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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비전, 비춰 주시는 데까지 가는 것(2015.3)

하나님이 지금 내게 비춰주시는 데까지 충성스럽게 디디면 그 길 끝에서 다음 길을 보이실 것이고 그게 나 같은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또한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면 공동체가 나를 검증할 것이고 공동체가 나를 보내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부터 저는 소위 비전이라고 하는 것이 없어졌어요.

 

 

 

 

비전, 비춰 주시는 데까지 가는 것

인천공항초등학교 주종호 선생

 

 

 

 

 

 

, 김정태

 

 

 

 

2015년 한해 동안 좋은교사운동 학원복음화 위원장으로 활동하게 되는 주종호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익숙한 학교를 떠나 생소한 현장에서 일하는 것은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일인데요. 삶의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는 주종호 선생님을 만나 그 속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선생님의 성장 과정을 소개해주시죠

1981년 인천에서 태어났습니다.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과 함께 살았어요. 교사이신 부모님은 경기도 이천의 한 초등학교에서 만나 결혼을 하셨는데 인천으로 바로 들어오지는 못해서 세 살이 될 때까지 할머니가 키워주셨어요. 차이나타운 아시죠?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원인 자유공원(옛 만국공원)이 있고 개항장 거리가 있는 곳인데 거기가 제가 나고 자란 동네입니다. 제가 사는 동안에는 관광지도 아니었고 마치 할렘 같은 곳이었지만 저는 그곳에서의 추억이 많습니다. 동네가 자유공원 바로 아래라서 친구들과 정말 신나게 놀았어요. 학교에 오가려면 자유공원을 가로질러야 했기 때문에 공원 전체가 동네 아이들 놀이터였습니다. 골목 끝의 공중변소를 공동 사용해야 했고 집 천정에는 쥐들이 달리고 골목 도랑에는 생활하수가 흘러가는 지저분한 곳이었는데도 아이였던 저에게는 그곳이 좋은 기억으로만 남아 있어요. 반면 어른들은 힘들었다고 합니다. 저희 부모님은 그곳 얘기를 하면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하세요. 거기서 여러 가지로 고생을 참 많이 하셨거든요.

학교 다니는 내내, 저는 그냥 조용한 모범생이었습니다. 부모님이 공부하라는 말은 평소에 거의 안하셨지만 막상 시험 결과가 안 좋으면 아버지께 크게 혼나곤 했어요. 아버지는 정이 많으면서도 완고한 분이십니다. 중고등학교 때 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말씀드리면 공부 외에는 절대 허락하지 않으셨죠. 제 동생은 혼나면서도 뒤로 자기 하고 싶은 걸 하고 다녔지만 저는 그러지 않았어요. 사춘기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병이 되었던 것 같아요.대학 1학년 때 심리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시기를 지냈습니다. 사람 만나는 게 무서울 정도로요. 하나님과의 관계도 어려웠죠. 그때 제게 하나님이라는 분은 나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뭐 하나 부족하면 당장 지적질하는 그런 존재 같았어요. 당시 저를 양육해주었던 리더를 붙들고 펑펑 울었죠. 자유로워질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스물일곱에 결혼을 하고 독립을 했습니다. 저는 늘 일찍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빨리 저다운 삶을 살아보고 싶어서였던 것 같아요.

 

초등 시절부터 따라다닌 교사선교회

어릴 적부터 할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녔습니다. 할머니는 6.25 전쟁 때 월남해서 부산쪽에서 할아버지를 만나 몇 년 생활하다가 인천으로 올라와 정착하셨습니다. 그때 목사님을 만나 믿음을 갖게 되고 그 교회의 개척멤버가 되셨어요. 어머니는 시집 오면서부터 할머니에게 이끌려 교회에 나가게 되셨습니다. 안타까운 건 몇 년을 다녀도 복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는 거죠. 아버지는 청소년기까지는 중고등부 회장을 하기도 했고 먼 길을 걸어 새벽기도도 다닐 만큼 열심이셨다고 해요. 그런데 목사님과 불화가 있은 후 교회와 단절하고 극렬한 반교회주의자가 되셨습니다. 목사님의 잘못도 있지만 아버지의 신앙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없는 매우 율법적인 종교생활이었던 게 원인이었던 것 같아요.

저의 진정한 신앙 성장은 교사선교회를 만나면서 부터였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1,2학년쯤이었을 때 어머니가 동료 선생님을 통해 교사선교회를 알게 되셨습니다. 당시 교사선교회는 정식으로 선교회라는 이름을 걸고 한창 선생님과 제자들 양육을 시작하던 때였는데요. 그때 하나님께서 교사선교회 수련회를 통해 어머니를 인격적으로 만나주셨어요. 동생과 저는 어머니를 따라 교대생과 선생님들이 함께 하는 수련회를 가기도 하고 제 또래 아이들이 모이는 디모데캠프에도 가고 어머니 학급 제자들과 함께 제자양육을 받기도 했습니다. 교사선교회에서는 양육 받은 제자들을 디모데라고 부르는데요, 이게 제 정체성의 시작입니다. 교사선교회에서 양육을 받고 자라 이제는 동역자가 된 것인데요, 참 감사한 일입니다. 사랑의 빚을 많이 졌어요. 교사선교회에 그렇고 특히 어머니에게요. 어머니는 아버지 때문에 교사선교회 활동을 지속하지는 못하셨습니다. 지금은 제가 일하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시고 때로는 충고도 해주시며 기도하고 계세요.

 

신앙생활에 고비는 없었나요?

제 신앙에 고질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은혜 누릴 줄을 몰랐다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그런 상태로 여러 가지 사역을 해야 했다는 것이죠. 연료가 거의 없는 차가 아슬아슬 달리다가는 결국 서버리는 것처럼 저에게도 그런 시기가 찾아왔습니다.

몇 년 동안 정말 낯 뜨거울 만큼 실수나 잘못을 많이 저질렀습니다. 당시 저 때문에 곤란하셨을 많은 선생님들께 너무나 죄송스러워요. 제 상태를 알게 된 선배 선생님께서 제가 하던 사역을 다 맡을 테니 저는 가서 회복할 시간을 가지라고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양육으로 저를 도와줄 선생님까지 직접 찾아서 만나게 해 주셨어요. 아주 헌신적인 리더를 만났습니다.

그렇게 도움을 받으며 한 4년간은 교사선교회를 떠났다고 여기며 살았습니다. 리더 외에 다른 사람들과는 거의 교제가 없었죠. 그러다가 양육 받은 지 2년쯤 지나자 어디선가 힘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다시 교사와 디모데 양육을 할 수 있었고 몇 년이 더 지난 지금은 공동체로 다시 돌아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많이 힘겨웠지만 거품이 빠져서 제가 비워지기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작년 초부터 하나님을 풍성하게 누리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는데 마침 작년 말에 자연스럽게 옮기게 된 교회에서 예배를 통해 큰 기쁨을 누리고 있어요.

 

범생인듯 범생아닌 범생 같은 나

조용히 말 잘 듣는 모범생이었습니다. 학원이나 과외 같은 것을 몰랐기 때문에 별로 바쁘지 않았어요. ‘몰랐다는 말이 정말 맞는 것이, 당시만 해도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보습학원 다니던 아이들은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수학이나 과학만 빼면 웬만한 학교 공부는 다 잘 따라갔습니다. 그렇다고 아주 열심히 하거나 썩 잘한 것은 아니었어요. 책을 많이 읽지도 않았고요. 공상하는 데 들인 시간이 많았습니다.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도서관에 두 시간을 앉아 있으면 한 이삼십 분 공부하고 나머지는 자세만 유지하면서 쓸데없는 공상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도 어떻게 교대에 갈 수 있었느냐고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기는 한데요,아시다시피 객관식 평가가 내용을 정확히 잘 알아야만 높은 점수를 받는 게 아니잖아요? 저는 주로 답을 잘 고르는 요령을 익혔어요. 공부를 공부답게 제대로 안한 거죠. 공부하려는 동기가 공부보다는 아버지의 인정에 더 쏠려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눈가림만 한 겁니다. 중학교 때는 드럼을 배우고 싶었고 고등학교 때는 음악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기도 했었는데요, 부모님의 확고한 신념에 따라 그냥 살던 대로 살았습니다. 장남들이 원래 좀 그러잖아요. 게다가 저는 성격도 그리 사교적이지 않고 워낙 독립적이어서 친구들과 어디를 함께 놀러간 적도 없고 그냥 조용조용 살았어요. 글쓰는 것을 좋아해서 고등학교 2학년 때 문예부 활동을 하기는 했었습니다. 친구와 인천에서 꽤 큰 찬양대회도 나가봤고요. 그것들만큼은 아주 설레는 경험이었죠. 대개의 저 같은 모범생들은 시키는 것 외에는 자의로 경험해 본 것들이 별로 없어요. 그러면서 점점 나다움을 잃어가죠. 그걸 되찾으려면 모범생 아니었던 애들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애써야 해요.

교사라는 진로를 정할 때도 그리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저 부모님이 교사이고 주위에 있는 분들도 대부분 교사여서 자연스럽게 저도 교사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특히 교사선교회 선생님들을 어릴 적부터 보면서 , 나도 언젠가는 저런 선생님이 돼서 같은 일을 해야지.’라고 생각했었어요. 교사선교회 1세대 리더이신 이풍우, 홍세기 같은 선생님들을 닮고 싶었죠. 고등학교 2학년 말쯤 한창 음악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다 한풀 꺾인 차에 아버지께서 너 인천교대 가는 게 어떻겠냐?’고 하시더라고요. 생각해보니 인천교대에 교사선교회가 있는 게 아니겠어요? 이거 잘됐다 싶어서 딱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인천교대에 갔습니다.

 

행정 실수로 발령이 난 학교에서 아내를 만나다!

첫 학교에서는 약 7개월 근무하다가 입대를 해서 그런지 몇몇 아이들 외에는 별 기억이 없습니다. 신규 시절에 너무 개념 없이 살아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몰라요.

군복무를 마치고 원적교로 복직을 해야 하는데 행정 실수로 다른 학교에 발령을 받게 됐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아내를 만났죠. 하나님의 인도하심 같아요. 전역하던 날 바로 발령장을 받아 학교에 가서 인사를 드렸어요. 그리고 집에 가는데 그 학교 여자선생님으로 보이는 분이 통화를 하면서 건너편 길을 걸어가고 있더라고요. 속으로 예쁘네했는데 다음날 보니 우리 학년 학년부장님이었던거죠. 아내는 저보다 한 학번 위인데 워낙 학교가 작다보니 젊은 선생님들이 다 부장을 하고 그랬어요. 101일에 복직해서 이듬해 2월까지 고작 몇 달 밖에 함께 근무하지 못했는데 다른 학교로 가고 나니 너무 보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연락하고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2년 정도 교제하다가 결혼을 했어요.

그 학교에서 흔치 않은 경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군복무를 마치고 10월에 복직해서 이듬해 2월에 학년을 마쳤으면 이제 교사로서 딱 1년을 채운 건데, 다음 해에 바로 6학년 부장을 하게 됐습니다. 좌충우돌했죠. 그런데 한술 더 떠서 그 다음에는 교무부장까지 하게 됐습니다. 고작 경력 2년을 가까스로 채운 사람이 교무부장을 해야 할 정도니 학교 상황이 참 어려웠던 거죠.

2학기에 주변 아파트단지 재건축이 끝나고 대거 입주를 하면서 갑자기 서른다섯 학급이 늘어나고 학생들이 막 전입해오는데 그야말로 정신이 없었어요. 거의 매일 11시에 퇴근을 했습니다. 그 해에 결혼을 했고 바로 다음 해에 청간 내신을 내서 학교를 옮겼습니다. 새로 옮긴 인천 남부지역은 승진을 하려는 분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서 굳이 제가 부장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 생각했습니다. 마침 큰 학교에 발령 받아서, 신규 시절 할 수 없었던 아이들과의 추억만들기를 많이 할 수 있을거라 기대했어요.

그런데 한 학기가 지나고 가을에 새로 오신 교장 선생님이 줄줄이 연구학교를 끌어오시면서 한동안 죽어라 고생했습니다. 온갖 업무들로 아이들에게 집중하지 못했고 학급에서 행복하지 않았어요. 전혀 민주적이지 않은 학교 조직에 대한 불만도 정수리를 뚫고 나올 정도로 가득 찼고요. 특히 방송 담당으로서 영상 제작 업무를 하면서 참 힘들었어요. 그때 제 양육리더 선생님이 많이 도와주셨죠. 장비 준비부터 편집 툴 사용까지 다 안내를 해 주었습니다.

2년 하다 보니 제가 점점 영상 만드는 일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이거라면 아이들과 뭔가 즐겁게 해볼 수 있겠다 싶어서 하고 싶은 대로 실컷 해보니 좋은 성과가 났습니다. 교장 선생님도 저를 전폭적으로 믿어주시고 제 마음대로 다 하라시며 적극 지원해주셨어요. 큰 행사에 틀어야 할 영상도 사전점검조차 안하셨죠. 그분이 의도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저를 발견해준 분이라서 정년퇴임하실 때 정성껏 영상 만들어 선물해드렸습니다. 짜증나는 학교업무라며 한 2년은 막 욕하면서 했는데 뜻밖의 과정을 통해 전혀 몰랐던 제 일면을 발견하게 된 거죠.

 

교사로서의 고민이 있다면?

실은 얼마 전까지 내가 계속 교사를 해야 할지에 대해 몇 년간 아주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이게 다가 아닌 것 같은 거예요. 지금 근무하는 학교로 넘어오면서는 이 학교가 마지막이다라는 생각으로 왔었어요. 제가 이런 말을 여기저기서 하니까 몇 가지 흔한 반응들이 나왔습니다.

교직에 계신 분들은 권태기인 거랬어요. 여러 해 같은 곳에서 같은 일 하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겪게 되는 그런 시기라고요. 그 말 뒤에는 항상 이런 뉘앙스가 따라붙었어요. ‘어차피 누구나 겪는 거니까 너무 유난 떨지 마라, 나가면 후회만 한다, 세상 호락호락하지 않아!’. 어떤 분들은 이렇게도 말씀하시더라고요. ‘너도 내 나이 돼 봐. 다 순응하고 살게 돼.’ 하나같이 의미심장한 말들인데 제 마음에 차지는 않더라고요. 저를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은 제가 사춘기라고 했습니다. 겪어야 할 때 겪지 못하고 지나간 것을 이제야 겪는 거라고요. 맞는 것 같더라고요. 권태기든 사춘기든 둘 다 맞는 이야기 같습니다. 지금까지 교사로 지내온 삶도 그게 맞았던 거고요. 그런데 그것들을 몽땅 다 합쳐 답을 해도 마음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게 문제였어요.

그렇게 외로워하면서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야 알았습니다. 아까 교사선교회의 홍세기, 이풍우 선생님을 닮고 싶어서 교사가 되려 했다고 말했는데요, 막상 교사가 되고 10년 넘게 지난 지금에야 저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분들을 여전히 마음 깊이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닮고 싶지는 않습니다. 같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분들과 다르게 만드셨으니 저는 제 삶을 저답게 살아야 할 겁니다. 어느 랍비의 말처럼, 훗날 하나님은 저에게 너는 왜 모세처럼 살지 못했냐고 책망하시기보다 왜 주종호답게 살지 않았냐고 책망하실 거예요.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것인지요?

이제는 모든 길에 열려 있어요. 학교에 계속 있는 것도 좋고 다른 길도 좋아요. 어느 유명한 영화감독에게 영화감독 지망생이 감독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답니다. 그러자 그 감독이 두 가지 질문에 답할 수 있으면 된다고 했어요. 첫째는 당신은 정말 영화를 사랑하는가?’인데 그건 아마 답하기 쉬울 것이라고 하면서 두 번째 물음을 던졌습니다. ‘영화도 당신을 원하는가?’ 이 두 번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때가 오면 영화를 하라고 했데요. 무엇을 하건, 저는 이 두 번째 물음에서 막혔어요.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만 하나님도 내가 그렇게 살기를 바라시는지, 그분이 나를 보내시는지 답할 수 없었거든요.

작년 9월 초, 학교를 벗어날 생각으로 제가 하고자 했던 일을 시작하려고 구체적인 준비를 하던 참에 인천 교사선교회에서 토요학교 사역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하필 토요학교 준비모임 시간이 그 일을 하려던 시간과 매주 겹치게 된 겁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는데 이상하리만큼 미련 없이 토요학교를 선택했어요. 두 번째 물음에 답하지 못하던 차에 내가 하겠다고 나서지 않아도 내가 꼭 하게 될 것이라면 하나님이 열어 주시겠지.’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정리가 되기 시작했어요. 마치 반지의 제왕이야기 속 절대반지를 빼낸 듯 한 기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내게 비춰주시는 데까지 충성스럽게 디디면 그 길 끝에서 다음 길을 보이실 것이고 그게 나 같은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또한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면 공동체가 나를 검증할 것이고 공동체가 나를 보내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저는 소위 비전이라고 하는 것이 없어졌어요. 굳이 말하자면 지금 보이는 데까지 잘 가는 게 저의 비전이랄까요?

 

앞으로의 계획, 꿈꾸는 사역

교사선교회 공동체에서 좋은교사 사역 제안이 처음 들어왔을 때 저는 가지 않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다른 분이 가기로 결정이 되고 싹 잊고 있었는데, 사정이 생겨 다시 연락이 온 거예요. 기도하며 고민한 끝에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 같다는 믿음이 생기기에 하겠다고 했습니다.

애초에 아무것도 몰랐는지라 앞으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계획은 없어요. 다만 사람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보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합니다. 그 하나님을 풍성하게 누리고 싶어요. 그리고 제 역할에 맞게 복음으로 선생님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를 줄곧 고민하고 기회를 만들어 실행하면서 살려고 해요. 학교에서 복음대로 살아야겠는데 여러 이유로 어려워하시는 선생님들, 복음으로 인해 힘을 얻어 살고 계시는 선생님들, 또 복음 안에서 형제 된 학교 밖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그 이야기들을 전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그게 지금 제 앞에 비춰진 길이거든요.

 

하나님은 당신을 교사로 부르셨습니다.’라는 문장 끝에 지금까지는.’ 이라는 말을 꼭 붙이고 싶다는 주종호 선생님.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삶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