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만나고 싶었습니다

아이의 눈으로 수업을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서근원 교수)


서근원 대구 가톨릭대학교 교수

 

아이의 눈으로 수업을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인터뷰 ㆍ 홍인기

 

서울교대를 졸업하시고 평교사로 근무하신 경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교사 시절 이야기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1988년에 초등 교사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때는 매달 시험을 봤습니다. 매월 15일쯤 되면 참고서 회사에서 시험지 한 뭉텅이를 교실로 보내 주었습니다. 과목별 모의 시험지죠. 선생님들은 수업 시간에 아이들에게 그 시험지를 풀게 하고, 월말 시험은 대부분 그중에서 출제했습니다. 따라서 아이들은 그 참고서 전과를 사고 문제집도 샀습니다. 아이들을 문제 풀이 기계로 만들고 있었죠. 이게 무슨 교육인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참고서 회사에서 제공한 시험지를 한쪽에 쌓아 두었다가 쓰레기통에 다 버리곤 했습니다.

저는 수업할 때 정해진 시간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아이들의 상황에 맞추어 수업 속도를 조정했습니다. 그때는 경영록 검사를 매주 받았는데, 거기에 매일 시간표 별로 수업 목표를 반드시 적어야 했습니다. 저는 수업 목표를 안 쓰고 아이들이 학습해야 할 주요 내용을 적었습니다. 어느 날 교감 선생님이 불러서 목표를 안 쓴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저는 다음 시간에 아이들이 배워야 할 내용이 더 중요하지 않느냐고 항의했습니다. 학년부장 선생님은 그냥 교감 선생님이 쓰라는 대로 쓰라고 충고했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따르긴 했지만, 나로서는 이중 일이었습니다.

수업할 때 저는 내가 가르치기보다는 아이들이 직접 하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 주제를 두세 시간에 걸쳐서 수업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교장 선생님은 일제 시대에 사범 학교를 졸업하신 분이셨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학급의 쓰레기통 위치도 지정해 주었습니다. 교장 선생님에게는 당연한 일이지만 저에게는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와서 제대로 배우게 하려는 저의 실천과 충돌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아이들은 자라 가는 것에 비해 교사인 나는 정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가 있었습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면 계속 차단당했습니다. 더 이상 안 되겠다는 생각에 전교조 활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전교조 활동은 사회 구조적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데 에너지를 다 쏟고 있었습니다. 저는 사회 구조적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서 학교 내부의 문제가 자동으로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회 정치적 문제와 교사들이 교육 과정을 제대로 만들어 가르칠 수 있는 내적 역랑을 기르는 일은 별개의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사들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그와 관련된 별도의 기구나 모임을 만들어 꾸준히 준비하기 위한 아카데미를 제안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저는 교사로서 정체되는 것을 모임을 통해 극복하려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대학원 진학을 고심하게 되었습니다.

 

교수님은 수업 연구에 있어서 그동안의 연구를 뛰어넘는 독창적인 연구를 해 오셨습니다. 그동안 어떤 고민과 문제의식 속에서 연구를 해 오셨나요?

저는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교육사회학과 교육인류학 사이에서 무엇을 전공할 것인지를 고민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교육사회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육과 관련된 사회적 문제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저에게는 학교 문화에 대한 문제의식이 많았습니다. 문화에 대한 관심은 교대를 다니며 읽은 문화인류학 관련 책의 영향이 컸습니다. 여러 이유로 교육인류학을 선택한 후 제 학문적 고민의 핵심은 타자를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교육인류학을 전공하겠다는 이유는 학교의 비교육적 문화를 변화시키겠다는 이유였는데, 교육인류학은 ‘너의 눈으로 판단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죠. 10년 정도 공부하면서 ‘이해한다는 것이 뭐냐’는 학문적 관심이 깊어 가면서 학교 현장의 문제와는 많은 거리를 두게 되었습니다.

저는 대학원에 입학한 후로 줄곧 ‘교육을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교육을 이해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지’ 등에 대한 대답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박사 과정에 입학한 뒤로 교직을 그만두었고 아내는 휴직한 상황이어서 생계도 책임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박사 과정을 졸업한 뒤에는 한국연구재단의 연구비 지원을 신청했습니다. 한국연구재단에 연구 계획서를 지원하면 3년 동안 약 1억 원의 연구비가 나옵니다. 이 연구에 뽑히기 위해서는 사회적 기여가 높은 분야의 연구 주제를 선정해야 했습니다. 당시 저는 전략적으로 ‘초등학교 수업 문화의 이해와 개선 방안’이라는 주제로 연구 계획서를 제출했습니다.

제가 공부한 바에 의하면, 학교 수업 문화의 변화는 강의나 설명으로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문화란 삶의 습관입니다. 따라서 문화의 개선은 삶의 습관을 바꾸는 일이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바로 워크숍이라고 저는 보았습니다. 직접 해 보는 것이죠. ‘이해와 개선 방안’ 중 ‘이해’는 교육인류학으로 들여다보는 것이고 ‘개선 방안’은 워크숍이었습니다. 그런데 교육의 핵심이 수업이고 수업이 곧 교육입니다. 따라서 수업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교육을 이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학교의 수업 장면을 대상으로 교육을 이해하는 데 적합한 연구 방법을 먼저 체계화하고, 그 연구 방법을 일상의 장면에 적용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교육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 찾고자 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저는 교육인류학자로서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좀 더 명확히 정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연구를 통해 연구자로서의 제 자신과 실천가로서의 제 자신이 결합되었습니다. 학문적 문제의식과 현실적 문제가 결합된 것이죠.

수업 보기와 관련해 교수님은 아이의 눈으로 수업을 보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과정 속에서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요?

제가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2001년에 《우리교육》에 전국 각지의 수업을 관찰하고, 그 수업에 관하여 논평하는 형식의 글을 매달 썼습니다. 그런데 저는 교육인류학자이고, 따라서 수업을 비평하기보다는 이해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업의 처방도 그러한 이해가 기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의사가 환자를 잘 들여다보고 처방해야지, 처방을 가지고 환자를 보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저는 나만의 시각이 아닌 다양한 시각에서 수업을 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그 작업이 제가 의도한 대로 수업을 충실하게 이해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제 몸에 배어 있던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모습이 나타나서 이해보다는 비평으로 치우쳤습니다. 이 시기는 제가 하려는 일에 비추어 보면 실험이고 과도기였습니다. 미진하고 불만족스러웠습니다.

2003년에는 교육과정평가원의 의뢰를 받아서 비슷한 작업을 했습니다. 여기서 저는 수업을 이해하는 일을 제대로 해 보고자 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찾은 것은 수업을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수업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수업과 관련하여 저 스스로 질문을 갖고 그에 대한 대답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이 그러면 안 되는데…’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은 ‘왜 그럴 수밖에 없는가’ 하고 질문하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느 선생님이 교과서 해설식 수업을 한다면, ‘그 선생님은 왜 교과서 해설식 수업을 할까?’와 같은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고 애썼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 학교 체제 속에서 교사들은 국가가 가르치라고 정한 교육 과정과 학생 또는 학부모의 요구 사이에서 딜레마를 겪고, 그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 다양한 전략을 사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작업을 통해서 수업을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졌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교사를 중심으로 교사의 수업을 이해하다 보면 아이들이 사라지는 한계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의 시각은 교사에서 아이들에게로 옮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교육인류학의 관점과 방법에 의해서 수업을 이해하고 개선 방안도 찾아보겠다는 주제를 가지고 학술 연구 재단에다 연구 계획서를 제출했는데, 채택이 되어 청주교대에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연구를 함께 진행한 곳이 삼우초등학교입니다. 그때 삼우초등학교는 처음에는 남한산초등학교를 모델로 시작을 했는데, 수업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방과 후 활동, 특기 적성 활동과 같이 교육 과정 외의 활동을 중심으로 운영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들은 그 일을 하느라고 에너지의 대부분 썼어요. 이 과정에서 수업에 대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낀 선생님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수업을 공개하고 보고하도록 결의합니다. 처음에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하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수업을 많이 본다고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한 시간의 수업이라도 제대로 깊이 보아야 한다고 했지요. 그런데도 삼우초등학교 선생님들은 자기 계획대로 추진했고, 결국 제가 예상한 대로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업을 보고 말하는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제안하고, 삼우초등학교 선생님들과 함께 수업을 보는 눈과 말하는 방식을 바꾸기 위한 공부를 함께 해 나갔습니다. 그렇게 2006년 가을부터 수업을 보고 대화하는 관점과 방법을 정리해서 2007년에 ‘삼우 수업 대화 모형’을 만들었습니다. 그 방법으로 수업을 보고 기록하고 분석하고 대화하니 과거 수업 협의회 때 발생하던 문제가 사라졌습니다. 특히 교사들 사이의 갈등이 해소되었습니다. 그 후로 이런 과정을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아이 수업으로 대화하기’, ‘아이 눈으로 수업 보기’, ‘아이 세상 이해하기’가 만들어졌습니다.

 

‘아이 세상 이해하기’, ‘아이 눈으로 수업 보기’, ‘아이 수업으로 대화하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아이 세상 이해하기’는 아이의 일상적인 말과 행동들, 아이 주변의 사물이나 사람이나 사건 등의 의미를 아이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선생님과 학생이 같은 공간 속에서 같은 시간 동안 머무르지만 그 시공간은 아이와 선생님에게는 그 의미가 서로 다릅니다. 예를 들면 학교의 화장실은 선생님에게는 말 그대로 볼일을 보는 곳이고, 필요한 시간만큼만 머물렀다가 최대한 빨리 벗어나야 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어떤 아이에게 화장실은 안식처일 수도 사교장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화장실은 최대한 빨리 벗어나야 하는 장소가 아니라 가능하면 오래 머무르고 싶은 장소입니다. 따라서 선생님이 아이들을 적절히 지도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의 의미 세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아이들의 행위들을 아이들의 의미 세계와 관련해서 파악하게 되고, 선생님이 무슨 말이나 행동을 했을 때 그것이 아이들의 의미 세계 속에서는 어떻게 자리 잡게 될지, 그로 인해서 아이들이 어떻게 말하거나 행동하게 될지 예상할 수 있게 됩니다.

‘아이 눈으로 수업 보기’는 ‘아이 세상 이해하기’ 작업을 수업으로 한정시킨 것입니다. ‘아이 세상 이해하기’가 아이의 삶 전체를 이해하는 것이라면, ‘아이 눈으로 수업 보기’는 한 시간 또는 두 시간 동안의 삶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수업은 학생이 학습을 하는 것입니다. 학습은 아이들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업을 하기 위해서 선생님은 아이들이 자신의 말이나 행동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이해’라는 말을 쓰면 아이들은 그 말을 선생님의 의미로서 이해하지 않고 자신의 사용하던 언어의 의미로서 ‘이해’라는 말을 수용합니다. 선생님의 모든 말과 행동이 아이에게 그렇습니다. 단순히 아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제가 최근에 관찰한 어떤 아이는 수업 시간에 가만히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시선을 허공에 두는 것 같기도 하는데도, 선생님이 ‘무엇 무엇을 써 봐라’, ‘펴 봐라’ 하면 정확하게 행동했습니다. 교사는 그 아이를 무기력하고 게으르다고 평가했지만 제가 보기에는 달랐습니다. 그 시간은 ‘아파트에서 애완동물을 키우면 안 된다’는 주장에 대한 자기 의견을 쓰는 시간이었습니다. 아이는 교과서가 주장하는 대로 아파트에서 애완동물을 키우면 안 된다고 썼습니다. 수업을 마친 다음에 ‘너 정말 아파트에서 애완견을 기르면 안 된다고 생각하니?’ 하고 아이에게 물어봤습니다. 본인은 길러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안 된다고 써야 쓸 게 많기 때문에 안 된다는 쪽으로 글을 썼다고 했습니다. 쓸게 많은 것을 선택한 이유는 발표를 시킬지 몰라서라고 말했습니다. 수업 시간에는 뭐라고 써야 할지를 가장 많이 고민했다고 했습니다. 이 아이는 교사들의 평가와 달리 멍한 표정에서 계속 고민을 하고 있었던 거죠. 외적인 행동만으로 성급하게 판단해서는 안 되는 아이였습니다. 모든 아이가 그렇습니다. 이처럼 아이의 관점에서 수업을 보면 선생님의 눈으로 본 것과는 전혀 다른 수업이 보이고, 그것을 볼 수 있게 되면, 교사 중심의 일방적인 수업을 하지 않고 아이를 고려하는 방식으로 수업을 하게 됩니다.

‘아이 수업으로 대화하기’는 학교 현장에서 선생님들이 수업과 관련하여 재미있게 대화하고, 그 과정에서 한 가지라도 발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아이들에게 의미 있는 실천적인 대안을 스스로 모색하도록 하는 작업입니다. 특히 이것은 기존의 수업 협의가 관찰자 중심의 일방적인 판단으로 이루어짐으로써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선생님들은 한편으로 수업을 아이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료 선생님들과 함께 대화하는 방법을 익힙니다. 이것은 새로운 종류의 게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게임을 할 수 있으려면 게임의 룰과 몇 가지 게임 기술을 익혀야 합니다. 그것을 익히는 데 적어도 15시간 정도의 실습이 필요합니다. 그 게임의 룰과 기술을 익히고 나면 다양하게 변형할 수 있습니다.

 

사토 마나부 교수의 배움의 공동체 운동이 수업 운동에 끼친 명과 암은 무엇일까요?

우리 학교의 선생님들에게 수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수업에서 아이를 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입니다. 수업 속에서 학생들 사이의 관계를 강조하고, 협력 또는 협동하도록 촉진합니다. 배움의 공동체가 지향하는 것이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실행하는 과정이 얼마나 이론과 일치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맞고 저것은 틀리다는 식으로 수업을 지나치게 정형화하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하나의 처방에 학생들을 끼워 맞추는 방식입니다. 협력 학습이나 협동 학습은 지역 여건이 열악한 경우 잘 안 됩니다. 일제식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발생하거나 한 학생이 주도하고 나머지는 배제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 같지만 참뜻은 모르고 학습의 퍼포먼스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배움의 공동체가 수업에서 아이를 본다고 하지만, 아이의 관점이 아니라 교사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그리고 아이의 다양한 특성과 수업의 다양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가운데 하나의 정형화된 수업의 틀을 일방적으로 부과함으로써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배움의 공동체가 가지는 근본적인 한계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지도 않고, 모든 환자에게 한 가지 약을 미리 처방해서 투여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과거에 우리 교육학자들이 범한 오류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우리나라 교육학자들은 우리나라의 학교 현실과 그 안에 존재하는 아이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외국에서 새로운 교육 이론을 도입해서 교육 과정과 교과서를 바꾸고, 새로운 교수 방법을 도입하여 학교 현장에 적용해 왔습니다. 교사들 역시 새로운 교수법이 유행하면 자기 반 아이들을 충분히 이해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연수장에 가서 돈 주고 사다가 자기 반 아이들에게 적용해 왔습니다. 아이의 관점에서 아이의 세계를 이해하지 않은 가운데 이루어지는 수업 개선은 억지입니다.

외국에서 새로운 교육 과정이나 교수법을 들여오는 것은 늘 선생님을 소비자에 머물게 합니다. 많은 교사들이 남보다 정보를 먼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아는 체하고 군림하려는 것으로 자신의 전문성을 나타내려고 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타인에게 대해 자신을 식민지화 소비자화 하는 것입니다. 배움의 공동체는 수업 개선을 위한 기존의 노력들이 범한 오류를 반복하고 있으며, 그 점에서 우리의 수업 현실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고 봅니다. 배움의 공동체를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과정에 주목하면 그렇습니다. 이 문제를 극복하려면 교실 현장으로부터 새로운 교육 과정과 교수법이 나와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교사가 수업을 개선하려고 할 때, 개인의 능력만으로 안 되는 것도 있습니다. 상황 문제 속에서 힘들 때가 많은데, 교사 개인이 혼자 변한다고 수업이 바뀔 수 있을까요?

변화를 이야기할 때 교사는 제도가 바뀌지 않는 부분을, 정부는 선생님이 안 바뀐다는 이야기로 핑퐁 게임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제도의 변화가 근본적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습니다. 제도적으로 접근하는 부분이 필요하지만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제도의 변화가 소용이 없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진보적인 정부가 들어서서 제도를 바꾸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지만, 이에 대한 현장의 반발로 인해서 결국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교육 정책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사람이 바뀌지 않은 가운데 제도만 바꿈으로써 나타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제도를 바꾸기에 앞서 우리가 먼저 모델을 만들어서 국민들에게 보여 주고, 그것을 방향 삼아서 함께 나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 주세요.

그동안 현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보니 제 공부를 못 했습니다. 제가 연구한 내용을 학계에 알리는 작업을 하려고 합니다. 제 나름의 이론적 기반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정리하고 그것에 비추어서 기존의 이론들을 재해석하여 학계에 소개하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좋은 모델을 만들어 내는 것, 희망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동안 많은 선생님들이 제가 하고 있는 일에 관심은 있었지만 기회가 닿지 않아서 익히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 분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상설적이고 체계적인 연수 과정을 운영하려고 합니다. 그 연수 과정을 통해서 적어도 몇 분이라도 현재의 제 수준 이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제가 없이도 스스로 할 수 있게 말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스스로 서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한 세대는 지나야 우리 학교와 교육이 변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한 세대를 준비하려고 합니다.

 

자신이 걸어온 길에 확신에 찬 사람을 만나기는 정말 드물다. 그만큼 치열하게 자신의 논리를 쌓아 온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교육을 한국의 시각에 의해서 바꾸고야 말겠다는 학문적 의지가 넘치는 분을 만났다. 천천히 제대로 길을 걸어야 한다고 말하는 서 교수님의 말을 들으면서 세상은 빠른 길을 원하고 한방에 해결되는 길을 원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올바른 학문은 늘 생명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 왔다. 내가 서 있는 교사의 자리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던지고, 꾸준히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오신 교수님의 이야기를 좋은교사운동 회원들이 좀 더 귀담아 듣고 함께 실천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