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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이곳입니다(2015.1)

그때 나도 모르게 이렇게 답을 했어요. "내가 필요로 하는 학교가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학교에 오고 싶었습니다." 내 진심이었어요. 내가 무엇인가를 줄 수 있는 아이들, 그런 학교에 오고 싶었죠. 그래서 결혼식을 올렸던 우리 교회 앞에 있는 이 학교에 두 자녀를 데리고 함께 다니고 있어요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이곳입니다

광주 송우초등학교 조안숙 선생님 

 

 

 

 

 

  ·사진 김정태

 

 

 

몇십 년 전만 해도 한 집안에서 딸이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습니다. 그 딸들은 대개 집안의 오빠나 남동생들의 공부를 위해서 희생되는 경우가 많았지요. 조안숙 선생님은 고향이 작은 섬마을이었기에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삶에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개입하면서 그녀의 꿈을 하나씩 이루어가셨습니다. 우연과 같은 여러 만남을 통해 복음을 듣게 되고 또 기독교사대회를 만나 교사로서 살아가야 할 길과 방법을 깨우치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자신을 너머 제자들과 세상을 위한 중보기도자로 살아가고 있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어 보세요.

 

아름다운 내 고향 신지도

김으로 유명한 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도에서 팔남매의 일곱째로 태어났어요. 옛날에는 신지도에 가려면 먼저 배를 타고 완도까지 간 다음 거기서 배를 15분 정도 더 타고 가야 신지도에요. 그리고 선착장에서 차로 10분을 더 가야하는 깡시골이었어요. 농사와 양식업을 하는 늙으신 부모님 아래에서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언니, 오빠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어요.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는 성격이 참 좋은 분이셨어요. 일을 다 마치고 저녁 밥상에 둘러앉아 각자 하루 중에 있었던 일을 서로에게 이야기하는 가정 분위기를 이끄셨지요. 그 시간이 참 좋았어요. 언니가 넷, 그 밑에 오빠 둘, 그리고 저랑 여동생이에요. 언니 넷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구로공단 같은 곳에 취업을 했어요. 그렇게 번 돈으로 오빠 둘의 대학 공부까지 하게 했는데 지금도 두 오빠는 네 명의 언니들을 부모님같이 모셔요.

어릴 적 고향을 추억하면 항상 명사십리 바닷가에서 놀았던 일이 떠올라요. 옆으로 가늘고 길쭉한 작은 섬이라 섬 중앙을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반대편 바닷가로 가는데 10분 걸려요. 그래서 이쪽 해변에서 물놀이 하다가 지겨우면 반대편 갯벌이 많은 바닷가로 건너가 고동, 낙지, 꼬막을 잡고 놀았어요.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하면 하루가 다 가요.

 

성적 관리에 애를 썼던 어린 시절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성적에 신경 쓰는 조숙한 아이였습니다. 가난을 이기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한다는 언니, 오빠들의 말을 듣고 일찍부터 철이 들었어요. 중학교 시절 제 위의 두 오빠가 동시에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고등학교 진학은 생각도 못했어요. 나보다 공부 못하는 친구들이 학력고사 준비할 때 외로움과 슬픔을 달래며 집으로 오곤 했지요.

그런데 중3 체육시간에 한 선생님이 오셔서 고등학교 장학생으로 나를 데리고 가겠다는 기적과 같은 제안에 전남 담양에 있는 창평고등학교의 3년 장학생으로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그 곳 생활은 섬에서 온 제게 너무 힘겨웠어요. 나보다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많았고 그 속에서 경쟁해야 하는 것이 무척 외로웠죠. 그래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당시 우리 부모님은 모두 60이 넘으셨지요. 3 때 아버지가 환갑이었고 언니, 오빠들은 모두 서울에서 살았어요. 제 진로와 관련하여 제대로 된 조언을 해줄 사람이 주변에 없었습니다. 그때에 완도 출신이셨던 담임 선생님이 우리 집안 형편을 잘 아시고 무조건 너는 교대를 가라고 하셨어요. 혼자 공부하고 주말에도 친척 언니집에 가서 겨우 자고 오느라 지쳐있던 저는 교대가 어떤 대학인지도 모르고 단지 대학 가는 것 자체가 목표였기에 아무런 생각이 없이 광주교대에 입학했어요.

 

공동체생활을 통해 더불어 사는 삶을 배우다

대입 원서 접수창구에서 전도활동을 하던 네비게이토선교회 언니들을 만났어요. 그 언니들은 브릿지 예화를 통해서 저를 전도하려 했어요. 순간 저는 당돌하게 그 언니들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면 한번 증명해 보세요.” 그런데 그 언니들의 복음을 듣고 돌아서는 순간 희한하게도 내 마음속에 어떤 변화가 생기더군요. 그 언니들은 저의 냉소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헤어질 때까지 제 질문에 웃음과 긍정적인 태도로 답변해 주었어요. 그 언니들과 헤어지고 교문을 나설 때 저의 강퍅한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뀌더군요. 그 이후 겨울방학을 보내면서 가족들에게 선언했어요. “대학에 가면 기독교인이 되겠어요.” 라고. 원래 무교였던 부모님을 비롯해 오빠들까지 저희 집안은 각자의 판단을 존중하는 분위기였어요. 그리고 신입생으로 입학한 후부터 네비게이토 선교회에서 빠져 살게 됩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 내 마음속에는 전에 없던 기쁨이 가득했어요. 1학년 2학기부터는 원서접수 창구에서 저를 전도했던 그 언니들과 공동체로 같이 살게 되었어요. 그 언니들이 그러더군요. “너 그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니?” 그래서 그 언니들은 강퍅한 저의 양육리더가 되는 게 부담스러워 다른 언니들한테 넘겼다고 하더군요. 강팍한 저를 경험하지 않은.^^

신앙생활 초기에 의심이 많아 선교회 언니들에게 자주 물었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일대일양육에서 얻은 힘으로 대학생활을 잘 해낼 수 있었어요. 또 하나님 만나게 해달라고 성경을 계속 읽었어요. 일주일을 작정하고 읽었어요. 4일째쯤에는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어요. 처음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가 정말 어려웠어요. 그런데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그게 되더군요. 그 후 신앙생활 이전의 저는 인상파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우울하고 침울했는데 대학교 1학년 예수님을 믿은 이후부터는 제 표정이 달라졌습니다.

대학 졸업할 때까지 선교회 사람들과 공동체 생활을 했어요. 같이 살면서 자연스럽게 성격차이로 인한 갈등을 겪었죠. 정말 사소한 차이에서 오는 갈등들이었어요. 이런 것들을 리더 언니에게 말하고 같이 손잡아 기도하면서 울었던 기억이 나요. 특히 저를 이끈 두 번째 리더 언니가 제 성격 때문에 참 많이 힘들어 했어요. 제가 좀 독립적이었거든요. 서로 의논해서 결정할 일도 일방적으로 통보하곤 했죠. 워낙 어릴 때부터 제 일을 혼자 해결하다 보니 더 그랬나 봐요. 저는 공동체 생활 속에서 혼자 앞서가지 않고 상대방을 기다려주고 맞춰가며 살아가는 것을 배웠어요 

 

살려달라고 절규했던 신규교사 시절

1992년 전남도 발령을 기다리면서 4년 동안 함께 했던 선교회 공동체 생활을 떠나 어디로 가게 될지 모르는 두려움에 빠졌어요. 그때 기도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이 예레미야 2911~13절 말씀이었어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이 말씀 앞에서 소망을 갖고 9월 발령을 기다렸습니다.

첫 학교는 장흥 회진초등학교였습니다. 어쩜 그렇게 첫 발령지는 내 어린 시절 바닷가 학교생활과 똑같은지 놀랍기만 했어요. 교사로서의 비전도 모호하고 내 안의 고쳐야할 성품도 여전히 많은 데 첫 교사 생활은 설렘으로 시작해서 포기하는 마음으로 전개되었어요. 아이들의 모습과 준비되지 않은 내 모습 때문에 자취집 마당에서 별을 보며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했어요. 외롭고 힘듦을 고백하며 살려달라는 절규의 기도를 했던 시절이었어습니다. 어린아이들과의 만남이 교사가 되어서 처음이라 마치 옛날 제 어릴 적 친구들을 만난 느낌이었어요. 아이들의 특징을 몰랐죠. 영적인 것 말고 교사에게 필요한 교수법, 학급경영 등에 대해 구체적인 준비가 많이 부족했어요. 그래서 기독교사대회의 세미나와 협동학습을 만나면서 부족했던 부분들을 보완하게 되었답니다.

 

새로운 신앙의 세계를 만나다

두 번째 근무지인 장흥초등학교로 옮긴 후 새로운 신앙의 세계를 알게 되었어요. 지금 섬기는 이레교회(우산중앙교회)를 개척하신 임채환 목사님을 만나면서 성령님의 역사와 임재를 체험했어요. 또한 한 영혼을 깊이 사랑하고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돕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하며 배우게 되었어요. 그리고 저는 선교회를 나와 교회 개척 멤버로 들어갔어요. 청년회, 여전도회, 주일학교 교사 등 모든 일들을 함께 나누면서 성령 충만함 속에서 기쁘게 섬겼죠. 장흥읍에서 때마다 120분 거리인 광주까지 와서 수요예배, 금요철야, 주일 예배, 새벽기도까지 마치고 내려가는 속에서도 기쁨이 충만했어요.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교회 다니는 저를 보고 목사님은 학교를 광주로 옮길 것을 권유하셨지요. 그러던 중에 교원정년단축과 함께 광주시에서 교사를 많이 모집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주변의 만류와 부모님의 반대 속에서도 과감하게 사표를 냈어요. 19992월의 일이었죠. 내 바람은 늙으신 부모님의 구원과 형제들을 위한 기도를 더욱 열심히 하면서 살고 싶었기에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었다는 확신이 있었죠. 임용시험을 다시 치고 그 다음해인 200031일 광주에서 다시 발령을 받았어요.

 

기독교사대회를 만나다

광주에서 첫 발령을 받은 해 4월에 일생일대에 가장 힘든 시간을 겪었어요. 우리 반 아이 중에 자폐아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발작하는 과정에서 그만 때리게 되어 폭력교사가 된 것이죠. 이 일로 인해 교사로서의 자격 없는 저를 보게 되었고 심지어 교단을 떠나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런 심란한 시기를 목사님과 성도들의 중보기도로 이겨내었고, 교회 권사님의 소개로 2000년 기독교사대회에 참석하였어요. 정말 저를 위해 준비되었던 대회였어요. 특히 노무남 선생님의 선택강좌에서 예수사랑 교육프로그램도 배웠어요. 그분과의 상담을 통해 위로도 받고 그 이후로도 중보기도의 지원을 받아 교사로서 건강한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어요. 저는 대회에서 그 아이(자폐아)를 나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어요. 그 다음해인 6학년까지 아이를 다시 맡으면서 힘든 모든 과정을 이겨낼 수 있었으니 하나님의 은혜였어요. 하나님이 나를 낮추시고 더 준비된 교사가 되게 하기 위해서 겪도록 하신 일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그 아이를 계기로 교직자 선교회에 가입하게 되었고 다음 해에는 협동학습 세미나를 통해 연구회 회원이 되었어요.

 

건강한 체력으로 세 아이를 얻다, 43세에!

배우자에 대한 기도를 꽤 오랫동안 구체적인 항목을 두고 기도했어요. 그러다 34세에야 지금의 남편을 만났어요. 만날 당시 믿음이 없었던 제 남편은 외갓집 마을의 사람이었고 나와 여러 면에서 같은 점이 많았어요. 그래서 2003년에 남편과 함께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어요. 그런데 남편의 초보 신앙이 자라기까지는 정말 여러 가지 험난한 과정을 겪었죠. 2007년 둘째를 임신한 상태에서 새벽기도를 다니면서 제 남편에 대한 약속의 말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4:1). 이 말씀을 붙잡으면서 아브라함의 인내와 기다림을 배웠어요. 지금은 함께 손잡고 기도하고 있고, 남편의 기도 후원을 받으면서 살고 있어요. 결혼 후 세 자녀를 얻었어요. 노처녀가 결혼해서 36세에 첫 아이(예은)를 낳고, 38세에 둘째(예성), 압권은 셋째(예강)43세에 얻었죠. 대학시절 선교회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매일 아침 달리기했던 습관이 그 후로도 이어졌고, 이 모두가 나이 들어서도 아이를 건강하게 낳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준비하신 과정(?)이었나 봅니다. 건강한 체력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요.^^

 

교직자선교회(선한 교육)와 협동학습연구회

좋은교사 회원이 된 2000년을 기점으로 교직자선교회에서 준비한 풍성한 영적인 잔치들을 마음껏 누렸어요. 협동학습 세미나를 듣고 나서는 2003년부터 시작된 광주협동학습연구회 회원이 되었어요. 연구회 활동을 통해 영적, 지적으로 준비된 교사가 되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어요. 특히, 김현섭 선생님이 휴직한 해에는 광주에 매월 내려와서 협동학습 세미나를 진행해 주시면서 광주연구회의 내실이 다져 주셨어요. 결혼 후에도 세 아이를 출산·양육하면서 쉽지는 않았지만 교직자 선교회와 연구회 모임에 가능하면 참석하려고 애를 썼고 그 관계의 끈이 끊어지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어요.

 

다시 송우초등학교로 오기까지

지금 근무하고 있는 송우초등학교는 2002년부터 5년간 근무했던 곳으로 5년 만에 다시 옮겨와 3년째 근무하고 있어요. 작년 교장 초빙제 평가 시 평가위원장님이 교사면담을 하면서 왜 이 열악한 지역으로 다시 왔냐고 나에게 물으셨어요. 그때 나도 모르게 이렇게 답을 했어요. “내가 필요로 하는 학교가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학교에 오고 싶었습니다.” 내 진심이었어요. 내가 무엇인가를 줄 수 있는 아이들, 그런 학교에 오고 싶었죠. 그래서 결혼식을 올렸던 우리 교회 앞에 있는 이 학교에 두 자녀를 데리고 함께 다니고 있어요.

지난여름, 기독교사대회 때 학급경영세미나 강의를 준비하면서 하나님이 확실하게 깨닫게 해주셨던 것은 내가 있어야 할 곳이 바로 이곳이라는 것이에요. 한 선생님이 저의 이 고백 앞에 자신이 현재 다니고 있는 학교가 너무 멀고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제 고백을 듣고 동일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하셨어요. 2014년 기독교사대회에는 셋째를 출산한 후 4년 만에 참석해서 그런지 훨씬 감회가 크고 새로웠어요.

 

중보기도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광주협동학습연구회 회원들과 함께 꿈과 비전을 나누고 있어요. 사실 연구회 회원들 각자는 다 평범한 분들이에요. 혼자서는 대단한 일을 할 수 없죠. 하지만 협동학습이론대로 우리 각자가 갖고 있는 장점을 활용하여 나름의 역할을 맡아 광주와 전남지역에 있는 선생님들에게 교육활동 결과들을 나눠주는 일을 지속해 가자고 격려하고 있어요. 세미나 등을 통해 만나 선생님들이 교실의 어려움과 고민을 푸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실 때마다 정말 큰 보람을 느껴요.

요즘 40대 중반을 넘어 나이가 드니까 자꾸만 다음 세대를 생각하게 됩니다. 선한교육을 아름답게 섬겨주신 권상훈 장로님, 홍기춘 선생님과 같은 분들이 너무 그동안 잘하셨어요. 그래서 우리 후배들이 앞으로 우리보다 더 어린 후배 교사들을 어떻게 섬겨야 할까에 대한 고민이 굉장히 커요. 기도하고 준비해야 할 것이 참 많은 것 같아요. 한국 교회도, 우리나라 통일 문제 등을 봐도 지금 우리 세대의 짐이 참 무거운 것 같아요.

하나님이 주시는 이 부담감을 안고 기도로 나아가고 있어요. 저는 할 수 없지만 이 작은 저를 통해서 한 명의 교사, 한 명의 학생이라도 그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이룰 수 있게 된다면 저는 그것으로 제 사명을 다했다고 생각하며 감사할 뿐이에요.

 

광주란 이름을 들으면 마음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무등산 수박, 월드컵 4강 진출, 그리고 5·18민주화 항쟁. 그런 까닭에 지리산을 가로지르는 88고속도로를 타고 인터뷰 가는 길은 정말로 설레는 발걸음이었습니다. 전라남도를 아우르는 낯선 지명들과 가난한 섬마을의 어린 딸로 씩씩하게 살아온 조안숙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 내게 주신 구역이 아름다운 기업이라고 하신 선생님의 아름다운 고백과 함께 저를 위한 축복의 기도를 받으며 행복한 마음을 가득 품고 대구로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