려 생활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 우연의 작동 기제

군 제대 후에도 여러 일이 있었다. 제대 후 학교에 복직하지 않고 불우 청소년을 섬기겠다고 찾아갔다가 거절당한 후 아슬아슬하게 겨우 복직했고, 아이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힘들어 하는 가운데 극적으로 교사로서의 부르심을 확인했다. 학교에서 부딪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찾은 기윤실 강연회 참석을 계기로 기윤실 교사 모임 창립 멤버가 되었고, 이후 좋은교사운동의 진행 과정의 중심에서 서서 지금까지 오게 되었다. 

이렇게 내 인생에 있어서 ‘교사로서의 부르심’ 한 가지만 보더라도 결코 내가 계획하지 않은,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와 이끄심이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도와 보호하심은 객관적 상황에서는 ‘우연’이라는 모양을 하고 찾아왔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 삶을 좌우했던 이 우연은 단지 행운의 이름으로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 노력의 결과나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 온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내 쪽에서의 어떤 결단이나 순종, 헌신과 맞물려 왔다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나의 결단이나 선택을 따라 나를 인도하신 것이 아니라 내 선택과는 전혀 다른, 혹은 선택을 넘어 더 새롭고 적절한 길로 인도하셨지만, 이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내 선택 가운데 있는 어떤 진실 혹은 믿음을 귀하게 보시고 그것을 의로 여기시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우연이 나의 결단과 어느 정도 맞물리는 면이 있었고, 그러한 해석과 연결이 가능했기에 내 삶에 임한 하나님의 우연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으로 이어졌고, 내 삶에 주어진 행운을 넘어 하나님을 소유하며 더 크고 분명한 인도를 받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대학을 선택할 때 나는 진로에 대한 안목이 없는 시골 소년에 불과했지만 이제 더 이상 부모님에게 신세를 지지 않겠다는 정도의 염치는 가지고 있었고, 대학 졸업 즈음에는 비록 졸업 이후를 위한 준비는 전혀 하지 못했지만 시대의 모순의 핵심으로 나아가 그곳에서 복음이 해답임을 삶으로 보이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고 그 소망에 나를 드렸었다. 교직에 나온 후에는 원래 군 입대를 연기하고 교직 생활을 더 하려고 했는데, 학교 내 기간제 선생님 한 분의 부탁을 받고 그냥 예정대로 5월 군 입대를 결정했다. 그 선생님은 내가 군대 간 그 자리에서의 2년 경력을 바탕으로 사립학교에 취업했다. 군 제대 후에는 안정된 공립학교 교사 자리로 가지 않고 불우 청소년을 위한 비정규 기관에 가서 섬기려고 했으며, 이후에도 아이들의 문제와 내 한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몸부림들을 해 왔다.

이런 것들이 내 공로가 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그 중심을 또한 멸시하지 않으셨으리라는 믿음은 분명히 가지고 있다.

올해로 좋은교사운동 대표 역할 3년째 접어든다. 벌써 좋은교사운동 상근자로만 6년 휴직을 했지만 아직 3년이 더 남아 있다. 교사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교사가 아닌 것도 아닌, 이 어정쩡한 자리를 지키며 가끔 내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또 어떻게 인도하실지 그분이 주실 우연을 기대하며, 나는 하나님 앞에서 내 중심을 지키며 살아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