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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 세계를 품다

우간다 에피소드#12. 선교사, 그리고 그 자녀들(MK)_홍세기

월간 <좋은교사> 3월호

선교사, 그리고 그 자녀들(Missionary & Missionary Kids)

 

홍세기

 

아들, 가수 홍이삭

아빠, 선교사 자녀는 그냥 돈 없고, 외로운 아이들일 뿐이에요. 가난한 떠돌이들이죠.”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는 나의 질문에 아이가 한 대답은 지금도 내게 생생하게 남아 있다. 미국에서의 1년 공부 후 부모를 만나기 위해서 필리핀에 온 둘째 아들 이삭이가 한 말이다.

아이는 부족한 학비와 비뚤어진 턱 때문에 떠난 지 1년 만에 한국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냐는 나의 질문에 이삭이는 친구를 들어 자신의 처지를 에둘러 말했다. 10년 전의 일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자녀의 삶에 대해 대책 없는 부모였다. 공부는 다 못했으나, 자신이 선택한 음악의 길에서 스스로 뭔가를 해 보려는 시간을 지난하게 보내던 아이였다. 그런데 엊그제 끝난 싱어게인3에서 많은 분의 응원으로 우승하였다.

 

부모가 잘 모르는 아이의 음악세계

아이들이 어릴 때는 가족이 모두 선교지에서 함께 지냈지만, 대학생이 된 이후 10여 년은 우리 부부 둘만 함께 지냈다. 그래서 나는 정확히 내 아이 이삭이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지, 어떤 음악 세계를 구축하며 지금까지 지내왔는지 잘 모른다.

몇 해 전 슈퍼밴드에 출연했을 때도 우리는 우간다에 있었다. 지인들이 더 열심히 아이의 TV 출연 장면과 언론의 내용을 들려주었기 때문에 분위기를 파악하는 정도였다. 이번에 참가한 싱어게인3에서도 우리 부부는 경연 마지막 공연에 겨우 한국에 도착했다.

 

 

아이가 블로그에 써 놓은 글도 나중에서야 확인하며 얼마나 애를 쓰며 몇 개월간의 경연에 참여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경연 마지막 날 방청석에서 우리 부부는 외롭고 돈도 없는 아이의 인간 승리같은 장면을 보았다. 일등 했다는 가수가 내 아들임에도 관객 수준의 어색한 축하 장면을 연출할 수밖에 없었다.

 

부실한 부모의 선택

사실 우리는 아이의 음악 공부를 더 잘 뒷받침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2009년 이삭이가 음악학교에 공부하러 가기 위해 오디션을 본다고 말할 때 나는 박수를 쳤다. 아이 스스로 그 음악의 길을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는 아이가 음악을 공부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비인 나도, 아이 자신도 확신이 없었다.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음악을 특별하게 잘하는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부모로서 음악적 역량을 성장시킬 어떤 도움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 들어간 일반 대학 생활을 통해서 아이는 음악 외에 다른 것을 추구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고, 옆에서 보는 나 역시 그랬다.

 

대학 지하실과 거리에서, 친구들과 음악으로 쿵쾅거리다가 휴학을 한 상태에서 버클리음대 합격 통지를 받았다. 기왕 하려면 다니던 학교는 아예 그만두고 떠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하면서도, 나는 직무유기 같은 선택을 했다.

떠나는 아이에게 학비와 생활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의 뒷바라지와는 상관없는 필리핀 마닐라 한국아카데미로 갔다. 그리고 1년 후 지원금이 더 이상 없어서 군대에 가는 것이 좋겠다며 공부하던 아이들 불러들였다. 한국에 온 아이는 또다시 쉽지 않은 생활을 스스로 해나가야 했다.

 

 

아이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삶

우리 부부가 선교사 자녀를 가르치겠다고 나선 것은 1998년 파푸아 뉴기니에 가기 이전부터였다. 뜻밖의 큰 은혜를 받고나는 방학이면 선교사 자녀 캠프의 교사를 한답시고 여기저기 다녔고, 급기야 한국을 떠났다. 그러면서도 나는 자녀들을 고려하는 일은 늘 우선순위에 두지 않았다. 이런 시원치 않은 태도는 파푸아 뉴기니에서 선교사 자녀들을 가르치고 귀국하던 2001년 이후 아이에게 실제적인 어려움을 주었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학교로 복직한 우리 부부는 둘째 이삭이를 외롭게 두었다. 또래의 남자 아이들과 어울리기 어려웠던 아이는 혼자서 자신의 음악 세계와 춤을 구축해 갔다. 외로움과 소외를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파푸아 뉴기니에서 그렇게 즐겁게 음악 활동도 하고, 산과 들에서 친구들과 마음껏 뛰놀던 아이가 한국에 와서 컴퓨터와 거울 앞에서 외로운 시간을 보냈다. 푸른 초원을 그리워하던 아이는 온갖 음악 세계를 탐구하며 그 시기를 보냈다. 거기에는 부모의 무지와 무관심이 한몫했다.

 

낯선 정체성을 지닌 아이들

내가 선교지에서 만난 아이들 대부분은 부모의 자녀 양육 태도에 불만을 표시했다. 선교지를 이동할 때마다, 함께 지내던 친척과 친구들을 떠나야 했던 아픔. 자식이라는 이유로 부모가 선택한 선교지에서 낯선 이방인으로 생활해야 하는 존재. 어디에서나 낯선 타인이라는 감정과 더불어 가진 것이 없기까지 한 궁핍한 생활.

 

사람들은 외국에 살면서 해당 국가 언어뿐만 아니라 영어도 잘해서 좋겠다고 말하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중간한 사람. 한국에 다시 돌아와도, 너무 많이 변해버려서 적응하기 어려운 상황. 낯선 정체성을 지닌 한국인이 된 자신을 보면서 가지게 된 불안.
선교사인 부모에게는 선교적 과업이 항상 우선순위에 있으므로 언제나 두 번째가 되는 박탈감. 때로 부모들의 우선순위에서 마지막으로 밀려나 겪는 외로움과 자살 충동. 여러모로 정서적 아픔을 가진 아이들이 청소년기 선교사 자녀들이다.

 

다민이의 질문과 대답

선생님, 선생님 같은 분이 왜 여기까지 와서 우리를 가르치세요?”

 

우리 같은 존재를 위해서 한국에서의 모든 일을 접어두고 선교지까지 올 이유가 있었냐는 다민이의 질문이다. 태어나자 곧 파푸아 뉴기니에 와서 고등학생이 된 다민이는 이후 문집의 글을 통해서 스스로 이 질문에 대답을 했다.

 

온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한 아이를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 가능하다.’ 내가 이 아이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으나 나는 그냥 그들과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에게 위로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첫 선교지로 발걸음을 뗀 지 20년이 지난 지금, 내가 가르친 선교사 자녀들은 넓고 다양한 영역에서 상당히 괜찮은 청장년들로 자라주었다.
낯선 환경과 사람들과 살아야 했고 다양한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성장해가면서 더 잘 지내고 있다. 그때 내게 힘을 준 다민이는 지금 기후 위기에 대한 대안을 만드는 국제기구에서 일하느라 영국에 거주하고 있다.

 

광야에서 함께 있어 주기

나는 누군가가 내게 좋은 교육의 조건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한다.

광야에서 함께 있어 주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교육하기 위해 하나님이 택한 교실은 광야였다. 신명기 8장 초반부 성경에 따르면 겸손을 가르치기 위해서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광야가 필요했다. 그야말로 모래와 자갈, 더위와 추위만 있는 곳이다. 생존도 어려운 그곳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좋은 교육 장소였다.
이집트에서 400년 동안 쌓인 노예근성을 없애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알려줄 장소, 그들에게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장소가 광야였다. 그 광야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계셨었다.

 

선교사 자녀들에게 선교지는 견뎌내야 할 광야이다. 그곳에서 생존을 터득한 후 생명력 있는 존재가 되고, 이후 얻게 되는 모든 것에 감사하며 부모처럼 다시 소명을 따라가는 삶을 살게 된다. 부모에게 섭섭했던 마음은 이내 존경으로 변하고, 부모의 사역을 도우며 잇고 싶은 마음도 갖는다.

그러나 자녀들이 광야 생활을 통해 이렇게 변화되기까지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적절한 나이에 적절한 교육을 받아야 하고, 필요한 때에 의미 있는 타인이 옆에서 그들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함께 겪어주어야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모세가 필요했던 것과 같다. 특별히 한국인 선교사 자녀들에게는 한국에서 온 선생님이 필요하다.

 

부모 이외에 청소년기를 같이 고민하고 방황을 이해해 줄 선생님과 학교. 그런 학교까지 기대하는 것은 그동안의 한국 선교 역사로 볼 때, 언감생심 그야말로 욕심인 것을 안다.

매우 소박하게, 그저 같이 있어 줄 선생님이 이들에게 필요하다고 나는 말한다. 선교사 자녀들이 어려움을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모국어 활용 능력의 신장을 통한 정체성확립과 자신을 지켜 낼 수 있는 신앙, 그리고 튼튼한 인간관계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온 선생을 고마워하는 부모 선교사들

나는 복이 많은 교사 생활을 해 왔다고 생각한다. 나를 사랑하고 자녀 삼아주신 그분을 감사한 마음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그때, 선교사 자녀들이 내게 보였다. 그리고 내가 만난 그 아이들은 내게 여러모로 큰 복이 되었다. 내가 그들 곁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 귀한 아이들이 내 곁에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내가 드린 것이 작음에도 나는 영광스럽게 이 아이들의 부모가 되고 선생이 될 수 있었다.

 

파푸아 뉴기니, 한국의 한동국제학교, 필리핀의 마닐라 한국아카데미, 그리고 선교지를 찾아다니면 만났던 그 아이들이다. 그들의 부모는 힘겹게 타 문화와 사람들에게 적응하며 기를 써 일하느라 정작 자기 자녀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몰랐다. 그래서 선생인 내가 그곳에 있으면서 일어난 자녀들의 변화와 성장에 대해서 지금도 감사를 표현한다.

별로 한 것 없이 아이들과 놀기만 하다 온 것 같은데, 자신과 아이들을 위해 일생 은혜를 끼친 사람으로 알고 지금도 고마워한다. 아마도 내 아들 이삭이에게도, 누군가 나 대신 그런 역할을 해주었을 테다. 선생님, 목사님, 선교사님, 때론 친구들.

 

내가 이 길을 계속 가야 할 이유

10년 전 그때로 돌아가 다시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나는 내 아이 학비 마련을 위한 일을 찾기보다 선교지로 간한다고 할 것이다. 충분히 돕지 못한 것은 미안한 일이나 내가 가야 할 길이었기 때문이다. 고맙게도 아이는 그때 나의 선택에 큰 상처가 없다. 돈도 없고, 외롭고, 턱도 비뚤어져 노래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는데도 괜찮다고 한다. 단단해졌고 믿음직해졌다. 고맙게도 스스로 그렇게 커 주었다.

 

아들이 이렇게 성장하고 있기에 나는 아프리카에 계속 있어야 한다. 힘에 부쳐서 하던 일을 손 놓고 싶을 때가 있어도 이를 악물고 선교지에 있는 이유는 나는 내 아이들에게 그때와 같은 아버지여야 하기 때문이다. 어디에 있든 나는 내 아이 이삭이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이삭이의 우승으로 선교사 자녀들이 큰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우간다에서 같이 일하는 선교사들이 얼마나 열광을 하며 응원을 하고 있었는지 내가 미안할 정도이다. 이삭이의 목소리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된다니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가. ‘돈도 없고 외로운 사람들일 뿐이라던 마음을 위로해 주시듯 만 명도 넘은 분들이 이삭 토스트팬카페 회원이 되어주셨고, 상금도 주셨다. 아비의 덕으로 된 것 하나 없으니 나는 자랑할 것 없는 부모이다.

그동안의 자녀를 향한 미안한 마음과 큰 걱정을 이제 넘치는 감사로 바꾸려 한다.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이삭이를 응원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일부 사진출처 : JTBC 싱어게인3, 뉴스룸)

홍세기, 강학봉  우간다 쿠미대학교에서 6년째 일해 왔다. 원고를 쓰는 지금은 한국에 잠시 체류하고 있는 중이며, 텔레비전에 나온 덕분에 과거 동료교사들과 제자들이 연락을 해와서 소식을 주고 받느라 분주한 생활을 하고 있다. 아내 강학봉은 양눈 백내장 수술 후 회복 중이다. ukarump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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