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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오 칼럼

이 세대의 아들과 빛의 아들 (2009년 07월)


 

온 나라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 가져온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역사상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이렇게 오랫동안 슬퍼했던 적이 있었던가 하는 것을 생각할 때, 그리고 한 사람의 죽음이 개인은 물론이고 사회 전반에 이렇게 넓고도 깊은 충격과 성찰을 가져왔던 적이 있었던가 하는 것을 생각할 때 그의 죽음은 어떤 모습으로든 한국 사회 변화의 큰 분깃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사랑과 존경이 아닌 논란과 논쟁의 대상이던 사람

그런데 노 전 대통령은 김구 선생님이나 김수환 추기경 같이 모든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던 존재가 아니었다. 물론 노사모와 같은 열성적인 지지자들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는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논란과 논쟁의 대상이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다고 침묵으로 동조하고 있던 그 문제의 핵심에 온 몸을 던지거나, 분명히 문제지만 모두가 거론하기를 원치 않았던 문제들을 직설적이고 노골적으로 문제 제기하기를 쉬지 않았다.

정치에 입문하기 전에는 군부독재에 저항하고 억압받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싸웠고, 정치에 입문한 이후에는 군부독재의 책임자들을 거칠게 추궁했으며, 국민의 뜻을 벗어난 정치적 야합과 지역주의에 대해 정치적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리고 국민 여론을 자신들의 뜻대로 이끌어가려는 일부 언론 권력에 대해과도 갈등을 지속했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에는 권력기관에 대한 통제를 내려놓음으로 인해 오히려 그들로부터 부메랑을 맞는 것을 자초했고, 정치개혁을 위한 여러 시도들은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으로부터도 외면을 당했고, 부동산 투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몸부림은 부동산 투기 세력으로부터 역공을 당해 오히려 투기가 극성을 부리는 상황을 맞기도 했고,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한 노력은 수도권에 이익을 가진 집단으로부터, 남북 화해와 평화 증진을 위한 노력은 냉전을 통해 이익을 누려온 집단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결과를 낳았다.

세상의 모순에 대한 그의 이러한 도전은 한편으로 그 동안 그 문제를 통해 기득권을 누리고 있던 사람들의 실체를 드러냄을 통해 그들로 하여금 그 동안 숨기고 있던 본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아주 거친 방식의 저항을 하게 만들었다. 특별히 일부 언론들은 언론으로서의 최소한의 공정성도 유지하지 않음으로 자신들의 실체를 드러냈다.


비방의 표적과 거치는 돌이 된 사람

하지만 그의 도전으로 인해 실체가 드러난 사람들은 일부 기득권층만이 아니었다. 이 사회에서 큰 기득권을 가지지 못한 소시민들도 부분적으로 이 사회의 모순들과 직간접으로 개입되어 있고, 그들도 이 사회의 변동 과정에서 혹 자신에게 약간이라도 손해가 가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음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그들 중 많은 사람은 기득권층들이 주도하는 현재의 모순이 유지되어야 자신도 그 기득권층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기득권층이 던져주는 고물을 맛볼 수 있을 것이라는 욕망의 존재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물론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도 허물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의 고백대로 그는 새 시대를 처음이기를 원했지만 사실 구시대의 끝자락을 살았던 사람이다. 야당의 1/10에 불과했다고 하지만 그도 불법 대선자금을 받았어야 했고, 전직 대통령들에 비하면 지극히 미미한 액수이고 먼지털이 수사라고는 하지만 포괄적 뇌물수수 협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기득권의 저항과 주류 구조가 워낙 강고했기에 그들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직설적이고 거친 언어와 행동이 불가피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닫게 만드는 부분도 많았다. 의도는 좋았지만 그것을 실행할 능력이 부족한 부분도 많았고, 좀 더 잘 해 주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실망을 준 부분도 많았다.

어쨌든 이 모든 것이 맞물려 그는 마치 비난받기 위해 대통령이 된 사람처럼 많은 사람들의 비방의 표적이 되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거치는 돌이 되기도 했다.


그의 죽음이 남긴 것

그의 죽음은 그 동안 일부 언론을 비롯하여 여러 기득권 세력과 사람들의 욕망, 그리고 그의 인간적 허물들이 버무러져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있던 안경을 벗기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 시대가 처한 상황과 그 가운데서 그가 바라봤던 이상, 그리고 그가 하고자 했던 일에 대해 실체에 가깝게 보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그에 대한 이어지는 추모와 슬픔의 실체가 아닌가 싶다.

그러하기에 그의 죽음에 대한 국민적 슬픔은 단지 시간이 흐르면 잊혀지는 감정적 차원에 머물 것 같지가 않다. 오히려 국민들은 그의 죽음을 통해 그가 맞부딪혀 싸우고자했던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시대적 과제의 핵심을 볼 수 있는 안목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현재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격차를 점점 더 벌리는 승자독식의 사회로 갈 것인가 아니면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를 줄이며 모두가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 인간적인 사회로 갈 것인가 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국민들은 그의 죽음을 통해 우리 시대 사람들을 떠받치고 있는 욕망의 실체를 보게 되었고, 이제 그 욕망의 추구를 향해 앞만 보고 달리는 우리의 모습을 성찰하고 옆을 볼 수 있는 성찰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국민 모두가 부동산과 주식으로 대표되는 불로소득에 눈이 멀어있고 경제적 이익과 고물이 떨어지는 것이라면 묻지마 지지를 보내는 우리의 속물근성에 대해서도 돌아보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이 세대의 아들’이 가진 한계를 넘어

어떤 사람은 그의 죽음의 방법이 ‘자살’이라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물론 ‘자살’이라는 이 죽음의 방법에 동의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으로 향해 나아가는 구속사에 참여하지도 알지도 못하는 ‘이 세대의 아들’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다만 하나님이 일반 은총으로 허락하신 양심에 대한 민감함과 불의에 대한 분노와 약자에 대한 아픔에 반응하여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다스리는 일반 역사의 한 도구로 살아왔을 뿐이다. 그러하기에 그에게 있어서 ‘자살’도 이러한 양심과 분노, 아픔에 대한 최후의 반응 수단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하기에 ‘빛의 자녀’로 부름받은 우리는 그의 ‘자살’을 탓하기 이전에, ‘이 세대의 아들’로서 양심을 통한 하나님의 보편적인 의의 통치에 반응하기 위해 자신의 온 삶을 드리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보편적 의의 요구 뿐 아니라 구속사적인 의의 본질을 아는 자로서 그 의에 반응하기 위해 무엇을 했고, 무엇을 희생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그는 구원의 진리를 모르는 자로서 구속자로서의 메시아의 본질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정치적이고 세속화된 차원에서는 메시야적 요소들을 그의 삶을 통해 많이 반영하였다. 그러기에 ‘빛의 자녀’인 우리가 할 일은 그가 참 진리의 본질에 도달하지 못한 자로서도 양심을 통해 희미하게 비취는 진리를 반영하기 위해 했던 그 노력이 가진 한계를 진리의 본질로 그 의미를 충만하게 드러내고 실현해가기 위한 몸부림을 시작하는 일일 것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몸부림은 ‘빛의 자녀’인 우리가 어떤 면에서는 ‘이 세대의 아들’보다 더 의롭지도 지혜롭지도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서 ‘빛의 자녀’라는 우리의 정체성은 분명하게 유지하지만 ‘이 세대의 아들’의 의와 지혜로움에 대해 겸손한 자세를 취하고 그를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제대로 듣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리라.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누가복음 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