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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사람을 변화시키는 낭만청춘 교사(2014.8)

초임 때부터 시행착오를 하면서 나름 갖게 된 모임 철학이 있어요. '그냥 한다, 힘을 뺀다, 꾸준히 한다' 입니다. 제가 바로 설 때, 저를 비워서 준비되어야 일이 되는 것 같아요. 기도로 준비되었을 때는 가만있어도 사람들이 오더군요. 그래서 지금은 큰 비전이나 거창한 목표를 갖고 있지 않아요.

 

 

 

 

양산 산양초등학교 정지희 선생님

사람을 변화시키는 낭만청춘 교사

 

 

 

 

·김정태

 

 

 

 

좋은만남 인터뷰 요청을 받는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겸손히 사양하시죠. 그래서 좋은교사운동의 적()은 지나친 겸손이란 말도 있어요.^^ 정지희 선생님을 만나자 마자 이렇게 용감하게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드린다고 하니 그냥 솔직하게 제가 살아온 또 살아가고 있는 이야기를 하면 되는 거죠?” 하시는 긍정 마인드를 접했습니다. 마치 숲 속의 상쾌한 공기를 마시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어요.

 

믿음, 남동생을 낳고 하늘나라로 가신 어머니의 선물

제 고향은 경남 진주입니다. 거기서 14녀 중 넷째로 자랐습니다. 할머니, 아버지, 언니들, 남동생, 새어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6살 때 당시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께서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때 어머니 뱃속에 막내 남동생이 있었는데 아기를 낳기 위해 항암치료를 거부하셨지요. 남동생 출산 후에는 이미 암이 많이 진행된 상태여서 치료 시기를 놓쳐 버렸어요. 그때 우리 집에 목사님이 오셔서 복음을 전하고 어머니의 병이 낫도록 기도해 주셨죠.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유언을 남기셨어요. 하나님은 정말 계시다고, 너희들보다 먼저 천국에 가 있을 테니 거기서 다시 만나자고 하셨죠. 그래서 다섯 자녀들은 모두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교회에 출석하며 믿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셋째 언니와 남동생은 신앙생활을 쉬고 있지만요. 당시 아버지는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했어요. 심지어 굿도 했어요. 마지막으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목사님을 의지했지만 기대대로 되지 않아 지금까지도 믿음을 갖지 못하고 사세요. 한때는 큰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교회 간다며 집에서 쫓아낸 적도 있지요.

너무 어릴 때 일이라 자세하게 기억나는 것은 많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 집에 오신 목사님이 어머니를 위해 기도해주시고 예배를 드렸던 장면도 생각나고, 그 아픈 중에도 하나님을 간절하게 믿었던 어머니의 모습이 기억이 나요. 항상 찬송가를 부르셨어요.

 

친구의 죽음으로 영원하지 않은 삶을 고민하다

언니들과 달리 저는 자라는 동안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어요. 3 때는 교회에 아예 가지 않고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해서 대학에 가려고 했지요. 그러다 시험에 떨어져 재수를 합니다.

어느 날, 같은 학원에 다니던 한 친구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는 일이 생겨요. 참 많이 울었어요. 늘 같이 밥 먹고 이야기하던 친구의 어이없는 죽음을 접하고 일주일 내내 울었어요. 그때 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죠. 어린 시절 경험했던 엄마의 죽음, 그리고 20살 때에 절친했던 한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이 세상이 영원한 것이 아니란 생각을 했어요. 장례식 때 친구의 관을 봤어요. 그 아이의 키와 거의 비슷한 150cm 길이의 관이었어요. 너무나 충격적이었어요. ‘그 아이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 내가 죽으면 나는 또 어디로 갈까?’ 정말 두렵고 무서웠죠.

그때 다른 한 친구(김민정)가 저를 전도했어요. 울고만 있지 말고 같이 교회에 가자면서 저를 진주교회 금요철야예배에 데리고 가요. 다시 들어선 예배당에서 기도를 하는데 왜 그렇게 하염없이 눈물이 나던지요. 정말 회개의 눈물을 쏟았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제 안에 믿음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교사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

언니들이 교대에 가야한다고 했어요. 그땐 선생님이 되는 게 싫었어요. 일단 교사가 되려면 진주교대에 가야하고 그러면 집을 떠날 수가 없었거든요. 대학을 핑계 삼아 집을 나가 독립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언니들이 사립 대학교는 갈 생각조차 하지 말라 하고 서울도 안 된다고 하니 막연히 교대를 지원하게 되었어요. 물론 진짜 교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건 대학생이 되어 후세대를 만나고부터였지요.

대학생활의 진짜 낭만

대학에 입학해서 바로 CCC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순장은커녕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고 농땡이만 부리다가 결국 2학년 1학기를 쉬게 되었어요. 재수할 때 간절히 기도하던 마음이 막상 대학생이 되고 나니까 조금 달라지더군요. 공부한답시고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 호기심이 많았어요. 놀고 싶고,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지요. 화장, 연애, , 시내를 돌아다니며 놀기 등. 그런데 한편으론 하나님을 위해서도 살고 싶었고요.

좀 이중적이었어요. 그렇게 세상(?)친구들과 노는 재미에 빠져 있다가 우연한 일들로 마음 상하는 일이 생겼어요. 영적으로도 침체되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2학기 동아리 모집 기간에 다시 다른 선교단체를 찾아 다녔어요. 그때 한 언니(저를 처음 양육해 준 선배)가 일단 가보자고 해서 따라간 곳이 후세대회관이었어요. 그곳에서 지금 GT 대표인 정영찬 목사님 말씀을 듣게 됩니다.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저를 교사로 부르셨다고 하셨어요. 저는 제가 시험을 잘 봐서 교대에 입학한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저를 하나님의 교사로 쓰기를 원하신다는 거예요. 그때는 그 말씀이 정말 위로와 도전이 되었답니다. 부끄럽지만 화장하고 술먹고 소개팅하는 것을 대학생활의 낭만으로 알았어요. 그런데 목사님은 그런 것들이 낭만이 아니라고 하시며, 진짜 낭만은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신앙서적을 읽으며 영적 훈련을 받는 것이라고 하셨죠. 그 말씀이 진짜 낭만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동안 제가 믿었던 낭만은 가짜였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 깨달음 이후 제 대학생활은 달라졌어요. 러시아 단기선교에도 참가하고 교회 대학부의 리더훈련도 받고 영적체험도 하게 되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진짜 낭만적인 대학생활을 한 것에 대해 후회가 없어요.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직장생활을 하니 대학 때처럼 깊은 독서와 영적훈련을 다시 한다는 것이 참 힘들더군요. 그래서 제대로 된 20대의 낭만시절을 보낸 것 같아요.

 

이 학교를 진달래 꽃밭으로 만들리라!

거제에 신규발령을 받았어요. 부푼 꿈을 안고 정영찬 목사님이 말씀해 주신대로 근무하게 되는 학교와 맡은 아이들을 진달래 꽃밭처럼 복음으로 다 변화시키리라는 그런 원대한 각오로 첫 학교인 사등초등학교에 갔어요. 하지만 그곳에서 저는 한없이 무너졌답니다.

제가 무너진 몇 가지 원인들이 있어요. 6학급이라 기본적으로 업무가 많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학교 사택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교장, 교감 선생님과 같은 사택에 살면서 초임 2년 동안 제 사생활을 갖기 힘들었어요. 그분들은 때마다 혼자 있는 저를 불러내어 회식을 하셨어요. 6학급이라 도망칠 곳도 없었지요. 물론 후세대에서 배운 대로 디모데 양육도 하곤 했어요. 주말에는 반 아이들을 사택에 초대해서 밥을 먹이며 같이 놀러 가기도 하고 주간 모둠 중에서 가장 우수한 모둠 아이들을 데리고 시내에서 영화를 보기도 했어요.

그런데 제 옆에는 그런 저를 격려해주는 이도 없고, 또 서로 자극이 될 공동체가 없으니 그저 한없이 무너졌던 것이죠. 막연히 잘할 수 있다고 목에 힘 잔뜩 주고 학교 현장에 갔던 제 모습을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공동체 없이 혼자 떨어져 기독교사의 삶을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 같아요. 지금도 후배들과 함께 디모데 양육을 하고 있지만, 저를 양육해 준 많은 리더 언니들의 헌신 때문에 이 길을 갈 수 있어요. 중요한 건 힘을 빼고, 하나님 앞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제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요.

 

결혼 이야기

남편은 건축 시공을 하는 사람입니다. 부산과 진주를 오가며 만났고 1년 정도 교제하다 결혼했습니다. 처음 진주에서 만났을 때 함께 기독교사의 비전을 공유해 줄 수 있겠냐고 물었어요. 놀랍게도 제 남편은 동역할 수 있다고 했고 지금도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GT 언니들 중에서 교사와 결혼을 못해 단체를 떠나는 것을 자주 봤습니다. 그래서 결혼 전 기도제목 중에 하나가 기독교사의 비전을 공유할 수 있는 남편을 만나는 것이었어요. 저는 교사가 아닌 남편일지라도 함께 공유할 수 있기를 기도했어요. 지금은 매주 저희 집에서 교사 양육 모임을 해요. 그 일을 하려면 7명 분 식사를 준비해야 하죠. 남편의 도움 없이는 이 모임을 할 수가 없어요. 거기에다가 GT수련회와 동역자MT에도 같이 가요. 남편도 GT수련회에 와서 정영찬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듣고 교사수련회이지만 일반인도 충분히 공감할 말씀이라고 이야기해요. 요즘 제 남편은 제가 GT를 그만 두겠다, 양육 모임을 그만 하겠다 하면 오히려 말려요. 제가 양육 모임을 하지 않으면 집에서 막 짜증내고 그런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인 것 같아요.^^

 

디모데 양육을 하면서 갖는 보람

디모데 양육을 했던 아이들이 교회에 등록하는 것이 보람이 됩니다. 또 교사 양육을 하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도 좋지만, 저와 함께 했던 지체들이 리더로 세워지고 디모데 양육을 결심하는 모습을 볼 때인 것 같아요. 이번에 만난 디모데 아이는 교회 유년부에 출석하고 있지만, 믿지 않는 가정의 아이예요. 처음엔 유년부 학생인 줄 몰랐는데, 수업 시간에 우연히 캄보디아의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 이야기를 하다가 교회 유년부 친구인걸 알았어요. 이 아이가 모임에서 성경도 찾아주고 저의 좋은 동역자가 되고 있어요. 올 한 해 이 친구를 통해서 많은 아이들이 교회와 연결되었으면 좋겠네요.

 

그냥 한다, 힘을 뺀다, 꾸준히 한다

결혼하면서 양산으로 이사했어요. 처음 거제에 발령이 날 때처럼 이번에도 양산을 변화시키리라!’ 그런 거창한 각오로 왔지요. 그런데 모임에 사람들이 안 오더군요. 급기야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2년 정도 GT모임에 제가 가질 못했어요. 너무 힘들어서 양육도 놓아야 되나하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정말 그만 접으려고 했던 적도 있어요.

그런데 막상 접으려고 하면 희한하게 어디선가 사람들이 나타나요. 지금 양산에서는 두 그룹의 교사 양육 모임이 진행되고 있어요. 내가 열심히 한다고 할 때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더니, 그만두려고 하니까 갑자기 사람들이 나타나고참 신기했어요.

제가 꿈꾸는 것은 GT 공동체와 함께 디모데 양육과 교사 양육을 계속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임 때부터 시행착오를 하면서 나름 갖게 된 모임 철학이 있어요. ‘그냥 한다, 힘을 뺀다, 꾸준히 한다예요. 제가 하는 것이 아닌 것 같아요. 제가 바로 설 때, 저를 비워서 준비되어야 일이 되는 것 같아요. 기도로 준비되었을 때는 가만있어도 사람들이 오더군요. 그래서 지금은 큰 비전이나 거창한 목표를 갖고 있지 않아요. 그냥 공동체에 머물러 있는 것이 저를 바로 서게 해 준다고 생각하며 제 자리를 지키려고 해요.

 

학교를 새로 옮길 때마다 내가 이 학교를 변화시키리라!’ 라는 당찬 각오를 가졌던 선생님은 이제 그런 만용(?)을 버렸답니다. 선생님은 그런 헛된 용기 속에서 한없이 무너졌다고 하지만, 결국 그 무너짐과 낮아짐 덕분에 지금처럼 교사들과 학생들을 또 공동체를 섬기는 리더로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게 된 것이겠죠? 세월이 흘러 외모는 변해갈지라도 지성과 영성이 부요한 사람은 항상 낭만청춘입니다. 새롭고 신선한 공기같은 존재로 학생들과 교사들을 살리는 교사, 정지희 선생님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