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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온전한 기독교사의 삶을 소망하며(2014.04)

기독교사의 삶이 분리되지 않고 통합된 삶으로 성장하여 주변의 교사와 아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습니다. 영성, 연구, 사회운동, 공동체성 중에서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다음 세대의 기독교사를 세우는 일에도 역할을 감당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제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잘 분별하여 하나님나라 운동의 큰 물줄기에 연결되어 있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좋은교사운동 교육실천위원장 김효수 선생님

온전한 기독교사의 삶을 소망하며

 

 

 

 

 

 

/ 사진·김기웅

 

 

 

어릴 적 잦은 이사 속에서 길러진 나그네 영성

강원도 삼척 풍곡이 저의 고향입니다. 청정 자연에서 열목어와 뱀을 친구 삼고, 냇가에서 잡은 물고기로 매운탕 끓여먹는 등, 시편 23편의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부모님께서는 가정 신앙의 개척자였습니다. 특이한 공통점은 두 분 모두 청소년기에 주님을 영접하신 일인데, 친구 따라간 부흥회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강원도 평창에서 삼척으로 부임지를 옮기신 목사님의 소개로, 평창 아가씨와 삼척 사나이가 평생의 연을 맺었습니다. 그 후 두 가정에 복음의 씨앗이 떨어지면서 제 부모님을 통해서 다른 친지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제 어머니는 늦은 나이에 신학 공부를 하여 지금은 전도사로 섬기고 계시며, 아버지는 당시 30대 장로(초고속 승진?)가 되셨습니다.

성장 과정에서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잦은 이사입니다. 유년 시절은 강원도 삼척, 초등 시절은 대구와 경북 봉화, 중학교 시절은 청주, 고교 시절은 경북 영주, 대학 시절은 교원대, 교직 생활은 충남, 그리고 지금은 인천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릴 적 잦은 이사는 주로 아버지의 직장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종사하셨던 탄광 산업의 사양세로 인하여 잦은 이사를 했지만, 돌아보면 제게 나그네 영성을 키워주었던 것 같습니다. 변화를 좋아하고 환경에 크게 얽매이지 않으며 숙박이나 이동 생활에 유연한 융통성 있는 사고방식이 몸에 베인 것 같습니다.

 

피부 트러블이 기적적으로 사라지다!

저는 어릴 때 율법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안정적인 모태 신앙의 모습으로 살아갈 것 같던 저의 삶에, 하나님께서는 매우 역동적으로 간섭하셨습니다. 그 첫 사건은 6학년 때 찾아온 피부병이었습니다. 날짜도 6.25!! 혹시 건선이라고 들어보셨는지요? 봉화와 태백의 작은 병원에서는 제대로 진단을 못 받아 피부 트러블을 홍역이나 수두로 알았습니다. 나중에 보니, 그것은 아토피보다도 고치기 힘들다는 건선이었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을 뒤덮어 올라왔다가 딱지가 지면서 가뭄의 땅바닥처럼 갈라집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허물 벗듯이 떨어져 나가기를 수없이 반복하는 건선! 4년이 넘도록 매일 피부과를 출입하며 주사를 맞았습니다. 온 가족은 그런 저를 붙들고 가정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 전까지는 매사 자유분방하며, 왈가닥, 좌충우돌하는 열혈 초딩이었음을 지금도 남아있는 잔 상처들이 증명해주지만 피부병은 그런 저의 성격을 바꿔놓았고 자존감의 바닥을 경험케 하였습니다.

제가 주님을 영접하게 된 계기도 제 피부병이었습니다. 저는 피부병으로 고통 받던 중학교 3학년 여름 수련회에서 주님을 영접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또한 수련회 이후, 주님께 간절히 매일 밤 9시에 40일 작정 기도를 하였습니다. “주님! 살아 계시다면 제 피부병을 치유해 주세요.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고등학교 입학 전, 2월까지 고쳐주세요.” 주님께 기한을 통보하며 고쳐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놀랍게도 겨울이 지나는 동안 점점 나아졌고 그 뒤로는 피부 트러블 때문에 병원에 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감격을 구구절절 기록하여 두란노 새벽나라에 기고까지 했으나 큐티 책에는 실리지는 않았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도 있습니다.^^

 

입시 교육으로 고통 받았던 고교 시절

청주 중학교 시절은 50명이 넘는 과밀 학급에서 도시 생활에 익숙지 않던 키 작은 시골 소년이 피부병으로 시달리던 어두운 날들이었으나 고등학생 때는 적극적이며 진취적인 모습으로 새 출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가스업으로의 직업 이전을 제안 받고 온 가족은 다시 경북 영주로 이사를 갑니다. 영주에서의 고등학교 생활을 한마디로 압축하자면, 경북의 한 입시 명문학교 소수 정예반(독수리반)에서의 스파르타식 입시 교육이었습니다. 그 학교에서는 2주에 한번만 외출 허락을 받으며 기본적인 신앙생활이 흔들일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저는 그 속에서도 매주 교회를 다녔습니다. ‘일정 기간만 교회 외출을 포기하고 입시를 잘 넘어서자, 지금까지 독수리반의 규칙을 깬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는 고3 담임 교사의 회유와 협박에 굴하지 않다가 종교 탄압을 받는다며 교무실에서 펑펑 운 적도 있습니다. 그 일은 스트레스가 심했던 고교 시절, 하나님 앞에서의 마지막 신앙 자존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고된 기숙사 생활은 고3 스트레스로 이어져 체력과 체질도 약해지고 가위에 자주 눌리다가 나중에는 위장병이 생겼습니다. 시험 도중에 화장실 출입이 잦았던 징크스에, 무엇보다 수능 시험 그 자체에 참으로 적응하기 어려웠습니다. 암기력을 바탕으로 한 문제풀이식 공부 방법이 잘 통했던 내신 성적과는 달리, 익숙지 않았던 수능 문제 유형은 나름대로 열심히 해봐도 쉽게 성적이 나오지 않았습니다(인터뷰를 한 기자도 그랬음. 혹시 독자님도?^^).

 

정동진에서 발견한 소명, 교사

수능 당일, 컨닝에 능했던 옆 자리 삼수생의 협박스런 부탁(큰 글씨로만 답을 쓰라는)을 받으면서부터 시작해서 수능 언어 영역 시험에서는 시간 초과로 큰 지문 두 개의 정답을 그냥 찍었습니다. 그리고 시험 날에는 여지없이 시작되는 화장실 출입 등으로 수능을 망쳐 버렸습니다. 이후 저는 극단적인 행동을 선택합니다. 20일 정도 학교를 나가지 않았고, 유서도 써보고, 끝내는 자살 시도를 했습니다. 깊은 절망 앞에서 대책 없이 무너져간 나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청소년기에 갖고 있었던 법조인의 꿈도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고 장래 희망보다도 더 근본적인 나의 존재와 인생의 목적 등, 본질적인 회의와 질문을 제기하다 결국에는 재수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학원에서 말 한마디 없이 1개월을 지낸 시점에 경북 영주에서 온 아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랑 같은 학교를 다녔다는 공통점 때문에 그 아이와 자연스럽게 절친이 되었고 종교철학적 논쟁도 나눌 수 있는 관계로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의 권유로 참여하게 된 다윗과 요나단집회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하면서 제 삶에 거룩한 변화들이 일어났습니다. 교회 성경 공부 모임에 참석하고 새벽기도를 다녔습니다. 그리고 수험 서적만큼 성경책을 읽으면서 신앙이 조금씩 깊어졌습니다. 그런 가운데 문득 학원에서 만나는 재수생들이 긍휼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재수생들의 관심과 호감을 얻게 되면서(모의고사 1등이 크게 작용함^^),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간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르는 문제를 도와달라는 수험생에게 한 문제 풀어 줄 테니 1시간을 달라고 해서 옥상에 데려가 복음을 전하는 야매 전도사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입시에 매여 인생의 목적을 찾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겪은 암흑기와 비슷한 학창 시절을 힘들게 버티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40일 작정 기도, 목사님과의 상담을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제 진로를 발견했습니다. 심리학과 신학을 공부해서 청소년 상담 목회 또는 상담 클리닉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일명 김효수 청소년 상담 클리닉센터를 여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직업 영역에 대해서 가족들은 반대했어요. 그런 상황에서 정동진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역에 내리자마자 망망대해를 바라보면서 미래에 대한 나의 인식은 제한적이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바다처럼 광대하고 측량할 길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수욕장 구석에서 홀로 부흥 집회를 열며 부모님께 7장에 달하는 장문의 편지를 쓰고 상징적인 기념물로 조개껍데기 3개를 주워서 간직하는 등, 나름대로는 거룩한 세리모니를 했습니다. 그 가운데 정리된 생각은 우리 청소년들이 어디에 가장 많이 있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은 학교였습니다. 그렇다면, 교사? 이 직업은 제가 학창 시절 이래 꿈도 꾸지 않은 진로 영역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저는 사범대로의 진학을 꿈꾸게 되었고 대학에 입학해서는 목적의식을 가진 대학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운명적인 만남, CCC 그리고 좋은교사운동

그렇게 입학한 교원대 신구 대면식에서 5분 소개 시간에 기도라는 말을 했다가 CCC 순장들의 레이더 망에 잡히어 결국 CCC와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이어집니다.

당시 기독교사연합, 좋은교사운동과의 만남도 참으로 운명적이었습니다. 1998년 학교 채플에 찾아오신 어느 기독교사(김현섭 선생님)가 이번 여름에 전국 최초로, 모든 기독교사들이 모여서 대회를 치르게 되는데, 그 대회에서 자원봉사자로 섬겨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바로 1998년 제 1회 기독교사대회였습니다. 이대회는 제게도 특별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대회 장소였던 춘천 강원대 캠퍼스로 가는 도중, 큰 비가 계속 내리더니 마침내 경춘선이 끊기고 말았습니다. 대회를 진두지휘했던 송인수, 정병오 선생님은 집회 장소에서 엎드려 울며 기도하였고, 소수의 자원봉사단 청년들 사이에서는 이 대회가 예상보다 극히 적은 숫자로 치러지면서 실패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신문 하나 들고 빗속을 뚫고 수련회장으로 찾아오셨던 선생님들의 모습, 내가 볼 때는 참 훌륭한 선생님이신데 눈물 흘리며 교육 현실에 대해서 통회하며 자복하는 교사들의 모습, 이 모든 것들이 충격과 도전으로 다가왔습니다. 게다가 기독교 세계관이나 기독교적 교육 연구 등을 새롭게 접하면서 총체적인 기독교사의 삶을 살아가야한다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대회 자원봉사 이후에 겪게 된 삶의 변화도 참 신선했습니다. 윤소영 선생님과 배움과 나눔’ (교원대 예비기독교사모임)을 출발시켰고, 기독교 교육 분야의 책들을 탐독하고, 교육 단체들의 수련회 탐방을 시작했습니다. 대학 4년 동안 40회의 수련회와 단기선교에 참여했습니다. 예비교사 시절부터 기윤실, 교사선교회, CCCTIM 등의 기독교사 단체 수련회와 전문 모임이었던 협동학습 세미나를 배우고 접하게 된 것은 향후 예비교사 사역을 펼칠 수 있는 자원이 되었습니다.

그 때 제 별명(권면 대마왕, 강권대제)처럼 CCC 내부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놓치지 않고 닦달하면서까지 후배들을 모임에 동참시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지금도 교원대 후배 8명과 함께 13평짜리 사랑방에서 자취 생활을 하며 훈련했던 시간들이 선명하게 기억되는데, 그 후배들 중에서 향후 리더로 세워지기를 기대했던 친구들은 차츰 떠나가고 그리 기대하지 않았던(?) 친구가 지금 제 옆에서 좋은교사운동 상근 사역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손현탁 선생님입니다.

교육으로의 부르심을 따라서 열심히 달려갔지만 정작 4학년 때 임용시험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상황에서 병역을 해결하기 위해 일부 선배들이 추천하는 공군 장교 시험에 응시합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시험에 떨어지고 서울 기간제 교사에도 떨어져 임용고사 준비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해하던 시점이었습니다. 정병오 선생님께서 임용 준비를 하면서 협동 간사로 일해보라는 제안을 해주셨고 저는 급기야 좋은교사운동 본부 사무실 2호 간사가 됩니다. 더욱 감사했던 것은 서울두레교회 옥탑방을 얻어서 살게 도와주신 겁니다. 그래서 임용 시험 공부와 간사일을 병행하며 회원 배가를 위해서 연락처를 돌리고 기독교사대회 준비 작업도 하게 되었습니다.

 

예비교사 아카데미 개척 이야기

2002대회 때, 예비교사 트랙을 기획 운영하게 되었고, 2003년에 예비교사 아카데미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내부적으로는 송인수 선생님마저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셨으나 저는 30명을 목표로 포스터를 들고 서울 지역의 캠퍼스 15군데를 돌아다녔습니다. 그 결과, 기가 막히게도 아카데미 첫 모임에 30명이 찾아왔습니다! 대부분 교육대학원을 다니는 교육학도들과 초년 교사들이었습니다. 현재 22기까지 진행되고 있는 예비교사 아카데미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이를 통해서 좋은교사운동의 회원으로 일하는 분들이 많이 생겨나게 된 점은 정말로 큰 기쁨입니다.

2003년에 공군 기술학교 장교 입대에 재 도전하였는데 또다시 최종 시험에서 떨어집니다. 그래서 2개월 남짓한 임용시험을 갑작스럽게 준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부족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8:1의 경쟁률을 뚫고 충남에 합격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전 방위적인 부르심이 전 방위적인 사역으로!

2개월간의 짧은 교직 생활을 뒤로 하고 입대, 군복무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29, 드디어 본격적인 교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교사로서 몸담고 일할 단체를 고민하던 차에 CCC의 나사렛운동의 초기 정신과 역사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 말 나사렛 초대 간사님이셨던 이상규 간사님께서는 나사렛운동이 직업 영역별로 펼쳐지는 민족 복음화의 전초 기지 운동이었는데 지금은 졸업생 모임으로 전락했다며 안타까움을 지적하셨습니다. 삶의 영역에 구체적으로 연결되는 다리를 놓는 사역의 필요성을 저 역시 절감하며 CCCTIM(당시 JEMO) 공동체를 택합니다.

복직한 2006년 충남에서 CCCTIM 서산-예산 모임을 개척하며 서산여중의 신우회 모임을 인도하였습니다. 한 학년이 끝나는 시점에서 간증으로 아이들에게 복음전도를 하며 기독동아리(Jesus-teen)를 운영하였고요. 그밖에 좋은교사운동의 교육실천운동-정직캠페인, 가정방문, 자발적 수업평가받기 운동, 일대일 결연-을 그 무엇보다도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ACTS) 교육대학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교육과정을 공부했습니다. 거기서 대안학교 현장을 탐방하며 기독교 교육의 꿈도 키울 수 있었습니다. 다만, 우리나라 기독교 교육 운동이 다소 사변적이어서 학교 현장에 바로 적용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또한 인위적인 기독교 원리 적용에 한계도 있는 것이 사실인지라 공부를 할수록 공교육 현장에서 느끼는 괴리감은 더 커졌습니다. 기독대안학교 근무도 잠시 고민했지만 공교육 현장에서 아직은 더 치열하게 서지 못했다는 생각에 마음을 접었어요. 이 모든 활동들은 온전한 기독교사가 되고 싶은 믿음과 신념을 지향해왔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2008년 기독교사대회에서는 사회교과 모임이 없던 것을 아쉬워하던 중에 기독사회교사모임(행복한수업만들기 사회모임)을 시작하여 대표로 섬기게 되었고, 기독교적 수업 운동에 관심을 이어왔습니다. 그리고 CCCTIM 전 대표 정찬규 선생님(현재 마닐라 한국아카데미 선교사)의 소개로 만나게 된 아내와 200912월에 결혼을 하게 되었고, 2010년부터 2년간 교원대 석사 파견 시험에 합격하여 새롭게 공부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대학원 시절에는 좋은교사 북유럽탐방(1) 및 현장 연구에 힘을 쏟았습니다. 이때 이우고 및 덕양중, 장곡중에서 질적 수업 연구를 할 수 있었고 배움의 공동체와 관련된 석사 논문을 쓸 수 있었습니다. 일본 배움의 공동체 모델이 국내 학교에서 각기 다르게 적용되고 있음을 비교 연구한 것으로 기계적 도입이나 기술이 아닌, 학교 문화에 따라, 교사의 신념에 따라, 개별화되며 다양한 적용이 일어남을 발견하였습니다.

 

수업에는 교사의 삶이 녹아 있어요

행복한수업만들기 사역이 활발하게 펼쳐졌던 2011, 김태현 선생님이 상근하고 문경민 선생님과 제가 각각 초등, 중등 사무국장으로 일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교육과정 재구성이나 수업 기법으로 나아가기보다 선생님들이 처한 내면의 아픔이나 두려움 등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교사들이 자신의 내면을 알아차리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20122월초, 종로의 한 식당에서 이규철, 김태현, 김효수 세 명이 함께 만나 이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수업에는 교사의 삶이 반영된다. 또한 수업은 학생들이 교사의 삶을 만나는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 자신의 신념이나 정서가 수업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아이들에게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를 성찰하고 이해해가는 과정이 중요하다그날의 대화를 계기로 지금의 좋은교사 수업코칭연구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2년간, 수업코칭 사역을 진행하며 수업 영역으로의 은사적 부르심을 확인해가고 있으며 현재 교원대 대학원 박사 과정(3년차)에서의 연구 방향도 교사의 수업 전문성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앞으로도 교사의 수업 전문성 성장 과정을 밀도 있게 분석하고 규정해내는 일 등, 수업코칭의 가능성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하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수업비평이나 배움의 공동체 운동이 갖고 있는 편중성보다는 교사의 가르침 의도와 학생의 배움 과정을 균형 있게 고려해가면서도 교사의 내면을 세우는 수업친구 만들기 운동의 확산과 수업코칭 연구를 한층 더 체계적으로 이론화하고 싶습니다. 아직은 수업코칭 임상 경험을 가진 전문가가 소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에, 수업 나눔 워크숍을 중심으로 활동가들의 내적 역량 강화에 힘쓸 것입니다. 외부 강의 활동보다는 내부 활동가 그룹 안에서 더 깊이 있게 연구의 지평이 깊어지고 넓어지는 일을 해나갈 계획입니다. 물론, 수업코칭연구소 사역 뿐 아니라 교육실천위원장으로서 이 시대의 기독교사운동이 실천할 영역을 찾아 기독교사연합에 기여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사가 분리되지 않는 삶

저는 대학 시절에 품었던 온전한 기독교사의 삶을 여전히 소망합니다. ‘기독교사의 삶이 분리되지 않고 통합되어 있는 삶으로 성장하여 주변의 교사와 아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습니다. 영성, 연구, 사회운동, 공동체성 중에서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으며 다음 세대의 기독교사를 세우는 일에도 일정 부분 감당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제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잘 분별하여 하나님께만 쓰임 받아 어떠한 직임으로 일하게 되든 간에 거대한 하나님나라 운동 역사의 물줄기에 연결되어 있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