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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 있다 보면 청소년을 바라보는 지혜를 입게 되죠.(2015.08)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이 옳다면 그런 보상이 없더라도 가야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아요. 우리가 보상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는 게 아니니까요. '이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찾아오겠지'라는 기대조차도 내려놓아야 하죠.그렇게 아무 얻어지는 것이 없어도 이 길이 맞는 것 같아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 있다 보면

청소년을 바라보는 지혜를 입게 되죠.

 

경인고등학교 곽상학 선생님

 

 

 

, 사진_ 주종호

 

 

 

국어교사, 목사, 청소년 사역, 레크리에이션, 입양, 청바지 등 곽상학 선생님을 수식하는 말은 참 여러 가지입니다. 살아온 삶이 그만큼 평범하지 않았다는 뜻이겠지요. 최근 출간한 선생님의 책 청바지(청소년을 바라보는 지혜를 입어라_두란노)’를 읽으며 그가 요즘 세상에서 말하는 스토리가 있는 사람임을 알아챘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 풀어놓은 하나님의 스토리.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봤습니다.

 

상실 속에 찾아온 믿음

제 생일은 1971315일입니다. 제 아버지는 충남에서 병원을 하던 부유한 집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6.25 전쟁 중에 수난을 겪으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고 전쟁이 끝난 후 상경해서는 매우 어려운 성장기를 보내셨어요. 청년이 되어 한 식당에서 주방 일을 하셨는데 거기에 종업원으로 있었던 어머니를 만나 저를 낳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두 분이 결혼을 하신 상태가 아니었던 데다가 신생아였던 제가 몸이 많이 약해서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출생신고를 안 하셨다고 해요. 그런데 제가 점차 건강해지길래 출생신고를 하러 가셨는데 태어난 해는 알았지만 출생일이 언제인지를 두 분 다 모르셨던 거예요. 그래서 그냥 면사무소에 신고하러 간 그 날짜로 출생신고를 했고 그게 제 생일이 됐습니다.

제가 자랄 때 우리 가족은 주로 청계천, 을지로 등 아버지가 장사를 하시던 곳에 살았어요. 아버지는 열심히 사업에 매진하셨어요. 다만 부모님이 서로 다정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일 때문에 아버지가 집에 잘 들어오시지 않는 경우도 있어서 어떻게 해서든 내 동생들을 내가 돌보고 관리해야겠다는 생각을 스스로 했어요. 제 밑으로 여동생 둘이 있는데 그 아이들에게 저는 엄부(嚴父) 같은 오빠가 된 거죠.

남자가 시간 있고 돈 생기면 다른 생각을 한다고,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도박과 여자 때문에 집안 재산을 탕진하셨고 아예 따로 살림을 차려서 저희 가족을 떠났습니다. 가뜩이나 예민한 사춘기에 한때 영웅이었던 아버지가 저희 가족을 떠났기 때문에 저는 정말 삶의 방향을 잃었고 심각하게 고민을 하다 죽을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렇지만 죽으면 전설의 고향에 나올 법한 지옥이 반드시 있을 것 같았어요. 지옥에는 가지 말아야겠다 싶었고 그러려면 종교를 가져야하는데 절에 가자니 도시에서 다니기가 어렵고 그래도 교회에 가자는 생각에 일단 서점에서 성경책을 사다가 집에서 조용히 읽기 시작했죠. 마침 하나님의 은혜로 근처 교회의 전도사님이 가정방문 전도를 해서 그 교회에 따라 나갔는데 의자도 없는 작은 교회였어요. 거기서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동생들도 데리고 나가면서 그 교회 청소년부가 처음으로 시작됐습니다.

학교에서는 학급회장도 하고 공부도 무난하게 했어요. 그렇지만 가정사가 순탄치 못해서 순간 방향을 잃을 때는 공부에서 아예 손을 놓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거의 꼴등을 하기도 했어요. 기복이 심했죠. 사립 인문계고등학교에서 경쟁하며 공부하느라 많이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매일 도시락을 세 개씩 싸들고 다니면서 밤 10시에 집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하며 종례를 했죠. 너무나 힘들고 치열하게 공부를 했던 것 같아요. 성적순으로 서열화시키는 학교가 결코 행복하지 않았죠. 유일한 낙은 교회에 다니는 거였어요. 작은 교회였지만 교회에서 여러 가지 활동을 했죠. 유명한 부흥사님이 오면 작은 교회에 삼사백 명이 들어차서 부흥회를 했는데 그때 전도사님이 안 계셨기 때문에 고등학생이었던 제가 양복을 입고 보혈찬송을 한 시간 동안 인도하기도 했어요. 제가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이듬해, 고등학교 1학년 누나가 잠실에서 전학을 왔어요. 예쁘고 말도 잘 통해서 참 좋았지만 고백은 못하고 짝사랑만 했지요. 나의 첫사랑이자 짝사랑이었던 그 누나는 지금 제 아내가 되어 있습니다.

 

선교, 교사가 된 이유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학력고사를 불과 몇 달 앞두고 기흉(氣胸)으로 수술을 받고 입원을 했습니다. 심란했던 그때, 오히려 예수님을 뜨겁게 만났고 그 사건을 통해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명확한 삶의 방향을 정했어요. 주의 보혈로 내 인생을 덮고 사람 살리는 길을 가자 생각하고 신학대학에 가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마지막 때가 가까웠는데 신학대학에 바로 가는 것보다 언어를 준비하여 선교지로 나가야 하겠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중국에 가서 북한으로 넘어가 복음을 전하겠다는 마음을 정하고 1990년에 중어중문학과에 입학했어요.

대학 기독학생회와 교회 차세대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군복무를 마치고 교회의 파송을 받아 마침내 중국에 가게 됐어요. 스물다섯 살 때였는데, 현지 선교사님을 도와 학교를 세우는 일을 했죠. 현지를 체험해보니까 공산권 같은 창의적 접근지역 선교를 위해서는 뭔가 도구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의사든 사업이든 교육이든 뭔가가 필요했는데 제게 사람을 키우는 은사가 있다는 조언을 듣고 교육선교로 방향을 잡게 된 것이죠. 해외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국어교육을 다시 전공하기로 했어요. 이처럼 제가 교사가 된 데에는 선교가 결정적인 동기가 된 겁니다. 졸업 후에 중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나면서 다양한 수업 방법과 독특한 학급 경영을 시도하며 좌충우돌 교직 생활을 이어갔어요.

2010년에 중국 천진한국국제학교에 초빙교사로 1년간 근무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교회 파송으로 선교를 다녀온 지역이었죠. 학교에서는 국내와 같이 한국 아이들에게 국어를 가르쳤지만 근무시간 외에는 현지 대학생들과 일대일 제자훈련을 몰래 했습니다. 그런데 총각 때 선교지에 있을 때와는 달리 가정이 있는 상태에서 아내, 아이들과 떨어져 혼자 들어와 있으려니 만만치 않더라고요. 하지만 그때 만났던 중국 대학생들을 지금도 만나다 보면 선교적 영성을 유지하며 교단에 설 수 있다는 강력한 동기가 되어 감사하답니다.

 

내 생애의 아이들

한 아이가 있었어요. 이 아이는 가정에서 관리가 거의 안 되는 아이였어요. 제가 총신대 대학원에 다닐 때였는데 노는 아이들이 매일 이 친구 집에 가서 진을 치고 있는 거예요. 안 되겠다 싶어서 일주일에 두 번 제가 대학원에 가는 날에는 이 친구를 데리고 다녔어요. 총신대 식당에서 함께 저녁을 먹고 공부할 거리를 줘서 독서실에 들여보낸 후에 저는 수업을 들으러 갔죠. 수업 마치면 10시에 같이 집에 왔어요. 저는 쌍방향 가정방문을 해요. 제가 아이들 집에 가는 것만 아니라 아이들이 우리 집에 오기도 하죠. 이 아이는 우리 집에 거의 20번도 넘게 와서 밥 차려그러면 알아서 라면을 찾아 끓이기도 했어요. 그만큼 이 아이를 아끼고 친밀했는데 어느 날 아이 엄마에게서 전화가 온 거예요. 저는 감사 전화 인가보다 했는데 집에 저금통이 없어졌으니 찾아 달라는 전화였어요. 집에 아이들이 워낙 많이 왔다가니까 그 아이들이 저금통을 훔쳐간 것 같으니 저에게 찾아달라는 거였죠.

순간의 보람을 바라며 학급운영을 한다면 그건 참 힘듭니다. 교사는 부모님과 관리자의 지지와 격려에서 많은 힘을 얻는데 이런 일이 있을 때는 사실 힘이 빠지더라고요. 관리자분들도 그래요. 가정방문을 가려고 출장을 올리면 왜 쓸데없이 꼭 필요하지도 않은 일을 굳이 벌이려고 하느냐거나 마치 출장비를 받으려고 그러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 참 힘들기도 해요. 기독교사들은 그런 것 같아요.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하려니까 더 힘든 거예요. 격려와 칭찬과 인정이 안 되니까. 그런데도 이 길이 옳다면 그런 보상이 없더라도 가야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아요. 우리가 보상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는 게 아니니까요. ‘이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찾아오겠지라는 기대조차도 내려놓아야 하죠. 그렇게 아무 얻어지는 것이 없어도 이 길이 맞는 것 같아요.

 

복음을 흘려보내는 선생님

저는 국어과 수업을 다양하게 구조화하는데 가급적 기독교적 세계관을 수업에 많이 녹여내려고 노력합니다. 국어과는 타 교과에 비해 그러기가 한결 유리하죠.

사립학교에 있을 때는 학교에서 복음 전하는 활동을 자유롭게 마음껏 했어요. 공립학교에 근무하면서는 학교장 경고장을 몇 번 받았어요. 정식으로 결재라인 다 거쳐서요. ‘담임 쌤과 함께 하는 조찬 프로젝트라는 것을 했는데 마음 맞는 아이들끼리 그룹을 짜서 담임 선생님과 아침을 먹는 것이었어요. 저는 컵라면을 준비해놓고 아이들에게는 각자 간단한 음식을 가져오도록 했죠. 먹을 때 간단한 예식으로 기도를 하고 먹는데 교회 다니는 아이들이 있다면 그 아이에게 기도를 시키고 없으면 성당 다닌다는 아이에게 시키고 그나마도 없으면 농부님께 기도하자고 하면서 기도를 했어요. 그런데 그게 불교나 무종교인 부모님들에게는 선생님이 교회 다니는 아이들만 예뻐한다며 문젯거리가 됐고 그분들은 교감 선생님께 바로 전화를 했죠. 아이들에게 선생님과 함께 학교 교무실에서 하는 아침식사는 잊지 못할 좋은 추억일 수 있는데 아쉬웠어요. 아이들이 우리 집에 왔을 때 가장 복음을 쉽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곳곳에 기독교적인 상징물들이 있으니까 그것이 매개가 되어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게 돼요.

아이들이 먼저 다가와 선생님, 할 말 있어요하는 것은 상담이고 선생님이 너 얘기 좀 하자하는 것이 면담인데, 면담이 아니라 상담을 해야 하는 거잖아요? 저는 제 쪽에서 먼저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아요. 특히 아이들이 우리 집에 왔을 때는 일단 그냥 TV 봐요. 아니면 이런저런 얘기하고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뭔가 물꼬가 트이면 그것을 가지고 아이들이 술술 말하게 되는데 그 타이밍을 만드는 거죠. 그렇게 학급운영이 되고 그 관계가 자산이 되는 겁니다. 그때는 제가 원치 않는 이야기들까지 줄줄이 엮여 나와요. 그러면 저는 진짜 그래?’하면서 무심한 듯 반응을 합니다. 특히 남자 아이들과 상담할 때는 얼굴도 안 쳐다봐요. TV 보면서 이야기를 쭉 듣다보면 아주 깊은 이야기들을 막 해요. 그중에는 거의 뉴스에 나올 법한 것들도 있죠.

제 주변에 왜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공립학교 남교사에게 주어지는 일들의 특성상 그런 상황에 많이 노출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뿐 아니라 하나님이 경험하게 하신 것도 같고요. 그것들이 다 아름다운 일들만은 아니지만 목회의 자산, 청소년 사역의 자산이죠.

 

용서로 회복된 가정

저의 가장 큰 신조는 ‘open’이에요. 이것이 학생들과 부모님의 마음을 여는 key. 교사가 자기 삶을 보여줘야 해요. 예전에 모 방송사의 인터뷰게임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했었습니다. 출연자가 자기 삶의 문제와 관련된 여러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문제를 풀어가는 프로그램이었죠. 당시 제가 근무했던 학교 아이들은 잠재적인 경우까지 포함해서 거의 50% 가까이가 깨어진 가정의 아이들이었어요. 얘들한테 뭔가 더 가르치고 성적을 올리는 것보다 좀 더 공감하고 다가가야 할 필요가 시급했습니다. 내가 꺼내놓아야겠다고 생각해서 방송에 나갔죠. 또한 아버지를 용서하고 그분과 화해하고 싶은데 그럴만한 계기가 필요하기도 했어요. 마침 해당 프로그램 관련자가 제 후배여서 자연스럽게 기회가 닿았던 겁니다.

아버지의 과거와 관련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다가 제 이복동생까지 만나게 되었습니다. 만나서 물었어요. “너는 행복했니?” 그러자 동생은 .”라고 답하더군요. ‘, 너는 행복했구나.’ 저의 청소년기에는 아버지가 없었지만 이복동생의 청소년기에는 아버지가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지금도 실제 아내는 그분이라 생각하고 이복동생을 자기 자녀로 여기며 더 귀하게 여기십니다.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오는 것은 대부분 이 아이를 위해 무얼 좀 도와달라는 거예요. 섭섭하기도 하죠. 이복동생은 손가락 한 마디가 없는 장애가 있는데다 미래에 대한 준비도 꿈도 없이 게임 폐인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장래가 보이지 않던 동생을 위해 우리 가족 모두가 예수님의 보혈로 덮고 기도했어요. 지금 그 친구는 대기업 본사에서 근무하며 결혼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였죠. 아버지는 지금도 그래요. (이복동생) 인생이 풀린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요. 그러면 저는 아버지에게 그럽니다. “아버지, 왜 얘 인생이 풀린 것 같으세요?” 그러면 아버지는 네가 기도해서냐?” 그러십니다. 농담조로 말씀하시지만 아버지도 인정을 하세요. 방송 후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것은 꼭 통과해야만 하는 과정이었고 그 과정을 지난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것들이 회복됐습니다. 서로 왕래도 하고 있고 명절 때는 그 어머니(지금은 홍천 어머니라고 부릅니다.)가 저희 집에 와서 제 어머니와 함께 장을 보러 다니세요. 어머니를 형님이라고 부르면서요. 제 어머니가 참 대단하신 거예요. 우리 가정에서 제가 자살을 생각하다가 먼저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제 동생들이 따라 나왔고 마침내 어머니도 믿음을 갖게 되어 매일 새벽기도를 다니며 저보다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평은 용서를 통해 왔잖아요? 용서는 주의 보혈로 일방적인 은혜로 뒤덮여야 이루어지는 거예요. 한쪽이 굉장히 손해 보는 거예요. 큰 각오가 있어야 하죠. 성경 인물 중 므두셀라의 삶을 통해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오래 참으세요. 우리를 향해 오래 참고 손해 보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을 받았다면 나 또한 그런 사랑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입양, 하나님 사랑의 펌프

아내와 마음이 아주 잘 맞아요. 꿈이 같죠. 거실 한 가운데 저희 가훈(?)을 써 놓았는데 짧은 인생 웃자예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늘 행복하게 웃으면서 살자는 의미도 있지만 이 세상이 짧다는 것,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이 짧다는 것, 그러니 좀 더 의미 있게 살자는 의미가 있죠.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일이 뭘까를 고민해보니 사람 살려내는 것이더라고요. 그래서 단기선교 등으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여러 구호기관을 통해 후원도 했지만 어느 날의 큐티를 통하여 보다 지속적이고 실천적인 삶을 살 것을 도전받게 되었어요. 청년 때부터 입양을 생각했지만 선뜻 용기가 안 났고 여러 차례 상담을 하면서도 용기가 나지 않아 그냥 돌아오곤 했어요. 그렇지만 기도할수록 마음을 강하게 주셔서 솔직히 눈 질끈 감고 입양을 했습니다.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남자 아이 둘을 입양했어요. 보통 남자 아이 입양은 잘 안 한답니다. 대부분 여자 아이 입양이고 남자 아이는 해외로 입양되는 경우가 많아요. 입양을 하려는 사람들이 이것저것 많이 따지고 까다로운 경우도 많고요. 그런데 저희 부부는 그런 것 없이 되는 대로 입양을 했어요. 그랬더니 홀트 쪽에서 저희 가정에 대해 무척 고마워하시더라고요.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습니다. 애초에 불임 부부였다면 어느 정도 수월했을 거예요. 그런데 저희는 직접 낳은 아이가 있잖아요. 비교가 될 것 같은 거예요. 비교는 무서운 거거든요. 게다가 첫째 아이를 초등학교 5학년까지 키웠잖아요? 이 아이한테 사랑을 다 쏟아내고 우리 안에 남은 건 의무감밖에 없을 거다, 그냥 복지 차원에서 입양하는 거다, 그러면 우리는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우리 결론이었거든요. 그게 가장 무서웠어요. 사랑이 아닌 의무감으로 입양한 아이를 양육하는 것이 아닐까, 첫째 아이에게 쏟은 것 같은 사랑을 과연 입양한 아이에게도 줄 수 있을까 정말 두려웠어요.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기우(杞憂)였습니다. 사랑은 저장된 것이 아니더라고요.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거였어요. 마르지 않게 부어주시니까 둘째에게 더 질 좋은 사랑이 가는 거예요. 셋째에게는 그보다 더 좋은 사랑이 가고요. 10월에는 넷째가 또 옵니다. 기관에 입양신청서를 넣고 아기를 기다리는 기간에는 우리도 임신 기간처럼 태교를 합니다. 온 가족이 가슴으로 낳기 위하여 마음을 모아야 해요. 가장 좋은 방법은 가정 예배입니다. 저희는 이른바 화목제라고 해서 화요일과 목요일에 가정예배를 드리는 데 내년엔 여섯 명이 모여 앉아 예배를 드리게 되겠네요.(웃음)

 

청바지’, 주 안에서 죽을 때 이루실 비전

저의 비전은 몸에 힘 빼자입니다. 몸에 자꾸 힘을 넣고 나는 이렇게 살겠다하는 순간 하나님의 일을 너무 제한하게 되고 야망으로 끝나게 되는 것을 많이 봅니다. 몸에 힘을 빼고 하나님과 친밀하게 있으면 하나님이 필요한 때에 정확한 포지션에 갖다 두시는 것 같아요. 그것이 비전이 되는 것이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망해야 됩니다. 계속되는 자기 부인과 자아 죽이기를 통해서 내 삶의 주인을 예수님께 내어드려야 하는 것이죠. 세례는 곧 죽는 것이잖아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아는 죽어야 해요. 그리고 십자가 안에서 다시 살아나 마침내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는 게 우리 인생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최근에 청바지(청소년을 바라보는 지혜를 입어라)’라는 책을 썼습니다. 청소년은 바라봐야 하지만 바라보고 싶지 않은 존재죠. 그러나 이들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은 하나 같이 하는 소리잖아요? 그들을 바라보기 위해서, 또 구체적으로 돕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죠. 그 지혜는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로 풀어낸 지혜랍니다. 저는 청바지를 참 좋아합니다. 어떤 옷과도 코디하기 편하고 내구성도 좋으니까요. 색깔도 푸른색이어서 늘 밝고 생동감이 넘치고요. 아이부터 할아버지까지 즐겨 입는 이 청바지는 단절된 세대의 대안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요즘 청바지 교회를 생각하고 있어요. ‘청소년을 바라보는 지혜가 있는 교회’. 강원도권에 폐교를 임대할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미혼모들을 비롯한 학교 중도 탈락자들이나 지역 아동 청소년 교육과 돌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농사짓는 것을 좋아하는데, 함께 자식 농사, 청소년 농사, 작물 농사를 지으면서 농부의 마음을 품고 싶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해 나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가치 챙기기 식의 야망을 하나님의 비전이라고 착각하지 말자라는 겁니다. 포도나무에 가지가 아무 공로 없이 그저 붙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포도열매를 주렁주렁 맺듯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 있다 보면 하나님께서 툭툭 길을 열어 주시고 때가 되면 그 분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게 하실 거라고 확신을 합니다. 그래서 힘을 빼고 하나님과 친밀하게 지내자가 저의 비전이라면 비전입니다. 요셉이 그랬고, 다니엘도 그랬으니까요.

 

선생님과 대화하면서 증거열정이라는 두 낱말이 떠올랐습니다. 자기 인생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거가 많은 사람은 그분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런 사람의 열정은 하나님을 향하지, 어떤 로 향하기를 경계합니다. 이런 순전함으로 다음 세대 청소년을 바라보며 청바지의 삶을 살아가는 곽상학 선생님. 선생님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여러 청소년들의 삶에도 증거와 열정을 선물해주시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