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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이 땅에 더 많은 기독교학교가 필요합니다(2014.03)

우리나라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유교 문화가 강한 지역에서 미션스쿨을 통해 기독교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음 세대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기 위해서 기독교 학교 운동을 펼쳐야 한다'는 도전에 저의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이 일에 저와 우리 가정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대전 새로남기독학교 정해경 선생님

이 땅에 더 많은

기독교학교가 필요합니다.

 

 

 

·김정태

 

 

 

 

 

어린 시절, 주변에 사람이 거의 없는, 문명과 격리된 소백산 산골에서 자란 정해경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선생님은 가난한 가정 형편 속에서 일찍 철이 들어 공부 밖에 몰랐던 순박한 시골 소녀였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찾아와 꿈을 갖게 하시고 낯선 장소와 사람들 속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인도하심을 따르다 보니 공립학교 교사에 사립학교 교사로, 이제는 미인가 대안학교로 직장을 옮긴 40대 중반의 교사가 되었습니다. 상식으로 봤을 때 가정의 안정과 자라는 자녀의 미래를 위해서도 그러면 안 될 것 같은데, 모험의 삶을 기쁘게 살아가시는 정해경 선생님의 이야기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소백산 달밝골에서 온 하이디

저는 경상북도 풍기읍 삼가리 달밝골이란 소백산 아래 작은 산골 동네에서 34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밭농사를 지으셨고 동네에 집들이 띄엄띄엄 떨어져서 열 채 정도 있었습니다. 가을에는 아버지가 소백산 송이버섯을 채취해 오셨는데 그 귀한 송이버섯을 마음껏 먹으며 자랐습니다. 친구가 없어 주로 형제자매끼리 놀았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달밝골에서 10리 길을 걸어 삼가분교를 다녔어요. 물론 형제들과 같이 통학했지요. 달밝골은 이름대로 밤에 달빛이 참 밝은 동네란 뜻입니다. 80년대 초까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어요. TV, 라디오 없이 호롱불을 켜고 살았어요. 그렇게 문명세계에서 떨어져 살던 제가 처음 학교에 갔을 때 너무 좋았어요. 특히 선생님의 말씀이 좋아 즐겁게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달밝골에서 보낸 삶을 추억하면 대체로 행복했어요. 그런데 주변에 사람이 너무 없으니까 자연은 좋았지만 사람들 속에 섞여 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장남인 우리 아버지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시려고 달밝골을 떠나 영주시 순흥면 태장이란 동네로 이사를 했습니다. 이사 온 이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잦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소 장사를 하면서 빚을 많이 지게 되어 아버지께서 그 빚을 갚느라 참 많이 고생하셨지요. 그래서 큰 언니와 작은 언니가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인조 공장에서 돈을 벌어야 했어요. 저도 산골의 조그만 학교를 다니다가 읍내 국민학교로 전학을 와서 적응이 쉽지 않았습니다. 촌티 나는 저와 놀려는 친구들이 별로 없었지요. 그런데 5학년 때였어요. 담임 선생님(손승환 선생님)께서 어느 날 제게 웅변대회에 나가보라고 권유하셨어요. 마침 저는 웅변대회에서 1등을 했는데 그 이후로 제가 자신감도 갖게 되었고 친구들도 많이 사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일찍 철든 범생 소녀, 예수를 만나다!

제 외할머니는 신앙심이 돈독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도 결혼 전에는 교회에 다니셨는데 6.25전쟁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어머니는 큰집에서 살게 되었고 거기서 우리 아버지를 중매로 만나 결혼하십니다. 그런데 친할아버지는 종교심이 많지만 정감록과 풍수지리설을 신봉해 피난처로 가장 안전한 풍기 달밝골에 들어가 사셨던 것이죠. 그리고 할아버지는 집 안에 불상을 모시고 예불을 드릴 정도로 불심이 강했습니다. 그러니 시집 온 저희 어머니는 신앙생활은 꿈도 못 꾸셨고 교회도 당연히 못 나갔지요.

중학생이 되면서 가정 형편이 어려워 언니들이 공장 취업을 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저는 어떻게든 고등학교에 진학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가정 경제를 위해 학업을 포기하고 공장일을 하는 언니들처럼 살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공부를 할 수 밖에 없다는 절박함이 제게 있었고 그런 절박함은 저를 일찍 철들게 했어요. 중학생 때 중간고사 기간을 앞두고 주말에 도시락을 준비하여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혼자 공부하곤 했어요. 그 결과 영주 선영여고에 3년 장학생으로 진학했습니다. 고등학교에서는 3년 장학생이란 부담감 때문에 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결과도 나쁘지 않아 공부의 재미와 즐거움으로 지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고2 때까지는 공부한 만큼의 결과를 얻었지만 고3이 되어서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내 뜻대로 성적이 나오지 않았어요. 어느 봄날이었어요. 모의고사 성적표를 받아 좌절하고 있었는데 제 안에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 세상에 완전한 신이 있다면 그 신께 나를 맡겨 의지해 보고 싶다.’ 신기하게도 바로 그때 제 안에 성령 하나님이 찾아 오셨어요. 하나님에게 제 마음을 열었던 것 같았어요. 그 일이 있은 후, 김완신이란 친구에게 제 고민을 이야기 했어요. 그 친구는 제게 교회에 같이 가보자 했고 그렇게 저는 마음이 활짝 열린 상태로 교회에 나갔습니다. 처음 설교도 기억이 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여, 저를 떠나소서.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하는 성경 말씀이었어요. 처음으로 제가 죄인인 줄 알았어요. 그 후 교회에서 열리는 학생 예배, 대예배, 저녁 예배까지 다 참석했어요. 제 마음은 이미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갔기에 그건 어렵지 않았어요. 한때는 기숙사에서 공부하다 빠져 나와 친구들과 부흥회에 간 적도 있어요. 3때 일어난 일들은 제겐 엄청난 변화였고 평소 저를 범생으로만 알던 학교 친구들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이었어요.

 

뜨거웠던 대구교대 IVF 개척 멤버 시절

부흥회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앙이 뜨거워졌습니다. 급기야 주님을 위해서 살려면 신학교에 가야 할 것 같아 고민이 될 때 영주 동부교회 중고등부 교사였던 안대영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선생님은 저의 고민을 들어주시고 진로 상담을 해 주셨어요. 저는 그분과의 대화를 통해 제 안에 교사가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렇게 하여 저는 대구교대에 진학을 했고 나중에 안대영 선생님이 IVF라는 대학생 선교단체에서 활동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대구교대에 IVF가 없었어요. 안 선생님은 제게 모임을 시작해 볼 것을 제안하셨습니다. 신입생이고 아무것도 몰랐지만 그 일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김원숙 간사님의 도움을 받아 기숙사 친구 이명옥, 같은 과 친구 한경혜 이렇게 세 명이서 용감하게 대구교대 IVF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대학 생활은 IVF공동체를 빼면 할 말이 거의 없습니다. 1학년 때부터 매일 아침 기도회, 소그룹 성경 공부, 전체 모임, 리더 모임, 서적 전시회, 학기 중 1박 수련회, 여름 수련회와 말씀과 삶 겨울 수련회를 참여하면서 바쁘게 지냈습니다. 부모님과 가족을 떠나 멀리 대구에서 유학을 하면서 외롭고 힘든 저에게 공동체는 가족과 같은 따뜻함으로 정서적인 외로움을 채워 주었습니다. 또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신앙 서적 읽기, PBS훈련은 제 인생에 귀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늘 과외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어야 했고 등록금을 위해 장학금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대학 생활은 바빴고 시간 관리를 잘 해야만 했지만 돌이켜보면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IVF와 함께해서 참 행복했습니다.

 

TCF와 함께 초임 시절을 뛰어 넘다

19959, 대구 관음초등학교에 첫 발령을 받았습니다. 대학 시절 IVF를 통해 충분히 훈련 받았기에 발령을 받으면 공립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복음도 전하고 제자양육도 해 보리라는 야무진 꿈을 갖고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제 기대와는 달리 첫 교직 생활은 한마디로 처참했습니다. 첫 근무지였던 학교에서 동료 교사와 비교를 당하며 교감 선생님에게 잘 못한다고 욕먹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래도 대학 때까지 주로 칭찬과 격려를 들었고 장학금도 받으며 나름 열심히 살아왔는데 누구에게 불려가 욕먹는 경험은 참 힘들었습니다. 특히 동학년 부장교사로부터 같이 발령 받은 후배교사보다 못 한다는 비교를 많이 당하면서 제 자존심이 짓밟혔습니다.

대학에서 섬기는 훈련을 받았어요. 졸업하면서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꿈을 꾸고 갔지만 첫 학교에서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꼈어요. 내가 선교단체에서 훈련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이미 섬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 착각했던 것 같습니다. 내 인격과 실력은 그런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죠. 그러면서 자존감이 많이 낮아졌습니다. 그런 까닭에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대구TCF를 찾아 갔습니다. 교대IVF에 오셔서 강해설교를 해주셨던 이용세 선생님을 통해 TCF를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 곳에서 선배 선생님들을 만나 기독교사로서의 정체성을 찾고 교단에서 살아갈 힘을 공급받았습니다.

저는 TCF를 사랑합니다. 그 이유를 물으신다면 특별히 말씀과 음식을 나누는 축제와 향유의 영성이 TCF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 말씀 안에서 서로의 삶을 나누는 것을 통해 수없이 흔들리고 넘어졌던 제가 삶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용기를 공급 받았어요. 결혼을 하며 대구를 떠나 수원에서 살 때도 우리 집을 수원TCF 리더 모임 장소로 제공했어요. 또 기독교사대회도 제가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게 끊임없이 자극을 주었어요. 그냥 교사로 머물러 있지 않게 하고 배우고 성장할 도전을 주는 곳이 기독교사대회였어요. 주중 기독교사모임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멈춤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속해서 쏟아지는 학교 업무와 수업 준비로부터 벗어나 기독교사모임을 하면서 쉼표를 찍었던 것 같아요. 선생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장을 보고 음식을 하면서 잠시 멈춰 서는 거죠. 그리고 제가 가고 있는 길을 다시 한 번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결혼, 가정, MK선교사

제 남편은 대학 시절 같은 과 친구였어요. 그때 제 남편은 저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었지만 저는 오랜 동안 외면했어요. 94년 대학 졸업 후에도 남편에게 반응하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제 남편은 잊을 만하면 연락하더군요. 심지어 제가 더 이상 나한테 오지 말라고 너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던 적도 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배우자를 위한 기도를 드리던 중에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내가 너한테 이미 다 주었는데 왜 자꾸 기도 하냐?” 그 말씀에 다른 할 말이 없어지더군요. 그래서 제가 남편에게 연락을 하면서 결혼에 골인했습니다. 그리고 중앙기독초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남편을 따라 수원으로 학교를 옮기게 됩니다. 결혼 이후 지금까지도 제가 TCF 활동을 꾸준히 할 수 있었던 것은 제 남편이 육아를 책임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모임에 참석하고 섬길 수 있도록 항상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이 지면을 빌어서 다시 한 번 남편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2000년 딸 시은이를 출산하고 육아휴직에 들어갔는데 남편이 중앙기독초등학교에 근무하면서 mk선교사로 나가고 싶어 했습니다. 저는 당시 아이가 어려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남편이 너무 원해서 마지못해 따라갔습니다. 200187일에 R국에 입국하였는데 마침 그해 유명한 9.11테러 사건이 터지면서 심적으로 참 힘들었습니다. 남편은 그 때 선교사 자녀 학교 호프아카데미에서 한국어 트랙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며 저학년 아이들을 가르쳤고 저는 시은이가 어려서 파트 타임으로 일주일에 이틀 정도 학교에 가서 교사로 섬겼습니다. 비록 1년 반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저희 부부에게는 특별한 경험이었고 또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던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선교사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삶으로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중앙기독초등학교의 가장 큰 자랑 = 선생님

한국으로 돌아와 복직해서 어려운 교장 선생님들을 만났습니다. 관리자의 특성에 따라 학교 교육의 방향이 달라지는 경험을 하며 비본질적인 것에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이 속상했습니다. 어떤 교장 선생님은 국화꽃을 너무 사랑하시어 그것을 키우고 보호하는 것에 집착하셔서 그분의 기호를 맞추는 데 모든 교직원들이 노심초사했어요. 또 다른 분은 참 능력 있는 분이셨는데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그분을 만나는 교사들이 자주 상처를 받았어요. 당신의 기준에 안 맞으면 교사들의 숨통이 막히게 하는 분이셨어요. 그런데 제가 그렇게 숨통이 쪼이니까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교육을 못하게 되었고 윗분의 눈치와 요구를 맞추다 보니 수업을 대충하게 되더군요. 공문의 형식, , 체계에 집착하며 교육의 본질을 놓치게 되었습니다. 공교육에 회의를 느꼈어요.

어느 날 교직 11년차 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앞으로 한 학교에 5년씩 근무한다고 해도 6개 학교도 못 돌고 교직생활이 끝나는데 정말 내가 해보고 싶은 교육, 교육다운 교육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렬하게 들었습니다. 마침 그때 중앙기독초등학교에서 신관 건물을 짓고 반을 증설하면서 교사 모집 공고를 냈습니다. 저는 과감하게 사표를 쓰고 2007년 중앙기독초등학교에 지원서를 냈습니다. 그리고 발령을 받습니다. 같은 학교에서 남편과 함께 근무하게 되었고 제 아이도 중앙유치원부터 중앙기독초등학교 6년 과정을 행복하게 보냈습니다.

중앙기독초등학교에서 제가 들었던 말 중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은 바로 중앙기독초등학교의 가장 큰 자랑이 뭔지 아세요?”라는 질문에 망설이지 않고 바로 선생님들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 곳에 근무하면서 그 말을 실감했습니다. 동학년 선생님들과 마음을 모아 함께 협력하여 교육의 시너지가 극대화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또 학교와 가정이 함께 교육하기에 그 효과가 커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매일 아침 큐티를 하면서 교사의 권위가 아닌 말씀의 권위로 학생들을 훈육하는 축복을 누렸어요. 어떻게 하면 더 잘 가르칠까를 고민하는 일 때문에 공립 학교에 있을 때보다 더 바빠졌고 퇴근 시간도 더 늦어졌지만 힘들지 않았습니다. 기쁨과 감사함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6년 동안 중앙기독초등학교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교사로서의 전문성을 키워갈 즈음에 하나님께서는 다른 비전을 보여 주셨습니다. 바로 한국에 중앙기독초등학교 같은 기독교학교가 더 많이 생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르심에 이끌리어 대전 새로남기독학교로 오다

2010년 고난주간에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음성이 누가복음 1928절에서 38절을 통하여 들려왔습니다. ‘매여 있는 나귀새끼를 제자들에게 끌고 오라 하실 때 주인이 물으면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말씀과 같이 주님은 제 남편을 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해 10월에 중앙기독초등학교에서 2010 ICEC대회(국제기독교사대회)가 있었고 그 기간에 남편은 대회를 섬기느라 바빠 말씀에 집중을 못했으나 대회 기간 내내 저는 은혜를 누렸어요.

마지막 날 김동호 목사님께서 한국의 기독교사들을 위한 말씀을 증거하셨어요. 경북 안동의 기독교 인구가 적지 않은 이유, 그 도시에 많은 미션 학교들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유교 문화가 강한 곳에 기독교 인구가 미션 스쿨을 통해 늘어나는 사례를 들면서 앞으로 다음 세대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위해서 기독교 학교 운동을 펼쳐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한국 교회와 우리나라를 살리는 일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도전에 저의 가슴이 뜨거워졌고 이 일에 저 자신과 남편과 우리 가정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201112월에 대전 새로남교회에서 중앙기독초등학교에 요청이 왔습니다. 새로남기독학교를 시작하는데 리더 역할을 할 수 있는 교사를 보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가정은 수원을 떠나 대전에 가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작년 2013년 한 해 동안 새로남기독교학교에서 매일 밤 10시 이후에 퇴근했습니다. 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어요. 하지만 당연히 올 곳에 왔다는, 일하려고 왔다는 생각으로 기독교 학교를 세우는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물론 중앙기독초등학교에서의 경험이 없었다면 저희 부부가 이곳에서 기독교학교를 세우는 일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수원에서 배우며 받은 사랑을 이곳 대전 땅에 기독교 학교를 세우는 일을 통하여 흘려 보내고 싶습니다. 지금도 중앙기독초등학교에서 경험했던 아이들의 밝은 미소와 아이들이 행복해 했던 학교생활을 잊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된 선생님들의 사랑을 먹고 자라는 아이들의 해맑은 얼굴을 보면서 수원이 아닌 다른 지역, 다른 곳에서도 기독교 교육의 축복이 흘러넘치길 소망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곳 대전에서도 학교에 오는 것이 즐겁고 행복한 아이들을 만날 수 있어서 가슴 벅찹니다.

 

더 많은 기독교 학교가 필요합니다

주님은 우리 부부를 경제적인 부분에서, 또 사회적 신분에서 비교적 안전한 교육공무원의 자리를 내려놓고 사립 기독 초등학교 교사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신분의 안전을 내려놓고 주님만 의지한다고 고백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사립 학교에서 미인가 대안학교로 인도하셨습니다. 저는 깨달았습니다. 이제까지 내가 주님을 위해서 뭔가 드린다고 했지만 제대로 드린 것이 없었다는 겁니다. 지금은 고백합니다.

주님, 이제 정말 제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앞으로 저희 가정을 또 어떻게 인도하실지 주님만이 아십니다. 우리 인생은 오직 주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는 제가 꿈꾸지 않습니다.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겠습니다.”

지금 제가 알고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위한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제가 경험한 것을 들어 사용하실 것입니다. 특별히 공립 학교에 근무하시는 선생님들에게 김동호 목사님의 도전을 드리고 싶어요. 우리나라 공립 학교에도 훌륭한 기독교사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기독교 학교 운동을 할 교사도 필요합니다. 저는 좋은교사운동 교사들이야말로 기독교 학교 운동을 잘할 수 있는 적임자들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처럼 이 일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일부의 교사들이 기독교 학교 운동에 동참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정해경 선생님을 만나면서 기독교 학교 운동이 우리나라에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곳곳에 안동시와 같은 사례들이 더 많아져야 미래의 한국 교회와 한국에 희망이 생긴다는 선생님의 도전을 제 가슴속에 새깁니다. 교육 현장의 영적 싸움의 일선에 선 전사와 같은 정해경, 최병준 두 부부의 모험과 도전에 주의 도우심이 가득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