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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스스로 인간이 되어갑니다”(신성욱 과학저널니스트, 작가_2016.9)


아이들은 스스로 

인간이 되어갑니다












신성욱 (과학저널니스트, 작가)

1995년부터 다큐멘터리 작가 겸 프로듀서로 KBS일요스페셜 <생로병사의 비밀> 등의 제작에 참여했고, KBS스페셜 <침묵으로의 초대>  60여 편의 TV 다큐멘터리를 기획·연출했다. AIBD(아시아 방송개발원)어워드 다큐부문상, YWCA가 뽑은 올해의 좋은 프로그램상 등을 수상했다. KAIST에서 과학저널리즘으로 공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2009 KBS 특집 다큐멘터리 <책 읽는 대한민국 읽기혁명>을 제작하고, 뇌가 좋은 아이: 한 살 아기에게 책을 읽혀라를 집필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과학저널리스트의 길을 걷게 되었다. 뇌과학의 최신 연구를 쉽게 소개하는 안내자 역할을 하며, ‘읽기와 뇌 발달’, ‘놀이와 뇌 발달’, ‘하늘보다 더 넓은 뇌 등을 주제로 전국의 시도교육청, 교육연수원, 학교, 도서관에서 400여 회 이상의 강연을 해왔다. 현재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의 북스타트코리아 상임위원이자 ()신미디어랩 대표다. 경기도 광주 문형산 기슭 동막골에서 아내와 아홉 살 딸과 함께 살고 있다. (참조: 인터넷 교보문고)


인터뷰 조창완 / 정리 · 사진 김현경


지난 3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우리가 속아온 뇌과학의 신화와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신성욱 작가의 강연이 열렸다. 신 작가는 강연에서 그동안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라는 대상과 뇌가 만들어지는 시기의 아이들, 그 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육에 대해 방대한 이야기를 나눠주었다. 당시는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이 한참 세상을 들썩이게 하던 때였다. 인공지능 시대를 말하는 현시점에서 우리 교육은 무엇을 가르치며 어디로 향해야 할까? 신 작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함께 생각해보기 원한다.

 

간단하게 소개를 해주신다면?

다른 사람에게 저를 소개할 때 보통 과학저널니스트, 작가라고 소개합니다. 대학에서는 철학과 독일어를 전공했어요. 대학을 졸업하고는 20년 가까이 방송 일을 했죠.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왔고, 그때도 스스로를 소개할 때 다큐멘터리 작가라고 했습니다. 사실 방송은 제게 방편이었어요. 어릴 때부터 사람이 궁금했습니다. 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늘 그런 걸 궁금해 했던 거 같아요. 언젠가 누군가가 너한테 다큐멘터리는 뭐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제게 다큐멘터리란 인간에 대한 탐구라고 대답을 했었죠.

젊을 때 공부하고 고민했던 것을 가지고 사회에서 20여 년 일을 하다 보니, 밑천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공부를 더 해야 되겠다. 어떤 대학원을 갈까 생각을 많이 했죠. 제가 고민하고 있던 내용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학과를 찾아보았지만 별로 흥미가 안 생기더군요. 그래서 미루고 있었는데 카이스트에 과학저널리즘이라는 과정이 생긴다는 공고를 우연히 보게 됐어요. 제가 방송하면서 과학기술 분야의 프로그램을 많이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과학기술이야말로 사람의 삶을 압도하고 있구나, 느끼게 되었습니다.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훈련하고 현대의 과학기술에 대해 이해하고 있으면, 인간에 대해 혹은 세상에 대해 겉도는 논쟁을 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늘 하게 되었어요. 프로그램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전문가들께 그런 걸 많이 여쭤봤죠. 마침 대학원에 와서 보니까 뇌과학 분야에서 내가 궁금해 하던 것들을 열심히 연구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저도 덩달아 공부하게 된 거죠. 사람에 대한 관심, 사람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자연스럽게 뇌를 공부하게 된 거라고 볼 수 있어요.

 

뇌과학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공부하는 학문인가요? 그리고 뇌를 공부한다는 것과 인간을 아는 것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 부탁드립니다.

뇌과학에는 크게 세 분야가 있어요. 간단하게 구분한다면 정신의학, 대뇌생리학과 같은 생물학적 접근, 그리고 뇌공학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제가 공부한 분야는 주로 저널리즘의 관점에서 대뇌생리학의 연구 성과들을 살피는 쪽이었습니다. 뇌과학이 진전되고 뇌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많아지면서 인간의 마음과 행동이 뇌와 관련된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최근 뇌과학의 흐름은 결국 인간에 대한 질문으로 옮겨가고 있어요. 과거에는 철학이나 종교, 심리학에서 그 해답을 보여줬다면 이제는 뇌과학이 그런 질문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현재 뇌과학자들의 고민은 인간이란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마음이라는 것은 도대체 뭔가, 정신은 뭔가이런 것들이에요.

지금은 뇌과학이 기반학문처럼 변모하고 있습니다. 뇌 연구에서 나오는 결과들을 다른 학문분야에서 많이 활용하고 있죠. 이를테면 경제학에서는 신경경제학이라고 부르는 뉴로-이코노믹스(Neuroeconomics)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경영학, 조직이론, 마케팅 기법 등은 뇌과학의 연구를 바로바로 반영합니다. 흥미롭게도 신학 분야에서도 신경신학이 등장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여러 학문 분야에서 뇌과학의 성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뇌과학이 정말 기반학문처럼 되어 가는군요.

조심스럽게 한 마디 덧붙인다면, ‘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뇌가 상품화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브랜드화 되었습니다. 보통 실험실에서 연구하고 생활하는 뇌과학자들은 일반 대중과 소통할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뇌 연구의 성과들을 대중에게 소개하는 과학 커뮤니케이터들이 있습니다. 아주 훌륭한 전문가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사이비 과학자 또한 매우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대중들은 편향된 정보나 낡은 정보, 혹은 신비화된 정보 등을 상식처럼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 통해 뇌를 상품화하는 경향이 생기는 거죠.

특히 교육 분야에서 이런 현상이 아주 심합니다. 예를 들면 제가 학교 선생님들 연수를 많이 다니는데요. 보통 저를 소개할 때 뇌교육에 대해 이야기해 줄 거라고 하세요. 그러면 저는 가볍게 반론을 해요. “뇌교육이 뭔가요?” 학교나 교육현장에서 쉽게 이런 말을 쓰세요. 사실 뇌교육이라는 말은 잘못된 말입니다. 뇌교육을 제게 풀어서 설명 해주실 수 있겠어요? 뇌교육이라면 뇌를 교육한다는 말일 텐데, 그게 말이 되나요? 교육은 인간을 기르는 건데 왜 뇌만을 따로 떼어서 말할까요? 그렇다면 발교육, 손교육, 위교육, 간교육은 왜 안 하지요? 표현이 좀 그렇지만 뇌가 돈이 되기 때문입니다. 상품화하기 좋지요. 많은 선생님들이 뇌교육이라는 용어를 말하고, 거기서 나오는 정보를 가지고 뇌를 이해하고 계세요. 너무 안타깝습니다. 게다가 아주 위험한 생각이에요.

 

뇌와 교육에 대해 좀더 이야기를 나눠주셨으면 합니다. 작가님이 쓰신 책을 보니, 아이들의 독서교육에 대해 많이 고민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지나친 독서교육이 아이의 뇌를 망친다고 하는데.

책은 아이에게 위험한 물건입니다.(웃음) 우리는 이 사실을 꼭 기억해야합니다. 칼은 굉장히 유용한 도구죠. 하지만 때로 흉기로 바뀌지 않습니까? 제가 보기엔 책도 다를 바가 없어요. 독서교육을 한다고 했을 때 우리는 책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가 왜 아이들에게 책을 읽혀야 하는가?’라는 질문부터 시작을 해야 합니다. 그런 질문 없이 마구잡이로 아이들에게 책을 안겨줬을 때, 아이들에게 그것이 유용한 도구가 될지 흉기가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왜 그러냐면, 독서는 과학이기 때문입니다. 침대가 과학인 것처럼(웃음) 독서는 과학입니다. 뇌과학이에요. 아이들의 뇌가 성장해가는 과정에 맞춰서 인지능력, 지능, 지각 등 모든 부분이 골고루 조금씩 성장합니다. 책은 아이들의 뇌가 성장하는 과정에 맞추어서, 마치 우리가 꼬맹이 아이들에게 날이 없는 플라스틱 가위를 주고 자르는 시늉만 하게 하듯이, 그렇게 읽게 해야 합니다. 발달하는 과정에 맞춰서 아이들이 봐야할 책이 따로 있죠. 하지만 언제부턴가 한 살이라도 빨리, 한 권이라도 많이 읽히는 게 좋다는 생각이 상식이 돼버렸습니다.

제가 최근에 본 사례들 중에서 저 혼자 안타까워했던 사례가 있는데, 초등학교에서 방학을 하면 인문학캠프를 엽니다. 똑똑하다는 초등학생 아이들을 모아놓고 대학 교수님이 오셔서 논어 같은 것을 강의합니다. 그럼 아이들이 그것을 듣고 토론도 하고요. 그럼 보통 반응이 이러죠. ‘, 초등학생이 논어를 가지고 강의를 듣고 토론을 하다니, 대단한데!’ 하지만 제가 보기엔 매우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논어 같은, 흔히 고전이라고 불리는 책들은 독서능력을 갖춘 다음에 읽어야합니다. 어린 아이들이 볼 책이 아니에요.

독서란 무엇인가과학적인 방식으로 다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의 뇌가 발달하는 단계에 따라 독서능력 역시 6단계 내지 7단계의 발달과정을 거칩니다. 첫 단계는 문자를 알아보고 읽는 단계부터 시작을 하죠. 대체로 나이로 치자면 만 6세 정도입니다. 독서의 마지막 단계는 마지막 책장을 덮고 자신이 읽은 내용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추론도 하면서 적용하는 단계입니다. 그러려고 책을 보는 것이지요. 이런 작용이 뇌에서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시기는 10대 중반 이후입니다. 그때가 돼야 가능해져요. 그 사이에 6단계, 7단계의 독서능력 발달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런데 고전이 좋은 책이라고 해서 아이들에게 무조건 한 살이라도 빨리, 한 권이라도 많이 읽게 하는 것은 이런 과학적인 사실들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독서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그런 어려운 책을 보고 토론을 했을 때 그 아이의 인생에 어떤 결과를 남길 것인지 고민해야합니다. 그게 독서의 교육적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독서교육을 단계에 맞게, 과학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학교현장 등에서 그런 접근 방식은 거의 보지 못했어요. 특히 때 아닌 인문학 붐이 일면서 학교에서는 인문고전캠프를 여는 식으로, 책을 강조하는 형태로 나타나요. ‘봐라, 인문학의 시대가 열리지 않느냐. 책을 많이 읽어야한다.’ 이거는 좀 안타까운 생각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길러주어야 할 것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관심입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그것을 놓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교육입니다. 인간에 대한 관심이 책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는 없잖아요. 예를 들어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노동의 현장에 가서 도대체 인간의 노동이란 무엇인가?’ 생각할 계기를 만들어 줄 수 있겠지요. 계기만 만들어 주면 아이들은 제 스스로 사람과 세상을 인간의 방식으로 바라보고 만나고 생각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이번 여름 가족여행에서 그런 소중한 경험을 했습니다. 제 처가가 전남이거든요. 영암, 보성, 담양 지역을 둘러 봤습니다. 마지막 날 담양에서 서울로 올라오려는데 아내가 그러는 거예요. “5·18 묘지가 가까워? 한번 가보고 싶네.” 초등학교 2학년 딸아이가 어떻게 받아들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너무 힘든 경험이 아닐까 걱정도 들었는데 일단 들러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무덤들을 둘러보던 딸내미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겁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왜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 죽인 사람들은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말이에요. 그런 질문을 받은 저는 당연히 많이 놀랐지요. 설명하느라 진땀을 흘리긴 했지만 제겐 너무나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인간이 가치롭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죽음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이런 것을 책을 통해서만 배우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어요. 아이들을 책에 가두려 하고, 책만 많이 읽히면 인문학 교육을 잘하는 것이고, 그것을 잘 정리해서 발표 잘하면 인문학적 소양이 깊은 걸까요?

 

그렇습니다.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조차 그런 고민 없이 그저 책 읽기를 강조하고 책을 읽게 하는 것 같아요.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독서는 취미이자 특기이고 공부를 잘하기 위한 방편 혹은 수단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과학으로 접근하는 태도가 부족했습니다. 독서에 대해서 역시 뇌과학이 진전이 되다보니까 새롭게 고민하고 접근하게 된 거죠. 뇌에서 문자라는 추상적 기호를 해독하는 능력, 문자를 해독해서 자기의 경험과 맞춰보는 능력, 간직하는 능력 등이 모두 발달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독서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90년대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독서를 과학으로 보는 것이 최근의 성과라고 말하기엔 20년이 넘었잖아요. 20년이 넘도록 새로운 흐름에 대해 쳐다보지도 않는 상황이 굉장히 안타까워요.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적절한 독서방법은 무엇일까요?

독서를 과학으로 보는 관점을 우리가 조금 관심 있게 들여다보면 시사점을 얻을 수 있는데요. 적어도 초등학교 시절까지의 아이들에게는 책보다 더 소중한 게 훨씬 많다는 점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책은 나중에 읽어도 늦지 않습니다.

문자 언어를 예를 들자면, 책은 글자로 가득 차 있잖아요. 문자라는 것은 추상적 기호죠. 갈증이 날 때 이라는 글자를 들여다본다고 갈증이 해소되지 않잖아요. 진짜 물을 마셔야하죠. ‘이라는 글자는 하나로 약속되어 쓰이고 있지만 그 글자와 실제 존재하는 물은 같지 않고, 더구나 사람들은 각자 물에 대해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합니다. 그것을 저는 언어의 풍경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모두 저 마다의 독특한 언어의 풍경들을 가지고 있죠.

그러면 언어의 풍경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언어의 풍경은 관념적인 게 아닙니다. 내가 몸으로 경험한 기억입니다. ‘이라고 했을 때 어릴 때 물가에서 사고 날 뻔한 경험이 있는 사람의 언어의 풍경 중에는 공포가 있겠죠. 호수나 강물을 봤을 때 두려움을 느끼고 내 몸이 반응할 겁니다. 그 언어의 풍경이 실제 내 삶을 좌우합니다. 내가 물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지니게 되는가를 결정하게 하죠. 다른 예로, 어떤 남자에게 이성 혹은 여성이라는 언어의 풍경이 어떠한지에 따라 그 남자가 여성을 대하는 태도가 결정됩니다. 실제하는 삶의 태도는 추상적 기호인 문자로 쓰인 관념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내가 경험한 기억들이 결정합니다.

어린 시절은 바로 그런 것을 채워나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책, 글자로 경험하는 것 보다 몸으로 경험하는 기억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굳이 과학적으로 그 시기를 구분하자면 사춘기 이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 12세 전후로 우리 인간의 뇌는 대대적인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갑니다. 그 전에는 동물적인 본능에 충실한 뇌, 뇌라기보다는 사실 인간이죠. 인간의 아이라는 독특한 존재들은 동물적인 본능에 충실합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생물학적 조건들을 갖추는데 주력하죠. 예를 들면 인간답게손을 잘 쓴다던지 하는 것을 습득해 갑니다. 처음부터 만들어져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나와 경험한 과정을 통해 배우죠. 보는 것도 마찬가지죠. 시각이 형성되는 것은 태어나서 만 7~8세까지 계속됩니다. 이렇듯 인간이 생물학적인 조건을 갖추어나가는 아이들의 시기를, 저는 건설공사에 비유합니다. 초등학생 시절은 특히 기초공사가 왕성하게 이뤄지는 과정입니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독서가 아니라 몸으로 경험하는 기억들이고 이 기억들이 재료가 되어서 마음, 더 나아가 자아를 이루게 됩니다.

 

어릴 때부터 독서습관을 잘 들여놔야한다고 들어온 것과 다른 이야기를 해주시는군요. 요즘은 워낙 초등학생 아이들에게부터 독서를 강조하는데요. 뛰어노는 아이들 보다 앉아서 공부하는 아이들이 많아요. 아이들이 인간 삶에 꼭 필요한 기초공사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네요.

저는 그것을 인간에 대한 위기라고 말합니다. 우리 인류가 수만 년, 수십만 년, 수백 만 년 동안 진화하는 과정에서 어린 시절은 몸을 쓰는 시기였습니다. 유전자의 명령에 따라, 생물학적 시간표에 따라 그렇게 살아온 거예요. 윤리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요. 어린 시절에 그렇게 몸을 통해 생물학적인 인간의 조건들을 갖춰 나가고, 이를 토대로 지적인 영역이 얹어지기 시작합니다.

뇌도 마찬가지로 만들어지고 살아가는 동안 계속 바뀝니다. 몸으로 경험하는 기억이 곧 뇌를 만드는 재료예요. 사람들이 흔히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어요. 뇌를 발달시키면 공부를 잘하게 되거나, 어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뇌는 늘 결과예요. 예를 들어, 엄지와 검지의 끝을 맞닿게 해서 동그라미를 만드는 손동작은 인간만 가능한 동작입니다. 우리와 손 모양이 아주 유사한 유인원은 절대 만들 수 없는 모양이에요. 인간의 손이 이렇게 작동되기 때문에 우리 뇌가 변하게 된 겁니다. 이 손 모양을 이용해서 도구를 잡고 사용하게 하고, 책장을 넘기게도 하고요.

그런데 최근 한 두 세대 만에 아주 오래된 인류의 전통이 사라지고 있어요. 아이들이 앉아있기 시작한 거예요. 앉아서 책을 읽고, 공부를 하죠. 몸을 쓰며 인간의 방식들을 배워나가야 할 시기에 말이에요. 굉장한 위기입니다. 몸을 쓰는 시간보다 앉아있는 시간이 더 많은 성장기를 보낸 새로운 인류의 등장을 우려와 걱정으로 바라보는 과학자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몸을 쓰기보다 앉아서 교육받아온 다음 세대를 어떻게 교육해야 할까요? 최근 알파고로 대표되는 인공지능이 화제가 되며, 학교가 위기라는 담론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작가님은 이를 어떻게 보시나요?

제가 강의나 강연에 가서, 특히 선생님들에게 꼭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드디어 학교의 전성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면 대개 고개를 갸우뚱 하세요.

학교란 근대의 산물이죠. 불과 100년 전만해도 모든 사람이 정보에 접근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어요. 근대적 관점에서 학교는 권력자가 요구하는 인간을 키워내는 곳이었고, 교육의 목표는 잘 써먹을 수 있는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었죠.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정보를 가두던 자잘한 둑이 무너지면서 수많은 정보들이 모두 흘러 나와 바다가 되었어요. 누구나 접근 가능하고 광활한, 정보의 바다가 생기면서 학교는 무력해졌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아이들은 더 이상 학교에서 정보를 얻지 않습니다. 특히 고학년으로 갈수록 아이들은 정보나 지식을 얻기 위해 학교에 오지 않아요. 지식과 정보를 공급해주는 훨씬 다양한 수단이 생겼습니다. 특히 시장은 이 과정을 산업화시켜서 매우 기민하게 지식과 정보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학교에서 지식을 포함해 배울 게 많았고 그래서 권위가 있었던 것인데, 이제 권위가 서지 않으니까 학교의 위기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권위를 다시 세우면 학교가 살아날까요? 그런 생각은, 이런 말씀 죄송합니다만, 죽은 자식 불알만지기 입니다. 그렇게 돌아가서도 안 되고,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가령 철기시대가 도래했는데 청동기시대로 돌아가자는 말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변화한 시대에서 학교는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저는 학교가 정보나 지식으로부터 과감히 떠나야한다고 봐요. 학교는 더 이상 지식을 가지고 경쟁하는 곳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학교는 다른 곳에서 할 수 없는 것을 해야 합니다.

그럼 새로운 학교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 지점에서 뇌과학과 학교가 만난다고 생각하는데요. 인간을 흔히 Social Animal이라고 하죠. ‘Social’이란 관계를 말합니다. 인간은 관계의 산물입니다. 그저 우리는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정도가 아니라 관계의 산물이에요. 뇌도 마찬가지입니다. Social Brain이라고 부릅니다. 관계가 단절되면 뇌는 바로 고장 납니다.

학교는 바로 이 지점을 붙들어야 합니다. 학교는 관계를 맺는 곳, 관계를 회복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언제부턴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Social의 요소들을 군더더기로 여기고는 가차 없이 치워버렸어요.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학원 같은 곳에서 친구를 만나고 하지만, 학원은 애초에 관계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당연히 빽빽한 상가에 자리를 잡습니다. 학교는 그렇지 않아요. 운동장이 있고 화단이 있고 도서관, 음악실, 과학실, 체육관도 있어요. 요즘은 텃밭을 만든 학교도 많더군요. Social, 즉 관계 혹은 관계 맺기는 단순히 인간관계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나 아닌 다른 모든 존재와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정체성을 획득하고 확인하고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무한한 원인이라고 부릅니다. 한 아이는 제대로 된 인간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한한 원인들과 관계를 맺습니다. 비가 내리면 비를 맞는 것, 흙을 만지면서 그 속의 미생물을 만나는 것 등 모든 것이 관계를 맺는 일이에요. 안타깝게도 가정이나 마을에서의 교육 기능, Social, 관계 맺기도 거의 사라졌습니다. 대가족을 이루고 많은 형제들과 함께 또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동네 형, 친구들과 어울려 뛰어 놀았던 과거 세대엔 가능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죠. 가정과 동네는 교육적 기능을 다 잃었어요. 하지만 아주 희망적이게도, 학교에는 그런 희망의 근거가 남아있습니다. 대단한 게 아니에요. 넓은 운동장이 있잖아요. 그밖에도 학교는 Social의 요소를 너무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학교의 전성시대가 시작될 거라고 말하는 겁니다.

선생님들이 스스로를 지식의 전수자라고 생각한다면, 미디어에서 말하는 것처럼 곧 사라질 직업이 되고 말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교육은 지나치게 인지교육에 집중돼 있어요. , 인간의 다양한 능력 중에서 오직 인지능력을 극대화시켜 놓고 이 능력을 키우는 것을 교육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요즘 인성교육을 다시 강조하는 흐름이 생기고 있습니다. 방향은 잘 설정했지만 제 생각에 이런 말들은 지나치게 윤리적이에요. 우리가 사용하는 인성교육이란 용어에는 생물학적 조건으로서,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는 이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만이 아니에요. 위에서 이야기 했듯이 인간은 몸을 통해 인간의 방식을 습득하고 자아를 이뤄 갑니다, 이것이 곧 Social Animal, Social Brain의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2000년대 초 미국정부에서 <From Neuron to Neighbor>라는 교육개혁 보고서가 나왔습니다. 교육의 중심이 아이들의 지적인 능력 배양에서 관계 맺기로 옮겨져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때 보고서를 만든 연구진의 절반 이상이 뇌과학자(Neuroscientist)였습니다. 뇌과학의 성과들을 교육계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서구의 교실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우리의 학교는 이 점에서 아쉬운 점이 참 많습니다. 많은 교실은 여전히 권위적이고 지식 전달 위주입니다. 학교나 가정에서 교육을 통해 인간의 본연이라고 할 수 있는 관계 맺기를 소홀히 한다면 아이들은 인간의 유전자는 가지고 태어났지만 인간의 방식을 제대로 갖지 못한 괴상한 존재로 자랄지도 모릅니다.

알파고가 우리에게 준 충격은 과연 내 직업은 사라질까?’ 이런 게 아닙니다. ‘인간이란 뭐지? 이제 기계가 인간의 고차원적인 기능까지 수행하게 되었네. 그렇다면 인간에게 남는 일은 뭐지? 우리는 뭘 가르쳐야 하지? 교육이란 뭐지?’ 이런 질문을 던지기 때문에 충격인 것입니다. 사실 알파고가 둔건 바둑이 아니었다고 저는 주장합니다. 알파고는 인간의 뇌를 흉내낸 컴퓨터 본체만 있고 몸이 없지요, 팔과 손을 쓸 수 없어서 엉뚱한 사람을 앉혀놓고 바둑을 두게 했습니다. 머릿속으로 수를 생각하는 것만을 바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바둑판의 정확한 지점에 착점을 해야만, 돌을 놓아야만 비로소 바둑은 완성됩니다. 온라인 축구 게임과 온몸을 쓰는 진짜 축구 경기를 구별하고 전혀 다른 영역에 존재하는 이유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이런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보지요. ‘흙 퍼나르기 경기라는 게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평생을 바쳐 삽질을 연습한 삽질 챔피언은 시간 당 500번 쯤 삽질을 할 수 있는 신기에 가까운 능력을 터득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포클레인과 삽질 대결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인간 최고수 삽질 챔피언과 포클레인의 흙 퍼나르기 경기, 상상해보십시오. 과연 흥미진진할까요? 사실 이건 할 필요가 없는 게임이죠. 우리는 포클레인을 잘 활용만 하면 됩니다. 인공지능도 똑같습니다. 저는 인공지능을 과연 지능이라고 부르는 게 맞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인지교육이 교육의 전부가 되어버린 지금 상황이 계속된다면 포클레인 앞에서 삽을 들고 어떻게 할지 몰라 고민하는 난감한 상황을 맞게 될 겁니다. 교육은 기계를 활용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스스로 터득할 수 있게 돕는 것입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선생으로서, 교사로서 이 시대를 사는 아이들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듭니다. 이런 아이들과 만나고 가르치는 선생님들에게 하고 싶은 말 있으시다면요?

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이들이 자란다라는 말은 아이들은 무한한 원인들 속에서 자유롭게 제 스스로 인간이 되어간다와 같은 말입니다. 굳이 어른들이 뭘 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스스로 인간의 길을 찾아 갑니다. 아니 아이가 대체 뭐 길래 그걸 제 혼자 할 수 있냐고 물으실 수 있겠습니다. 장엄한 생명의 역사 속에서 우리 인간의 조상들이 터득한 무한한 관계들이 아이들 속에 씨앗으로 들어있어요. 어른들이 정해놓은 몇 가지 규칙만으로는 그 씨앗에 무엇이 담겼는지 알 수 없습니다.

교육으로 인간을, 삶을 디자인할 수 있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다보니 지나치게 개입하게 됩니다. 어릴 때부터 책 많이 읽히려고 하고, 이런 저런 습관을 갖게 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부모와 교사가 해야 할 일은, 선배 인간으로서 아이에게 인간의 방식을 잘 보여주고 아이가 제 스스로 인간의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곁에서 지켜봐주는 것, 필요할 때 격려해주고 응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육은 사람을 디자인하는 것이라는 오해를 멈춰주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이 무한한 원인들 속에서 자유롭게 제 스스로 인간이 되어갈 수 있도록, 모두 함께 도울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인간이 되어간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교사인 우리가 아이들에게 진정 말해주어야 하는 것은 인간으로사는 법이라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인간으로 참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이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