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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지금 이 곳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면 앞으로도 할 수 없어요(2014.05)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일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이 곳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면 앞으로도 할 수 없어요. 누군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오죽 답답하여 나한테 부탁할까 생각하며 거절하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 오히려 나에게 성장이 일어나더군요.

 

 

 

 

부산 광무여자중학교 정계연선생님

지금 이 곳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면 

앞으로도 할 수 없어요

 

 

 

 

글 / 사진·김정태


 

 

 

고물상을 하셨던 부모님 밑에서 고장 난 물건들과 책들을 장난감 삼아 가지고 놀며 구김살 없이 밝게 자란 선생님은 불가지론에 빠져 허무한 대학생활을 하던 중에 CCC 4영리 전도를 통해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그 후 기적처럼 찾아온 남편과의 결혼으로 가정을 치유하게 되었고 교사선교회, 협동학습연구회와의 만남을 통해 학생과 교사들을 변화시키는 삶을 실천하고 계십니다. 장차 시간의 십일조를 드리고자 선교의 마인드로 사역을 준비하시는 정계연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어 보세요.


매축지 고물상집의 왈가닥 소녀

저는 3남 1녀 중 장녀로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어요. 시골에 사시던 부모님은 일자리를 얻고자 하는 마음과 자녀들을 도시에서 공부시키려는 뜻에 부산으로 이사하셨어요. 어린 시절 기억의 대부분을 차지는 공간은 부산의 매축지인 범일5동 고물상이지요. 아버지가 고물상을 운영하였어요. 당시 범일5동은 가난한 피난민들이 살던 곳이었어요. 저는 호기심이 많았지요. 또 장사에도 조금 소질이 있었던 것 같고요. 집이 곧 고물상이다 보니 여기에 들어오는 만화와 버려진 책들, 롤러스케이트, 붕어빵 기계 등이 우리 남매들의 놀이기구였지요. 시간만 나면 만화나 고물로 들어 온 책들을 읽었어요. 심지어 망가진 롤러스케이트를 동네 아이들에게 돈을 받고 대여해 주며 용돈을 벌기도 했고, 붕어빵이나 도너츠 장사도 했어요. 그때 도너츠를 기름에 튀기다 다쳐서 얻은 흉터가 어릴 적 활달했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요. 집 뒤 공터에서 제 친구들이나 남동생들과 구슬치기, 딱지치기, 술래잡기 등 당시 아이들의 모든 놀이를 거의 다 하며, 정말 원 없이 놀았어요.

그래도 어머니의 교육열은 대단하셔서 당시에 뉴스터디라고 하는 학습지를 매일 받아서 풀어야 했었어요. 늘 그걸 다 못하고 미루어 놓고 숨겨 놓다가 들켜서 혼이 난 적도 많았지요.


얌전한 범생 소녀의 중고교 시절

고등학생 때 운명적인 선생님 한 분을 만났어요. 이몽희 선생님! 당시 사진작가 겸 시인이셨는데 노래도 잘 하시고 언변도 아주 탁월하셨어요. 특히 학생들의 편지에 반드시 답장을 주셨고 여고생들의 심금을 울리는 좋은 말씀을 많이 해 주셨지요. 사실 저는 그 국어선생님을 좋아했지 딱히 국어 과목을 좋아했거나 잘 하는 것은 아니었어요. 백일장이 지옥처럼 느껴졌거든요. 지금도 백지에 글을 쓸 수 없어 막막하고 두려워했던 기억이 생생해요. 국어교사가 되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하고 글도 잘 써야한다는 압박감이 있었지만, 결국 사대 국어교육학과로 진학하게 된 것은 그 선생님 때문이었죠.


하나님은 계연 씨를 사랑하세요

초등학생 때, 고물상 맞은 편에 서울에서 전학 온 친구가 있었어요.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서울말을 하는 그 아이랑 친해지고 싶었어요. 어느 날 그 아이가 교회를 가더군요. 그래서 그 아이를 따라 몇 번 갔어요. 막내 동생을 업고 갔던 적도 있었는데 아기를 데리고 교회 왔다며 전도사님의 칭찬을 듣기도 했어요. 급기야 고물상에 놀러오는 제 친구들 9명을 데리고 교회에 가기도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게 전도더라고요. 하지만 나중에는 어머니의 심한 반대로 가지 못하게 되었어요. 중학교, 고등학교에서는 오로지 대학 진학만이 목표였기에 그저 열심히 공부만 했어요. 그런데 막상 대학에 진학하고 보니 고등학교에서 배웠던 학문 거의가 가설이었음을 알게 되었어요. 그렇게 열심히 외웠던 내용들이 몇 사람의 주장이라는 사실 앞에서 멘붕이 왔지요. 그러면서 세상에 진리는 없는 것 같아 보였어요. 고교동문 동아리에 가입하여 인생에 대해 고민하고 독서토론을 핑계 삼아 책 한권 읽다 잠시 이야기 나누고 동아리에 가서 노는 일이 반복되자 대학 생활이 허무하게 생각되었어요.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제 자신이 한없이 싫었고, 다른 친구들과 비교하며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되었지요. 그 때 고등학교 때 제일 친한 친구가 학교에 놀러왔고 함께 캠퍼스 벤치에 앉아 이야기할 때였어요. CCC의 두 자매가 전도하러 나왔는데 저와 친구를 각각 한 명씩 따로 떼어4영리를전하였어요.“ 하나님은 계연씨를 사랑하시고 계연씨를 위한 놀라운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라고 하는데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에 약간 놀랐어요. 두 종류의 사람을 나타내는 의자 그림이 나왔어요. 저는 당시 무척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오른쪽 그림처럼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삶을 살고 싶었어요. 약간 주저하고 있는데 건너편에서 친구가 오른쪽처럼 살고 싶다고 먼저 말하는 거예요. 저도 따라 말했고, 기도도 따라했어요. 그런데 신기한 것은 제 안에 하나님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어요. 아마 어릴 적 막내동생을 업고 교회에 갔던 기억이 살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자리에서 제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할까요.

 


그분 안에서 찾은 행복한 삶

저를 전도한 분은 CCC에서 우리 학교를 담당한 간사님이어서 1주일에 한 번씩 만나며 새 생명 시리즈라는 책자로 순모임을 했고 조금씩 성장하게 되었어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첫 날 들은 이 말씀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어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이 얼마나 좋았는지요. 지난 저의 삶을 완전히 버리고 싶었거든요. 늘 허전했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로 충만히 채워졌어요. 그때만큼 제 인생에서 행복했던 날들은 없었던 것 같아요. 기적과 같은 하나님의 은혜로 1982년 여름 심천수련회도 가게 되었어요. 달빛이 흐르는 심천에서 김준곤 목사님의 말씀이 흘러 퍼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거룩한 땅에서 자신의 신발을 벗었던 말씀을 전하셨어요. 저는 그 때 제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고 신발을 벗어놓고 회개 기도를 드렸지요. 그 이후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여러 번 체험하며 대학 4년을 온전히(?) CCC 사역에 드렸어요. 대학생활 초기에는 소심하고 외롭고 불안한 삶을 살았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물 만난 물고기처럼 자유롭고 가슴 벅찬 삶을 살았던 것 같아요. 매일 아침 동그라미파크에서 바이블미팅을 하고, 큐티를 하고, 전도하고자 노력하고, 순모임을 하는 등 CCC운동에 열심히 참여했어요. 순원을 위해 기도하고 가족과 민족, 세계 복음화를 위해 기도했지요. 저의 비전도 그때 생겼던 것 같아요. 학생 복음화가 저의 비전이 되었지요. 그 때 제 남편도 만났어요. 당시 CCC에서는 대학 3학년까지는 교제를 금하고 있어서 이후에 만남을 가졌지요.


학교 복음화의 꿈을 안고 교사가 되었어요

부산의 한 여자중학교에 첫 발령을 받았는데 가정방문을 가면 눈물 없이는 갈 수 없는 집들이 많이 있었어요. 문을 열면 바로 작은 부엌에 방 한 칸이 있고 거기에 대여섯 식구가 사는 집들이 허다했지요. 공단 지역이라 더욱 그러했어요. 부모님들이 집에 없는 경우도 많았고요. 사랑이 많이 필요한 학생들을 가르쳤지요. 이몽희 선생님께 배운 대로 날마다 학생들 공책 검사하느라 밤 9시가 넘어 퇴근하기도 했고 점심시간에는 번호 순서 대로 불러서 복음을 전하고 새벽기도 때마다 학생들을 위해 기도했지요. 교재연구도 없이 습관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칠까봐 당시 손으로 직접 썼던 지도안을 일부러 다 버리고 다시 새롭게 지도안을 만들어 가르치곤 했지요. (지금 생각하면 오만하고 고집스럽고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해요. 자료가 축적되면 더 좋은 지도안이 나올 수 있었을 텐데…) 그 때도 어떻게 하면 수업을 재미있게 하고, 복음을 녹여서 수업 시간에 가르칠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어머니와의 사별, 남편과의 결혼

발령 받고 2년 후 어머니께서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복음을 전했지만 잘 받아들이지 않던 어머니께서 마지막에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세상을 떠났어요. 어머니를 위해 정말 기도도 많이 하고 하나님께 울기도 많이 울었지요. 얼마 뒤 아버지의 재혼으로 막내 동생은 반항하기 시작했고. 참 힘든 나날이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저의 결혼을 두고 아버지께서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소개를 통하여 몇 분을 만났지요. 이후로 만남이 이어지진 않았고요. 그때 대학 시절 헤어진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아무런 감정 없이 친구처럼 만났죠. 저는 매년 1월 일기장에 올해의 목표 서너 가지를 기록해두곤 했어요. 그 해의 목표 중 하나가 27살인 그 해에 결혼하기였어요. 그것도 12월 31일 부산 CCC회관에서. 아주 구체적인 목표를 적고 일 년 동안

기도하는 거죠. 그 해에는 정말 절실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 배우자를 알아볼 수 있는 증표를 달라고 기드온처럼 기도했고 때마침 교회 목사님의 설교가 제 귀에 들어 왔어요.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7번 돌때에 성이 무너졌고 나아만 장군이 7번 강물에 들어갔을 때 문둥병이 깨끗해진 것을 말하며‘7’은 하나님의 숫자이고‘6’은 인간의 숫자라는 내용이었어요. 제 귀에 확 꽂히는 말씀이었어요. 그 말씀을 묵상하다 제 일기장을 보니 아버지 소개로 만났던 남자분들은 희한하게도 모두 6번의 만남으로 끝이 나 있었어요. 그 설교를 들은 다음날 남편과의 만남이 약속되어 있었는데 바로 7번째 만남이었어요. 참 신기하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기대하는 마음으로 남편을 만나러 갔어요. 저는 까만 봉지에 빵 2개, 우유 2개를 넣어 약속 장소로 갔는데, 남편은 과일이 든 도시락 찬합에 따뜻한 커피가 들어있는 보온병을 준비해 왔더군요. 그때 제 마음에 남편과 나는 참 다르다는 생각과 함께 두 사람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잘 채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돌아오는 버스에서 남편이 제 손을 잡아주었어요. 마음이 열리면서 남편이 좋아지기 시작했지요. 그렇게 연애를 하다가 마침내 진주에 계신 남편 부모님께 인사를 하러 가는 길이었

어요. 버스 안에서 우연히 남편 가방 속의 수첩을 보게 되었는데 전율이 흘렀어요. 남편의 수첩에도 그해 12월 31일 CCC 회관에서 결혼하는 것이 올해의 기도제목으로 적혀 있었어요. 물론 결혼 대상자는 없었고요. 그렇게 신기한 인연에 경악을 금치 못하다 서로 너무 좋아서 12월까지 기다릴 것 없이 그해 여름에 결혼식을 올린 거죠.^^


세 가지 약속

제 남편은 섬김이 몸에 배어있어요. 특히 저의 새어머니를 아주 잘 섬겼어요. 그런 남편 덕분에 새어머니와 갈등을 빚던 동생도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되었지요. 신혼여행에서 예배를 통해 세 가지를 다짐했어요.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자’, ‘이웃이 언제든 쉬어갈 수 있도록 오픈하우스를 하자’, ‘ 가정예배를 드리자’. 이 약속들을 지금까지 완전히 지키지는 못하지만 어느덧 우리 가정의 지향점이 되고 있지요. 신혼 초, 방 두 칸짜리 집에서 살았는데 CCC 순장님 부부와 같이 지냈던 적도 있고, 입시를 위해 귀국한 선교사님의 딸에게 두어달 지내도록 방을 개방한 바 있어요. 지금은 우연한 계기에 카자흐스탄에서 유학 온 한 자매와 함께 살고 있지요. 무슬림가정에서 태어나 CCC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듣고 가족들에게도 신앙을 숨긴 채 그 신앙을 위해 한국으로 유학왔지요. 크리스천 가정에서 지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 자매인데 학교가 멀어도 함께 있고 싶다면 그러자고 제의해 이제는 제 딸이라 생각하며 지내고 있어요. 일주일에 한 번은 자매와 신앙적인 교류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없다면 내일에는 할 수 있으리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려하는 거지요.


공동체와 양육만이 살 길이다

결혼하고 출산 후부터 사는 게 참 힘들었어요. 미혼 때는 교단의 선교사로 전도의 열정을 불태웠어요. 그런데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부터는 수년 동안 아무것도 할 수없었어요. 그런 제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아신 주님은 모라중학교로 발령 받게 하시고 그 곳에서 믿는 선생님을 통해 교사선교회를 만나게 하셨지요. 3년간 강학봉, 배점옥 선생님에게 양육을 받으며, 저도 다른 선생님들과 제자들을 양육했어요. 개림중학교에 근무할 때는 제게 양육 받은 반 아이들이 다른 친구들에게 전도하게 한 결과, 학교 강당에서 가진 크리스마스 축제에 400명이 모이는 결실을 거두기도 했지요. 그런데 요즘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쉽지 않은 학교 상황이 되었어요. 조금만 기독교적인 메시지를 이야기하면 학부모로부터 항의 전화가 들어와요. 마음이 무척 아프지요. 그래도 또 다른 모양으로 양육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찾고있어요.

교사선교회를 통해 배운 양육은 제 일생에 큰 변화를 주었고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쳐 주었어요. ‘양육만이 살 길이다. 양육은 한 만큼 유익이다’는 소박한 꿈으로 시작한 제자의 삶이 제 삶의 소명이요, 존재의 이유가 되어 양육을 하지 않고는 앞으로도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교회에서도 이런 마음으로 구역모임을 섬기고 성장반 교사로서 또 다른 제자를 양육하기 위해 집사님들을 돕고 있지요.


부산협동학습연구회

1998년에 기독교사대회 이후 3년 동안 교사선교회에서 저와 함께 양육을 받은 분들이 소은숙, 심은희, 고외옥, 이정실, 문혜숙 선생님이었어요. 3년의 양육이 끝난 후 이분들과 헤어지기 싫어서 우리가 훈련 받은 내용으로 학교를 섬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하던 끝에 협동학습연구회를 조직하여 연구 활동을 해 보자는 것에 마음이 모였죠. 당시 부산 TCF 초대 대표였던 심은희 샘이 총대를 메고 우리를 이끌어주기로 했어요. 이것이 부산협동학습연구회의 탄생이었죠. 그 다음 소은숙 샘이 부산협동학습연구회를

섬겨주었고, 임지호 샘이 함께 하게 되어 더욱 든든하게 세워지게 되었지요. 이미 단단해진 기반 위에 제가 2011년부터 대표를 맡게 되었어요. 15명의 든든한 연구위원들이 있어서 자체적으로 스마트한 협동학습도 기획하게 되었고, 심화과정도 자체 세미나가 가능한 수준에 서게 되었어요. 지금은 2, 4주 목요일 이사벨중학교에서 영성과 전문성, 관계성을 갖춘 건강한 교육공동체 세우기를 목표로 지난 연수 후 출석하는 분까지 25명 이상이 모이고 있어요. 저는 계속 고민했던 것 같아요. 수업을 세우기 위해 학생을 세우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학생들과 큐티 나눔도 해 보고, 도시락 만남도 해 보고, 늦잠 자는 아이를 깨워서 학교로 데려 오기도 하고, 어려운 학생들을 교회 수련회에 초청하기도하고… 교실이 무너져간다고 걱정의 소리가 높을 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학생을 가르치고 섬기는 일이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ACTS 대학원을 다녔고, 협동학습도 열심히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수석교사에 도전하다

2011년에는 지금 근무하는 학교에서 수업 공개를 20회 이상 한 것 같아요. 전국적으로 수없이 많은 교직원들이 교과교실제를 벤치마킹하러 방문하였어요. 교육부에서, 교육감님이, 교육장님이, 동아리에서, 연구회에서, 국어교사 대상으로, 싱가포르에서, 스페인에서… 학교에 방문하는 분이 있으면 제게 수업을 공개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저는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았지요. 협동학습으로 수업을 해왔기 때문이죠. 게다가 우리 학교 학생들은 정말 호응도 좋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학생들이었어요. 얼마 있지 않아 수석교사 공고가 떴어요. 이건 바로 저를 위한 제도라고 생각하고 곧장 원서를 내고 시험을 치고 면접을 보았어요. 준비 없이 응시한 유일한 시험이었어요. 그런데 당당히 합격을 했어요. 1차 시험이 지도안 작성이었는데 식은 죽 먹기였죠. 그동안 수 없이 수업을 공개해 왔기에 어렵다면 오히려 이상하겠지요. 지금 수석교사 3년차예요. 첫해에는 학교 안에서 수석교사의 위치가 정립되지 않아서 거의 수업장학계의 일을 했지요. 존재감이 없었어요. 때를 기다리며 그냥 참고 버텼던 것 같아요. 지금은 저를 찾는 우리 학교샘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제 자리가 벅적할 정도로요. 수업이나 업무에 관해서도 묻고, 마음이 무너질 때면 하소연을 하기도 하구요. 어제도 한 선생님이 제게 와서‘수석 샘이 우리 학교에 계실 때 수업동아리도 만들고 수업에 관한 한 모든 것을 전수받아야 한다’고 하셨지요.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알겠느냐”고 사명을 일깨워 준 것처럼 하나님께서“수석교사로 세운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수석교사로서 학생과 교사를 만날 때 무너진 마음을 세울 뿐 아니라 복음으로 연결할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어요.


선교 사역을 꿈꾸고 있어요

언젠가부터 우리 삶의 10분의 1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자는 이야기를 남편과 하고 있어요. 우리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긴 해도 교직을 마무리한 후 적어도 10분의 1을 온전히 선교 사역에 헌신하고 싶다는 마음을 키우고 있어요. 선교사역에 반대하면 혼자 가버릴까봐 마지못해 동의했다고 말하던 남편이 지금은 발마사지를 배우고 있어요. 그리고 수학교사에서 진로교사로 전과를 했는데 이것도 선교사 자녀들의 진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준비하는 것 같아요.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는 말씀처럼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이 내일은 잘 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는 거죠. 누군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오죽 답답하여 나한테 부탁할까 하면서 거절하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 오히려 나에게 성장이 일어나더라고요. 

 

친구 따라 교회 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 9명의 다른 친구들을 교회로 인도했던 선생님의 어린 시절 에너지 넘쳤던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학생들과 교사들을 말씀으로 양육하고 수석교사로서 수업에 무너진 많은 동료교사들의 마음을 세워주며 외로운 이방인들에게 쉴 만한 곳으로 자신의 집을 내어주는 아름다운 삶을 통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곳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미래에도 할 수 없다는 말씀이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내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저도 지금 이곳에서 실천해야 할 일을 찾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