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좋은만남

졸업생들이 자기 자녀를 입학시키고 싶은 학교를 만들고 싶어요(2015.06)

대부분의 미션스쿨들이 그냥 예배만 드리는 것에 만족하잖아요? 저는 그걸 좀 바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학교의 전반적 틀 안에서 아이들이 기독교적 가치에 녹아들 수 있도록. 그런 쪽으로 미션스쿨들이 변해가면 좋겠어요.

 

 

 

 

졸업생들이 자기 자녀를

입학시키고 싶은 학교를

만들고 싶어요

 

목포 혜인여자중학교 황도웅 선생님

 

 

, 사진_ 주종호

 

 

전남 지역 기독교사 사역의 주축 선한교육’(교직자선교회). ‘선한교육은 앞선 분들의 헌신과 열정을 다음 세대가 이어가야 할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중요한 시기에 세대 간의 고리 역할을 감당하며 발 벗고 뛸 사단법인 선한교육 대표 황도웅 선생님. 목포 유달산 기슭의 아름답고 따뜻한 학교에서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따뜻했던 어린 시절, 그리고 교회와의 만남

1971년에 광주에서 22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 모두 좋은 성품을 가지신 평범한 가정에서 막내인 저를 잘 챙겨주시는 두 누님과 형님 덕에 큰 어려움 없이 자랄 수 있었습니다. 제 성격이 차분하고 착실해서 크게 모난 행동을 안했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때에는 교회와 관련된 말만 나와도 왠지 거부감이 느껴지고 싫었어요. 6학년 때 중학교 배정을 앞두고서는 미션스쿨인 숭일중학교에는 제발 가지 않게 해달라고 아무에게나기도를 했었죠. 그 학교에 가면 의무적으로 교회에 가야 하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결국 숭일중학교로 배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 예상대로 숭일중학교에서는 교회에 가라고 하더군요. 당시 교목 선생님이 매주 월요일마다 주보를 검사했습니다. 저는 교회에 다니기는 싫었지만 교목 선생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니까 문제아로 찍히기 싫어 교회에 가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성품 중에 가장 좋은 것이 성실함과 꾸준함인데 교회도 그런 성품대로 꾸준하게 다녔죠. 지금 생각해 보면 이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었습니다. 제가 은혜에 가랑비에 옷 젖듯 하나님께 잔잔히 젖어 들 수 있었으니까요. 이후 제가 미션스쿨에서 근무하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신앙의 요람 교회그리고 숭일중학교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새벽기도에 갔어요. 그때 믿음은 별로 없었는데 새벽기도 다니고 교회 행사에 열심히 참여하다 보니 중고등부 회장도 하게 되었죠. 고등학교 2학년 때 교회에 분열이 일어나면서 제가 제일 높은 학년이 되는 상황을 맞았는데 내 후배들을 챙겨야겠다.’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동기들과 함께 수련회도 주도하고 그랬어요. 그것을 계기로 리더십이 생기고 신앙이 많이 자란 것 같아요. 이후에도 교회의 모든 대소사를 챙기면서 봉사를 했죠.

중학교 때는 학교에 아주 일찍 가야 했어요. 버스가 많지도 않은데다 사람이 워낙 밀려서 말이죠. 아침 6시쯤 학교에 가면 많이 어두웠거든요. 무서워서 찬송가를 1절부터 4절까지 다 외워 부르면서 다녔던 기억이 있어요. 저는 미션스쿨에서 학생들로 하여금 교회에 다니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만일 그러지 않았다면 저 같은 사람은 교회에 전혀 가지 않았을 텐데 그런 계기를 통해서 신앙이 자랐고 교회에서 봉사하게 됐으니까요. 미션스쿨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도 있지만 긍정적인 면도 분명 있겠다고 생각해요.

고등학교는 광주에 있는 금호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따뜻했던 중학교의 기억과는 달리 굉장히 몸부림쳤던 기억밖에 없어요. 그 당시에는 아이들을 성적으로 칼같이 나누고 상담도 오로지 성적이 올랐네 떨어졌네 하는 식이었거든요. 반면, 중학교 선생님들은 정말 따뜻한 기억으로 한분 한분 남아있습니다. 물론 그분들이 했던 말씀들도 다 떠올라요. 그때가 정치적으로 상당히 암흑기였는데 선생님들 중에는 저녁에 시내에 나가서 데모하고 오시는 분들도 많이 있었어요. 특히 윤리를 가르치셨던 김동호 선생님은 저희들을 향해서 항상 의미 있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겨우 중학생인 저희가 뭘 알았겠어요, 그냥 저 선생님 지금 진지하구나하는 분위기만 알았죠.

마침 어떤 아이가 불만이 있었는지 손을 들고 질문을 했어요. “선생님,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것도 많은데 선생님은 왜 항상 부정적인 것들만 얘기하십니까?” 그러니까 선생님이 “00, 밤이 어두울수록 별은 더 빛나는 법이다. 우리가 어두운 면들에 대해서 깊이 생각을 하면 거기에서 뭔가 희망을 볼 수 있지 않겠냐.” 이렇게 대답하시더라고요. 그 선생님은 수업을 시작할 때 항상 기도하고 시작하셨어요. 그분만이 아니라 그 학교에 계시던 연세가 있는 분들이 대부분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었는데 그분들이 수업을 하시기 전에 꼭 기도를 하시더라고요. 믿든 안 믿든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 말해주시고 기도하는 시간에 눈을 뜨면 엄하게 나무라는 선생님도 계셨는데, 그런 기억들이 제 머릿속에 남아 있어요.

 

열정적인 대학생활, 창조과학회와의 만남

전남대를 다녔는데 원해서 간 학교는 아니었어요. 어머님이 불교 신자이고 저 혼자 교회에 다니다 보니까 어렸을 때부터 나의 행실이 바르지 않으면 교회에 가기 어렵다는 생각이 늘 머릿속에 있었어요. 대학도 그런 생각으로 서울 쪽을 지망해서 모험을 하기보다 장학금을 받고 전남대에 다니는 쪽을 택했죠.

한편에서는 내가 왜 이 학교에 이 학과를 다녀야하지?’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워낙 주신 환경에 잘 적응하는 스타일이라 하나님이 이곳을 다니게 하시는 이유를 찾으며 성실하게 생활을 했습니다. 1, 2학년 때는 전남대 기독교회 선교단체 협의회광주지역 기독학생 총연합회연합 사역을 했었고, 그러던 중 대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창조과학회를 만나게 됐어요. 그 전에도 창조과학에 대해서는 조금 관심이 있어서 창조과학회에서 발간한 책들을 봤었는데 그때가 아마 대전에서 과학 엑스포를 할 때였을 거예요. 창조과학회에서 엑스포장 옆에 창조과학관을 운영했었는데 갑자기 거기를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갔죠. 가서 머릿속에서 가치관이 확 바뀌는 느낌이 들었어요.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할까요? ‘, 창조가 정말 진리구나.’라는 생각이 갑자기 확 들어왔어요. 그때 제가 지질학과를 다니고 있었으니까 이 학문을 창조의 관점으로 생각해볼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했고 이후 전남대학교 생물교육학과 조정일 교수님을 찾아가 창조과학회 동아리를 만들고 함께 사역을 했습니다. 저는 저희 학과 내에서 창조과학분과를 만들어서 후배들을 모아 이야기를 나누고 그랬는데 워낙 이 분야가 첨예한 부분이다 보니 교수님들이 굉장히 싫어하더라고요. 그래서 교수님들과 부딪치고 논쟁도 하고 때로는 불이익도 당하고 그랬지요.

 

아이들의 눈빛에 끌려 교사의 길로

저는 교사가 되는 것보다 제 전공 안에서 창조과학으로 이것을 재해석 해보겠다는 생각에 대학원 진학을 계획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4학년 1학기 말에 교생실습을 나갔다가 또 한 번 생각의 전환을 경험했습니다. 제 모교인 금호고등학교로 실습을 나가 아이들 앞에서 수업 시연을 하는데 이 아이들이 정말 초롱초롱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거예요. 그때 내가 교단에서 창조과학을 가르치면 이 아이들이 잘 흡수를 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교생실습을 마친 후에는 교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굳혔습니다.

코스모스 졸업 후, 바로 임용고사 준비를 시작했는데 우리 과 단짝친구가 지질학과 전공생들을 뽑는 국영기업체 채용 공고가 났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몇 년에 한 번씩만 있는 한국수자원공사 공채였는데 거기에 함께 원서를 내보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내봤는데 하나님 은혜로 합격을 해서 수자원공사에 들어가 일하게 됐습니다. 갑자기 또 진로가 바뀐 거죠. ‘이건 뭐냐?’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하나님이 뜻이 있으시겠지. 가서 직장선교사로 살아보자.’라며 정말 열심히 선교사적 삶을 살았어요.

제 첫 발령지가 수자원공사 용담댐 건설 사무소였는데 거기에 계시는 신앙인들과 함께 신우회를 만들어서 매주 예배드리고 주보를 만들어 직원들에게 돌리고, 성탄절에는 그곳 직원들 모두와 트리를 꾸미고 예배를 드리는 등 그렇게 2년 이상 생활을 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교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더 분명해졌습니다. 시공 건설업체에서 제공하는 회식문화, 유흥문화가 굉장히 발달해 있었어요. ‘정말 우리나라 문화가 너무 퇴폐적이구나. 술집이 이렇게 많은데 거기를 꽉꽉 채우는 사람들이 너무 많구나. 부조리가 너무 많구나.’라는 충격에 가까운 생각들을 하면서 결국 정말 교육밖에 없다. 교육을 통해서 아이들을 바꿔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간절했어요. 거기다가 이곳에 계속 있으면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 함께 들었지요.

그리고 확실히 하나님이 부르신 달란트가 다르다는 것을 그곳에서 깨달았어요. 저와 같이 신우회를 하셨던 과장님이 있었는데 이분은 하나님이 수자원공사로 부르셨다는 확신이 있는 분이었어요. 이분은 신앙적 철학이 아주 확고했어요. 공사를 시작하며 터를 닦을 때는 전통적으로 돼지머리 놓고 고사를 지내요. 그런데 이분은 끝내 그런 것들을 다 없애버렸어요. 술자리에서도 끊을 것은 확실히 딱 끊고 가시는 그런 면들이 있더라고요. 그분은 본인이 이야기를 할 때 나는 확실히 이곳에 부름이 있다.”라고 했어요. 저는 그게 힘들더라고요. 그곳의 생리가 저에게 잘 안 맞았어요.

그 전에는 마냥 교사가 돼야겠다는 생각만 있었는데 수자원공사에 근무하고 난 뒤에는 명확한 기도제목이 생겼어요. 하나는 내가 기독교학교에 가야겠다. 그래야 기독교적인 가치를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겠다.’였고 또 하나는 남자학교에 가야겠다. 아이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며 지내기에 그게 좋겠다.’는 거였어요. 그리고 고등학교에 가야겠다였는데 고등학생쯤 되어야 내가 말하는 것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죠. 이 세 가지를 놓고 기도를 했어요.

임용고시에 한 번 떨어진 후, 기도 중에 덕인학원에 원서를 내게 됐고, 19983월에 바로 이곳(학교법인 덕인학원, 당시 덕인고등학교)로 오게 됐지요. 제가 생각했던 세 가지 기준에 모두 맞아떨어지자 부르심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부르신 곳에서 뜨겁게 가르치다

저는 항상 바뀐 환경에 굉장히 빨리 적응을 해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을 하면 거의 미친 듯이 가거든요. 처음에는 정식 발령이 아닌 기간제 교사였는데 그 당시에는 기간제 교사는 방학 때 봉급을 안 줬어요. 그럼에도 가르칠 수 있다는 게 무척이나 기뻤어요. 오자마자 노트북 꺼내놓고 수업 준비하고 OHP 필름으로 수업자료 만들고 그랬죠. 그뿐 아니라 아이들에게 신앙교육을 시키고 싶었잖아요? 저의 철학은 수업에서 아이들을 장악하면 아이들은 나에게 끌리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1학기에 수업에서 아이들을 장악하고 2학기가 돼서 성경공부 하고 싶은 아이들을 과학실로 모이게 했더니 아이들이 오더라고요. 그렇게 성경공부를 시작했죠. 그 성경공부반 이름이 씨알이었는데 약 3기까지 그 활동을 했어요. 점심시간에는 그렇게 성경공부를 하고 야간 자율학습 때에는 저녁식사시간을 이용하여 매주 수요일마다 빈 교실에서 찬양을 드렸어요.

그러던 중 교목 선생님이 예배를 위해 찬양단을 조직할 때 인원이 부족하다고 하셔서 씨알 아이들을 합류시키고 목사님이 성경공부도 진행하시고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교목 선생님 주도로 넘어가게 되고 저는 옆에서 돕는 식으로 하게 됐죠. 우리학교 설립 60주년 행사 때 실내체육관을 빌려서 크게 행사를 했었는데 씨알 동아리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복음과 관련된 스킷드라마를 공연해서 많은 사람들과 은혜를 나누기도 했어요.

 

선한교육(교직자선교회)’와의 만남과 섬김

1997, 수자원공사에 근무하고 있었을 당시 제가 천리안 통신을 했었는데 거기에 1998년도 1회 기독교사대회 홍보가 뜨더라고요. 기도를 했죠. ‘하나님, 내년에 있다는 저 1회 대회에 꼭 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983월에 발령이 난 거예요. 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그래서 98년 첫해 대회에 갔어요, 비 많이 내리던 강원대학교에.

정말 은혜를 많이 받고 그때 처음으로 교직자선교회를 알았죠. 버스를 함께 타고 가면서 은혜를 나누는데 감동이었어요. 이분들은 삶 자체가 은혜였어요. 광주에서 강원도까지 4~5시간을 가는 길에 한 명씩 돌아가면서 간증을 했는데요. 거의 부흥회 수준으로 간증을 하며 올라왔죠. 대회에서 은혜를 많이 받고 내려올 때도 또 간증하면서 내려오고. 그러면서 지역별로 조직을 하자는 얘기가 처음 나왔고 저는 목포 지역에 계신 선생님들과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원래는 그냥 목포지역 기독교사들의 모임으로 시작한 것이었는데 그것을 교직자선교회 목포지부로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고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제 아내를 그 모임에서 만났어요. 아내는 당시 해남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진도에 언니가 근무하고 있었어요. 언니 관사에 함께 살면서 모임이 있는 날에는 언니와 함께 목포에 와서 기독교사모임에 참석했어요. 모임에 대한 사모함이 다들 대단했었죠. 2년 정도의 목포기독교사 모임 속에서 교제를 시작하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교직자선교회를 통해 함께 할 배우자를 만나고 예쁜 두 딸도 얻었으니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는 참 놀라운 것 같아요.

협동학습도 이 모임을 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협동학습을 알게 되면서 수업의 틀을 완전히 바꿨어요. 당시 저희 법인에서는 과학 선생님들이 법인 내 4개 학교 과학 선생님들을 모아서 공개수업을 했었어요. 그 수업을 협동학습 틀로 했는데 굉장히 참신했나 봅니다. 지금까지도 매년 보완하고 또 보완해가면서 협동학습의 틀로 수업을 하고 있는데 학급도 협동적 학급운영이라고 광주에 모임을 조직해서 운영을 같이 했지요. 협동학습을 수업과 학급경영 모두에 적용한 겁니다.

그런데 사립학교이다 보니, 아무래도 학교에 올인하다시피 많은 시간을 사용하게 됐어요. 11시까지 야간자율학습 감독을 하고 업무를 하고 학급 관리를 하고 또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시기를 함께 거치다보니 교직자선교회 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죠.

고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오면서 한 가지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학교의 전반적인 틀을 기독교적으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중학교에 처음 와서는 교무부에서 방과후학교를 맡았는데 방과후학교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하다가 블록 선택형 시스템을 개발하고 그걸 적용시키고 그 다음에 교무기획을 하고 교무부장이 되어 교육과정을 전반적으로 볼 수가 있었어요. 그러면서 교육과정의 전반적인 틀을 기독교적으로 바꿔야겠다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틀을 바꾼다는 게 쉽지 않잖아요? 업무량이 굉장히 많았죠. 거의 방학을 반납하다시피 하면서 학교에 몰입해 일하다가 덕인학원 연수에서 덕인학원 발전방향에 대한 발표 기회가 생겼습니다. 거기서 제가 생각한 시스템을 발표했는데 그것이 다소 무리하게 받아들여졌는지 뜻밖의 어려움을 겪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또 한 번의 전환점을 맞았죠. 하나님께서 내가 할 수 있게 하신 영역은 어디까지인가 고민하면서 나에게 주어진 영역에서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학교에 대한 것은 내려놓고 은혜를 받자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가정에 좀 더 충실하면서 은혜를 받으러 교직자선교회 수련회를 갔죠. 갔더니 그분들이 보자마자 우리가 (모임에 나오도록) 기도했었다면서 굉장히 반가워하시더라고요. 그러고는 바로 부대표가 되었습니다. (웃음)

제가 선한교육에 와서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옆에서 지켜보니 현재는 이분화가 되어 있는 것 같아요. 기존에 많은 헌신으로 일하시고 지금은 은퇴하셔서 여전히 왕성하게 사역하고 계신 선배님들의 옛 교직자선교회와 그 뒤에 들어온 그룹들이 바라보는 교직자선교회가 약간 다릅니다. 저는 그게 눈에 보이더라고요. 선배님들은 이곳에 오시면 본인들이 개척하신 단체이다 보니 무척 편하고 귀한 거예요. 지금이라도 뭔가가 필요하면 얼마든지 헌신할 수 있을 만큼 말이죠. 하지만 젊은 세대들은 자기가 헌신해야 할 동기, 자신이 희생해서 일구어냈다는 자부심이 아직은 부족해요. 그러다보니 모임을 해도 여전히 손님으로서 참여하는 거죠. 힘이 없어요. 선배님들이 계속 일하고 계시지만 1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많은 부분들이 연약해질 확률이 높죠. 그래서 제가 올해 대표가 되면서 세운 목표는 젊은 사람들을 세워주는 것입니다. ‘선한교육이라는 큰 사단법인 하에 있으면 젊은 사람들이 접근을 잘 못해요. 왜냐하면 선한교육에 여러 가지 사업들이 있는데 그 중에 현직에 있으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이 별로 없거든요. 젊은 선생님들이 공감을 할 만한 것들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제가 선한교육 이사장님께 부탁을 드린 것이 당분간은 모임을 분리해서 운영하자는 것이었어요. 법인인 선한교육은 선배님들이 만들어두신 틀에 따라 그분들의 사역을 하고 우리는 젊은 세대들을 세우는 일에 주력하겠다는 의도였죠. 그렇게 하면 작은 모임에서 젊은 세대의 참여가 필요한 공간들이 생기게 되고 여기에 이분들이 헌신하면서 점점 애착을 갖게 되리라고 기대합니다. 제가 있는 동안 젊은 세대들이 활동할 수 있는 터전을 가꾸고 싶은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앞으로의 소망

교사로서의 소망이 있다면 하나님이 제게 허락하신 위치에 맞게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만큼만 변화를 시도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학교에 대해서 많은 여유가 생겼어요. 학교의 업무에 휘둘리지 않고 기독교적인 가치관 안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를 고민할 수 있는 여유 말이죠. 그러면서 내가 뭔가 바꾸려고 했던 것들을 좀 더 점검해보자.’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한동대학교 교육대학원에 갔습니다. 교육과정과 교육방법에 대해 공부하는 과정이 무척이나 은혜롭고 좋았어요. 배운 것들을 학교에 계속 접목 시키고 있죠. 하나하나 적용하고 아이들이 변해가는 과정을 관찰하니 그것이 참 좋더라고요. 작지만 조금씩 공교육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교육과정을 접목한 결과가 바람직해서 학교가 대외적으로도 좋은 인상을 주고 있어요. 대부분의 미션스쿨들이 그냥 예배만 드리는 것에 만족하잖아요? 저는 그걸 좀 바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학교의 전반적 틀 안에서 아이들이 기독교적 가치에 녹아들 수 있도록. 그런 쪽으로 미션스쿨들이 변해가면 좋겠어요.

한동안 행정 파트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수업에 전념하여 아이들과 즐겁게 생활을 하고 싶고 그 후에 또 기회가 된다면 학교 교육과정의 틀에 전반적으로 손을 대서 더 좋은 기독교 학교를 만드는 게 꿈입니다. 제가 정말 바라는 것은 이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나중에 자기 자녀를 보내고 싶어 하는 학교를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그 학교를 나왔는데 정말 좋더라. 그 학교에 보내면 기독교적 가치관이 확립돼.’라는 생각을 가지고 내 자녀를 보내는 학교를 만들고 싶어요.

 

믿음 안에서 자신이 가는 길에 확신을 갖고 우직하게 걷는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참 든든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겸손함으로 받고 그 안에서 모든 열정을 다하는 황도웅 선생님. 이런 선생님의 삶이 선한교육혜인여자중학교두 공동체 모두에 빛과 소금이 되리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