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을 통해서 믿음을 실증해 보이는 교육
한승헌 (법무법인 광장 고문변호사, 제 17대 감사원장)
평생 권세 없고 가난한 서민들과 항상 가까이 있는 삶을 소망한 한승헌 변호사. 그는 하나님의 진리와 의를 받드는 선생님들이 말과 글로 그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에 그치지 않고 그 진리와 의를 따르는 실천을 통해서 믿음을 실증해 보인다면 그것이 바로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육이 될 것이라고 당부한다.
인터뷰-이봉수_2012.04
덕성여고 2학년 송가영, 백지영, 방민정, 나유정, 전지현 학생들과 함께 한승헌 변호사님을 인터뷰하였습니다. 강단 있는 삶을 살아오셨기에 다소 긴장하고 찾아뵈었으나 생각과는 달리 변호사님은 재치 있는 유머로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이끌어주셨습니다. 또 한승헌 변호사님께서 직접 쓰신 연하장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속에는 ‘柔勝剛’(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길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들어있었습니다. 변호사님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는 단단함을 이기는 부드러움이 녹아있었습니다.
송가영 : 가벼운 질문부터 하겠습니다. 변호사님께서는 강의나 인터뷰를 하실 때 항상 무릎 위에 손을 얹고 정자세로 있으시던데 그렇게 바른 자세로 하시게 된 게 어떤 계기가 있으십니까?
일제 강점기 시절 한학을 공부하신 아버지 밑에서 엄한 가정 교육을 받고 자랐어요. 아마도 그때의 몸가짐이 지금도 남아있는지 모르겠네요. 또 나는 시골 촌놈이라서 어딜 가서도 기를 펴고 살아본 적이 없고, 그러다보니까 사람들 앞에 나갈 때 수줍음이랄까, 그런 게 몸에 배었거든요. 지금 이 시간에도 굉장히 수줍어하는 중입니다.(함께 웃음) 좀 미화를 시켜서 말하자면, 한 인간으로서의 겸손함이라고 할까요?(웃음) 누구에게나 되도록 예의 바르고 겸손하게 응대해야 한다는 잠재 의식 같은건 아무래도 아버님의 영향이 크지 않은가 싶습니다.
송가영 : 변호사님의 아호가 산민(山民)이신데요. 산민이라는 뜻은 무엇인가요?
제 아호가 뫼 산(山) 자, 백성 민(民) 자, 산민인데, 서예 스승이신 검여(劒如) 유희강(..熙綱) 선생님께서 지어주신 겁니다. 제가 전라북도 진안 산골 출신이라는 걸 선생님께서는 잘 모르셨을텐데, ‘산민’이라고 지어주셨어요. 그렇게 아호를 지어주실 때 ‘한승헌 선생, 근재산민(近在山民)’이라는 휘호를 내려주셨습니다. ‘당신은 산민 즉 권세 없고 가난한 서민들과 항상 가까이 있을지어다.’라는 뜻이지요. 저는 이 아호가 참 맘에 듭니다. 산민정신은 제가 이렇게 나이 먹도록 세상 살아오면서 마음으로 받드는 저의 정신적 지침이기도 합니다.
송가영 : 아까 수줍어 한다는 말씀에 대해 더 질문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래도 법정에 서시면 말씀으로는 한 변호사님을 이길 사람이 없다는 구절을 어디서 봤는데요. 그렇게 어느 정도 언변이 있으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 그게 이렇습니다. 가령 어떤 배우 또는 연사가 무대나 마이크 앞에 서면 평소와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수가 있잖아요. 프로가 무대에 섰을 때와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될 수도 있듯이 저도 법정의 변호인 석에 앉으면 그때는 좀 다른 사람이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좀 진지하고 엄숙해질 수도 있고, 때로는 얼마쯤 독기도 드러내고, 그럴 수가 있겠지요. 그건 자기 본분 수행에 부수되는 표정이자 스타일이니까 그렇게 해야 될 때에는 그렇게 합니다. 그렇지만 평소의 저는 그런 인간형은 아니에요. 제가 감사원장 할 때 어느 분이‘감사원장은 좀 무섭게 보여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제 밑에 있는 850명이 모두 무서운데, 저까지 무서울 필요가 뭐 있습니까?
나유정 : 한 변호사님께서도 고문을 당한 경험이 있으시잖아요? 그때 어떻게 그 힘든 고문을 견디셨는지요?
저도 고문을 당한 적이 있었지요. 예전에 제가 변호를 맡았던 피의자나 피고인이 고문을 당했다고 호소하거나 폭로하면 법정 안팎에서 규탄도 하고 고문에 의한 자백을 유죄의 증거로 삼지 말라고 대들고 했지만 대부분의 법관들이 그런 피맺힌 호소나 규탄을 외면하곤 했어요. 그런 중에도 내 자신이 고문을 당하리라는 것은 예상할 수가 없었지요. 무엇보다도 내가 범죄자 취급당할 일을 하지 않는데다가, 설령 아무리 내가 밉다 한들 ‘내가 변호사인데 설마 하니…’하는 생각이 잠재되어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나처럼 허약한 사람에게 고문을 가하면 그 결과는 폭행 상해 아닌 살인이 될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말하자면 ‘허약하니까 안 당한다.’ 는 자신감이었지요. (다 같이 웃음)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1975년 3월, 중앙정보부는 사형 폐지를 주장한 글 한 편을 트집 잡아서 나를 반공법으로 묶으려고 2박 3일에 걸쳐서 밤샘 조사를 했습니다. 사실은, 김지하 시인의 변론에서 손을 떼라는 요구를 거절했다가 당한 일인데, 그때 저는 지하실에서 잠도 못 자고 밤샘 조사를 받는데 조사 담당자 말고도 세 사람의 건장한 사나이가 내 옆에 버티고 서 있는데다 그 중 한 명은 야구 방망이만한 몽둥이를 들고 서 있는 거예요. 내가 그 방망이로 맞진 않았지만, 위압을 느낀 것은 사실이지요. 그런 판에서 기가 안 죽고 끝까지 내 할 말을 제대로 한다는 게 얼마나 힘 든 일이었는지 몰라요. 그런데 1980년 5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역시 남산에 붙들려갔어요. 그 땐 정말 호된 고문을 당했어요. 뭐, 김대중 선생 옹립하고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서 내란음모를 했다는 혐의를 조작해서 자백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 물론 단호히 부인했죠. 사실무근이었으니까. 그런데 얼마 뒤에 위에서 무슨 지시가 떨어졌는지 어느 날 저녁에 정말로 고문을 하는 거예요. 조사실에 있는 야전 침대에서 뽑은 침대 봉으로 어깨를 비롯한 전신을 내리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내 말이 달라지지 않으니까 각목을 정강이에 넣고 무릎을 짓이기는 고문을 하더군요. 몹시 견디기 어려웠지요. 그런데 그런 육신의 아픔보다 치욕스러움에서 오는 정신적 고통이 더 참기 어려웠어요. 그러나 내 말 한마디에 김대중 선생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생명과 운명이 좌우될 수도 있다 생각하니 정신이 오히려 더 번쩍 드는 것이었어요. 끌려 온 인사들이 모두 심하게 고문을 당했는데 만일 나만 고문을 안 당했더라면 미안해서 큰 일 날 뻔 했어요(웃음). 그렇게 자신이 고문을 당하고 나니, 제가 그 전부터 벌여 온 고문 폐지 운동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지고 또 고문 정권의 퇴출과 관련자의 엄벌이 반드시 실현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한층 더 굳어지더군요.
백지영 : 저희가 학생 입장으로서 느낀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교육 정책이 자주 바뀌고 비효율적이고, 획일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배움이라는 게 목적이 있잖아요. 그 목적을 자꾸 잃어가는 것 같은데, 한 변호사님께서 생각하시는 배움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배움이라는 것은 뭐냐. 사람을 사람답게 가꾸고 이웃과 세상을 위해 올바르게 살아가는 일꾼을 길러내는 것이 배움의 목표이자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교육이란 말은 가르친다는 교(敎)자와 기른다는 육(育)자로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사람을 사람답게 기르기 위해서 가르치는 교육은 없고, 오로지 시험을 치기 위한 학습만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시험 기술을 교습하는 것이 교육으로 되어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결국 육(育)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학교 수업을 통해 올바르게 육성되는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기에다 정부가 바뀌고 장관이 바뀔 때마다 제도나 방침이 조석으로 변하고, 정권 차원의 색깔이 교육 현장을 오염시키고 있어서 교육의 중립성도 흔들린 상태입니다. 교육자 정신도 많이 퇴색해서 걱정스럽고요. 어느 모로 보나 이 나라 교육계는 일대 변혁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봉수 : 이제 두 가지정도만 더 질문을 하려고 하는데요. 변호사님께서 학창 시절에 특별히 기억나는 은사님이 계시는지? 어떤 면에서 좋은 은사님으로 기억을 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대단한 감동스토리는 아니지만, 두 분의 은사가 생각납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영로 생님이 계셨어요. 사범학교 갓 졸업 하고 산간 벽촌에 있는 우리 학교에 오셨는데, 틈만 있으면 산과 들에 나가셔서 식물 채집을 하시더라고요. 그냥 취미로 모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져다가 말리고 표본을 만들어 소중하게 간수 하시더군요. 하숙집에 가 보았더니, 방 안이 온통 채집해 온 식물 더미와 그 표본 무더기로 가득 차 있어서 놀랐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가끔 일본인 교장하고 싸운다는 소문이 돌고, 간혹 우리 어린 학생들도 우연히 그런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어요. 왜 싸우는지 처음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선생님께서 남달리 반일 민족주의 사상이 강해서 더러 불복종 반항을 하신 때문이었습니다. 뒤늦게야 그런 눈치를 알아차린 우리는 비록 철부지 심정이지만 그 선생님을 좋아하고 존경하기까지 했어요. 선생님께서는 훗날 경기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이화여대 교수가 되셨는데, 세계적인 식물학자로 알려질 만큼 학문적으로 큰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제가 서울 와서 검사와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선생님을 다시 뵐 수가 있었는데, 그 때 두툼한 식물도감과 저서를 주시기도 했지요. 대학에 와서는 경제학을 강의하신 송주영 교수님이 생각납니다. 그 어른은 다정하고 따뜻한 면보다는 엄격하고 호되게 공부를 시키는 실력 있는 선생님으로 유명했습니다. 한국 전쟁 휴전 전후인 1953년 당시의 한국 사회는 혼란스럽고 피폐하여 대학 내의 면학 분위기도 어수선할 때였는데, 강의 시간에 그렇게 엄격할 수가 없었어요. 저학년 때는 합동 강의실에서 수강을 하다보면 옆 사람과 잡담도 하고 그러잖아요? 그러면 그 걸 그냥 넘기지 못하고 단하로 내려와서 학생의 얼굴을 출석부로 때리기까지 하셨지요. 그처럼 좀 지나치기는 했어도 학생들 열심히 공부하도록 열성을 다하신 점에 대해서는 모두들 송 교수님을 존경하게 되었지요. 경제학 원서 강독 시간에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으로 알려진 ‘제국민의 부’라던가, 데이비드 리카도의 ‘지대론’의 원서를 발췌해서 공부했어요. 예습 안 해서 못 따라오면 막 야단을 치셨어요. 나중에 서강대학 교수로 오셔서 정년 퇴임하셨는데, 실력 있고 엄한 교수로서 오래 기억될만한 스승이십니다.
방민정 : 요즘 뉴스에도 학교 폭력 문제가 많이 나오고 있고 학교 폭력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가해자에 대한 징벌을 더 엄하게 해야 한다는 엄벌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학교 폭력의 원인 및 해결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어려운 문제입니다. ‘잘못이 있는 학생에겐 벌을 주어야 하는데 뭐 징벌도 못하게 되어있으니까 학교 폭력이 더 늘러난다.’ ‘요새 학생 인권을 존중하다 보니까 교권이 상실 되어서 학내의 폭력을 막을 수가 없다’ 이런 말들을 하는데 나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학생 인권 같은 건 무시하고 교사가 징벌이라는 이름으로 학생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도 학생 폭력의 사례는 왕왕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학교 밖에 널리 알려지거나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되지 않고 넘어갔는데 요즘은 여차하면 금방 신문 방송 SNS에 공개가 되죠. 그러니까 학생 폭력을 학생 인권의 존중과 교권 약화의 탓으로 돌리려는 그런 의견은 타당치 않다고 봐요. 그렇다고 예방과 선도라는 모범 답안 같은 대책이 실효성을 담보한다고 보기도 어렵지요. 선생님들이 사랑으로 잘 타이르고 교육 현장의 문제점을 바로잡는 것이야 기본의 기본이 터이지만, 징벌이 폭력성을 수반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선생이 학생의 뺨을 때리고 발로 차는 그런것은 반대하지만, 남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상처를 입혔거나 큰 피해를 준 학생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교육적인 불이익을 주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봅니다. 상습적이거나 죄질이 나쁘거나 피해가 너무 크면 형사 처분이 불가피한 경우도 있겠지요. 물리적인 징벌은 안 되더라도 그 밖의 다른 방법, 예를 들어서 공개적인 경고를 하고 기록에 남긴다든지 본인이나 학부모로부터 서약을 받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평생 상처가 되는 것이 가혹하다면 가령 일 년 동안 별 탈 없이 잘 지냈다면 그 기록을 말소해주는 방식 같은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지요. 교육 현장에 효험이 통하는 대책은 물론 학교 선생님들이 잘 아시겠지만, 답답해서 생각해낸 ‘학조부모’의 짧은 생각입니다.
이봉수 : 마지막으로 저를 포함한 기독교사들이 오늘날의 교육 현실에서 어떤 소명을 갖는 것이 필요할까요?
학생들이 비록 성인의 차원과는 다르지만 그들 나름대로 이세상의 이런 저런 고민과 고통과 아픔을 다 겪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감수성도 예민하니까 반항심이 강해질 수도 있겠지요. 쉽게 낙담하거나 비관할 수도 있고, 반대로 희희낙락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심리 상태와 고민을 이해하고 감싸주고 어루만져줄 수 있는 따뜻한 손길이 결핍되어 있지 않은가 싶어요. 부모나 선생님이나 이 사회가 그런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들 고민 없이 자란 사람 없다. 너만 겪는 것 같지만 누구나 그런 아픔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러면서도 다 공부 할 만큼 하고 자기 본분 다했다. 너희들이라고 못할 것 없지 않느냐.”난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요즘 학생들의 발랄하고 생동감 있는 기질이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다고 자신의 본분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고 싶어요. 인생 만사에 때가 있는 법인데, 학생 시절엔 역시 공부 열심히 하는 것이 기본 아니겠어요?
신앙을 가진 선생님들에게 제가 감히 무슨 말씀을 드리겠어요? 그래도 굳이 한 말씀 드리자면, 말씀으로 만이 아니라 실천으로 자신의 신앙을 증명해주심으로써 동료와 학생들이 감동을 체험하도록 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사실 ‘선생님’이라는 호칭과 직분의 범주 안에 이 세상의 모든 신성함이 다 들어있다고 하겠습니다. 거기에다 더하여 하나님 신앙을 가진 선생님이라고 하면 더욱이나 신성한 존재가 아니겠어요? 요는 우리가 다 아는 대로 ‘행함이 있는 믿음’이냐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목사님들이나 장로님들이 기도나 설교를 유창하게 잘 한 대서 사람들이 감동하고 하나님을 따르고 올바른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듯이 신앙을 가진 선생님들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참된 신앙인의 본을 보여주고 가르치는 것, 그 이상의 교육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에서는 지식의 전수나 학습 효과도 중요하지만 인성(人性)과 가치관을 올바르게 함양하는 일이 그에 못지않게 절실하다는 점, 누구나 공감하는 바가 아니겠어요? 그러기에 하나님의 진리와 의를 받드는 선생님들이 말과 글로 그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에 그치지 않고 그 진리와 의를 따르는 실천을 통해서 믿음을 실증해 보인다면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육이 되지 않겠습니까?
언제나 권세 없고 가난한 서민들과 항상 가까이 있는 삶을 소망한 한승헌 변호사. 그의 삶의 이야기를 제자들과 함께 들으면서 나는 우리 교실에 있는 가난하고, 이 사회에서 소외 받을 수 있는 몇몇 학생들의 얼굴이 생각났다. 기독교사의 삶이란 가난하고, 소외 받고, 고통 받고 있는 학생들과 언제나 함께 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진리와 믿음을 실증해 보이는 삶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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