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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교사공동체와의 만남이 삶의 방향을 바꿨어요(2014.12)

내 안에 너 있다. 네 안에 나 있니?”라고 속삭이시는 주님. 이런 주님 앞에 힘을 얻어 섰다가 다시 주저앉기를 반복하는 허약한 다리에 근육을 붙여 단단히 버틸 수 있도록 기윤실 교사모임과의 만남을 허락하신 것이 아닐까 싶어요. 이젠 이런 귀한 섬김을 모임 안에서 뿐만 아니라 학교 안에서도 나눌 수 있는 쉬운 선배 교사가 되고 싶어요.

 

 

 

 

교사공동체와의 만남이

삶의 방향을 바꿨어요

 

서울 세곡초등학교 최나영 선생님

 

 

 

·사진 임종화

 

 

 

학교가 위기다. 교회가 위기다라는 말도 학교와 교회, 그리고 교사단체에서 이제는 충격적이거나 새롭지 않고 일상이 되어 무뎌져 가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 기독교사로 살아가기 위해 더 모이고 애써야 하는 것이 당위적인 답이지만, 오히려 이 위기 때문에 많은 선생님들이 처음 가졌던 순수함과 소명이 잃어버리고, 교사단체와 모임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이 예뻐 보이고, 어려운 지역의 학교에 있는 것을 더 행복해 하고, 교직 초기에는 관심 없었던 학교의 중심에 선 교사로 나아가기 위해 애쓰는 선생님이 있습니다. 힘들 때 찾아간 기독교사모임이 인생을 바꾸었고, 지금도 기독교사모임에 함께 하는 것이 너무도 행복하고, 공동체를 통해 삶의 방향을 잡아가고 있다고 고백하는 선생님이 있습니다. 궁금하시죠? 최나영 선생님을 만나보세요.

 

순종적이었던 어린 시절

197932, 11남 중 장녀로 태어났어요. 담당의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분만대기실에서 엄마가 난산으로 정신을 잃은 순간 태어나 하마터면 침대에서 미끄러져 생을 달리할 수도 있었다고 해요. 다행히 버둥거리지 않고 얌전히 의사를 기다려 목숨을 부지한 저의 출생을 기념하여 지금까지도 전국의 학교들이 일제히 새 학년을 시작하나봐요.^^

교회에 다니지 않던 부모님이 동생이 크게 아픈 것을 계기로 제가 5살 때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믿음생활의 첫 발을 내디뎠어요. 성격 그대로 주님을 열정적으로 사모하고 온 몸으로 헌신하는 아버지와 조용하지만 요동 없이 기도의 단을 쌓으시는 어머니 밑에서 순탄하게 교회생활을 할 수 있었죠.

장남인 아버지 쪽으로는 집안의 첫 손주로서, 어머니 쪽으로는 흔한 손자들 가운데 유일한 손녀로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지만, 그만큼 기대가 큰 지라 성격이 활발하지는 못했어요. 더구나 보수적이고 엄격한 아버지는 조금이라도 흐트러지거나 버릇없이 구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기에 혹여나 실수해서 꾸중 들을까 싶어 어린 맘에도 늘 눈치보고 주눅 들어 지냈던 기억이 있어요.

초등학교 입학 후에도 이런 성격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자기 할 일만 착실히 하는 학생으로 지내다가 3학년 때 정재은 선생님을 만나면서 일대 전환점을 맞게 되었어요. 다른 반 아이들이 모두 부러워할 만큼 장점이 많으셨던 선생님은 특히, 공평한 분이셨다는 인상이 강하게 남아있어요.

어느 날, 수학쪽지시험을 보는데 한 친구가 제일 먼저 문제를 풀어 가지고 나갔고, 저도 곧 따라 나가 시험지를 제출했어요. 채점 결과, 친구는 하나 틀리고 저는 모두 맞았는데 두 사람을 시간과 정확성 면에서 각각 동일하게 인정해주시며 부상이었던 사탕을 10개씩 똑같이 주셨어요. 순서상 밀릴 거라 예상하고 지레 포기하고 있었던 저는 그게 너무 감동이었어요. 시도하기도 전에 포기하는 성격이었던 소심쟁이에게 언제나 변함없이 미소로 맞아주고 늘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며 조금이라도 성과가 있을 때는 넘치는 보상으로 자신감을 채워주셨던 선생님 덕분에 조금씩 제 안에 감추었던 모습들을 꺼내 보일 용기가 생겼던 것 같아요.

 

범생이었던 학창 시절

기억해 보면 중학교 때도 정해진 매뉴얼을 착실히 따라가는 모범생이었어요. 사춘기를 격하게 겪는 남동생 덕분에 부모님을 덜 힘드시게 하려고 별다른 반항 없이 상황에 충실히 적응했어요. 학교에서 시키는 자율학습시간에 복습하면서 나름 공부하는 방법을 잡아갔고, 그러면서도 쉬는 시간엔 수다를 떨어가며 매점을 들락날락거리고, 날라리(?) 짝꿍을 만나 그 친구들의 순수함을 알고 난 이후로는 묻지마 성교육도 열심히 받고, 복장검사가 있는 날엔 치마를 바꿔 입어줘가며 두루 잘 어울렸어요. 중학교 3학년 때는 담임 선생님과 총각 체육 선생님을 엮어드려 결혼에 골인시키는 일등공신이 되기도 했죠. 축가를 해드리면서도 두 분이 결혼하시는 게 참 신기하고 흐뭇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 이후, 비평준화 지역이었던 부천에서 고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빠와 갈등이 있었어요. 반에서 4~5등이었던 저는 1순위 학교보다는 2순위 학교에 지원해서 어느 정도의 안정적인 성적을 유지하고 싶었지만, 공부하는 분위기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아빠는 무조건 1순위 학교를 가라고 하셨지요. 저는 반항 한 번 못하고 그 학교로 지원하여 합격은 했으나 제 생애 처음 보는 등수를 경험하기도 했죠. 하지만 그 분위기에도 곧 적응하기 시작했고, 당시 최고로 인기가 많았던 풍물 동아리에도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는 면접관 2학년 언니들에게 겁먹고 터진 눈물로 동정표를 얻어 당당히(?) 입성했어요. 덕분에 공부로 인한 스트레스를 장구를 두드리며 풀 수 있었고, 학교 축제 때마다 마무리 공연에 등장하여 많은 친구들의 꽃다발 세례를 받으며 분에 넘치는 관심과 사랑도 받았어요. 방학 때와 주말에도 학원이 아니라,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서 난로에 불 때워 친구들이 가져온 가래떡과 고구마를 구워먹고 치마 속에 체육복 바지를 입은 채 뒹굴거리며 아이돌 그룹의 조상 H.O.T의 라디오 방송에 흥분하며 귀를 귀울이고, 학교 옆 시장의 길거리 간식을 흡입하며 학교와 함께 했어요. 수업시간에 집중하는 습관과 창의성이나 논리력 따위는 배제된 문제풀이식 수업에 대해 불만 없는 완벽한 순응, 암기에 약한 저에게 딱 맞춰진 수능 유형 덕분에 성적도 조금씩 올라 다시 학급에서 4~5등 정도를 유지하며 만족한 학교생활을 했어요.

 

평범치 않았던 신앙생활

평안한 가정과 즐거운 학교생활로 밝고 명랑하게 사춘기를 시작한 저는 교회에서도 학생부 워쉽 찬양단에서 활동하며 또래모임에서 얻을 수 있는 동질감과 찬양을 통해 느껴지는 잔잔한 감동을 만끽할 수 있었어요. 교회에서 인정받는 부모님 밑에서 더불어 주목을 받으며 유치부 시절부터 함께 커온 친구들과 함께 하는 교회는 또 다른 안식처이자 제 미래와 연결되어있는 기대와 도전이 넘치는 공간이었어요.

그런데 한창 사춘기였던 중학교 2학년 때 교회에서 큰 충격과 아픔을 경험했어요. 완벽을 기하는 성격의 아버지가 형처럼 따르던 목사님과의 마찰로 인해 시험에 드셨고 가족에게 이렇다 할 이유도 설명치 않으신 채 갑자기 다른 교회로 옮길 것을 통보하셨어요. 그래서 거짓말처럼 어느 날 갑자기 교회를 옮겨야 했어요. 10여 년을 한결같이 다니던 교회를 나와 이 곳, 저 곳을 순회하며 섬길 교회를 찾는 동안 눈물이 맺혀 찬송가 가사를 볼 수 없었고 그 어느 교회에도 정을 붙이기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일 년 정도를 꼬박 울며 잠을 청했던 것 같아요. 애틋함이 미련이 되고, 미련이 포기가 될 때쯤 상처받지 않을 만큼만 교회생활을 하는 법을 배웠어요. 그렇게 비슷한 사정으로 교회를 2번을 더 옮긴 후 새로이 정한 교회를 따라 초중고를 보낸 부천에서 경기도 시흥으로 이사를 왔어요. 3때 시절엔 매주 목사님의 안수기도를 받으며 1부 예배를 드리고 학교로 바로 달려가 공부하는 주일이 반복되었고 곧 대학 입시를 맞이하게 되었죠.

 

대학시절 나에게 다가와 주신 주님

워낙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던 저는 맘껏 책을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서점 주인이 꿈이었던 시절도 있었으나,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의 야사를 듣고 아직 밝혀지지 않았거나 왜곡된 우리나라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사학과를 가고 싶다는 생각과 해외에 대한 막연한 로망이 있어 외교학과에 관심이 있었어요. 다행히 그 해 수능이 쉽게 출제되어서 평소 점수를 유지하여 원서를 썼는데 고입 때와 마찬가지로 막판에 아빠의 반대에 부딪혔어요. 흙 파먹고 살 거냐는 짧은 말과 함께 교대에 원서 넣으라는 말씀에 비로소 교대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고, 절대권력자인 아빠의 한 마디에 대꾸 한 번 못하고 또 그렇게 제 진로가 정해졌죠. 공무원이셨던 아빠의 경제적인 상황과 아이들을 원래 좋아하던 제 성향을 고려한 최적의, 하지만 제 의지는 크지 않았던 선택이었죠.

그렇게 들어간 대학교는 학교와 집, 교회만 오가던 저에게 음주가무라는 별세계를 연결해 주었어요. 따뜻한 눈빛으로 다가오는 c.c.c 언니들을 멀리한 채, 10여 개의 동아리를 가입하여 신입생 환영회를 쫓아다니고 많지 않은 교대 남자선배들에게 열심히 신입생 턱을 얻어먹고 다녔고, 봄바람을 따라 서울 전역을 누비고 다녔어요. 그 좋아하던 책들도 이상하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명예교수님들로 채워진 학교 수업엔 흥미를 느낄 수 없었어요. 당시 동기들과 대화 중에 제가 청년부 회장을 하고 있다는 말을 하자 한 친구가 화들짝 놀라며 불교인 줄 알았다는 말에 급히 회개했던 기억이 있어요. 술자리에선 가장 앞서 파도를 일으키고 알코올의 힘에 기댄 느슨함을 자유함으로 이름 지어 즐기던 저는 드디어 매를 드신 주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어요.

검사에도 아무 이상이 없는데 피가 거꾸로 쏠리는 메스꺼움과 함께 온 몸에 힘이 빠져 그 자리에 주저앉기를 반복(얼굴이 하얗게 질려 내심 백혈병에 걸린 줄 알았다)했고 그 이후 술병만 보아도 역하게 만드시는 주님 앞에 결국 항복했어요. 사실 어렸을 적부터 잘 생긴 동생과 탁월해 보이는 친구들에게 열등감을 갖고 있던 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으시리라 생각했던 주님이 저에게 깊이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반증이기도 해서 놀랍도록 기뻤어요.

졸업 후, 믿지 않는 남자 친구와의 인연을 차마 끊지 못하는 저의 연약함도 아버지의 발령을 따라 온 가족이 영종도 관사로 들어가게 되면서 매듭지어져 낮에는 리무진 버스로 서울에 있는 학교로 출퇴근을, 밤에는 8시면 끊어지는 버스 시간으로 인해 칼퇴근 하여 살을 에는 바닷 바람소리를 들으며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교회에 들어가 기도하는 광야 생활을 시작했죠. 이 시기를 통해 소리 내어 울며 기도해도 눈치 볼 필요 없는 교회와 저를 위해 기도해주고 있었던 많은 교회 분들의 소중함을 뼛속 깊이 새길 수 있었고 교회에 대한 애정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어요.

 

내 인생을 BeforeAfter로 가른 기윤실 교사모임과의 만남

교대에 합격한 이후엔 교회학교 교사로 헌신하게 되었어요. 워낙 아이들을 좋아해서 매년 맡은 아이들을 우리 집에 한 번씩 데려가 재울 만큼 애정을 쏟았고 4년간의 교회에서의 교사생활을 충실히 쌓은 덕에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해졌죠. 이후 임용시험 후, 발령받은 학교에서도 아이들을 대하는 데 익숙하고 자연스러웠던 지라 선생님들이 신규 같지 않다며 칭찬해주셨고, 대학교 동아리에서 배운 레크레이션과 타고난 친화력으로 아이들을 장악했다고 한껏 들떠 자만해서 지내다가 4년차 때 만난 2학년 꼬마들 앞에서 완전히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비뚤어진 시선으로 칠판을 응시하는 이 9살 인생들 앞에서 느껴지는 불편함, 발령동기가 지도하는 옆 반의 아이들의 놀라운 수학성취도, 이별 후유증 등이 겹치면서 자존감은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고, 그 어떤 조언도 도움이 되지 않았죠.

그 때, 일 년 전 단 한 번 참석했다가 중등 선생님들만 가득해 발길을 끊었던 기윤실 교사모임 부천모임이 생각났고, 끊임없이 모임 안내를 보내주셨던 부천모임대표 김영식 선생님께 연락을 해 20062월 제부도에서 있었던 겨울 수련회에 참석하게 되었어요. 혼자 밥 먹는 것을 싫어해 일주일을 고민하다가 결국 여기라도 안 가면 죽을 것 같아서 찾아갔던 기윤실 교사모임 수련회. 그 수련회는 저에게 놀랍고 감사한 시간이었어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저를 단 한 번도 혼자 밥 먹게 하지 않았으며 수련회 내내 끊임없이 누군가의 관심과 위로를 받았고, 특히나 이문식 목사님의 저녁설교는 열등감에 사로잡힌 저를 위해 준비하신 것처럼 내 눈엔 늘 네가 주인공이라며 다독이시는 그 분을 만나게 하였어요. 감동에 흠뻑 빠져있는 저에게 곧 우리 학교가 소속된 강서모임의 대표님이었던 정명현 선생님이 연결되었고, 기윤실 교사모임의 양대 산맥 이상흥 선생님과 임태규 선생님을 모시고 4명 정도의 단출한 지역모임에서 집중적인 사랑을 받으며 교사로서의 한 해를 건강하게 넘겼어요. 홈페이지에 간간히 올리는 지역모임 후기에 얼굴도 모르는 분들이 어마어마하게 칭찬댓글을 달아주는 것 또한 칭찬에 목말라 있던 저에게 기윤실 교사모임의 매력에 폭 빠지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죠.

일 년 후, 20072월 서울여대에서 진행된 겨울수련회에서도 절 위한 또 하나의 선물이 준비되어 있었으니 바로 꿈섬이예요. 저녁시간에 설교하시던 김동호 목사님의 목회를 마치고도 본인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도록 인수인계를 잘 마치고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목표라는 말씀이 가슴에 팍 꽂혔어요. “주님, 저에게 쉼 없이 감동을 주는 이 모임에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쓸모가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어찌하면 좋을까요?”라는 기도가 나왔어요.

기도시간이 끝나고 광고가 이어졌는데 기윤실 교사모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고, 좋은 리더로 헌신하고 싶은 사람들을 꿈섬’(꿈섬은 기윤실교사모임 리더훈련과정 꿈꾸는 섬김이의 줄임말이예요) 이라는 과정에 초청하는 내용이었어요. 이거다 싶어 뛰었던 가슴이 추천해주는 사람과 후원해주는 사람을 데려오라는 말에 무너져 내렸어요. 우리 지역모임 선생님들이 수련회에 한 분도 오지 않으셨기에 추천을 부탁드릴 분이 없었던 거예요.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숙소로 올라가며 나 정말 꿈섬하고 싶은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데 마침 그 순간 옆을 지나가던 손은정 선생님이 꿈섬? 그럼 같이 내려가요!”하며 팔을 붙드셨어요. 당시에 꿈섬지기(꿈섬 진행팀)셔서 저의 중얼거림을 귀담아 들으셨던 거죠.

이렇게 운명처럼 시작된 일 년 간의 꿈섬4기 과정을 통해 연예인 같은 송인수, 정병오, 이경식, 김진우, 임종화, 김성천, 김현섭, 이강은, 천무현 선생님의 보석같은 강의와 평생을 함께 할 귀한 동역자들을 만났고, 과제 제출할 때까지 금식하겠다며 조용히 압박하시는 정철모 교장지기님과 손은정, 김영식, 이병환, 전선기 꿈섬지기 선생님들의 섬김을 누리며 조금씩 고민하고 성장해갔어요. 그리고 꿈섬을 수료했다는 이유만으로 바로 2년간 강서지역모임 대표를 맡았고, 3년간 사역팀으로 섬기며 2010년 기독교사대회를 준비했으며, 이어서 2년간은 꿈섬 9, 10기의 지기를 맡기에 이르렀어요.

 

학교 중심에 선 교사를 꿈꾸며

수련회 때마다 깊이 있는 말씀과 위로를 통해 상처받은 맘을 회복시킨 후, 학교 중심에 서는 기독교사가 되라며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여준 우리 모임 덕분에 작년엔 생각도 안했던 부장교사를 하게 되었어요. 그 자리를 통해 우리 교실과 우리 학급 아이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시선이 학교 전체로 옮겨졌고 차츰 알게 된 학교 면면의 불합리함에 새로운 고민들이 시작되었어요. 늘 그렇듯 답을 미리 준비해주시는 하나님 덕분에 꿈섬 겨울캠프에서 지기로 섬기는 동안 강의를 오셨던 김성천 선생님의 학교운영위원회 교원위원이 되면 학교 전체를 품을 수 있다.”는 한 마디가 가슴에 새겨졌어요. 소통이 되지 않는 교장 선생님과의 대립이 뻔한 자리여서 갈등을 무서워하는 저에게 버거운 자리였지만, 우여곡절 끝에 올해 교원위원이 되었고, 학교운영위원회 회의를 전후하여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로 힘들 때마다 새로이 시작한 꿈섬 2.0모임에서 매달 눈물을 줄줄 흘려가며 하소연하고 겨우겨우 버텨가고 있어요.

지난 8년간 함께 고민해온 강서지역모임은 비폭력대화와 수업연구 등 소심하고 게을러서 도전을 꺼리는 제 성향에 끊임없는 파장을 일으켜, 묻어가며 성장할 수 있는 친정 같은 보금자리가 되어주고 있고, 2009년에 시작된 79또래모임은 한 달에 한 번씩 엠티를 하며 우정을 다지고, 결혼식 축가부터 출산 축하까지 삶의 소중한 순간들을 함께 하며 아직까지도 든든한 동역자로 함께 하고 있어요.

세세히 챙겨주지는 않지만,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일단 믿고 사역을 맡겨주고 작은 일에도 어마어마한 칭찬을 부어주는 우리 모임 덕분에 제 능력 이상으로 심하게 달리고 있어 살짝 겁이 나기도 해요. 하지만 하나님이 절 사랑하신다는 가장 큰 증거 중에 하나가 우리 모임과의 만남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저의 교직생활이 기윤실교사모임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뉜다고 할 만큼 이 공동체가 참말로 귀하고 소중합니다.

 

쉬운 선배 교사가 되고 싶어요

체질이 소심하여 늘 고민만 하느라 힘을 다 소진하고 주저앉아 있는 저를 향해서 언제나 변함없이 널 너무나 사랑한단다.”라고 품으시는 주님. 이런 주님 앞에 힘을 얻어 섰다가 다시 주저앉기를 반복하는 허약한 다리에 근육을 붙여 단단히 버틸 수 있도록 기윤실 교사모임과의 만남을 허락하신 것이 아닐까 싶어요. 이젠 이런 귀한 섬김을 모임 안에서뿐만 아니라 학교 안에서도 나눌 수 있는 쉬운 선배 교사가 되고 싶어요. 이제 교직 경력 10년을 넘어가지만 아직도 한참 부족한 저를 보여주고 조언을 얻고자 동료장학 때 많은 선생님들을 초청했어요. 그런데 바쁜 학교 상황과 수업참관 자체에 대한 조심스러움으로 쉽게 발을 들이지 못하는 선생님들을 보며 언제든 도움이 필요할 땐 손을 내밀 수 있고, 각자의 경험과 수업 팁을 함께 공유하며 기여하는 기쁨과 나누는 분위기가 절실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너무 뛰어나 감히 엄두가 안 나는 훌륭한 선배가 아니라 저 정도면 할 만 하겠다 싶은 만만하고 쉬운 선배로, 힘들 땐 눈물을 보여도 될 만큼 편안한 선배로 아이들의 삶을 두고 고민하는 동료 선생님들과 함께 하고 싶어요.

그 작은 시작으로 학교 안에서 5p.m이라는 처녀회(총각이 없음) 모임과 책보라는 이름의 교사학습공동체를 꾸려가고 있습니다. 나누고 싶다는 바램으로 시작했지만 사실 제가 힘들 때 가장 의지하고 큰 위로를 받는 저의 비빌 언덕이 되어주고 있어요. 학운위 회의 후, 힘들어하는 저에게 공동체라는 욕구카드(그로그)를 쥐어주며 선생님은 혼자가 아니에요.”라고 말해주는 후배 선생님들 앞에서 눈물을 옴팡 쏟기 일쑤랍니다. 기독교사모임 뿐 아니라 학교 안에서도 공감 받을 수 있는 울보교사라서 참 행복합니다.

 

최나영 선생님과 만남의 여운이 오래 남습니다. 본인의 고백대로 어찌 보면 무모할 만큼 충성스럽게 공동체와 선배교사의 삶을 따라 온 삶입니다. 여전히 공동체에서 선생님을 만나는 것이 행복하고 설렌다는 선생님, 앞으로도 쉬운 선배로, 그리고 공동체에서 쓸모없는 사람이 될 때까지 함께 하고 싶다는 고백을 들으며, 나이가 들고 익숙해지는 것이 꼭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 공동체와 함께 할 때 누리는 힘이고 특권이 아닐까요? 문득 사무실에 출근하며 떠나온 지역모임 선생님이 보고 싶은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