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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아이 옆에 서 있는 교사를 꿈꾸다(2014.10)

저는 가르치는 것보다 배우는 게 더 좋아요. 그런데 역설적으로 말하면 배움이 좋아야 교사를 교사답게 만드는 것 같아요. 내가 알고 있는 지식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자극을 받을 수 있는 것을 배워야 해요. 또 아이들이 그런 지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려면 교사인 내가 달라져야 해요. 결국 제대로 공부를 해야 하는 거죠.

 

 

 

아이 옆에 서 있는 교사를 꿈꾸다

 

 

대구 대봉초 빈상혁 선생님

 

 

 

·김정태

 

 

 

책 속의 지식을 철저히 외워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면 그 학생은 공부를 잘한다고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교육 현실입니다. 그런데 반 학생들과 책에서 배운 것을 직접 체험하고 글로 만난 위인들의 삶의 흔적을 함께 추적하면서 진짜 공부를 경험케 하는 것에 탁월한 선생님이 있습니다. 학교 현장에서 공부하며 실천하는 삶에서 뿜어져 나오는 빈상혁 선생님과의 내공 깊은 이야기를 들어 보세요.

 

유소년 시절

대구에서 2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부유한 가정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자식들이 학비나 생활고를 걱정할 만큼 가난하지도 않았습니다. 부모님의 생활력이 강하여 자식들에게 내색하지 않고 정말 열심히 사셨거든요. 아버지는 <코오롱>에서 근무하시다가 나오셔서 장갑을 만드는 개인 사업을 하셨어요. 그러나 사업이 잘 안 되어 그만두신 후 한약재를 지고 대구와 인근 지방을 다니며 한약을 파셨어요. 그리고 대구 약전골목의 한약방에서 일하게 됩니다. 할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장남이었던 아버지가 일찍부터 가장 노릇을 하셨죠. 아버지는 젊은 시절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하셨고 어머니는 혼인 후에 믿음을 가지셨어요.

대구범어초등학교 시절엔 부모님을 따라 집과 가까운 동대구침례교회에 다녔습니다. 5학년 때 담임이셨던 임무열 선생님(당시 청년)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누님을 따라갔던 대구성원교회에 지금까지 출석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만난 좋은 선생님들을 통해 신앙을 배우다

덕원중학교를 거쳐 오성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성격이 온순하고 순종적이라 별다른 일탈 행동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께서 한약업을 하셨기에 장남인 제게도 관련 분야로 진학하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고1 때 적성은 인문계였으나 고2 올라가면서 자연계반으로 지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수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었어요. 그러던 중 고2 때 같은 반이었던 친한 친구(김태욱-현재 초등교사)를 통해 교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진로를 초등교사가 되는 방향으로 바꾸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고교 시절 수학 때문에 힘들어했던 시간들이 참 아쉬워요. 학교에서 배웠던 수학 공부는 제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공부였어요. 독일에선 자동차를 배울 때 첫 수업시간부터 실제 자동차를 두고, 보고 만지면서 시작해요. 책 없이 자동차를 해부하는 것에서부터 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각 부품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면 책을 가져와 공부합니다. 실제를 먼저 경험한 후에 이론을 공부해요. 귀납적인 공부라고 할까요.

우리 학생들이 수학을 비롯한 여러 과목에서 공부가 어려운 까닭도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내 삶과 동떨어진 이론만 배우니까 배움에 실패하는 것이죠. 그래서 교사가 된 지금, 제 수업을 귀납적인 공부, 현실에서 출발하는 수업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나를 온전하게 만들지 못하는 진짜 공부는 쓸모가 없어요. 공부가 나와 연결되어야 공부가 됩니다. 제 고교 시절엔 그런 연결이 안 되니까 수학 공부를 잘 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학교 선생님보다 교회 선생님들이 더 기억에 남아 있어요. 특히 고1 때 교회 선생님이었던 윤무홍 집사님(현재 은퇴 장로님), 2 때 조복임 집사님(현재 사모님)과 함께 했던 분반공부 시간을 잊지 못해요. 그때 성경 말씀이 잔잔히 제 안에 스며들었어요. 또한 이분들은 집에 초대도 해주시고 함께 탁구를 치는 등 학생들과 자주 어울리셨어요.

1 때 학습을 받고 고2 때 세례를 받았어요. 제 생각에 신앙과 삶이란 아주 자연스러워야 한다고 봐요. 크리스천이라면 사람들이 저 사람은 신앙인이야라고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예수를 믿는 믿음이란 주를 고백하는 사고의 과정뿐만 아니라 삶 자체가 제자가 되는 것임을 그때 배웠던 것 같아요.

 

교대 부적응 학생?

대학 생활은 큰 변화의 시기였습니다. 원해서 갔던 학교였지만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어요. 지식을 암기하거나 기능을 연습한 후 평가를 통해 나의 수준을 저울질하는 방식에 잘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또 교대 특성상 실기 수업이 많아요. 한번은 첫 국악(단소 등) 수업을 앞둔 방학 때에 학생들 대부분이 학원이나 선배 등을 통해서 기본적인 운지법을 배우고 왔더군요. 저는 단소를 처음 만져 보는 거였죠. ‘아이고, 큰일 났구나!’ 하면서 힘들게 겨우 따라갔던 기억이 나요.

교육실습을 통해 잠시 경험한 학교의 관료적인 문화도 제겐 맞지 않는 옷이었고 가르치는 일도 참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교사가 꼭 되어야 한다는 욕심 같은 것이 대학 시절에 별로 없었어요. 동기들(90학번)보다 조금 늦게 교사가 된 것도 그런 이유가 있었던 거죠. 다만 아이든 어른이든 청년이든 사람 자체를 좋아합니다. 그것이 제가 아직 학교에 있는 까닭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입학하기 전부터 CCC에 연결되어 대학생활 동안 전도훈련, 제자훈련, 순모임 등을 통해 선배들의 신앙을 배우고 다시 순모임을 통해 후배들에게 이어갔던 경험은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큰 은혜였습니다. 여기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그립습니다.

 

이제는 원칙 안에서 유연한 교사가 되려 해요

19993, 첫 발령을 받은 학교는 대구남명초등학교였어요. 여기서는 신속하고 정확하게 학교의 업무를 처리하지 못해서 힘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어긋날 때 학교생활이 무척 불편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특히 교감 선생님과 종종 부딪혔어요. 제가 그 때는 학급 일에 더 많이 신경을 썼거든요. 학교 바깥으로 아이들을 자주 데리고 다니는 것에 비해 학교 일, 특히 공문을 꼼꼼하게 처리하지 못했고 또 자세히 가르쳐주는 분도 없고 하여 교감 선생님은 자주 충고와 질책을 하셨어요.

그러다 몇 년이 지나면서 조금씩 업무도 익히게 되고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다 보니까 상대방에게 나를 맞춰주는 게 점점 편해졌어요. 지금은 내 원칙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설득하거나 내가 설득을 당하며 살기로 했어요. 다시 말해서 유연하게 살려고 합니다.

 

지역모임이 필요한 이유

한 후배 교사(박세경 선생님)를 통해 TCF 참여 권유를 받았습니다. 2000년 대구 IVF회관에서 모이던 TCF 대구모임에 나갔습니다. 그때 변성구, 김덕기, 안준길 선생님 등도 만났죠. 그 후 한동안 휴면 기간을 가지다 20088월부터 김동준 선생님의 권유로 다시 모임에 지속적으로 나오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을 떠나 먼 곳에 갈 때는 비행기를 타야 해요. 물론 비행기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아주 드물지만 추락도 해요. 하지만 비행기를 타지 않고는 먼 곳으로 갈 수 없어요. 모임이나 지역교회도 그 비행기와 비슷하다고 봐요. 물론 불완전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일들과 지치고 힘들 때 모임에서 회복되고 치유되는 경험을 할 수 있어요. 제가 그렇게 치유받기도 하고 또 제가 누군가에게 힐링이 되기도 하고요. 일상 속에서 지역모임과 연결되지 않는 교사는 곧 사그라들어요. 함께 기뻐하고 아파하는 경험이 우리에겐 꼭 필요해요.

 

내 삶의 스승, 장기려 선생님

교사가 되기 전 <할아버지 손은 약손>이란 책을 통해 장기려 선생님을 알게 되었어요. 그러다 장기려 선생님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져서 나중에는 직접 그분의 제자들을 만나기도 했고요. 2003년부터 선생님의 제자이자 포항선린병원 원장이었던 이건오 원장님(현재 평택참좋은박애병원 의료원장)을 면담하기도 했고, 2005년에는 성산장기려선생기념사업회가 주최한 10주기 추모예배가 열린 서울대학교병원교회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었죠.

그분의 제자들을 통해 장기려 선생님의 이야기를 직접 들었어요. 선생님 생전에는 그분의 가치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요. 돌아가신 후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그만큼 우리 사회가 각박해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해요. 그분은 평생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셨어요. 저는 지금도 그런 면이 있어요. 제가 남들에게 비교되는 것이 싫어서 정직하게 말하지 않기도 해요. 그런데 선생님은 모든 일에 정직하고자 하셨어요.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늘 의식하셨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물질에 대한 욕심이 없었지요.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는 것엔 관심이 없고 오직 하나님께만 인정받기를 원하셨던 분입니다.

저는 교직에 대한 큰 애착은 없어요. 단지 나를 필요로 하는 아이들 특히 소외된 아이들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게 그 옆에 서 있는 교사로 남고 싶어요. 아이들을 위해서 그 옆에 서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죠. ‘서 있는 교사란 학생들이 올바른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사입니다. 올바른 목표는 다름 아닌 기독교적 가치입니다. 낮아지고 섬기면서 나를 비워나가는 것이죠. 그건 예수님의 산상수훈이면서 동시에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삶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살고자 했던 장기려 선생님의 일생을 보면서 기독교 이상주의를 많이 생각했습니다.

가끔 제 아내가 당신의 꿈이 뭐냐고 물어봐요. 전문직이나 관리자로 승진하거나 수석교사가 되려는 꿈도 없고 하니 답답해 보였을 거예요. 그런데 저는 도리어 지금 이대로도 참 많이 가졌다고 생각해요. 물론 지금도 제 삶을 옥죄는 여러 가지가 있어요. 가진 게 많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죠. 그래서 조금씩 더 비워야 좀 더 자유롭게 가치 있는 삶을 선택하며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다만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싶은 욕심이 많아요. 여기서 공부란 제도권 공부보다는 실질적 공부를 말해요. 그래서 지금까지 여기저기 많은 분들과 공부하는 모임을 만들어 왔어요. <마을학교 역사교사모임>, <대구역사문화연구소>, <좋은수업실천연구회>, <행복수업디자인연구회>, <브릿지 대구모임> 등을 통해서 교사는 물론 교사 아닌 분들과도 연구 모임을 해왔어요.

또한 담임했던 학생들을 중심으로 학습소모임도 하고 있어요. 한 달에 한 번 토요일에 독서모임으로 모이고 어떤 경우에는 이 아이들과 여행을 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학급에서 국어 시간을 이용해 <할아버지 손은 약손> 책을 읽고 있어서 여름 방학이나 겨울 방학을 이용해 답사를 합니다. 부산 복음병원, 장기려기념관 같은 곳을 둘러보면서 아이들이 책에서 글자로 알았던 것을 뛰어넘어 장기려 선생님의 체취를 직접 느끼고 그분을 닮아가고자 노력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결혼 이야기

아내와는 집단상담 연수를 통해 만나서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 아내는 집단상담 지도자였고 저는 연수생이었어요. 제 아내는 가정생활의 깊은 아픔을 경험하면서 상담을 공부하게 되었고 그런 자신의 삶이 녹아 있는 학위논문도 완성하였습니다. 제 아들은 저와 성격이 완전히 반대라서 서로 부딪칠 때가 많아요. 지금은 가급적 아이의 생활에 간섭하지 않으려 하지만 관계가 좀 더 회복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아이를 좀 더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가끔 아내와 다투었을 때 이전에 서로 주고받은 편지를 꺼내 봅니다. 그것을 보면서 그 사람과 좋았던 기억을 회상하며 회복되는 것을 경험하곤 합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의 지금 이 모습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하죠. 물론 제 아내는 그래요. 제가 듣기는 정말 잘 듣는데 결국에는 제 고집대로 한다는 거죠. 그것 참.

아이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기

할머니와 같이 사는 우리 반 학생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어요. 그 아이의 가방이 다 낡아서 새로 사러 같이 갔답니다. 그때 정말 기분이 좋더군요. 가정에서 돌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의 담임이 되어 그들과 교제하면서 격려해 주는 것이 아이의 삶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는 것이라 생각해요.

물론 교사에게 반항하는 아이들, 공교육에 적응 못하는 아이들을 이해하는 것은 지금도 어려운 일이에요. 그런 아이들을 대할 때 내가 제대로 관찰하지 못해서, 이 아이의 고단한 삶을 읽어주는 능력이 부족해서 어려웠던 순간이 많았어요. 그럴 때 그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필요해요. 그게 어렵다면 어떤 상황에 있는지 그 아이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기고 그걸 확인하고 입체적으로 아이를 이해하는 노력을 하려고 합니다.

우리 교사들은 학교에서 아이의 겉만 보기 쉬워요. 그 아이의 속마음을 읽지 못하면 아이에게 화를 내게 됩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꼭 말이나 행동, 글을 통해 단서를 남겨요. 그런 단서들을 눈여겨보고 기록해 두었다가 학생 개개인의 포트폴리오를 남겨서 학년 말 진급할 때 그 아이에게 선물로 준다면 아이가 자신을 발견하는 좋은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해요. 그런 면에서 교사는 학생들의 거울이 되어야 할 것 같아요. 굳이 아이를 비판하고 지적할 필요가 없어요. 단지 그 아이의 모습을 보여주기만 하는 것이죠. 물론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에요. 그런데 그것, 아이의 내면을 보는 것이 결국 나를 교사답게 하는데 꼭 필요한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좋은교사운동의 중보기도운동은 정말 중요한 겁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한 후 아이들을 만나면 다르게 보이거든요. 저는 그 행동이 기독교사와 일반교사의 차이점이라고 생각해요. 주님의 마음으로 아이들을 만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요?

 

평생토록 공동체가 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이번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이어져 있다는 것, 너라는 것이 나와 구분된 존재가 아니란 것을 깨달아 가고 있어요. 예수님은 소외된 소자를 섬기는 것이 바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셨죠. 그것처럼 타인에게 얼마나 민감하냐는 것은 곧 내가 제대로 살아가고 있느냐라는 척도라고 봐요. 그러므로 이웃을 위해서 내가 손해를 보는 것이 사실은 손해가 아니에요.

제 경험으로는 아이들과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으며 아파하고 실패하는 그것이 나를 더욱 나답게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어요.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까를 고민하는 것에서 발생하는 고통이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과 함께 아파할 수 있는 그런 차원의 고통을 선택하면 좋겠어요.

한 사회가 온전한 공동체가 되려면 관계가 회복되어야 하고, 함께 만들어 가는 공동의 목표가 있어야 하며, 서로 간의 대화가 있어야 해요. 이 세 가지가 유기적으로 잘 연결될 때 비로소 온전한 공동체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 학교가 관계 형성이 제대로 되지 않거나 공동의 목표가 없거나 삶을 나누는 인격적인 대화가 없다면 그건 공동체가 아니라 단순한 조직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관계, 공동의 목표, 대화 이것은 우리가 평생토록 연습하고 적용해야 하는 것이라고 봐요.

 

고민하는 교사들을 위한 책을 쓰고 싶어요

솔직히 저는 가르치는 것보다 배우는 게 더 좋아요. 그런데 역설적으로 말하면 배움이 좋아야 교사를 교사답게 만드는 것 같아요. 내가 알고 있는 지식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자극을 받을 수 있는 것을 배워야 해요. 또 아이들이 그런 지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려면 교사인 내가 달라져야 해요. 결국 제대로 공부를 해야 하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학교 공부는 진짜 공부에서 많이 벗어나 있어요. 공부는 단지 시험을 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공부를 통해 나를 나답게 완성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삶으로는 행복을 얻을 수 없음에도 이 왜곡된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저는 열심히 공부해서 교육과 관련된 글이나 책을 쓰고 싶습니다. 학교 현장에서 여러 가지 문제로 고민하는 교사들에게 내가 실패했던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성찰하는 기회를 만들고 싶어요. 장기려 선생님처럼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능력을 최대한 계발하여 다른 사람을 위해 남김없이 사용하고 떠나는 것이 제 소망입니다.

 

인터뷰 중에 들었던 최근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이야기, <서초교회 잔혹사> 책 이야기 등 우리 사회 전반에 대한 선생님의 혜안을 모두 지면에 옮기지 못함이 많이 아쉽습니다. 나다니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이 생각났습니다. 사람은 그가 존경하고 따르는 이를 닮아간다고 하는데 평생의 멘토로 닮고 싶은 장기려 박사님의 정신과 삶이 조금씩 빈 선생님의 삶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공부하고 실천하며 가르치는 삶을 통해 앞으로 출간될 멋진 책도 기대하며 선생님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