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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한 아이의 기쁨이 모두의 기쁨인 학급을 꿈꾸며(2014.01)

협동학습은 가르치는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제대로 된 삶의 가치를 알게 하는 것이에요. 서로 힘을 합치는 활동 한 두 가지를 수업에 조금이라도 넣으면 아이들이 서로를 배려하고 챙깁니다. 궁극적으로 서로를 위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했어요.


 



부산 삼덕초등학교 임지호 선생님

한 아이의 기쁨이 

모두의 기쁨인 학급을 꿈꾸며

 

 

 

 

/ 사진·김정태

 

 

 

 

고난에는 뜻이 있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지만 감히 그런 말을 입에 담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임지호 선생님은 쉽지 않은 아동, 청소년, 청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제대하고 발령을 받아 학생들을 병정 다루듯 제식 훈련 시키던 무서운 선생님이 이제는 뒤쳐지는 아이 한 명을 따뜻하게 보듬고 멘토링까지 해 주는 그런 감동 스토리를 써 가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변화의 한 축이 바로 기독교사대회에서 만난 협동학습연구회였습니다. 선생님에게 협동학습은 단지 하나의 수업 모형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삶을 성찰하게 하는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였습니다. ‘우는 자와 같이 울고 웃는 자와 같이 기뻐하라는 말씀을 붙잡고 한 아이의 기쁨이 모두의 기쁨이 되는 교실을 꿈꾸고 계신 임지호 선생님의 감동 이야기를 만나 보세요.

 

아버지의 발병과 함께 찾아온 시련의 시간

제 아버지는 회사원이셨고 어머니는 경남 양산시 일원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셨어요. 남동생과 여동생까지 모두 5인 가족으로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남들처럼 행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 아버지 하면 떠오르는 아련한 기억 한 가지는 제게 젓가락질을 가르쳐 주셨던 겁니다. 그 외엔 다른 좋은 기억이 없어요. 왜냐하면 아버지가 아프신 이후부터는 모든 것이 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정신이 오락가락 하시는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맞는 모습을 보며 살게 되었습니다. 어린 저에게는 그저 하루 빨리 이 환경을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살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어요. 그러다 어머니께서는 도저히 아픈 아버지와 함께 살 수 없다는 결단을 하시고 아버지를 병원에 입원 시킨 후 외가가 있는 창녕에서 살게 되었어요. 그때가 초 4학년 때였어요. 그 후 제가 중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아버지의 얼굴을 못 보게 되었어요. 결국 중 2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지요.

초등학교 2학년 때 혼자 하늘을 보며 사람이 왜 살지?’란 질문을 던졌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때 많이 힘들고 또 무서웠어요. 무엇보다 아버지가 너무 미웠고 싫었어요. 아버지와 헤어진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는 내가 어머니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어요. 어머니가 힘든 일을 하면 도와주려 하였고 특히 어머니에게 필요할 것 같으면 미리 생각해서 일을 처리하기도 하는 그런 강한 책임감이 강한 아이로 변모해 갔습니다. 그러면서 차츰 창녕 외가에서 아버지를 잊고 즐겁게 살았어요. 지금도 생각해 보면 우리 어머니가 참 대단하신 것 같아요. ‘어떻게 버티셨을까?’란 질문을 해 보면 다른 어떤 분보다 제 어머니가 강인한 분이셨던 것 같아요. 세 자녀들을 보호하고 키우고자 하는 모성애는 그 험한 고난의 시간을 견디어 내게 했던 것 같습니다.

이해되지 않던 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고등학생 때는 마산에서 살았어요. 친구 따라 마산 동광교회에 출석하면서 조금씩 믿음이 자라 갔습니다. 그런데 고 2때 갑자기 제 여동생(당시 중2)이 아버지와 똑같은 병에 걸리면서 또 다시 시련이 찾아 왔습니다. 그때는 아버지가 아프셨을 때보다도 더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초등생 때는 워낙 제가 어렸기에 어머니에게 별다른 도움을 줄 수 없었지만 고 2때 일어난 여동생의 일은 제가 짐을 져야 하는 부담으로 다가왔던 거죠. 그때 흔들리던 제 마음을 다잡을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은 신앙뿐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그나마 버틸 수 있었어요.

그런데 나중에는 남동생마저 똑같은 질병에 걸리게 되면서 그야말로 한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동생들이 집 밖으로 나가 돌아다니면 밤 12시를 넘기도록 찾아다녔던 적이 수십 번이 넘어요. 또 어떤 경우에는 포항경찰서에서 전화가 오기도 했어요. 시외버스를 타고 동생이 거기까지 간 거죠. 그 모든 형편은 제가 짐질 수 있는 심리적 한계를 넘어섰던 상황이었기에 더욱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3때는 학교 공부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기 전에 교회의 인적 드문 계단에서 매일 밤 울부짖으며 기도했습니다. 돌아보면 하나님께 많은 원망을 쏟아냈어요. ‘왜 우리 집안은 이런가요?’ ‘왜 우리 집은 병이 낫지 않습니까?’ 하다가 나중에는 고린도전서 10:13 말씀(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 제일은 사랑이라)을 붙들고 위안을 삼아 용기를 내고, 다시 또 원망하고 그러기를 반복하며 힘든 시간들을 버텼습니다. 성경에는 병자가 낫는 이야기들이 그렇게도 많은데 왜 우리 가정에는 그런 기적을 보여주지 않으시는 것인지, 정말 사랑의 하나님이 맞는 것인지 솔직히 믿기 힘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어요.

 

고통을 잊기 위해 더 힘들게 살았던 대학 시절

저는 교대로 진학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요. 하나는 그동안 초등학교 교사인 제 어머니가 힘들게 사는 것을 보면서 교대에 가고 싶지 않았어요. 두 번째는 제 손으로 아픈 동생들의 병을 고쳐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한의대에 진학하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고3 초기에만 해도 충분히 한의대 입학 가능한 성적이었는데 공부보다는 집안일을 비롯하여 다른 일에 마음을 많이 쏟게 되면서 성적이 떨어지고 결국 재수까지 했지만 한의대 진학에 실패했어요. 어쩔 수 없이 어머니의 희망대로 교대에 입학했어요. 내 동생들만큼은 내 손으로 꼭 고쳐주고 싶었지만 그마저 뜻대로 되지 않으면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대학을 다녔습니다.

대학 생활이라고 고등학생 때와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어요. 동생들과 어머니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집이 있는 마산에서 부산교대까지 통학했습니다. 심지어 학군단이었던 3, 4학년 때도 매일 아침 6시에 집을 출발해서 학교에 도착하여 7시부터 학군단 운동을 하고 9시에 수업에 들어가는 생활을 했어요.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할만도 했지만 마산으로 가야만 했어요. 제가 안 가면 어머니 혼자서 발병한 남동생, 여동생을 돌봐야 하는 상황이 돼 버리기 때문이었지요. 어머니도 낮에는 학교로 출근하셔야 했기에 아픈 두 동생만이 집에 머물러 있는 매우 불안한 상황이었어요. 급기야 어느 날 남동생이 그만 불을 내고 온 집안을 깨끗하게 태워버린 적도 있었지요. 주변 이웃들의 항의도 적지 않았어요. 우리 동생들 때문에 주변 이웃들이 당했던 고통을 생각하면 그분들도 많이 괴로우셨을 겁니다. 어쨌든 이런저런 것들을 다 감당해야 했던 당시 제 삶은 한마디로 도망다니고 눈치 보는 삶의 연속이었어요.

대학에서 CCC 활동도 했어요. 하지만 제게 큰 의미를 줄 순 없었어요. 당시 제일 듣기 싫었던 말이 모든 고통 뒤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위로의 말이었어요. 또 순모임 중에 순원들이 힘들다고 내 놓는 기도 제목을 들을 때 당신들이 정말 고통이 뭔지 알아?’ 하면서 그들을 비웃는 나쁜 마음도 제 안에 없지 않았어요. 그러면서도 3학년 때는 대표 순장까지 했어요. 그냥 책임감으로 끝까지 했던 것 같아요. 매일 아침 7시까지 학교에 와서 운동하고 수업하고 순모임에 대표 순장 역할까지. 또 마치면 바로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 생활을 대학 4년 내내 지속했던 것은 그렇게 고되게 살아야만 다 잊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고통을 잊으려고 노력했어요.

 

내게도 사랑이 찾아오다! 아이들!

교대 3학년 참관 실습과 4학년 교생 실습을 갔습니다. 그때 만났던 아이들은 어둡고 우울하게 살아가던 제게 힐링이었습니다. 그냥 저를 좋아해 주었어요. 제가 그 아이들에게 잘해 준 것도 없는데 무조건적으로 저를 좋아해 주는 게 저는 너무 좋았어요. 그런 맹목적인 사랑을 처음 느껴본 것 같아요. 그 사랑을 겪으면서 ! 이렇게 사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겐 사랑이란 말은 낯선 단어였는데 아이들의 해맑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느끼면서 바로 그때부터 교사로 살겠다는 마음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교사 같은 군인, 학생 같은 병사?

제대 전 임용시험에 합격하고 첫 학교에 발령을 받아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희안하게도 학생들이 다 병사들로 보이더군요. 24개월의 군대 기운이 채 빠지지 않은 상태로 학급을 맡으니 제가 아는 수준에서 수업을 하고 학급을 경영했습니다. 제식훈련을 시킬 정도였으니까요. 교직 2년차 때 만난 6학년 학생들에게는 정말 몹쓸 짓을 참 많이 했습니다. 한 아이가 잘못을 해도 모두의 연대책임으로 돌려 단체 벌을 주었어요. 쪼그려 뛰기, 토끼 걸음 등.

당시 옆 반 선생님(지금의 아내)이 운동장에서 제가 체육 수업을 하는 걸 잠시 봤는데, 어떻게 그런 수업을 할 수 있는지 무척 놀랐다고 하더군요. 운동장 이쪽에 있던 아이들이 전속력으로 일제히 반대쪽으로 뛰어가고, 가서는 각 잡은 줄을 순식간에 맞춰 서고. ‘어떻게 6학년 초등생들이 저렇게 행동할 수 있지?’ 하면서 신기하게 지켜봤다고 했어요. 부끄럽지만 당시 제가 제일 즐거워했던 수업이 체육 수업이었어요. 그리고 제가 잘할 수 있는 게 그거 밖에 없었어요.

그 다음 해에는 5학년 담임을 했고 그 아이들을 끝으로 첫 학교를 떠나 북구에 있는 학교로 근무지를 옮기게 됩니다. 학교를 옮긴 후 전 학교 선생님들을 만났어요. 그런데 그분들이 저를 원망하는 소리를 듣고는 제가 충격에 빠졌어요. 마지막으로 가르쳤던 5학년 아이들이 6학년이 되어 다른 반으로 흩어졌는데 그 아이들이 반에서 각기 다른 담임 선생님들을 힘들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워낙 저한테 압박 받으면서 군인 이상의 엄한 규율 속에서 지내다 벌의 강도가 약한 다른 반에 진급하면서부터는 대부분 괴물 같은 아이들이 되어 버렸다며 저를 질타하는 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아이들을 반듯하게 잘 훈련을 시켰다 생각했는데 그게 무서운 선생님이었던 제 앞에서만 그랬던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학교에서는 도무지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그런 상태에 빠져 버렸습니다.

2002기독교사대회에서 협동학습연구회를 만나다

학교에서 군인 같은 교사로 살던 제가 2002기독교사대회에서 협동학습을 만납니다. 그리고 제 삶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제 삶은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누구 하나 도와주는 이 없는 그런 힘겨운 싸움을 하며 버티며 살아온 저였기에 대학생 때부터 교사 초년 시절까지 처음 만난 사람들이 인식한 제 모습은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상황과 전혀 다른 상황, 아이들을 가르치고 이해하고 품어줘야 하는 그런 상황을 만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협동학습으로 가르치면서 학생들이 서로 도와가며 공부하길 바랐지만 저 자신이 전혀 협동하는 삶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보게 되었지요. 그러면서 제 삶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어요. 교단에 처음 섰을 때, 의도하지 않았지만 제 눈은 잘 하는 아이만 주목했어요.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은 무시하며 살았어요. 잘 못하는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협동학습을 하게 되니 못하는 아이들이 뭔가를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줘야 수업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이전 수업보다 아이들이 더 열심히 참여하고 즐거워하는 거예요. 그때 제 안에 그런 확신이 들더군요. ‘협동학습, 이거 잘하면 아이들을 정말 행복하게 만들 수 있겠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방법을 좋아하신다는 생각이 아주 강하게 들었어요. 무엇보다 못하는 아이들이 제 눈에 들어오게 만들어 주었어요. 케이건 책을 읽다가 그런 내용들을 읽으면서 너무 기뻐 혼자 흥분해 하던 순간들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러면서 수업에서 시작된 변화들이 점점 제 삶 전체로 확대되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기까지

저는 2001년에 결혼했습니다. 제 아내는 대학생 때 판(총학생회에서 진행하는 행사 시 분위기를 여는 몸짓)의 핵심 역할로 활약했었어요. 그런 제 아내가 저와 만나기로 결심하고 교회에 같이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저는 아내와 같이 성경 공부도 하면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결혼에 골인을 하게 됩니다. 당시 제 여동생은 1999(대학 졸업 후 4개월 뒤) 소천 했었고 남동생은 몇 년 뒤인 2005년에 소천했습니다.

결혼 당시 제가 아내에게 내걸었던 조건 두 가지가 있는데 교회에 같이 다녀야 한다는 것과 남동생이 아프니까 어머니와 함께 같이 살면서 동생을 보살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결혼 첫날부터 문제였어요. 이제야 제가 변화되어 인정하는 부분이지만 당시 저는 어머니와 동생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기에 남편으로서, 한 가장으로서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아내를 배려할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었어요. 수십 년간 살아온 저의 당연한 일이 더 이상 아내에게 통하지 않는 상황을 겪으면서 서로 많이 싸웠습니다. 그리고 결혼 1년 만에 따로 살게 되었어요. 당시 아내의 요구는 어머니와 남동생에게서 나와 살자는 것이었고 그걸 당시 제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그런데 약 1여 년의 힘든 기간을 갖던 중에 결정적으로 제 생각을 바꿔 주신 분들이 있었어요. 정찬규, 윤조열 CCC 순장님께서 조언을 해 주셨어요. 그리고 지금은 없어진 JEMO 지역 대표들이 제 이야기를 듣고 많은 조언을 해 주었어요. 그후 지금 출석하는 호산나교회 이성현 목사님을 만나 수개월 동안 일대일 양육을 받으면서 가장의 역할이 뭔지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어요. 어머님 집 근처에 우리 부부만을 위한 집을 구하고 아내에게 연락했습니다. 같이 살자고. 물론 그때 어머님이 느끼신 충격은 컸어요. 하지만 어머니의 동의보다도 제 가정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란 판단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아들, 딸 낳고 화목하게 살고 있습니다. 제 어머님도 이제는 하늘나라로 간 아들, 딸을 잃은 슬픔에서 다소 벗어나 손자, 손녀를 보면서 많은 위로를 받고 계십니다.

돌아보면 아내와의 관계에서도 협동학습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부부 사이에서 저는 제 주장만을 고집하였고 항상 아내에게 저를 따라오라고 했고 또 그걸 당연히 여겼습니다. 그런데 제가 수업을 할 때 아이들에게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도와주라는 말을 하고 있더군요. 제가 말과 행동이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서도 내 것만 챙기고, 아내가 죽든 말든 내 것만, 내 어머니 것만 챙기는 저의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을 봤던 겁니다. 그런 위선적인 저의 모습을 학생들에게 협동학습을 가르치면서 보게 된 것이죠.

하나님은 제 아내에게는 축복으로 하나님을 알아 가게 해 주시는 것 같아요. 나가는 대회마다 1등상(교육자료전 대통령상, 교육부장관상, 수업 대회 1등급, 보고서 1등급)을 받아요. 본인도 그래요. 자기 실력보다 과분한 영예를 얻는다고요. 이렇게 생각해요. 하나님은 사람마다 다르게 대하시는 것 같아요. 저 같은 사람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만 붙잡게 하셨고 제 아내 같은 사람에게는 확실한 은혜를 지속적으로 부어주셔서 그 곁을 못 떠나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협동학습은 삶의 가치를 말합니다

협동학습은 가르치는 기술을 연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제대로 된 삶의 가치를 알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 드리고 싶어요. 처음엔 협동학습으로 가르치는 것이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그 재미는 오래 안 가더군요. 그리고 재미만을 위해 또는 학력 향상만을 위해 협력을 하라는 것인가?’란 의문이 생겼어요. 어느 날 아이들을 자세히 관찰해 보니 소극적인 아이들이 조금씩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서서히 밝아져 가더군요. 그런 것을 보면서 그때 내가 협동학습의 기술을 썼기에 그런가?’라는 질문을 하면, 아니었어요. 솔직히 저는 요즘 굳이 협동학습을 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러나 아이들이 서로 힘을 합치는 활동 한 두 가지를 수업에 조금이라도 넣어 진행하면 서로를 배려하고 챙기는 것을 봅니다. 기술은 놓쳐도 궁극적으로 서로를 위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했어요.

작년에 반 아이들을 데리고 캠프에 갔어요. 그 캠프는 다른 학교 학생들과 함께 참여하는 캠프였는데 캠프 마지막 날 시상을 하는 시간에 진행자가 팀별로 시상을 할 테니 제일 잘한 학생 한 명을 뽑으라는 거였어요. 그때 우리 반 아이들이 이렇게 서로 말하는 겁니다. “아니, 다 같이 열심히 했는데 어떻게 한 명을 뽑아?” 그 모습을 보고 정말 흐뭇했어요. 결국 우리 반 아이들은 다른 학교와 달리 시상대에 반 학생 모두가 올라갔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방법을 잘못 사용하면 서로 반목하게 할 수 있죠. 하지만 교사의 내면에 더불어 살아가는 것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서로 좋아하고 도와주는 것을 가르치면 정말 아이들도 교사의 그런 기대대로 자라가는 것 같아요.

 

한 아이의 기쁨이 모두의 기쁨인 학급

제 인생에 있어서 지금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실 내 아이를 키우기 전에는 교실에 들어오는 반 학생들을 당연하게 대했어요. 그러다 내 아이를 키우고 사랑하면서 학교에서 만나는 학생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알겠더군요. 그리고 제 오랜 의문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되었고, 우리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어요. ‘내 아이가 이렇게 좋은데 우리 아버지도 나를 이렇게 좋아하셨겠다고 느껴지면서 다만 그때 우리 아버지는 많이 아픈 분이셨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반에 제가 어린 시절 겪었던 경험을 겪고 있는 아이들이 있어요. 그런 아이들을 보면 붙들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야기해 줍니다. 그런 아이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아요. 다른 친구들도 다함께 힘든 그 아이의 슬픔을 공감하게 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고요.

제가 꿈꾸는 학급은 한 아이의 기쁨이 모두의 기쁨인 그런 학급입니다. 7, 8년 전부터 그런 생각을 계속해서 갖고 있어요. 매년 바뀌는 아이들이지만 1년을 마쳤을 때 우리 반은 서로를 아끼는 반이었다는 그런 추억을 남기고 싶습니다. 적어도 반 안에서만이라도 상벌점 스티커를 없애고 진정한 학습 공동체를 경험하게 하고 싶어요. 학생들로부터 선생님! 내년에도 같은 반 해 주시면 안돼요?” 하는 말을 매년 듣고 싶습니다. 그처럼 제 진심이 아이들과 통하는 학급은 제 평생 포기할 수 없는 소망입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임 선생님은 학교 병설유치원에 있는 딸 은채를 만나 퇴근하셨습니다. 매일 아빠의 손을 잡고 등하교를 하는 은채도 행복해 보였지만 솔직히 딸보다 임 선생님이 더 행복해 보였습니다. 자녀를 키우면서,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지식과 물질과 사랑을 공급하는 게 순전히 어른만의 몫은 아닌듯합니다. 오히려 어린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부모가 또 교사가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사랑을 누리면서 온전한 사람으로 자라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