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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벌새 교사의 삶(2018.01) 벌새 교사의 삶 김민자(화순만연초등학교) 인터뷰·사진 조창완 목포의 눈물 저는 목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정월 보름에 음식 장만을 마친 후 만삭의 몸으로 아버지와 화투를 치다가 진통이 와서 두 시간 만에 저를 낳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의 생월생시는 화투시라고 웃으며 소개하곤 해요. 이런 훈훈한 탄생 스토리가 있는 화목한 가정이었지만 아버지는 제가 두 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여객선 갑판장 일을 하셨는데 높은 파도에 휩쓸려 배가 좌초되어 변을 당하셨지요. 여섯 살 오빠와 두 살배기 저, 뱃속의 남동생을 두고 그렇게 허망하게 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정신적 충격으로 건강이 급속히 나빠지셔서 늘 병원에 입원하거나 누워 계셨습니다. 당시 어머니 나이가 서른으로 젊으셨기에 주변에선 아이들을 고아원에 맡기고.. 더보기
은혜로 서는 삶(2017.12) 은혜로 서는 삶 이규대 (흥덕고등학교) 인터뷰·사진 김만호 가정의 위기 가운데 임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저는 전주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입학 전 홍성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초, 중, 고 시절을 보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아이스크림을 준다기에 누나와 함께 찾아갔던 여름성경학교를 시작으로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당시 어머니는 불교에 심취해 계셨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자주 절에 갔던 기억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어머니께서 집 주인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셨습니다. 문제는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한국 전쟁 이후 가족들과 헤어지시고 홀로 외롭게 자라시면서 어려서부터 교회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바로 여호와의 증인 교회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정에 위.. 더보기
홀로 오롯이 서고 함께 있을 때 더 빛나게 해 주시는 하나님(2017.11) 홀로 오롯이 서고 함께 있을 때 더 빛나게 해 주시는 하나님 어남예 (춘천계성학교) 인터뷰·사진 조창완 11살, 인생의 첫 터닝 포인트! 초등학교 6학년까지 강원도 원주 변두리 시골에서 자랐어요. 양돈업과 밭농사를 지으시던 부모님, 1살 어린 여동생과 친구처럼 컸죠. 동네에 구멍가게, 놀이터 하나 없었지만 자연이 주는 넉넉함에 정서적으로 안정되게 자란 거 같아요. 그러다 유치원과 학교를 다니면서 제 인생의 첫 고민이 시작됩니다. 제 이름이 좀 특이하잖아요. 시골에서 조용히 자란 저는 이름 때문에 쉽게 주목받는 것이 굉장히 낯설었고, 장난삼아 놀리는 친구가 있으면 무척 괴로웠어요. 그러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단체 벌을 받다 담임선생님께 들은 훈계가 제 인생의 첫 터닝 포인트가 되었어요. “키가 작은 사람이.. 더보기
물맷돌 하나로 서는 삶(2017.10) 물맷돌 하나로 서는 삶 송원용 (전주홍산초등학교) 인터뷰·사진 김만호 대학 청년부 형을 따라 교대에 가다 저는 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에서 3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전주에 한 번 나가려면 30분 걸어서 버스를 타고 나가거나, 1시간에 한 대 들어오는 버스를 기다렸다 나가야 하는 불편한 시골 마을에서 살았습니다. 저는 그렇게 외진 곳에서 초, 중, 고를 다녔고 친구들 중에 가장 멀리서 학교 다니는 친구로 기억되었습니다. 학창 시절 저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공부한 것도 아니고 특별히 뭐가 되겠다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단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훌륭한 사람이 되고 성공할 수 있다는 주변 분위기에 휩쓸려 그냥 공부를 했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엔 방과 후가 되면 들로 산으로 신나게 놀러 다녔습니다. .. 더보기
하나님의 온유함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는 기독교사(2017.09) 하나님의 온유함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는 기독교사 이해광 (양양여자고등학교) 인터뷰·사진 조창완 강원도 터줏대감 저는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났습니다. 4살 때 춘천으로 이사하여 초, 중, 고, 대학까지 춘천에서 생활하였습니다. 군대도 철원에서 근무하였고 교직 생활도 강원도 내에서 근무하였으며 현재 속초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대학원(ACTS)을 다니느라 양평으로 통학한 것을 제외하곤 강원도를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강원도의 영서와 영동 모두를 삶에서 즐긴 셈이죠. 교회 공동체 안에 뿌리 내리다 불신앙 가정에서 자라 교회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할머니께서 신앙생활을 하셨지만 아버지가 완강히 반대하셔서 가족 중에 교회 다니는 사람은 없었어요. 중3 때 반 친구가 중고등부 주말 수련회를 같이 가자고 .. 더보기
사랑, 받은 만큼 흘려보내기(2017.08) 사랑, 받은 만큼 흘려보내기 김에스더 (남호초등학교) 인터뷰, 사진 김만호 에스더라는 이름처럼 50년 인생동안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선생님. 또한 받은 사랑만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많은 사역을 감당해온 선생님. 교사로, 교회 사모로, 세 아이의 엄마로, 두 개 지역모임의 간사로 섬기는 그를 통해 섬김의 모습을 배워봅니다. 영화를 보며 갖게 된 교사의 꿈 부모님께서 생후 한 달 된 저를 처음 교회에 데리고 가셨을 때, 갓난아이가 예배시간 내내 한 번도 깨지 않고 잘 자는 모습이 너무 예쁘다고 목사님께서 이름을 ‘에스더’라고 지어주셨다고 합니다. 제가 어릴 적 아버지는 피를 토하시며 계속 누워있어야 할 정도로 많이 아프셨는데, 이런 아버지의 병이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나았습니다. 어린 시절 .. 더보기
하나님의 따뜻함을 전해주는 따뜻한 기독교사(2017.07) 하나님의 따뜻함을 전해주는 따뜻한 기독교사 박종식 (거제 하청초등학교) 인터뷰사진 김영식 교사로서의 부르심 고3 담임선생님이 제게 추천해 주신 학교가 진주교육대학교였습니다. 그런 대학이 있는지도 몰랐어요. 대학에 들어갔는데 꿈꾸던 학교가 아니었고, 모든 것이 고등학교를 다시 다니는 듯해서 실망스러웠습니다. 학교에 실망해 휴학하고 군대도 다녀와 복학을 했습니다. 이상철 당시 SFC 간사님(현, 마산성막교회 담임목사)과 함께 성경공부를 했는데 본문이 마태복음이었어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라는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 나라는 어떤 모습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통해 먼 미래의 천국이 아니라 내 삶 가운데 와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배우면서 그 긴장감.. 더보기
한번 하면 끝까지 한다(2017.06) 한번 하면 끝까지 한다 부산공업고등학교 손정웅 선생님 인터뷰,사진 조창완 부족한 시작을 준비하신 하나님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께서 갑자기 쓰러지셨지요. 가세는 기울었고 저는 집안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6학년 때부터 중학교 시절까지 신문배달을 하기도 했죠. 중고등학교 시절을 돌아보면 아버지가 오랜 투병생활을 하셨음에도 가족들의 배려로 나름대로 자유를 누릴 수 있었어요. 하지만 여전히 한쪽 신경은 병석에 계신 아버지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스스로에게 많은 제약을 준 시기이기도 하였지요. 그래서인지 중고등학교 시절 기억나는 특별한 추억이 없어 좀 아쉽기도 합니다. 중학교 졸업 후 공고 기계과에 진학했습니다. 사실 가족들은 인문고에 가기를 원했지만 저는 기술을 배우는 것도 좋았고, 무엇보다 취.. 더보기
교실을 바꿀 수 있으면 사회도 바꿀 수 있다(2017.5) 교실을 바꿀 수 있으면 사회도 바꿀 수 있다 ─ 차지훈 선생님 (군산미장초등학교) ─ 인터뷰,사진 _ 김만호먼 곳의 하나님이 아닌 내 옆에 계신 하나님아들부잣집 막내인 저는 드센 형님들 밑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중학교 시절까지 꿈도 없고 자신감도 부족한 내성적인 아이였죠. 이런 제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지랄 총량의 법칙’의 지랄을 거의 다 사용한 것 같아요. 그러느라 공부에 소홀히 해서 수능도 세 번씩이나 봐야했고, 전주교대는 세 번째 대학교가 되었습니다. 대학 1학년 때는 합격의 기쁨과 수험생에서 벗어났다는 기쁨으로 최선을 다해서 세상 속에서 지냈죠. 어느 날 아무 생각 없이 CCC 기도회에 따라나선 일이 있었습니다. 교회에 다니고는 있었기에 기도회 가면 기도를 열심히 잘 할 수 있을 .. 더보기
내 삶의 방향, 좋은교사(2017.4) 내 삶의 방향,좋은교사 ─ 장선희 선생님 (화정고등학교) ─ 인터뷰,사진 김영식 월간 《좋은교사》 창간호 표지 모델!정말 순간의 선택이 20년을 좌우하네요. 그때가 2000년, 교직 2년차인데요. 그해 제가 몹시 몸이 안 좋았어요. 수술을 받고 입원해 있는데 당시에 제겐 하늘같은 송인수 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어요. 급히 사진 한 장만 찍어달라고. 입원했다는 사실을 말씀드렸는데도 명함 정도의 사진 하나만 찍어주면 된다고 간곡히 부탁하시는데, 가슴 깊이 존경하는 분이라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퇴원하는 날 거의 화장기 없이 검정색 원피스를 입고 겨우겨우 스튜디오에 나갔습니다. 사진기사 분이 그런 저를 보고 깜짝 놀라시고 굉장히 난처해 하시더라구요. 그러면서도 잡지 표지에 나갈 거라는 사실은 절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