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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젖은 날개들을 쉴 수 있도록(2015.09)

신규교사 시절, 모든 것이 새로웠고 저는 아주 무식했죠. 열정은 있었지만 기술은 전무했어요. 아이들이 떠들면 뒤돌아서 기도했어요. 아이들이 안 떠들게 해달라고요. 기도해도 아이들 입이 닫히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때의 웃픈 실수들을 기록한다면 책을 한권 내야 할 거에요. 많은 시행착오 끝에 기독교사란 가슴은 성직, 손은 노동직, 머리는 전문직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젖은 날개들을 쉴 수 있도록

안산 슬기초등학교 전소연 선생님

 

 

 

, 손현탁

 

 

 

 

기독교사. 가슴 벅찬 단어죠? 그런데 현장에서 살아가다보면 얼마나 부담스런 단어인지... 때론 이 짐을 벗어버리고 도망가고 싶을 때도 많은 것 같습니다. 여기 이렇게 기독교사의 삶을 살아가보자고 속삭이듯 말씀하시는 선생님이 계시네요.

 

사랑과 아픔이라는 주요 기억을 저장한 어린 시절

1974년도 겨울, 서울 정릉동에서 14녀 중 막내로 태어나 어른들의 사랑과 귀여움을 받고 자랐어요. 아랫집에서는 꿈의 과일 바나나로 저를 유인한 후 자주 데려다 놀아주셨고, 어르신들은 뜻도 모를 노래와 춤을 시키며 즐거워하셨죠.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즐겁게 놀았던 기억으로 가득해요. 언니들은 공주처럼 집에만 있었는데, 저는 고무줄놀이, 딱지치기, 땅 따먹기 하느라 바빠서 해가 지고 나서야 퇴근을 하곤 했지요. 먼지투성이가 되서 늦게 들어와도 딱히 혼난 기억이 없어요. 부모님은 5남매 중 저에게만 유독 허용적이셨어요. 막내의 특권이었던 것 같아요. 천방지축, 좌충우돌, 늘 즐겁기만 했던 나의 어린 시절은 정말 행복했어요. 아버지가 돌아오시기 바로 전까지만요.

아버지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건축을 하셨는데, 일 년에 한두 번 집에 오셨어요. 아버지가 오시면 집에 큰 싸움이 났어요. 큰 오빠는 집을 나가버리고, 언니들은 싸우지 말라고 울며 매달렸지만, 너무 어렸던 저는 그 자리에 얼음처럼 꼼짝없이 서서 놀란 마음으로 바라보기만 했어요. 그리고 그 모든 광경들을 마치 사진을 찍듯이 제 인생의 주요 기억으로 입력했지요. 그때 무섭다고 표현하고 풀지 못해서 그런지 지금도 그 꿈을 꿔요.

여섯 살, 여름성경학교에 놀러 갔던 것이 계기가 되어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 이후 하나님은 제가 사는 이유였죠. 편치 않은 집에서 만신창이가 된 마음이 되면, 도망 나오듯 교회로 달려왔어요. 십자가 아래 찬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입술로 표현하지 못하는 마음까지도 위로해 주셨어요. 그렇게 눈물과 기도를 쏟고 나면 맑은 마음이 되고 새 힘이 생겼지요. 그때의 첫사랑과 믿음, 은혜로 지금까지 살고 있는지도 몰라요.

중고등학생 때는 열심히 공부해서 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삶을 나누는 것이 꿈이었어요. 지나친 이상주의자였죠. 걸어가면서도 공부를 할 정도였는데, 대학에 떨어지고 말았어요. 학력고사 당일, 급채와 위경련으로 시험을 중도 포기해야 했어요. 마지막 교시를 남기고 걸어 나오던 그 긴 복도를 아직도 기억해요. 심장이 없어져버린 기분이었어요. 아직도 긴장하면 머릿속이 하얗게 되고 위가 멈추고 급채하는 병이 있어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있을 이 병이 저에겐 악성이었어요. 3 연합고사 당일 발견된 이 병은 졸업연주회, 공개수업 등 크고 작은 일들 앞에서 그 존재를 당당하게 드러내곤 했죠. 위급한 상황에서 뇌의 신경전달물질이 이상 방향으로 진행할 경우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데, 상담을 하면서 유아기의 정신적 손상이 큰 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특히 이 병은 아버지 또래의 남자 어른들 앞에서 자주 도지곤 했는데, 요즘은 많이 나아졌어요. 좋아진 이유로는 신앙과 상담, 성숙이라는 아름다운 이유도 있지만, 관리자급 어르신들이 이제 더 이상 나와 큰 나이 차이가 없어졌다는 웃지 못 할 이유도 있답니다.

얼마 전, 상담을 받다가 정릉 집 곳곳에 놀란 눈으로 서 있는 다섯 살의 소연이를 보게 되었어요. 누군가 안아주면 바로 엉엉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아이의 표정이 불쌍해서 눈물이 나더군요. 그 아이에게 말했어요. “소연아, 그때 많이 놀랐지? 괜찮아. 어른들은 그렇게 싸울 수도 있어. 너 탓이 아니야.” 라고 말이에요. 하지만 쉽게 눈물이 그치지는 않더군요. 아버지는 제 내면에 남아있는 미해결 과제들과 많은 관련이 있어요. 그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노력하고 집착했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대로 남겨놓았어요. 그 아픔으로 인해 인생의 제한점도 생겼지만, 나 자신을 성찰해야만 하는 계기가 되었고, 에덴을 떠난 인간의 보편적 고통을 이해하는 창이 되었어요. 또 굽은 나무에 새들이 쉴 곳이 많듯이, 다른 사람의 마음으로 건너가는 연민의 다리가 되었고, 진주와 같은 비전이 되기도 했어요. 행복도 슬픔도 소중한 저의 일부분인 거죠.

 

속아서 들어간 대학교에서 CCC를 만나 새로운 꿈을 꾸다!

당시 처음 시행된 수능은 두 번 시험 중 잘한 점수를 택하는 여유로운 방식이었기 때문에 저에게는 기회가 되었어요. 그러나 원하는 대학들은 모두 떨어지고, 강요로 쓴 교육대학만 붙게 되었어요. 저는 학교를 다니며 반수를 시작했지요. 그런데 어머니께서 대학 1학년 말에 말씀하시더군요. 사실은 지원한 4개 대학에 모두 합격했는데 교대를 보내기 위해서 속이셨다고요. 당시 제가 맘이 여리다며 대학 합격 결과를 어머니께서 모두 확인하셨거든요. 제가 다시 시험을 보겠다고 우기자, 충격적인 선언을 하셨어요. “네가 교대에 계속 다니면, 그렇게 바라던 교회에 가겠다!” 라고 말이에요. 그렇게 저는 교대에 눌러앉게 되었어요. 제가 어떤 대학에 다니던, 내 꿈이 무엇이던 부모님의 구원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렇게 시작된 대학생활은 저에게 너무 외롭고 힘들었어요. 3월 초에 할 수 있는 일은 혼자 우는 일, 친구들에게 편지하는 일, 울면서 전화했다가 엄마한테 혼나는 일 뿐이었어요. 그런 저에게 순장님께서 다가오셨어요. 순모임 시간에 성경을 읽을 때마다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새로웠어요. 하나님을 알아가는 그 느낌은 마치 장님이 세상을 처음 보는 것과 같았어요. 그 뜨거운 믿음 안에서 민족 복음화, 세계 복음화의 꿈을 꾸게 되었지요. 텐트가 물에 둥둥 떠다니던 몽산포 여름 수련회, 텐트가 하늘로 날아다니던 고성 잼버리 수련회, 노숙자 같았던 거지전도여행, 배고팠던 금식수련회, CCC 안의 경험도 소중했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는 순장님들의 모습을 통해 많은 도전을 받았어요.

뜨거웠던 대학 시절엔 제가 인류를 구하는 영웅이 될 줄 알았어요. 온 몸에 문신을 한 조폭 아저씨에게도 덥썩 사영리를 꺼내고, 노숙자들을 찾아다니면서 돈을 드리거나, 겁 없이 모셔다 식사를 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내가 하는 일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도 같았어요. 삶은 드라마가 아닌 것을 알게 되었죠.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 보이던 어느 날,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라며 모델링하라는 바울을 봤어요. 자기처럼 살라는 거죠. 한 사람의 힘은 작지만, 나처럼 살 수 있는 두세 사람에게 꿈을 나눈다면, 또 그 두세 사람이 다른 두세 사람에게 꿈을 나눈다면 작은 빛은 큰 빛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 말씀은 비젼이 되었어요. 교실에서 나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제자들을 만들겠다는 기독교사의 꿈입니다.

 

어려웠던 신규교사, 그런 나를 도와준 CCCTIM

신규교사 시절, 모든 것이 새로웠고 저는 아주 무식했죠. 열정은 있었지만 기술은 전무했어요. 아이들이 떠들면 뒤돌아서 기도했어요. 아이들이 안 떠들게 해달라고요. 기도해도 아이들 입이 닫히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때의 웃픈 실수들을 기록한다면 책을 한 권 내야 할 거에요. 많은 시행착오 끝에 기독교사란 가슴은 성직, 손은 노동직, 머리는 전문직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은혜로 될 것과 노력해야 할 것을 조금씩 구분하게 되었어요. 생활지도와 수업지도면의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배움의 시간을 가지며 역량을 키워갔지요.

당시에는 수업과 생활지도보다 오히려 성경공부가 쉬웠어요. 가정통신문을 보내 성경공부할 사람을 신청 받아 대여섯 되는 아이들과 순모임을 했었어요. 또 학교 인근의 교회와 연계하여 여름성경학교를 진행하기도 했어요. 제가 온다는 소문을 듣고, 우리 반 아이들 17명이 여름성경학교에 와서 등록을 했지요.

반면 가장 어려웠던 것은 화를 내는 일이었어요. 화를 낸다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이라는 비합리적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화를 잘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훈계를 위해 화를 내고 나서도 죄책감에 빠졌어요. 지금은 화를 내지 않고, 화를 표현합니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할 때는 비폭력대화가 도움이 되었어요. 이제는 큰 소리를 내지 않고도 교실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지요. 훈계 상황에서 학생들의 감정은 수용하지만 그 행동에는 한계를 단호하게 지어줄 수 있게 되었어요. 이러한 경지가 되기까지 많은 시간과 시행착오가 쌓여야만 했던 것 같아요. 두 번째로 어려웠던 것은 남학생들이었어요. 아버지라는 한명의 경험을 모든 남자에게 전치시켜버리는 오류를 자주 범했어요.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인생각본을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나 자신이 바뀌지 않고서는 매번 똑같은 문제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저는 CCCTIM에서 활동을 하던 남편을 따라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고, 팀의 권유에 따라 부부 집단상담을 받게 되었어요. CCCTIM에서는 팀의 성장 속에서 쉽게 놓칠 수 있는 개인 내면의 치유와 성숙에 관심을 가졌고, 교사의 부르심 안에서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숙해가도록 힘을 실어주었어요. 상담을 통해 잘 살고 있다고 자부하던 나의 내면에 엄청난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빙산의 일각처럼 눈에 보이는 것들만을 해결하려고 했는데 보이지 않는 것들이 얼마나 강력하게 내 삶에 영향을 주었는지 보게 되었어요. 그 이후로 지금까지 남편과 상담 공부를 계속 하고 있어요.

 

연결의 힘을 믿어요!

인간의 마음에 대해 공부하면서 이상심리를 보이는 학생들에게 많은 관심이 가요. 그들은 전문상담을 받아야 하는 아이들이지만, 이미 가정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지요. 아무도 그들을 병원이나 상담소에 데려갈 여력이 없어요. 그런 그들에게 교사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은 너무 작아요. 하지만 무책임하게 회피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2014년도에 연구년으로 활동하면서 학교폭력예방을 위한 인성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정식 명칭은 ‘SAM Connection Program’으로 나(자존감), 타인(대인관계), 공동체(갈등중재)프로그램으로 구성되요. 또 프로그램의 중에서 장기적으로 기억해야 하고 훈습이 필요한 내용을 가사로 추출하여 노래와 율동을 개발했지요. 이것은 CCM 가수 유제범, 브라보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자 조현남, 어린이 랩사역자 휘타, 전도폭발 영상간사 김승철, 레인보우 율동팀장 윤미정, 노아 팀장 최복은 등 13명의 전문가들과 33명의 학생들의 재능기부로 가능했어요. 연결의 힘이지요.

음악교육과 출신이라 계속 음악 업무를 담당했어요. 처음엔 재능도 관심도 없었지만, ‘일만 시간의 법칙에 따라 나름 노하우와 자료들을 얻어갔지요. 학예회 날, 아이들이 비교육적인 내용의 가요를 부르며 선정적인 골반춤을 추는 것을 자주 보게 되요. 그런 아이들에게 동요를 들이미는 것은 갭이 너무 크게 느껴졌어요. 빠르고 재미있는 곡이지만 마음이 맑아지는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하고 싶어서 인성노래를 만들게 되었어요. 음악은 학습을 촉진시키고 가사 내용을 장기적으로 기억하게 하지요. 그것을 시작으로 지금도 매달 미취학부를 대상으로 한 말씀송을 만들고 있고, 최근에는 노아(노래하는 아이들)과 함께 쉼이 있는 교육 주제곡을 만들고 있어요.

 

연약할 때 나타나는 예수님의 능력

기독교사로 사는 것은 단순히 사영리를 전하는 것 이상입니다. 특히 초등교사는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가치관과 삶을 전달하게 되지요. 교사가 바른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교육과정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하고 가르칠 때, 학생들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세대를 본 받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아가는 교사의 잠재적 교육과정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될 거에요.

제 꿈은 크지 않아요. 몇 백 명을 전도하고, 몇 억을 헌금하는 등의 찬란한 일들은 계획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 일들은 훌륭하신 분들이 하시더라구요. 전 그냥 평범한 교사가 되고 싶어요. 높아지고 빨리 가지는 않아도, 아무도 봐주지 않는 교실에서 조용히 깊어지고,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싶어요. 상처받고 소외된 아이들이 제 품 안에서 수용되고 사랑을 얻어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젖은 날개들을 쉬고 푸른 하늘을 향해서, 그들의 꿈을 향해서 힘차게 날아갈 수 있도록 제 마음을 더욱 활짝 열고 싶어요. 그게 저에게는 큰 꿈이랍니다.

한 때 능력이란 눈 먼 자의 눈을 뜨게 하고, 몇 천 명이 회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아이들도 잘 가르치고, 안팎으로 훌륭함을 인정받는 파워 있는 기독교사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현실에 부딪힐 때마다 좌절하고 힘들었죠. 지금은 조금 달라요. 제가 생각하는 능력이란 돌로 맞고도 다시 일어나고,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도 다시 그 길을 가는 것이에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도망가는 굴욕을 겪어도 변함없이 목적을 향해 가는 힘입니다. 저는 연약하지만 그 연약함으로 인해 그리스의 능력이 저에게 머물기 때문에 저는 다시 예수님의 능력으로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약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울면서도 씨를 뿌리는 일을 계속하는 것, 그것이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기한까지 연약하지만 꺾이지 않으며 기독교사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말씀을 붙들고, ‘상처입은 치유자로 살아가기 위해 애쓰시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기독교사로 살아가는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나의 약점을 인정하고 그것을 통해 드러날 하나님의 강함과 능력을 기대하는 삶. 그렇지만 대단한 일들이 아니라 내 주변의 학생들과 동료 교사들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는 삶. 때론 작아 보이지만 위대한 그 일을 위해 오늘도 이 땅에서 살게 하셨다는 생각에 평범한 하루하루가 더 소중해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