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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가장 큰 선물, 기독교사 공동체 (2014.9)

아이들은 그들의 성품과 환경이 어떠할지라도 있는 모습 그대로 귀하게 사랑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그러한 철학을 삶으로 살아내는 교사가 제 꿈입니다. 변질되지 않고 끝까지 아이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교사, 평범하지만 비범한 교사가 되는 것이죠.

 

 

 

 

가장 큰 선물, 기독교사 공동체

 

전주 서신초 김지만 선생님

 

/사진·김효수

 

 

 

 

2014기독교사대회에서 레크리에이션을 접목한 광고 진행으로 시선을 끌었던 김지만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미디어 국장으로 전체 무대를 총괄하면서 쓸친소 프로그램 진행까지, 넘치는 끼로 충만한 선생님의 삶이 궁금했습니다. 선생님은 자신이 소개될 만한 인물이 아니라며 인터뷰를 마다했지만 좋은교사운동을 위해, 또 이 시대를 살아가는 30대 후반의 기독교사들을 위해 좋은만남을 열어 주었습니다.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으며 자라다

19769월 전북 정읍에서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어요. 제 기억에는 소심하고 내성적인 평범한 아이였는데 부모님께서는 무척 까불었고 똘똘했고 무대 체질이었다고 하셔요. 부모님은 엄격한 신앙교육으로 두 자녀를 양육하셨어요. 특히 어머니는 주일성수를 강조하셨는데 제가 그것을 어겼던 기억이 선명하게 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킹콩 영화를 보려고 주일 헌금으로 4살 아래 동생을 데리고 갔어요. 영화관에서 나오는데 하나님이 벌 주실까봐 너무 무서웠어요. 인도를 지나는데 도로 위 차들이 달려들 것만 같아 가게 현관으로 바짝 붙어 걸었던 기억이 있어요. 어릴 때 느꼈던 하나님은 무서운 분, 잘못하면 많이 혼내는 분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어머니로부터 엄격하게 받은 교육은 그 이후에 제 신앙의 순전함을 지키는데 굉장히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회심과 의심 끝에 찾아온 확신

중학교 2학년 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어요. 기도원에서 중고등부 수련회를 하는데 거기서 기도를 정말 열심히 했어요. 부모님께 순종하며 자란 저는 나쁜 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 죄인이라는 말이 별로 다가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기도하는 중에 내가 죄인이라는 생각이 마음에 와 닿으면서 부모님에게 거짓말 한 것, 남의 집 깨밭을 망가뜨린 일 등의 나쁜 짓을 한 장면들이 필름처럼 지나가는 거예요. 그때 스스로 죄인이라 고백하면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어요.

중고등부를 인솔하셨던 전도사님께서 사모하는 사람에게 방언이 주어진다고 하셔서 그 말씀에 따라 기도했더니 정말 방언으로 기도하게 되었어요. 어린 중학생이었지만 수련회에서 받은 은혜를 지키려고 길을 걸을 땐 길거리의 영화 포스터에도 시선을 뺏기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려가며 걷고, 방언을 까먹을까봐 집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기도했지요. 모태신앙치고는 강렬한 회심의 경험을 한 셈이죠.

그렇게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좋은 교회 공동체에서 학생회를 섬기면서 자랐어요. 그런데 고등학생 때에는 내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에 의심이 드는 거예요. 인간이 자신의 의식을 한 군데에 집중하면서 어떤 대상을 갈구하면 일종의 정신적인 작용으로 눈물 흘리는 종교적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데 이 과정에서 내가 예수님을 만났다고 착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죠.

하지만 이러한 의심은 고3 때 확실히 물러갔어요. 남들은 고3 시절이 힘들다고 했지만 저는 고3 때가 참 평안하고 좋았거든요. 그때 부모님이 독서실을 운영하면서 다른 몇 분들과 함께 같은 건물에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2층이 교회이고, 3층이 아버지가 운영하는 독서실이었어요. 학교 갔다 오면 2층 교회에 들러서 기도하고 3층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였지요. 성경을 읽고, 그중에 와 닿는 구절을 연습장 맨 위에다 적어 기도한 후에 공부했어요.

3 내내 마음이 평안했어요. 실제로 당시 200점 만점 수능 시험에서 평소보다 20점이 올라간 점수를 얻는 은혜도 있었어요. 3 시절에 이런 특별한 은혜를 누리면서 하나님에 대한 의심들이 자연스럽게 없어졌지요. 아마도 그런 의심은 진화론을 가르쳤던 학교 공부의 영향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3 때 제 진로에 대해서 외삼촌의 도움을 받았어요. 그 분은 전주에서 목회를 하고 계셨는데 제게 교대로 진학할 것을 권면해 주셨어요. 당시까지 제 진로에 대해 이야기해 주신 분은 외삼촌이 처음이었어요. 제가 경험한 학교 교육에서 한 사람의 인생이 결정되는 진로를 두고 담임 선생님들은 대개 개개인의 진로에 대해서 크게 고민해 주지 않으셨어요. 부모님들도 먹고 사느라 우리 자녀들이 뭘 잘하고 어떤 전공학과들이 있는지 당연히 모르셨지요. 진로를 두고 기도하는 중에 외삼촌의 권면으로 교대에 대해 알아보고 있는데 학교에서는 남자가 갈 곳이 못 되는 대학이 교대라는 부정적인 말도 들었어요. 하지만 그럴수록 제 마음은 더 끌리게 되어 결국 전주교대에 입학했어요.

 

기독교사의 꿈을 품게 된 대학시절

대학생이 되니 캠퍼스 시절의 자유로움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참 좋았어요. 제가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같이 있는 걸 좋아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지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너무 좋고 하니깐 술자리마다 끼어 있었어요. 하지만 보수적으로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은 터라 술은 죽어도 안 된다고 먹지 않았어요. 그런데 과 엠티에서 술을 먹지 않는 저를 본 선배들이 화가 나서 남자들을 전부 집합시켜 폭력을 행사하며 과의 기강을 잡는 일도 있었죠. 그때는 마음이 힘들었어요. 하지만 타협하지 않았어요. 술을 먹지 않으면서 과 생활도 열심히 하고 선배들을 깍듯이 대하는 모습에서 나중에는 인정을 받게 되었어요. 술 문제를 좀 유난하게 치렀지만 그 이후 제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들어간 동아리가 방송국과 CCC였어요. 처음에는 방송국 활동에 우선순위를 두었지요. 그러다 보니 순장교육도 제대로 못 받고, 주일도 못 지키는 경우가 생겼어요. 평소 저를 아끼며 기도를 많이 해주시던 이모할머니께서 그러한 제 모습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권면해 주셔서 다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게 되었고, 2학년이 돼서야 예비 순장교육을 받게 되었어요.

2학년을 마치고 입대를 했어요. 군복무 기간에 하나님께서 내 삶을 주관하심을 더 깊이 느꼈어요. 군목도, 예배도 없던 곳에서 군종병과 다른 병사들이 함께 새벽예배도 드리고 성경 1독도 했지요. 수송부 운전병을 하며 쉽지 않은 군 생활이었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나는 복을 누렸습니다.

제대 후에도 CCC 훈련을 열심히 받고 총무순장으로 섬겼습니다. 당시 처음 생긴 전주교대 기독인연합(GVF 전신) 집행부 4기 대표도 하면서 기독교사의 꿈을 확실히 품는 소중한 캠퍼스 시절이었어요.

 

놀이를 만나면서 교사로 거듭나다

신규발령을 받아 아이들에게 잘해 주려는 마음으로 교단에 섰지만 이상하게도 아이들과 관계는 멀어져 갔어요. 마음대로 되지 않더군요. 신규 3~4월 학교업무와 환경정리로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졌어요.

당시 저는 아이들을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화를 내는 모습이 더 많았어요. 예를 들어 개인적으로는 음악을 좋아하지만 수업을 하면, “왜 입을 크게 안 벌리냐?”, “노래 부르는 태도가 왜 이러냐?” 하면서 아이들에게 음악이 즐거움이 아닌 고통이 되는 그런 수업을 경험케 하고 있더군요. 그런 내 모습이 너무 싫었어요. 급기야 밤에 학교 운동장을 돌면서 하나님, 아무래도 저는 교사의 자질이 없나 봅니다. 그만두어야 할 것 같아요.” 이런 고백을 할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제 어려움이 바로 관계의 문제였음을 깨닫습니다. 당시 교회 여름 성경학교에서 레크리에이션을 좀 해봐라라는 부탁을 받고 무작정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 성경학교 때 실행해 보았어요. 놀랍게도 반응이 좋더군요. 이것을 학교에서도 하면 괜찮겠다 싶어서 교실 수업에서 사용했는데 예상보다 휠씬 학생들의 반응이 좋았어요. 이때부터 학기 초에 카리스마로 아이들을 휘어잡는 것을 버리고 첫 만남부터 놀이로 시작하였어요. 교실 놀이를 통한 학급운영으로 다가가니 아이들에게 내가 두려움이 아닌 신뢰의 대상으로 바뀌어 갔어요. 이렇게 관계가 개선되니까 교사로서의 자존감이 생겼고, 또 수업을 이끌어 갈 수 있는 힘도 생겼지요.

당시 전주교대 예비교사 아카데미가 진행되었고, 돌아가면서 강사로 섬기는데 저에게는 놀이지도라는 미션이 맡겨졌어요. 그런 식으로 여기저기서 8년 정도 놀이 강사로 섬기니까 이게 훈련이 되면서 지금은 제 달란트가 되었어요.

놀이를 통한 학급운영을 하면서 극적인 경험도 있었어요. 한 아이가 전년도에는 틱장애로 다른 학생들의 수업에 방해가 될 정도로 심했어요. 그런데 저랑 같은 반이 된 해에는 그 아이가 단 한 번도 틱을 한 적이 없었어요. 그때 놀이에는 치료의 힘이 있다는 것을 경험했어요. 그리고 자연스럽게 상담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대학원을 교육심리로 전공하면서 최근에는 놀이를 집단상담과 접목시켜서 실천하고 있어요.

 

전주교대 기독인연합이 GVF 기독교사 공동체로 성장하다

예비교사 때 연합운동을 하던 지체들이 교사로서 현장에 나갔더니 다들 힘들어 했지요. 자연스럽게 현직 교사모임이 만들어졌어요. 돌아가면서 학급경영 등을 발제하면서 지역모임으로 발전했어요. 그런 과정에서 저는 오랫동안 군산모임에서 지역리더로 섬겼어요. 지역모임 리더로 섬기면서 그 전에는 우리 학급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것만 생각했는데, 평생 1,000명의 아이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동료교사들이 제 가슴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동료교사를 기독교사로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기독교사, 교사선교사의 비전을 갖고 살게 하고 싶은 꿈이 생겼어요. 지역리더로 섬기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GVF를 하면서 선생님을 돕고 세우는 것이 자연스럽게 제 비전이 되었어요.

 

학교혁신, 가슴에 품다

김승환 교육감 초선 당선이 된 2010년 쯤 혁신학교의 등장은 또 하나의 비전을 던져 주었지요. 그 전에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학교를 해보며 함께 사는 마을 공동체를 그려 본 적은 있었지만 공교육 안에서 가능하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설렛어요. GVF 공동체 안에서도 몇 명이 한 학교에 함께 들어가 학교 혁신을 이루어 보자는 논의가 시작되었지요. 결단이 필요한 시점에 군산에서 전주로 내신을 썼어요. 그런데 함께 생각한 혁신학교에 당연히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여러 상황으로 인해 못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때 참 창피하고 난감했어요.

그렇지만 전주 외곽에 발령 난 학교는 혁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준비기간으로 필요한 경험을 많이 하게 되었어요. 까다로운 관리자와의 관계 훈련, 아이들과 깊이 있는 관계 맺음으로 학교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그러다가 2013, 지금 근무하고 있는 서신초로 오게 되었어요. 혁신학교인 전주 서신초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민주적인 의사결정문화였어요. 교장 선생님이 권위적으로 결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함께 생각을 공유하는 방식이 너무나 충격적이었어요. 하지만 학교 근처가 재개발구역으로 가정환경이 힘든 아이들이 많이 다녀서 가르치기 쉽지 않은 아이들이었죠. 더 깊은 사랑과 오랜 기다림이 필요한 아이들을 통해 선생님들은 지쳐가는 모습이 있었죠. 이러한 학교를 위해 무엇보다 기도 모임이 필요하다는 마음에 학교비전모임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삶을 나누고 학교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GVF, TEM, 성서교육회 선생님들도 계시고 단체에 속해 있지 않은 선생님까지 연합하여 함께 기도하는 모습이 너무 귀하게 느껴졌어요.

올해는 지친 학교 선생님들을 위해 더 섬기고 싶은 마음에 교무부장을 맡았어요. 매일 군산에서 전주까지 출퇴근 하는 상황에서 교무부장을 맡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선생님들을 지원하고 섬기는 역할이 주어진 것에 감사함으로 감당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교무회의가 따뜻하게 바뀌었어요, 선생님이 있어 학교생활이 즐거워요.” 라고 여러 선생님들이 칭찬해 주시는데, 오히려 초보 교무부장인 저로서는 지난 학기를 회상할 때 좀 소진된 느낌이고 좀 더 의미 있게 학교를 이끌어 가는데 제 능력의 부족함을 많이 느꼈던 시간이었어요.

학교를 보다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데 기여하고 싶고 그런 면에서 수업혁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전북은 아이 눈으로 수업보기를 중심으로 수업협의회가 권장되는 분위기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 학교도 이 과정을 연수하면서 계속 수업혁신을 진행해 왔어요. 그러면서 한 아이를 깊이 들여다봄을 통해 많은 통찰을 가질 수 있었어요. 그런데 결국에는 교사가 한 아이의 상황을 깊이 이해해야 되는 것으로 귀결되더군요.

한번은 수업협의회 중에 한 선생님이 수업 속 아이의 상황을 이해하는 과정을 밟는 중에 아이들이 그런 것은 알겠는데 나도 힘들다.” 하며 눈물을 터트리자 자연스럽게 교사로서 갖는 수업에서의 어려움, 무능함, 고독 등을 말하면서 서로의 마음을 만져주는 시간이 있었어요. 이때 교사의 내면을 세워주는 수업협의회를 고민하게 되었죠. 마침 좋은교사 수업코칭연구소를 중심으로 수업나눔에 참여할 수 있어서 굉장히 좋았어요. 감사하게도 수업코칭연구소 활동가 과정을 이수한 임수정, 최순용, 이소현 선생님도 계시니까 함께 협력해서 수업친구만들기 운동도 접목하려 해요.

 

하나님이 이끄신 2014기독교사대회

2000년 기독교사대회 때 처음 참석을 했었지요. 당시 예비교사였는데, 서관석 교수님과 최한성, 박성욱 선생님 등과 가서 이런 곳이 있구나하며 놀랐던 기억이 나네요. 이번 기독교사대회를 준비하면서 너무나 어려운 교육현실 앞에서 교육을 회복하기 위해 대회를 섬기는 큰 시대적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엄중한 책임감이 있었어요.

GVF는 전주교대 기독인연합으로 시작된 단체이기에 공동체성도 약하고 전북에만 있는 지역적인 한계도 있는데, 이번 기회에 우리를 쓰셔서 새롭게 세우시는 계기가 되겠다는 마음도 들었어요. 준비 과정에서 정말로 GVF의 공동체성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고, 전북만이 아니라 전국을 품을 수 있었어요.

그렇게 의욕적으로 시작했지만 막상 학기를 시작하면서 마음 모으는 것이 쉽지 않았고, 우리가 잘할 수 있냐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어요. 그런데 세월호 참사로 홍보할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도 1차 등록이 1,100명이 넘고, 연세대 원주 캠퍼스와의 협조가 원활하게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특별히 간섭하시는 것을 느꼈어요. 매주 토요일마다 기독교사대회를 위한 기도모임을 하였고, 전체모임도 기독교사대회 준비체제로 각 국별로 정말 열심히 준비하고 묵묵히 땀 흘려주는 공동체 지체들을 보며 참 하나님의 은혜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평범하지만 비범한 교사

제 교육철학은 하나님의 형상인 아이들은 사랑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이에요. 아이들은 그들의 성품과 환경이 어떠할지라도 있는 모습 그대로 귀하게 사랑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그러한 철학을 삶으로 살아내는 교사가 제 꿈입니다. 변질되지 않고 끝까지 아이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교사, 평범하지만 비범한 교사가 되는 것이죠.

그렇게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와 교사 공동체에서 채워지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어요. 아마 GVF를 안 했으면 기독교사로서의 정체성이 없거나 내가 만나는 아이들 정도만 품는 교사였겠죠. 저는 사실 강력한 리더십으로 이끄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저처럼 부족해도 공동체에 붙어 있었더니 최소한 기독교사의 정체성은 유지하고 살더라는 것을 후배들에게 보여주는 인생이 되고 싶어요. 그런 점에서 GVF는 하나님이 제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정, 교회, 학교, 기독교사단체에서 맡은 일로 숨 가쁘게 지내는 30대 후반 남교사의 살아가는 현실이 나의 자화상처럼 비춰지며 공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과 교육, 그리고 속한 공동체를 향한 꿈과 애정으로 가득 찬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오히려 나를 향한 응원가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만남을 계기로 세속의 가치가 난무하는 낯선 땅에서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는 다니엘과 같은 삶을 살기를 함께 응원하며 지내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