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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기독교사들과 함께 큰 숲을 꿈꾸는 교사(2014.11)

예전에는 실력과 능력을 갖춘 큰 나무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도 최선을 다해서 후배들에게 그늘이 되어주고 또 그런 후배들과 동역하면서 함께 큰 숲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해요.

 

 

 

 

기독교사들과 함께 큰 숲을 꿈꾸는 교사

 

거제 국산초등학교 이송철 선생님

 

 

 

/사진·김기웅

 

 

이순신 장군이 승리를 거둔 최초의 해전, 바로 이송철 선생님이 근무하고 있는 거제도에서 벌어진 옥포해전이었습니다. 지금은 조선소 주변으로 형성된 작은 도심 속에 있는 국산초에서는 방과 후에 모인 작은 제자디모데양육모임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공부 주제는 기도였습니다. 기도제목을 나누고, 바른 기도의 자세를 말씀을 근거로 살펴보는 모습은 마치 어린 신학도와 신학교수가 머리를 맞대고 성경을 탐구하는 모습을 보는 듯했고, 어린 예수님이 성전에서 율법학자들과 율법을 논했던 바로 그 시간으로 돌아간 듯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송철 선생님으로부터 비롯되었기에, 그를 탐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 그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려 합니다.

 

농사일로 집안일을 도우며 자란 어린 시절

고등학교 때까지 경남 고성군의 유교 전통이 깊은 씨족마을에서 자랐습니다. 불교와 기독교를 같은 종류로 알고 있을 만큼, 전혀 기독교 전통을 접할 수 없었지요. 매일 새벽 4시쯤 옆 동네 교회에서 들려오는 찬송가 멜로디만이 아련히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어린 시절 성장기 때 받았던 좋은 영향을 떠올려 보자면, 아버지께서 유년 시절 서당을 다니신 덕에 유교의 충효사상, 예절, 성실을 강조하셨어요. 그리고 부모님의 생업이었던 농사짓는 일에 학교 외의 모든 시간을 도와야했습니다. 공휴일이 돌아오는 것이 싫었을 정도로 많은 일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 많은 농사일 덕분에 자연에 대한 깊은 관심과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그로 인해 자연 친화적인 삶이 몸에 배게 되었습니다. 또 목재와 연장들을 다루거나 식물 재배, 동물 기르기 등의 경험은 지금도 교사로서의 풍성한 자산이 되었어요. 특히, 실과 과목은 몸으로 체득된 것을 다 가르치려다 보니 책 내용뿐만 아니라 책에 없는 내용도 가르칠 게 많아서 시간이 모자랄 정도입니다. 그러니 수업연구 자체도 책이나 지도서 중심으로 하기보다 경험하여 내면화된 것을 아이들이 공감하는 방식으로 수업활동을 진행합니다. 학교 영재학급에서는 어려서부터 늘 보아왔던 하늘의 태양과 달과 별들에 대해 학생들이 쉽게 이해하게 하고 천체망원경과 스마트 기기들을 이용하여 깊이 있게 탐구해 보는 과정으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라는 자연환경에 둘러싸여 있지만 조선소 주변의 도시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기 때문에 노작, 실습, 재배, 공작 등의 활동은 상당한 교육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투박하고 저돌적으로 공부했던 학창시절

학교 시간 외에는 농사일만 해왔던 나에게 공부를 하거나, 미래를 꿈꾸는 일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고등학교로 진학을 준비하던 중학교 3학년 시절, 진주나 창원(경남에서는 높은 성적과 좋은 대학 진학을 고려해서 진출하는 곳)을 가기는 어렵지 않겠느냐는 담임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는 속에서 뭔가 끓어오르는 원인 모를 오기 같은 것이 생겨나 열심히 공부했던 기억이 납니다. 효율적인 학습방법이란 것은 생각조차 못하였지만 오직 열심만으로 공부하여 장학생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원인 몰랐던 그 오기가 치유(?)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대학 진학을 위한 특별한 환경이 만들어지기 어려운 시골 고등학교의 특성상, 학교 수업을 듣는 것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뭔가 자율적인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어요. 다행히 뜻이 비슷한 친구들과 자발적인 스터디그룹을 만들었습니다. 밤 늦도록 교실에서 자습하다가 책상을 모아서 잠자고, 아침에 일어나 집에 가서 밥 먹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서 하루를 시작하는 패턴으로 지냈어요. 더운 여름철에는 선풍기 하나 없는 교실에서 모기를 쫓기 위해 모기향을 가득히 피워 놓고 공부를 했으며 대입학력고사가 다가오는 12,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교단 아래에 스티로폼을 넣어두었다가 꺼내어 바닥에 깔고 자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투박하고 저돌적으로 공부했습니다. 외부적으로 도움 받은 것은 EBS강의가 유일했었는데 그럼에도 우리 모임 중에서 서울대 등으로 진학한 친구들이 나온 것을 보면, ‘방법보다는 정신이 더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태도정신은 지금 기독교사로 살아가고 있는 내 삶의 커다란 자양분이 되고 있습니다.

교사가 되고 싶었지만 어떤 교사가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던 막연함 가운데 평소 좋아했던 국어, 지리, 과학 과목의 중등교사를 희망하다가 선생님과 주변의 권유로 교대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함께 먹은 밥 속에 담긴 따뜻함, 사랑 그리고 부르심

드디어 원서 접수 첫날, 당당하게 접수 번호 1번으로 서류를 넣었습니다. 함께 농사를 짓자던 아버지의 권유도 있었지만 가정 상황보다는 꿈을 찾아간 진주교대에 당당하게 합격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가정 형편, 새로운 도시생활 적응, 여학생이 대다수인 교대의 낯선 상황 등에서 외로움과 열등감을 느끼며 1학년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예기치 못했던 만남을 가집니다. 윤기성, 류철형, 박신숙 선생님을 알게 되었고 이분들을 통해서 후세대선교회(현재 GT선교회)를 소개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모임에 참석하게 된 첫날, 나는 체육대회 뒤풀이로 인해 술에 만취한 상태였지요! 왜 그 모임에 가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설상가상으로 모임 마지막에는 처음 온 사람들에게 자기소개 시간을 주었습니다. 그때, 내 입술에서 튀어나왔던 말은 제가 하나님을 잘 모르는데, 잘 알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 는 것이었어요. 이 말이 어떻게 튀어나왔는지듣고 있던 어떤 여선배는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는 기도는 가장 잘 응답해주시는 기도라고 답해주었어요.

이후에 밥 먹으러 가자해서 따라갔던 선교회 회관에서는 박신숙 간사님이 차려 주신 밥을 먹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태어나서 집 이외의 곳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누군가에게 초청받아 밥을 먹어본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그 후로도 선배들의 관심과 권유를 따라서 자연스레 회관에 계속 가게 되었지요. 그렇게 밥을 얻어먹어 미안하기도 했지만, ‘이 사람들이 왜 나에게 친절을 베풀까?’, ‘혹시 내게서 등쳐먹을 일이 있는 건 아닐까?’라는 의심을 해보면서도 그들의 관심과 사랑에 스르르 빠져들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선배들을 따라 간 1박 수련회 역시, 처음 경험해 보는 일의 연속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민들레 공동체 김인수 간사님(현재 민들레학교 교장)께서 무릎을 꿇고 4시간 동안 줄기차게 사도행전 강해를 해주셨습니다.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의 삶을 따라서 이 시대의 사도와 같은 하나님의 교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말씀하셨어요.

그 말씀들을 스펀지같이 빨아들이면서 그동안 밥 먹으러 따라다녔던 모임의 실체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밥에는 사람들의 따뜻함이 있었고 그 속에 하나님 사랑이 있었으며 그 너머에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이 있었습니다. 에스겔서 47:3~5 말씀의 환상처럼 이 공동체에 점점 젖어들면서 복음에 감화되어가는 과정을 내 스스로 고백하게 되었고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 모든 것이 1학년, 3개월 동안에 일어난 변화였어요. 그 없는 살림에 성경책 한 권을 사주신 류철형 선생님 덕분에 성경을 열심히 읽기 시작했고 여름방학에는 김인수 간사님을 따라 서부 경남의 무교회 지역의 시골 마을에 들어가서 노천 여름성경학교 활동을 했습니다.

 

부모님과의 갈등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었던 믿음과 공동체

한편, 여름까지 대학생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부모님은 아들이 예수쟁이가 된 것을 알아차리셨어요. 아버지는 그 대학교를 다니는 것을 그냥 둘 수 없다며 어머니와 누나를 보내 짐을 다 빼서 저를 끌고 고향 집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날 저녁 아버지로부터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습니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하나님과 이 공동체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을 포기하거나 그만두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밥도 안 먹고 기도로 버티면서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마침내 2학기 등록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폐인의 모습을 하고 있던 아들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어머니의 중재(?), 적당하게만 믿는 정도로 하겠다고 아버지를 설득하여 2학기 등록을 하게 되었습니다.

개강을 앞두고 교대 인근 교회에서 류철형, 박신숙 선생님과 같이 드렸던 찬양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를 부르면서, 늘 나를 기다리셨던 하나님, 내 가까이에서 늘 도와주고 기도해 주던 선배들의 사랑을 재확인하고 펑펑 울면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기쁨,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고백했기에 1학기의 변화를 끝까지 붙들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공동체와 함께하는 신앙훈련에 집중하며 더 큰 삶의 만족을 얻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내가 감당해야 할 자리를 찾아갔습니다. 군 제대 후에는 복학을 하고 후배들을 섬기며, 동아리 대표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거제,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는 땅

거제지역 기독교사모임은 98년 기독교사대회를 기점으로 류철형 선생님의 섬김 아래 더욱 굳건하게 세워졌습니다. 99년 교단에 첫 발령을 받고 내려간 이곳에서 나는 지금까지 거제 지역모임의 성장과정과 함께해 왔습니다.

경상남도에서 거제는 곧 기독교사 양성 훈련소입니다. 왜냐하면 경남의 신규교사들이 가장 많이 발령받아 오는 곳이 거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규교사들을 기독교사로 세워서 다시 육지로 파송하는 역할을 하는 곳으로 쓰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거제에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실제로도, GT선교회의 많은 선생님들이 거제를 거쳐서, 경남의 다른 지역으로 정착하고 모임을 개척하는 사례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거제: 크게 다스린다(클 거, 다스릴 제)라는 지역명의 뜻처럼, 6.25전쟁 당시 1·4 후퇴 이후로 생겨난 포로 수용과 정착 과정이라든지, IMF 외환위기 당시 유일하게 달러를 벌어들이는 역할을 해냈던 조선 산업 등을 생각합니다. 나라가 어렵고 힘들 때마다 거제는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는 일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기독교사운동으로도 거제도에 대한 자부심과 소명감은 나로 하여금 이곳을 지켜야겠다는 고백을 주님께 드리게 만듭니다.

 

거제 지역모임을 지키며 섬기는 땅콩 공동체

하나님은 분명 자신의 뜻을 우리로 하여금 기쁨으로 감당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만나게 하신 과정도 그분의 뜻 가운데서 거칠 것 없이 이루어가셨어요. 선교회에서 선후배 관계로 함께 일해 오던 아내는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성실과 신실함으로 본인이 힘든 상황에서도 언제나 주어진 역할과 자리를 잘 감당하는 모습에서, 인생의 반려자로서의 매력을 느꼈습니다. 나와 아내를 이곳, 거제에서 만나게 하시며 이곳에서 세우신 우리 가정은 거제모임을 지키겠다는 고백에 대한 응답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지역모임을 지속적으로 지키는 그루터기 같은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딸을 시집보내는 부모처럼, 신규 선생님들을 기독교사로 세워 타 지역으로 전출시키면서도 새로운 선생님들을 섬기는 그루터기와 같은 리더 선생님들이 지금도 그런 역할을 해 오고 있어요. 이들이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이 일을 해낼 수 있는 구심점은 무엇일까 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는데 그 답은 매우 가까운 곳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거제 옥포에 몇 분의 리더 선생님 가정이 모였고 자연스럽게 가족들이 가까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거의 매일 같이 만나면서 굳이 따로 살 필요가 있을까?” 라며, 가족들이 서로 돕고 같이 사는 공동체를 만들자는 생각으로 이어졌어요. 바로 그 실체가 공동체 건축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지요. 가정별로 이사 및 전세기간 등의 시기적인 상황들이 맞물리면서 20118월에 네 가정이 집을 짓기로 선포하였습니다. 텐트를 치고 가족캠프를 하면서, 밤새 내린 빗속에서도 우리 네 가정 가운데에 은혜로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였습니다. 서로가 울타리가 되어주면서 일하는 터전이 필요하다는 소망이 함께 모여 살게 한 것이지요.

공동체 주택이 지어질 장소를 물색하는 과정, 땅을 매입하는 과정, 땅콩집이라는 컨셉을 결정하고 건축을 하는 과정 등, 봉착하는 많은 난제들을 시원하게 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며 완성된 땅콩 공동체! 공동체 중간의 공용 공간은 게스트하우스 및 아이들을 위한 도서관과 놀이 공간, 기도회, 양육모임 등으로도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만나는 기독교사들에게 자주 권면하고 있어요. 지역모임마다 공동체가 있다면 참 좋겠다, 집 짓고 같이 살아라등등 어느덧 잔소리하고 있는 내 모습을 봅니다.

 

같이 숲으로 살자!

예전에는 라는 한 사람이 실력과 능력을 갖춘 큰 나무가 되어야겠다는 것을 생각했지만,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도 열심히 해서 후배들에게 그늘이 되어주고 또 그런 후배들과 동역하면서 큰 숲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겠다는 꿈을 꿉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말씀해 주신 권면, “나를 사랑하느냐? 양들을 먹이라.” 고 하시는 것처럼, 만나는 후배와 학생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는 일을 지속적으로 해 나가면 좋겠습니다. 그들도 그런 삶의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내 삶은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커다란 숲을 만드는 의미 있는 삶이 아닐까 라는 꿈을 꾸며 살아갑니다.

 

다시 천 척을 측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가득하여 헤엄칠 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에스겔 47:5).”

 

복음으로 변화된 이송철 선생님의 모습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는 성경 말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한 과정을 따라 변화되는 아이들의 모습을 꿈꾸는 성경구절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의 물속으로 푹 잠기어 드는 삶, 우리 아이들이 누려야할 복음이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