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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성숙한 기독교사 공동체와 함께 꿈꾸는 세계복음화(2014.6)

죽을 때가 되면 10억 이상의 재정으로 선교사 자녀들을 위해 매년 의미 있게 사용하는 것이 꿈이라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어요. 지금은 그 시기를 바꾸어 이렇게 말하고 싶네요. ‘나의 50대에는 5, 60대 이후로는 10억 이상을 선교사 자녀 교육을 위해 매년 사용하여 보는 것이 제 꿈입니다.’

 

 

순천중앙초등학교 송홍경 선생님

성숙한 기독교사 공동체와 함께

꿈꾸는 세계복음화

 

 

·김효수

 

 

송홍경 선생님과의 인연은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대학생 때 JEMO(지금의 CCCTIM)수련회에서 일본 단기선교 이야기를 나누는 송홍경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해외 선교에 동참하는 교사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90년대 초부터 선교사 자녀(MK) 사역을 열심히 섬긴 송홍경 선생님이 2014CCCTIM 대표가 되었습니다. 어떤 배경 속에서 선교사 자녀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CCCTIM 대표로 섬기게 되었는지 송홍경 선생님을 만나보았습니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군산 소년

1969년 한여름, 전북 만경 이모네 집에서 32녀 중 넷째로 태어났고 군산에서 자라났어요. 부모님은 집안 대대로 섬에서 살아오신 분으로, 군산 앞바다의 선유도와 신시도에 거주하다가 중매로 결혼하셨지요. 큰 형을 출산한 후에는 자녀교육을 위해 군산으로 이사하셨어요. 섬에 있는 집을 처분하고도 도시의 집을 살 수 없기에 전월세를 번갈아가며 살았어요. 아버지는 남의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나가시면 짧게는 3, 길면 6개월 정도를 바다에서 생활하셔서 함께 대화한 기억이 별로 없네요. 하지만 아버지께서 집에 오시면 늘 맛있는 생선을 먹었던 기억이 나요. 아버지의 수입으로는 항상 넉넉지 못했는데, 그마저도 몸을 다쳐 일을 못하시게 되면서 가정형편이 매우 어려워졌어요. 누나는 초등학교 졸업한 이후에 공장 생활을 해야만 했지요.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이 많아요. 학교 다녀오면 친구들과 밖으로 나가서 산으로 들로 그리고 온 동네를 다 돌아다니면서 저녁 늦게까지 놀았지요.

 

눈물 속에서 만난 주님

중학생 때는 비교적 열심히 공부하여 아침 조회 시간에 상도 받았어요. 부모님은 가정 형편상 실업계 고등학교를 바라셨지만, 인문계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열심히 공부했어요.

2 겨울방학을 앞둔 시기, 한 친구가 크리스마스 칸타타를 함께 준비하자고 해서 본격적으로 교회를 다니게 되었어요. 3 때 부활절 주일 아침, 분반 공부 시간에 담임교사였던 사모님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부활이 모두 나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어요. 그때 진심으로 죄를 인정하고 용서해 주심에 감사하는 기도를 함께 드렸어요. 그 기도 내용 하나하나가 마음을 움직였고 한없이 눈물을 쏟았지요. 그때 주님을 마음속에 모시게 되었어요.

 

세계복음화에 눈 뜬 대학시절

당시 어머니가 식당 일과 봇짐장사로 가정의 생계를 꾸리던 상황이었지요. 그래서 어려운 가정 형편을 고려하여 인천교대에 진학합니다. 처음으로 고향 군산을 떠나 낯선 인천에서 살게 되었지요.

대학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CCC(한국대학생선교회)와 함께한 생활이었지요. 3 졸업 때 교회 누나가 CCC 수첩을 선물로 주면서 대학에 가면 CCC를 해보라는 권면이 떠올라 무작정 동아리 모임방까지 찾아갔지만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되돌아오기를 여러 번. 그즈음 점심시간에 학교 동문의 탑 앞에서 고향 선배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데 전도하러 다니는 순장님을 만나 결국 CCC 동아리에 연결되었어요.

CCC에서 훈련받은 4년 동안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 한 영혼을 마음에 품는 것을 배워가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법을 경험했지요. 당시 김준곤 목사님의 순론과 민족복음화의 비전을 들으면서 저도 그 대열에 들어가고 싶다며 캠퍼스 간사의 삶을 꿈꾼 적도 있어요. 그러다 3학년 때 한국CCC에서 3,000명의 대학생들을 이끌고 필리핀으로 떠나는 해외단기선교를 추진했는데 함께 가게 되지요. 필리핀에 가서 2주 동안 전도도 하고, 현지 교회를 도와 길에서 타갈로그어와 영어로 율동과 함께 노래하며 아이들을 모아 예수영화 상영 전도 집회도 한 기억이 나네요. 이때부터 해외선교에 제 삶을 드리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된 것 같아요. 이 마음은 4학년 때 참여한 일본 단기선교를 통해 더 강하게 생겼지요.

어린이 순모임 사역과 함께 한 초임시절

선배인 정찬규, 윤조열, 이승희 선생님 등이 시작한 어린이제자모임(현재 CCCTIM)’ 공동체와의 만남은 너무나 자연스런 과정이었죠. 한두 해 선배인 그 선생님들과 같은 캠퍼스 생활을 했고, 그 선배들이 졸업한 후에도 캠퍼스를 방문해서 제자들과 순모임을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죠. 대학 4학년 때는 어린이제자캠프에 직접 방문해서 어린이 양육의 실제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되었어요.

92년에 인천간석국민학교에 발령받은 후 어린이제자모임은 고단한 초임교사 생활의 활력소였어요. 정찬규, 이승희, 윤조열 선배 교사들과 함께 교대를 졸업한 백철규, 이지현 선생님 등과 모여 학교에서 겪는 어려운 삶을 나누며, 어린이 순모임이라는 비전을 도전받고 실천했던 그 모임이 참 좋았지요. 당시에는 토요일에 오전 수업을 했는데, 수업이 끝나면 아이들을 데리고 교실에 남아서 다른 선생님들의 눈치를 보면서 아이들과 성경공부를 했지요. 어떤 때는 학교에 남아계신 선배 교사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마냥 얼른 아이들과 함께 엎드리기도 한 기억이 나네요. 그러다가 결국 아이들을 자취방으로 데리고 와서 순모임을 했어요.

이렇게 어린이 순모임 사역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사역의 영역이 확장되었어요. 아이들의 영적, 정서적, 관계적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순여행, 제자캠프 등도 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어린이만의 특화된 교재의 필요성을 느껴 93년에 홍콩CCC 어린이 사역 간사님들에게 도전을 받아, 95년에 윤조열 선생님이 어린이 사영리, 만남시리즈와 어린이 제자훈련교재 5권을 완성하게 되지요.

어린이제자모임이 진행되면서 더 많은 선생님과 함께 하고 싶어서 CCC 졸업생 교사 연락처를 일일이 구해 전국으로 순회하며 함께 할 교사들을 만나려고 노력했어요. 그래서 공주와 부산을 방문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 연결된 곳이 경기도 안산, 대전, 부산 등의 모임이에요. 지방에서 교사들이 함께 연결되어 교사수련회도 시작되고, 리더 세미나도 하게 되는 형태로 사역이 확장되었지요. 기독교교육도 잘 모르는 상황에서 교사들도 알아야 가르친다는 생각으로 책을 사서 읽고 나누며 그룹스터디 방식으로 공부를 하고, 어린이 상담이 필요하니 그것도 함께 연구하자며 학부모 상담, 아이의 발달 심리에 관한 책들을 서로 연구하며 읽었던 그 시절은 참 행복했어요.

 

선교사 자녀(MK) 사역으로 부르심

CCCTIM(당시 어린이제자모임)은 시작할 시점부터 학생 제자화 사역, 교사 사역 뿐 아니라 선교사 자녀(MK) 사역을 했다고 볼 수 있어요. 우리 공동체는 1993, 교사들과 함께 홍콩으로 단기선교를 갔다 오면서 MK사역에 대한 비전을 품게 되었어요. 개인적으로는 선교사를 비전으로 품었던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MK사역으로 이어지게 되었지요. 1994년 여름 CCC 의료선교부에서 해외 의료선교를 가는데 선교 현지에 선교사가 세운 대학의 한국인 교직원 자녀 교육문제가 있으니 의료팀이 올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교사들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어요. 의사, 한의사, 간호사로 구성된 팀에 생뚱맞게 교사인 저와 김은미 선생님이 약싸(약을 싸주는 사람의 준말)’를 자칭하며 다녀온 단기선교였지요. 단기선교 기간 중 그 학교 한국인 교직원 대부분이 선교사라는 소식과 자녀들의 교육적 필요를 듣게 되었어요. 영적 부담감을 가지고 돌아와 그 해 겨울 4명의 교사들을 모집하여 겨울방학을 통째로 방학학교라는 이름으로 섬기고 돌아오게 되었어요. 그 때 학부모 중 한 어머니께서 하신 간증을 잊지 못하고 있어요. “선교지에 와서 아이는 현지어로 듣고 말하는 수업시간에 알아듣지 못해서 멍하니 있다가 집에 와요. 교사도 학생도 도와주지 않는 현지학교에서 아이의 얼굴은 항상 어두웠어요. 보통 방학 때 학교에서 수업이 있다고 하면 아이들은 싫어하잖아요. 그래서 저도 방학학교에 대해 별로 기대를 갖지 않았죠. 그런데 이번 방학학교 첫날 수업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는 아이가 엄마하고 힘차게 부르는 소리에 깜작 놀라 보니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얼굴 가득 웃음꽃을 띄우며 신나게 이야기하는 거였어요. 그 모습을 보고 아이를 안고 펑펑 울었지요.” 그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모두 울었어요. 교사도, 아이들도, 총장님도, 교직원들도 모두! 그때 거기서 분명하게 비전을 보게 되는데, 바로 MK사역으로의 부르심이었어요.

그래, 바로 이런 아이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나를 교대에서 훈련받게 하시고 교사로, 특히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교사로 부르셨구나!’

그 이후로 매년 그 학교의 KoKi(Korean Kids의 약자; CCCTIM에서 MK들을 칭하는 말)들을 위해 방학학교를 지속했어요. 대학교수이면서 동시에 선교사로 살아가는 그들의 자녀에게 교육적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기쁨이 컸고요. 몇 년 후, 그 대학 안에 한국학교가 교육부의 승인을 받아 생겼고 우리는 또 다른 곳을 찾아다니며 단기 학습 캠프라는 형태의 사역으로 KoKi들을 계속 도와 왔어요.

그 이후 CCCTIM내에 KoKi팀을 이끌면서 여러 가지 사역을 해오다보니 이제는 자리를 많이 잡게 되었어요. 각종 선교사 수련회에서 선교사 자녀를 돌보는 Childcare사역, 선교사 자녀를 위한 원격 화상 수업, 선교 현지 단기 미니 학교(단기선교), 선교사 가정에 가정교사를 삼촌이모로 파송하여 교육하는 삼촌이모 프로젝트, 한국 선교사 자녀 학교 학습캠프, KoKi Academy for Caregivers라는 선교사 자녀 관심자 교육 프로그램, KoKi Family Camp(KFC, 선교사 가족 캠프), KoKi 장학금과 KoKi Vision Trip 및 역사 기행 등을 다양한 형태의 MK를 위한 사역을 해오고 있어 감사해요.

아내의 건강을 위하여 순천으로 거처를 옮기다

2010, 아내에게는 무척이나 힘든 시기였어요.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공부하는 것도 있고, 학교에서뿐 아니라 교육청 단위 행사에서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등 일이 많았지요. 특히 교장선생님과의 관계 때문에 많이 힘들어 했어요. 결국 허리가 아파 정밀 검사를 받았더니 의사의 소견은 스트레스 지수가 최고치이며 쉼이 필요하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우리 부부는 아이들 양육 문제 등을 함께 고려하며 아내 고향 근처인 전남 순천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합니다.

2011, 순천에 내려오면서 아내의 건강도 회복되었고, 감기를 달고 살던 아이들도 몸이 튼튼해져서 감사했지요. 저 또한 순천에 와보니 의외로 여유가 많아졌어요. 교육청 등에서 하던 일도 없고, 학교 일도 비교적 적은 편이었지요. 그래서 지방에 살고 있는 동역자들의 필요를 도울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순천은 부산까지 2시간 30, 전주 2시간, 광주 1시간 10, 진주 1시간 등 지리적 조건이 좋은 거 같아요. 그래서 제가 하고 있는 KoKi사역을 지방에서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시작한 것이 KAC(KoKi Academy for Caregivers)였어요. 선교사 자녀 교육 관심자들을 위한 4학기 훈련프로그램을 만들어 부산, 진주, 공주, 수원 등 네 곳에서 진행하고 있어요. 이렇게 KoKi사역이 확대되면서 더 많은 성숙된 교사들이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많이 들었고, CCCTIM 공동체가 더 성장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201310월 리더모임 때 ‘KoKi 팀사역을 통해 본 CCCTIM 발전방향이라는 주제로 발제를 했어요. 이때가 공교롭게도 CCCTIM 대표를 교체하기 위해 의논하는 자리였는데, 저의 발제로 공동체에 대한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어요. 이런 과정 속에 당시 CCCTIM 대표였던 윤조열 선생님이 더 많은 리더들이 다시 한 번 모여 정식으로 발제해서 이야기를 해보자는 제안을 하셨지요.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 제 삶이 있기 원해요

그래서 좀 더 심층적인 발제를 준비하는 과정에 정찬규 선생님, 이재은 선생님을 만나 KoKi 사역에 대한 계획과 나눔을 하던 중 자연스럽게 CCCTIM 이야기도 나누게 되었어요. 이재은 선생님이 지금 우리 팀의 상황에서는 송홍경 선생님이 대표를 맡아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해요.” 라는 제안을 했고, 이어 정찬규 선생님도 동의하는 말을 했어요.

CCCTIM 대표는 예상치 못한 역할이라 처음에는 좀 얼떨떨했어요. 왜냐하면 공동체 안에 KoKi팀이라는 전문모임 간사로 섬겨오면서 그 분야에 대한 마음이 많았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CCCTIM 대표를 제안 받았을 때 신기하게도 부담스럽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흥분되지도 않았죠. CCCTIM이 초기부터 지금까지 사역을 해오면서 그 과정에 대해 알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세밀한 체계를 잡아가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인식하에 꼼꼼한 나의 달란트가 활용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CCCTIM 대표가 된 후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 당신이었어요. 창세기로부터 시작된 역사에서 꾸준히 보여주신 하나님을 저 또한 보게 하셨죠. 사람은 태어나 살다가 죽어 사라지나,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시고 자신이 약속하신 것을 지키시며 신실하게 우리 삶의 현장인 역사 속에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게 되었어요. 이러한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 삶도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에 함께 있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그리고 나 혼자가 아닌 CCCTIM 교사들과 그 현장에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성숙을 위한 발걸음을 계속 딛고 싶어요. 하나님께서 CCCTIM에게 주신 은혜 중 하나는 성숙이라고 생각해요. 인생의 긴 호흡 속에서 각자 가진 성숙함으로 많은 이들을 실질적으로 품을 수 있는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어요. 지난 세월 동안 사역이라는 이름으로, 일 중심적으로 살다 보니까 서로에게 상처를 준 경험이 있었죠. 2000년 초중반 우리 공동체의 많은 리더들이 이런 상황 가운데 상담 공부를 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살피고 서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죠. 그 이후 많은 숫자의 사람이 모여 여러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을 제대로 돕는 공동체로 성장하길 소망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성장보다는 성숙을 택한 셈이죠. 성숙한 공동체로 세워가기 위해 대표로서 기도하며,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또한 성숙을 선물로 받은 CCCTIM 공동체가 바라보아야 할 비전은 제자화라고 생각해요. 공동체의 초창기부터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이자 우리의 사명인 제자화’. 이제는 학생과 선생님을 넘어서 MK와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꿈꿉니다. 성숙한 기독교사 공동체를 통한 세계복음화를 꿈꾸는 것이지요.

그리고 CCCTIM 사역과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따라 끝까지 충성스럽게 그리고 이 공동체에서 내가 지켜야 할 자리를 찾아 견디며 남아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를 바라며 그 중의 한 명이 나 자신이길 원합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저는 죽을 때가 되면 10억 이상의 재정을 선교사 자녀들을 위해 매년 의미 있게 사용하는 것이 꿈이라고 이야기 한 적이 있었어요. 지금은 그 시기를 바꾸어 이렇게 말하고 싶네요. ‘나의 50대에는 5, 60대 이후로는 10억 이상을 선교사 자녀 교육을 위해 매년 사용하여 보는 것이 제 꿈입니다.’

KoKi들을 위한 사역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어요. 그만큼 돈이 많이 필요한 사역이지요. 그래서 모금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내가 하고 있는 사역과 삶의 20%를 재정 후원과 모금을 위해 투자하려고 해요.

이후에는 KoKi팀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싶어요. 첫째는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 동역자들을 양육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싶어요. 둘째는 KoKi들을 돌보고 지원해주는 일을 동역자들과 함께 체계적으로 하고 싶어요. 셋째는 선교사 부부, 선교사 자녀, 선교사 가정의 모델링 작업을 하고 싶어요. 처음부터 선교사와 그 가정, 그리고 KoKi팀이 함께 준비하여 선교 사역을 감당하는 선교사 가정의 모델링을 통해 선교사 자녀 교육의 해법의 한 면을 보여주고 싶어요.

 

송홍경 선생님을 만난 후 순수한 열정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대학시절 품었던 제자화’, ‘선교의 비전을 놓지 않고, 욕심 없이 순수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몸을 맡긴 인생의 여정이 느껴졌습니다. 40대 후반인 선생님의 순수한 열정을 보며 저 또한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살고 싶다는 다짐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