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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나지막한 물댄 동산같이 (2015.2)

아파트를 돌아 골목으로 올라가시더니 뒤를 돌아보고는 신발을 벗어라는 것입니다. 저와 다른 선생님은 신발을 두 손에 들고 리더와 함께 구보를 시작하였습니다. 골목골목 오르막길을 뛰면서 양육 철저! 성경 읽기! 기도하기!’ 등의 구호를 따라 외쳤습니다. 겨울 꽁꽁 언 땅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뿌려 놓은 연탄을 밟으며 웅성거리는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의 눈총을 받으면서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날 때까지 뛰었습니다.

 

 

 

나지막한 물댄 동산같이

함안 가야초등학교 이거랑 선생님

 

 

 

 

 

 

 

·사진 김기웅

 

 

 

작년 9월 어느 날, 금산에서는 교사선교회와 GT선교회의 형제연합 체육대회가 있었는데,. 6~7개의 종목별 경기 중에서도 단연 시선을 끌었던 경기가 바로 ‘경남더비’였습니다. 배구 준결승에서 만난 GT선교회와 교사선교회 경남지역모임은 강력한 스파이크와 끊어질 듯하면서도 이어지는 렐리로 진행되면서 박진감 넘치는 열혈남아들의 전투로 변해갔는데, 코트 밖에서의 감독대결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GT선교회 정영찬 목사님과 감독대결을 벌였던 경남지역 감독은 좋은교사운동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었으니, 그를 만나러 함안으로 내려가는 길에선 그날 경기의 아쉬운 패배를 갚기위한(?) 리턴매치도 곧 추진할 것이라는 전언도 들려왔습니다.
 

 

거랑이가 교사가 됐어? 진짜?

갈매기 끼룩끼룩 노래하는 부산에서 태어났습니다. 7살이 되면서 진주로 이사를 왔고 2월생이라 초등학교에 바로 입학을 하였습니다. 어린 시절, 기억에 남는 일이 주로 학교에서 벌을 섰던 일들인 것을 보면 장난이 심하고 말썽을 많이 피웠던 모양입니다. 6학년 학급 어린이회 시간에 담임 선생님께서 이번 주의 말썽꾸러기몇 명을 뽑아 그 다음 주간 동안 나머지 공부를 시키셨습니다. 몇 주인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꽤 오랜 기간 동안 대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어른이 되어 만난 초등 동창생들은 거랑이가 교사가 됐어? 진짜?’ 라고 합니다. 저 역시 학력고사를 치르기까지 교사에 대한 생각이 없었던 것 같고요.

가정 형편이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도 좋지 않았습니다. 단칸방에 아버지, 어머니, 누나, 남동생이 함께 지내면서 불편함도 많았고 부모님들의 불화에 늘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밖에서 한참 놀다가 해가 늬엇늬엇 지면 기분이 우울해지고 집에 돌아가기 싫었던 적이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불상이나 석탑 등을 만드시며 주 고객이었던 절을 찾아 다니셨고 어머니는 외조부모님의 신앙을 따라 교회를 다니셨습니다. 다른 문제들보다 특히 종교적인 문제로 부모님은 자주 다투셨고 아버지께서 술을 드신 날에는 어김없이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그런 아버지가 싫었고 늘 가정에 대한 불만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6학년 때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해 주일학교 예배시간에 드려야 할 헌금으로 오락실을 섬긴(?) 경우가 많았습니다.

 

진주교대 원서 접수번호 1!

질풍노도의 시기였던 중2 때에는 나가던 교회에 발을 끊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다가 중3이 되면서 다시 교회에 나가며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의 불씨를 가까스로 살렸습니다. 돌이켜 보면 인문계 고등학교로 갈 수 있었던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사실 중2 때까지는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이 어려운 성적이었는데 신기하게도 3학년이 되자 갑자기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열심히 한 것 같지 않은데 성적이 올랐습니다. 3 때 담임 선생님은 저의 변화를 보시고 동료 선생님들께 자랑도 하셨던 모양입니다. 한번은 복도를 지나가던 국어 선생님께서 니가 거랑이제? 요즘 성적 많이 올랐다면서? 열심히 하니까 얼마나 좋노? 담임 선생님도 좋아하시고. 열심히 해라.” 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런 칭찬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릅니다.

연합고사 커트라인을 가까스로 넘긴 후, 진주고등학교에 진학하였습니다. 고등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교회 여름수련회에 참석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눈물로 회개 기도를 드렸습니다. 정말 뜨겁게 찬양하고 기도했었습니다. 1 여름 수련회 이후로 작은 변화가 있었는데, 학교를 마치면 친구들과 놀러 다니던 생활이 교회에서 친구들을 만나 찬양하고 기도하는 생활로 바뀐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는 행사들에는 거의 빠짐없이 참석하고 중고등부 임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들은 주로 교회 친구들이었습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평소에 존경했던 영어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사범대학 영어교육학과로 진학하고 싶었지만 제 모의고사 성적이 조금 부족했습니다. 그때 제 어머니께서 진주교대를 권하셨습니다. 그 전까지 교대를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신기하게도 전혀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사실 교대가 뭐하는 곳인지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냥 어른들 말씀에 초등학교 선생님 되는 곳이라는 정도만 알았고, 잘 아는 교회 누나와 형들이 그곳에 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만 들었던 정도였지요. 마침 담임 선생님께서도 권면하셔서 진주교대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너를 통해 믿었으니 너에게 세례를 받겠다

1992년부터 시작된 대학 시절, 교회는 열심히 다니기는 했지만 얼마나 제멋대로였는지 교직에 발령을 받고 10년쯤 지난 후 만났던 한 친구가 오랜만에 만났던 저에게 , 대학 때 나는 네가 인간 안 될 줄 알았다!” 라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황당하고 부끄러웠던지요? 왜 그런 말을 들었을까 생각해 보니 철없이 나 자신만 알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교만한 모습과 수업을 빼먹는 등 학교생활에서도 성실하지 못했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신앙적으로도 몹시 교만해서 선교단체에서 활동하는 친구들이 제가 교회 다니는 것을 알고 참여를 권하면 그런 활동보다는 교회 생활을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습니다.

199411, 군 입대를 하였습니다. 강원도에서의 군인 생활을 지내면서 교만하고 모난 성품이 조금 다듬어졌습니다. 공병대에 배치를 받아 그전까지는 경험하지 못한 투박하고 억센 선임병들을 통해 얼차례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감사하게도 중대 군종이 되어 대대 내에 있던 교회(군목이 상주하지 않는 교회)에 조금 더 자유롭게 나가게 되었습니다. 선임 군종과 함께 새벽기도를 나가고 매주 주일 예배를 섬기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서러워서 울고, 감사해서 울고, 예수님 보고 싶어서 울고.

병장이 될 무렵 신기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보다 한 달 먼저 들어온 선임병이 갑자기 제게 와서는 저를 계속 지켜봤는데 교회에 나가면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며 자기도 교회를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하면서도 참 감사했습니다. 함께 교회를 다니면서 성경도 같이 읽고 기도도 같이 하며 많이 친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림을 정말 잘 그렸던 그 선임병은 나이가 저와 같았는데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을 가는 대신 중장비(포클레인, 그레이다 같은 건설 중장비)를 몰았다고 했습니다. 벌어들인 돈으로 온갖 향락을 즐기는 생활을 했지만 만족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군대 교회를 다니면서부터 그림을 더 그리기 위해 대학을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선임병은 제대를 얼마 남겨두지 않았을 때 갑자기 자기도 세례를 받아야겠다며 저에게 세례를 달라고 했습니다. 세례는 목사님께 받아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사도행전을 보니 예수님을 믿으면 바로 주던데 왜 꼭 목사님께 받아야 하느냐, 나는 너를 통해 믿었으니 너에게 받겠다며 완강하게 나오기에 어쩔 수 없이 떨리는 마음으로 새벽에 둘이 일어나 세면장에서 빨간 물바가지에 물을 받아 목사님께서 세례 베푸시는 모습을 흉내 내며 세례를 주었습니다. 우리 둘 다 매우 진지했는데, 하고 나니 또 얼마나 웃음이 났는지요. 선임병이 제대 후 다니게 된 교회에서 이 사건이 이슈가 되었다고 합니다.

 

교사선교회와의 불편한(?) 만남

제대 이후 1년 반의 대학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임용고시를 쳤는데 이전까지 어려웠던 임용고시가 그해부터 미달이 되면서 손쉽게 합격하였습니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면서 저는 경기도로 원서를 제출하고자 했습니다. 이제 본토 친척 아비의 집과 교회를 좀 떠나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 싶었습니다. 저는 임용고시 응시지역을 두고 기도하면서 경기도로 가도 되겠지요?” 라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런데 경남에 남아있어야 한다는 마음이 떠오르더니 사라지질 않는 겁니다. 한바탕 몸부림이 있은 뒤 저는 경남으로 임용고시를 치고는 19993월 경남 양산으로 첫 발령을 받았습니다.

양산에서의 교직 첫 출발은 진정한 기독교사가 되겠노라는 결연한 의지로 시작되었지만 매우 초라하게 막을 내렸습니다. 기독교사로서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전도도 해야지 생각했었는데 아이들을 만나고 3월을 넘기기 전에 소리만 꽥꽥 지르고 야단치고 체벌하는 교사가 되었습니다. 제 속에 숨겨진 분노와 모난 성격이 얼마나 많았던지요?

그런 중에 같은 학교에 근무하던 92학번의 동기가 부산에 좋은 교사 모임이 있다며 함께 가 보자고 했습니다. 학교 사택에서 살고 있던 터라 저녁시간에 특별히 할 일도 없고 해서 함께 갔었습니다. 부산의 한 교회에서 여러 선생님들이 모이셨는데 저하고는 좀 안 맞다는 생각이 들어 5월에 한 번 간 후로는 다시 가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도 정신을 못 차리고 제 입맛에 맞는 모임을 찾고 있었다니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합니다. 어쨌든 아이들을 사랑하며 잘 가르치려고 애는 썼지만 항상 부족함을 느꼈던 저는 첫 해를 마칠 즈음 신문 광고를 통해 좋은교사운동에서 개최하는 교사캠프(20001, 숭실대)를 알게 되었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홀로 서울로 향했습니다.

숭실대에서 진행된 교사캠프는 여러 교사 단체들이 나와서 그들만의 사역을 소개하고 기독교사로서의 삶에 대한 도전을 주는 자리였는데, 강의를 듣던 중 교사선교회에 소속된 선생님의 학급 경영 사례를 듣는 순간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이들을 양육하고 또 그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을 양육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니. 강의를 마친 후 선교단체별 모임이 있어 교사선교회 모임을 찾아 갔습니다. 저는 경남에서 왔는데 어떻게 모임에 참여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경남에는 모임이 없으니 부산으로 연결을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부산 책임 간사였던 김승민 선생님의 전화번호를 받아 연락을 드렸고 20003월 별무리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부푼 꿈을 안고 참석했던 그 모임은 놀랍게도 지난 5월 친구의 소개로 참석했던 바로 그 모임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사건을 두고 교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뜻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대로 된 기독교사가 되려면 혼자의 노력으로 불가능하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공동체를 만나도록 이끄셨음에도 불구하고 저의 어리석음 때문에 그것을 보지 못하고 1년을 오롯이 낭비하였던 것이지요.

 

복음을 전해야겠다, 양육을 해야겠다

처음 맡았던 아이들은 5학년이었는데 교장 선생님은 저에게 그 아이들을 한 번 더 담임하라 하셨습니다. 첫 제자들에 대한 아쉬움이 많이 남았었는데 다시금 기회를 주시니 저로서는 매우 기쁜 일이었습니다. 교사선교회의 수련회를 마치면서 첫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 양육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20003월이 되고 다시 그 아이들을 만났을 때 저는 먼저 양육을 위한 선발과정을 시작하였고 최종적으로 3명의 디모데를 양육하였습니다. 태훈이, 이슬이, 현경이를 양육을 하는 동안 양육에 참여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전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점심시간에 출석번호대로 한 명씩 불러다가 백지전도법을 이용하여 전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앞이라 그랬는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겠노라고 고백하고 저와 같이 영접 기도를 하였습니다. 먼저 당했던(?) 아이들은 그 다음 번호인 아이들에게 정보를 누설하여 선생님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당부하였지만 복음의 능력은 아이들을 영접 기도로 이끌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후로 잘하든 못하든 양육을 계속 하려고 했고, 전도하려고 더욱 노력하였습니다. 물론 이 일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지칠 때마다 격려하며 기도해 주었던 공동체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당시의 교사선교회 부산지역 모임과 김승민 선생님(리더), 김동춘 선생님, 김민정 선생님과 함께한 종려나무 모임은 저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물댄 동산과 같은 공동체였습니다.

 

공짜로 받은 프라이드 베타 승용차!

양육모임을 통해 저는 또 한 번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매주 있는 양육모임에 가려면 양산-부산 간 시외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1시간 30분정도 걸리는 길을 갔어야 했는데, 어느 날은 양육리더였던 김승민 선생님께서 자신의 승용차를 저에게 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차가 생겼으니 이전의 차를 제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다른 차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 아니겠습니까! 이 일을 통해 리더가 멤버를 향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또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를 가슴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 이런 경험들로 인해 제 주위의 여러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물댄 동산이 되기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깨달음과 함께 제가 또 한 번 놀란 것은 차종이 프라이드 베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왜 놀라운 일이냐고요? 임용고시를 치기 전 대학 4학년 끝 무렵에 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발령받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차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차를 주시되 프라이드 베타, 색깔은 회색으로 해주세요. , 저는 돈이 없으니 공짜로 주세요. 아멘 할렐루야!” 그리고 양육을 받은 지 1년이 지나고 실제로 프라이드 베타를 공짜로 얻었습니다.

양육모임에 대한 추억은 참 많습니다.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단연 달동네 구보 사건입니다. 김승민 선생님은 성경공부 교재 예습이나 필독도서 읽기, 생활점검표 체크 등의 과제를 성실히 수행하지 못하던 저희들을 참다못해 하루는 따라 나오라는 말씀을 남기시며 먼저 아파트를 나서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리둥절한 저희들은 영문도 모른 채 따라 나섰습니다. 아파트를 돌아 골목으로 올라가시더니 뒤를 돌아보고는 신발을 벗어라는 것입니다. 멤버 중 여자였던 김민정 선생님은 그냥 따르라 하시고 남자인 저와 김동춘 선생님은 신발을 두 손에 들고 리더와 함께 구보를 시작하였습니다. 골목골목 오르막길을 뛰면서 양육 철저! 성경 읽기! 기도하기!’ 등의 구호를 따라 외쳤습니다. 겨울 꽁꽁 언 땅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뿌려 놓은 연탄을 밟으며 웅성거리는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의 눈총을 받으면서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날 때까지 뛰었습니다. 양육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창원에 깃발을 꽂으라

결혼 후 첫째 아들을 장모님께 맡기기 위해 저희들은 창원으로 왔고, 창원으로 오면서 양육리더로부터 창원에 가면 교사 양육모임 시작하여 창원에 교사선교회의 깃발을 꽂으라는 지령을 받았습니다. 창원 대산면에 소재하는 학교로 발령을 받았는데 도대체 어떻게 교사 양육을 해야 하는지 몰라 마음에 부담만 가지고 1년을 보냈습니다.

교사 양육을 시작하게 되기를, 그리고 경남지역에도 교사선교회 모임을 개척할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하던 중 하나님께서 몇 몇 분들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부산에서 특수교사로 근무하는 안애경 선생님과 창원에서 중등교사로 근무하던 김지연 선생님을 만나 양육 모임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로 제가 근무하던 곳으로 전입해 온 이준희 선생님과 아내가 근무하던 학교로 전입한 이주영 선생님이 양육 모임에 합류하게 되었고 초청예배를 통해 모임에 합류한 박진희 선생님과 함께 하면서 창원지역 모임은 조금씩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창원으로 전입온 지 3년만인 20067월 교사선교회 창원지역 창립 예배를 하나님 앞에서 감격적으로 드리게 되었습니다.

은혜 안에서 창원지역모임이 시작된 후 한참동안 다음 도약을 위한 우울한 준비기로 접어듭니다. 양육모임은 계속 되고 있는데 재생산이 안 되는 상황이 지속되다보니 리더인 저도 힘이 빠지고 멤버들도 변화 없는 삶에 익숙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기간이 2007년부터 대략 3년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200912월 별무리 모임으로 기억합니다. 모임이 지지부진하던 것이 너무 마음 아프고 우리 모두가 시간만 허비한다는 생각에 말씀을 나누면서 여러분은 왜 이 모임에 오는 것이냐?”,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모이느냐?”며 울먹였습니다. 사실 그 모임이 있기 하루 전 기도하던 중, 이렇게 얼렁뚱땅 모임을 준비하면서 전심으로 기도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이 변화되기만을 바라며 남 탓만 하고 있던 저의 모습을 보여주셨고 저는 뼈아픈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회개와 함께 저도 모르게 드린 기도가 있었는데 그것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이끄셨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고 돕는 손길을 붙여 주셔서 다시 한 번 창원지역을 부흥케 하시기를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2010년이 되어 새로운 학기를 시작하면서 기도 응답도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만나게 하시는 선생님들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양육팀이 생기고 활기를 띠며 성장하게 되었고, 2011년에는 처음으로 교사선교회 남부권(부산, 대구, 경남) 여름 디모데캠프를 주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사역을 통해 더욱 성장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창원지역 선생님들이 디모데캠프를 두고 함께 모여서 전심으로 기도하고 고민하는 과정을 통해 멤버십을 더욱 굳건히 하게 되었고 서로의 삶에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는 공동체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열방을 향해 복음을 심는 영적 리더가 되게 하소서

교직의 시작을 하나님께서 열어 주셨듯이 교사의 일을 마치게 되는 그 날까지, 만나게 하시는 선생님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교육 현장에 펼쳐가는 사명을 즐겁게 감당하고 싶습니다. 교사가 되기 전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반응했던 말씀이 있습니다. 이사야 588절에서 12절 말씀인데, 하나님께서 나를 항상 인도하여 물댄 동산과 같이, 물이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이 되게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두려운 고백이지만 믿음으로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민족과 열방을 향해 복음을 심는 영적 리더가 되게 하소서.”

 

창원지역 이야기를 통해서 공동체는 일련의 성장단계 즉, 허니문을 지나 암흑기를 견뎌야하고, 이를 넘어서야 건강한 성장기에 진입할 수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거랑 선생님은 올해부터 교사선교회 대표로 취임하십니다. 기독 공동체가 갖는 생명력과 역동성을 교육의 힘으로 전환해내고, 선교회 안팎의 기독교사들과 동고동락하는 섬김의 리더로 세워지실 것을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