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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 세계를 품다

우간다 에피소드 #8. 선교지에서 아내와 함께(홍세기)

우간다 에피소드 #8. 선교지에서 아내와 함께

홍세기

 

 

이따금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선생님은 뭔가 뜻도 있고 부르심이 있어서 선교지에 다니시지만, 아내 되는 분은 어떠세요. 동의하세요? 어떻게 동의를 받아내시나요?”

  아주 착한 아내가 남편의 뜻을 잘 따라주어 험할 것 같은 선교지 삶을 함께 살아가는지, 아니면 어떻게 아내를 설득해서 함께 다니는지, 혹은 강제로 끌고 다니는지 알고 싶어 하는 질문이다. 위의 세 가지는 모두 나의 경우가 아니다. 국내든 국외든 교육자로서 어떤 선교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서 아내는 나의 선배이고, 오히려 내가 아내의 뜻을 바탕으로 이런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이다. 어디서 어떤 일을 해야 할지는 남편인 내가 제안하고 설명하지만, 교육과 선교에 대하여 나는 늘 아내의 깊은 속마음을 헤아리고 움직인다. 그리고 이 파란만장한 동행에 마음이 크게 어렵지 않았던 것은 시작할 때부터 우리 둘만 아니라 그분도 기뻐하는 결혼 생활을 하자는데 동의했기 때문이다.

 

돌아가실 뻔한 세 번의 경험

  생활 풍토가 다른 선교지 생활 중에 아내가 거의 죽게 되었던 경우가 몇 번 있었다. 처음 파푸아뉴기니에 갔던 25년 전 셋째 아이를 유산할 때 위기를 겪었다. 밤새 아내의 하혈이 심하여 아침에 선교부의 경비행기에 실려 수술이 가능한 병원으로 옮겨진 적이 있었다. 함께 일하던 선교센터의 모든 선교사들이 열심히 기도하며 우리의 회복을 도왔다. 비교적 젊을 때라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들 식의 산후 보양식을 가져오는 바람에 그들이 무엇을 먹으며 산후조리를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다음은 필리핀에서 댕기열과 우간다의 말라리아때문이었다. 열병 퇴치를 위한 약은 간 기능에 영향을 미친다. 저하된 간 기능으로 음식물 섭취를 못하고, 극심한 열로 약해져서 거의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온다. 5년 전 말라리아 때는 이곳 우간다에서 긴급 수송으로 한국으로 돌아가 치료를 하고 와야 했다. 이럴 때면 미안한 마음이 커져서 선교지 외의 대안을 생각하곤 한다. 지금도 여전히 몸은 40kg를 간신히 넘기는 상태지만 감사하게도 별 탈 없이 씩씩하게 우간다 생활을 하고 있다. 

 

 

고생 충만한 아내의 선교지 생활

  처음 선교지의 선교사 자녀학교에서 아내는 초등학생들을 가르쳤. 본래의 직업 정신을 살려서 한국학교 생활 경험이 거의 없는 한국 아이들에게 좋은 한국 선생님이 되어주었다. 한동국제학교에 갔을 때 아내는 기숙사의 24명 아이들을 먹이고 재우며 동시에 교사 생활을 했다. 필리핀에서도 외국에서 온 20여 명의 선교사 자녀들을 돌보느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했다. 낯선 타국에서 트라이시클을 타고 장을 보며 식사 준비, 빨래와 청소, 간식 준비에 생활지도까지 다 해내는 철인이었다.

  나는 아내에게 학교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맡기고 엄청나게 고생시키는 몹쓸 남편이 되었다. 대상포진, 심한 두드러기 등이 몸이 약해지고 면역력이 떨어지면 드러나는 병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필리핀 이후 다시 떠나는 미지의 선교지를 위해 아내는 틈틈이 한국어 교사 자격 공부, 퀼트 전문가 공부를 해 두었고, 지금도 그 바지런한 몸으로 현지인 여성들의 생존을 위해 일을 하고 있다. 남편의 무모한 도전을 옆에서 함께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는 일이 이렇게 가혹하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진즉 물러섰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누구도 모를 일이었고 결과적으로 아내의 인생은 이렇게 험하게 되었다.

 

캉가 퀼트 공방 운영

  아내는 이곳 우간다에 오면서부터 부녀자들의 퀼트 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공방 이름은 ‘Kanga 퀼트이다. 현재는 20명 정도의 직원이 있는 중소기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매일 아침이면 마을 이곳저곳에서 서둘러 이 직원들이 우리 집으로 모인다. 천을 자르는 팀, 자른 천을 배열하며 색깔을 맞추는 팀, 그리고 손바느질을 하는 팀이 있다. 바느질 재료를 사고 바느질한 물건들을 배달하는 일은 나도 돕는다.

  부녀자들이 돌아간 저녁이면 책상 앞에 앉아서 제품 개발 연구가 시작된다. 시작부터 재봉틀로 하는 바느질은 고려하지 않고 손바느질만 한다. 재봉틀을 살 수 없는 형편의 부녀자들이 대부분인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손으로 하는 바느질에 인간미와 경쟁력이 오히려 더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한국에서 오는 손님들에게는 늘 바느질 재료를 구해 오고, 만들어진 제품을 한국으로 운송해 달라고 부탁한다. 20명이 만들어내는 바느질 소품의 판매도 큰 과제이나 지금은 우간다에 있는 한인들에게 인기 품목이 되었고, 한국에서도 여러 사람이 좋아해 주어서 주문 물량을 만들어내기에 바쁜 실정이 되었다.

 

 

 

 

바늘 하나의 기적

  농촌사회에서 생활하는 여성들의 삶은 그야말로 생활 개선에 희망이 없다. 가난한 농가 생활에 농사, 육아, 나무하기, 빨래하기, 물 긷기 등 가정 살림에 자녀들 학비 마련까지 다 해내야 한다. 아름다움을 여자들이 가진 최선의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어떨 때는 몸 씻을 비누 한 장 없는 경우도 있다. 조혼과 조기 출산으로 그만둔 학업은 형편상 계속할 수도 없으며 취업은 언감생심 생각할 수도 없다. 남편들은 아내를 소유물로 생각하여 인간적인 고려를 거의 하지 않는다. 

  캉가 퀼트 공방에 오는 사람들은 모두 아름답다. 아니 아름다워졌다. 바느질로 번 돈으로 자신을 치장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와 자부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표정도 밝고 즐겁다. 작은 바느질 땀을 이어서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는 학비도 마련할 수 있다. 제대로 된 엄마 역할, 딸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공방에서는 각각 직원들이 만들어내는 제품의 수에 따라서 공임을 준다. 손이 빠른 숙련공이 하루 15천 우간다 실링(6천 원)을 받을 수 있다. 젊은 남자들 임금이 보통 1만 우간다 실링(4천원)인 것에 비해서 많은 돈이다. 이곳 부녀자들이 할 수 있는 일로는 최선의 업이다.

 

여성 선교사들의 헌신

  내가 있는 이곳에는 우리 대학교 말고도 지역사회에서 일하는 여러 선교사들이 있다. 현지인 학교 운영, 신학교 및 지역 센터, 지역사회 개발, 고아와 AIDS에 걸린 사람들 돌보기, 고용증진을 위한 카페 운영 등이다. 이분들은 주일 오후가 되면 우리가 사는 마을의 작은 교회로 모여 나눔을 가진다. 거의 공동 운명체 같은 한인 선교사 사회다. 주일 오후 경건회와 음식 교제를 마치면 남자들은 운동장으로 나가고 여성들은 아내가 운영하는 퀼트 공방으로 모인다. 공통적으로 여성들이 바느질을 좋아하는 것도 신기한 일이지만 이분들이 모이면 웃음소리가 마당 너머까지 들린다. 선교사역의 고단함을 잊고 잠시의 쉼을 이렇게 갖는다. 뭔가 전쟁을 치르듯 승패를 가리는 운동을 하는 남자들과 달리 여성들은 바느질은 물론 다양한 대화를 나누며 관계를 돈독히 한다. 

남자들은 그저 여성들이 하자는 대로 따라서 하면 평화와 결속이 유지된다. 남자 혼자 일하는 사람들을 거의 보지 못한 반면, 여성 혼자 일하는 경우는 흔하기도 하고 성공적으로 사역을 해나가는 경우가 많다. 먼저 만들어진 남자보다 나중 만들어진 여성이 우월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가정과 사회를 지키는 것은 늘 여성들이다. 내 아이들도 장성한 지금까지 엄마와 의사소통이 편하다. 홀로되신 시어머니에 대한 고려도 아내가 훨씬 세밀하게 한다. 어머니와 아내의 관계는 내게 늘 기이하다.

 

 

길치 아내의 쉼터

  내가 아내를 위해서 하는 일은 그나마 그녀의 쉼터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낮에는 무조건 집을 비워서 혼자 뭔가를 할 수 있게 배려(?)한다. 아내의 쉼을 위해 이따금 함께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간다. 절대 길치인 아내는 내가 어디로 차를 몰고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옆에 앉아 있다. 어디로 가는지는 별로 상관없다. 나와 함께 있기만 하면 된다. 일과를 마치고 함께 잠자리에 누울 때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안도하는 것 같아 감사하다. 아내가 이야기하면 나는 그저 알아들었다고 동의해 주면 된다. 이따금 추임새를 넣으면 더 신이 나서 이야기를 한다. 일하다가 생긴 문제나 요청사항을 해결해 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무리한 것을 부탁하지도 않거니와 약간만 몸을 움직이는 것으로 그녀는 충분히 나의 사랑을 확인한다. 나는 남편으로서 이 정도의 역할을 하면서 얻는 은혜가 엄청나다.

  결혼 40년 동안 나는 적어도 28,000번의 끼니를 얻어먹었다. 나이 들어 잘 관리해야 하는 건강도, 인간관계도 이곳에서 하는 일에 대한 안정감도 모두 아내로부터 온다. 앞으로 얼마나 더 아내의 은혜를 입고 살아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나는 기회가 되는대로 이런 우회적 방법으로라도 감사를 표현해 두어야 한다. 아내는 이런 것도 다 알고 있으면서 그냥 넘어가 준다. ‘1%의 남자만 신이 직접 구제해 주고, 나머지 99% 여자를 통해서 구원된다.’라는 말이 있다. 물론 나는 99%의 남자에 해당한다.

 

홍세기 우간다 쿠미대학교에서 좌충우돌 일하고 있다. 미래를 과거보다 더 실제라고 여기며 오늘을 살려고 노력 중이다. 아내 강학봉은 퀼트로 부녀자들의 생존에 열심을 쏟고 있다. 가족으로는 한국에 어머니, 딸 하늘과 사위, 손주 둘, 그리고 음악 활동을 하는 아들 이삭이 있다. ukarump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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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goodtcher.tistory.com/entry/우간다-에피소드12-선교사-그리고-그-자녀들MK홍세기 [분필로 그리는 천국: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