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만나고 싶었습니다

칼 크리스티안 에기디우스

칼 크리스티안 에기디우스 (Karl Kristian Aegidius 덴마크 자유 교사 교육 대학 은퇴 교수 )

덴마크 자유 학교 교사로, 자유 교사 교육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다 1997년 은퇴하여 지금은 덴마크 자유학교협회 국제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부모님도 교사였고, 그의 아내도 교사였으며, 그의 아들도 현재 자유 중등 학교에 교사로 있다. 지난 좋은교사운동 북유럽 탐방단에 길잡이가 되어 주어 덴마크 자유 교육의 힘을 경험하게 해 준 인연이 있다



평등의 땅 위에 별을 띄우다


인터뷰  한성준,  사진 송칠섭,  번역 김종훈



어떤 계기로 교사가 되셨고, 교사로서의 삶은 어떠셨는지요?


   저의 아버지는 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셨고, 어머니도 교사셨습니다. 그래서 학교와 교육을 주제로 한 대화는 우리 집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젊은 시절, 고등학교(김나지움)를 졸업하고 나서 사실 저는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짧은 수습 기간을 거치는 동안 그 일이 저에게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950년대 당시, 덴마크의 시골 지역에는 교사의 수가 매우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소규모의 2학급 학교에 지원하여 유일한 교사이자 교장으로  6개월간 근무를 했습니다. 그곳에서의 생활이 만족스러울 만큼 성공적이지는 않았지만 이 경험을 통해 저는 교사로서의 ‘소명’을 발견했습니다.

그 후 덴마크 교육 시스템이 나아가야 할 지향점을 발견하기까지 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약 2년 남짓 교외 지역에 머물기도 했고 3년 정도 소규모 농장을 경영하기도 했습니다. 군대에도 다녀와야 했고, 학부모들과 함께 학교를 설립하여 약 7년간 아내와 함께 자유 학교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7년간은 대학에서 역사, 언어, 문학을 공부했으며, 초등학교에서부터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교에서 여러 과목들을 가르쳤습니다. 마지막으로 1976년에 자유 교사 교육 대학(Free teacher training college)에서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1997년 그곳에서 은퇴했습니다.



 덴마크의 자유 학교는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떤 과정으로 발전해 왔나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184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매우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당시 영적(종교적), 국가적, 사회적, 정치적인 대중 운동이 덴마크 전역을 뒤덮었고, 그 결과로 1849년 절대 왕정이 평화롭게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났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자유 민주주의 의회가 수립되었습니다. 새로운 국회를 구성한 모든 정당들은 민주 시민의 정치 참여를 위한 필수적인 전제 조건으로 보다 발전되고 더 나은 교육과 계몽이 필요하다는 점에 동의하게 됩니다. 그래서 공립 학교뿐만 아니라 사립 교육 기관들에 대해서도 재정적으로 지원을 해야 한다는 법률을 통과시킵니다. 당시 시골 지역에 있었던 공립 초등학교들은 교사의 수준, 시설 여건, 지역의 관심이나 재정적 지원 등이 매우 열악했기 때문에, 1852년 이래로 많은 지역의 부모들이 자체 조직을 결성하여 그들의 자녀들을 위한 자유 학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목사이자 국회 의원, 시인이자 철학자였던 그룬트비( Nikolaj Frederik Severin Grundtvig, 1783~1872)와 자유 학교(the Free school)의 교사이자 시민 대학(Folk High school)의 교장이었던 크리스텐 콜(Christen Mikkelsen Kold, 1816~1870)이 교육과 종교에 관하여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농촌 지역의 젊은이들을 교육하고 일깨우기 위해 각 지역의 선각자들이 농민 대학(Peasants' High Schools)을 설립하게 되었고, 이 학교가 훗날 시민 대학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1850년부터 1920년의 기간 동안 어린이들을 위한 자유 학교와 성인들을 위한 시민 대학이 생겨났고, 1879년 이후 14~18세의 농촌 가정의 소년 소녀들을 위한 자유 중등 학교(After school)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들 학교들은 지역의 자치 정부 위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감독을 받게 되면서 공교육 제도를 보완하고 국가 전체의 보편적인 교육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이는 교육 기관에 대한 재정적 지원이 주(州) 차원에서나 심지어 지방 자치 단체에서 이루어지도록 함으로써 자치 정부의 전통이 일반에 인식되고 정착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자유 학교에 관한 법이 처음에는 엄격하게 시작하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보다 유연해지면서, 1933년에 이르러 지역의 감독관을 지역에서 스스로 선출할 수 있게 되었고, 일반적으로 교육 기관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가진 지역의 목사님이나 관리들이 이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30년 동안 상황이 많이 변해 현재는 지역 사회와 중앙 정부, 정치가들 간에 불신이 생기면서 시험과 통제를 기치로 내건 사람들의 주장이 자유 학교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덴마크 사회는 농경 중심의 사회로부터 산업 중심의 도시 경제로 변화를 거듭했습니다. 1950년 이후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전체 인구의 4~5% 수준으로 급감한 것을 포함한 여러 상황들로 인해 시민 대학과 자유 중등 학교 역시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 적응해야 했고, 다양한 연령층의 학생들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이 학교들은 여전히 처음에 가졌던 생각 즉, 학생들이 실천적인 기술과 지식을 습득하도록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인격 성숙, 삶에 대한 열정, 자기 인식, 미래에 대한 믿음과 자신의 삶의 목적에 대한 명확한 인식 등을 꾸준히 발전시켜 오고 있습니다. 자유 학교 연맹의 마지막 멤버인 자유 교사 교육 대학(the Free teacher training college)이 1949년에 설립되었으며, 그룬트비와 콜의 교육 이념에 근거하여 오늘날까지도 교사들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150년이 넘도록 자유 학교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 그룬트비와 콜의 교육 철학과 원리는 무엇인가요?


이 두 사람은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가진 교육에 대한 생각과 견해는 상당히 맞닿아 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학교에 이들이 남긴 가치 있는 생각들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교육의 목적은 서로 다르고 다양할 수 있으나, 그룬트비는 ‘삶에 대한 계몽’이야말로 교육의 가장 우선되고도  중요한 임무이자 목적이라고 보았습니다. 또한 그룬트비는 교육의 목적이 ‘전인’을 길러 내는 것이라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즉, 교육은 인간의 정신과 재능의 다양성을 인정함으로써 학생들이 가능한 한 많은 측면의 가능성을 발달시켜 나갈 수 있도록 기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신체와 정신, 지성과 감성, 실천적인 분야와 이념적인 분야 등 다양한 측면들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서구 교육 제도의 힘에 밀려 주목을 받지 못하긴 했지만, 이러한 그룬트비의 아이디어는 근대의 심리학 연구나 교육적 사유를 통해 보다 분명하게 확인되고 깊이가 깊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교사가 자신의 일에 대해 지녀야 하는 태도에 관하여 교사-학생 간의 관계가 평행하다는 생각을 견지했습니다. 또한 학생들은 자질, 재능, 가능성을 타고나기 때문에 교사는 이를 발견하고 그 가능성을 계발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권력과 그에 대한 복종, 혹은 상급자와 하급자의 관계여서는 안 되며, 힘과 권위의 남용이 아닌 학생이 낮은 수준으로부터 높은 수준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끌어당겨 주고 올려 주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학교의 교육적 환경에 대해 그룬트비와 콜은 동일하게 ‘살아 있는 상호 작용’을 강조하였습니다. 즉, 교사와 학생을 교실에서 함께하며 협력하는 존재로서 학습 내용을 함께 결정하는 주체로 보았습니다. 즉, 외부의 권위로 인한 간섭, 규칙, 통제된 교육 과정이나 교수법 혹은 교육 내용이 아닌 상호 간의 도전, 격려, 강화, 영향, 가능성의 발견 등을 중요하게 생각함으로써 교육 활동을 통해 선택된 교육의 목적, 방법, 내용, 그리고 결과에 대해 책임감을 갖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참여를 강조했던 것입니다.

교사의 임무에 관하여 콜이 남긴 교훈적인 말 중에 “먼저 재미있게 만들라 ! 그런 후에 깨우치게 하라 !”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교사가 인생과 사회의 문제 혹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분야의 지식에 대해 이야기로 풀어내거나 표현할 때 학생들이 재미와 흥미를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학생들이 그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더 알고 싶은 동기와 열정을 갖게 되며, 학습에 대한 열정과 새로운 정보, 아이디어, 지식에 대한 감수성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말로 들려지는 이야기’는 지적인 내용에 대해서 통찰력을 갖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일깨우며, 감정과 감성을 자극하고,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며, 그것을 만든 사람들이 담아낸 것 그 이상의 가치를 전달해 주기 때문에 오늘날 자유 학교에서도 여전히 활용하고 있는 중요한 유산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유 학교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한 이 두 사람은 학생들의 지식과 학습 수준을 평가하고 측정하는 것에 대해 많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만일 밭에 씨를 뿌리고 나서, 성장을 촉진시키거나 더 잘 자라게 한다는 생각으로 땅을 파헤쳐 싹을 잡아당긴다면 이는 결국 식물에 해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음식을 섭취하고 난 후 그것을 다시 토해 내면 어떠한 영양도 신체에 흡수되지 못한다.”

형식적인 평가와 시험을 통해 점수를 부여하는 방식을 지양하는 이러한 사상은 오늘날 대부분의 자유 학교와 심지어 자유 교사 교육 대학에서 교사 교육을 받는 동안에도 여전히 적용되고 있습니다. 평가와 시험을 통해 점수를 매기는 것이 아니라 이와 전혀 다른 방식 즉, 열린 토론을 통해 학생들의 학습 정도를 측정 평가하고, 그들의 장점과 단점을 서술식으로 표현하는 평가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유 학교와 공립 학교 졸업생 간의 차이에 대한 통계 자료가 있나요?


아쉽게도 이와 관련된 자료는 없습니다.

(우리나라 현실을 머릿속에 그리며 자유 학교 졸업생과 공립 학교 졸업생 사이에 대학 진학이나 사회적 지위 면에서 무슨 차이나 어려움이 있겠지 싶어 질문을 했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너무도 간단명료했다. 실제 대학 진학이나 성적에 있어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한다.)



자유 학교 졸업생에 대한 덴마크 사람들의 인식은 어떤가요?


자유 학교에 관한 법령에는 자유 학교와 사립 학교를 관리 감독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교육

부에서 제시하는 가이드라인 역시 학생 개개인은 물론 각 학교와 학교의 교육 성과 및 결과에 관한 평가의 방향성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별 학교는 평가 범위와 그 방법을 선택함에 있어 자율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 질문은 일반적인 공립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자유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 어떤 사회적 지위에 있는지를 묻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에 대한 정확한 통계 자료가 나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평균적으로 학생들의 자질에 있어 큰 차이가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공립 학교든 자유 학교든 이 두 학교 시스템을 통해 배출된 사람들 모두가 그들이 경험한 시스템을 최고로 여기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교수님은 자유 학교가 일반 공립 학교와 덴마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우선 자유 학교가 공립 학교에 미친 영향은 몇 가지 측면에서 설명이 가능합니다. 먼저 이념적 혹은 교육적 측면에서 볼 때, 나는 그룬트비의 사상이 덴마크의 교사 교육 대학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18세기 교육 사상에 기초한 자유 학교와 그룬트비의 전통은 인간의 정신 발달을 자연 현상에 비유하면서 이로부터 메타포를 가져와 활용하고 있습니다. 1800년대부터 시작되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교사 양성을 위한 기관을 일컬어 ‘세미나리움’(라틴어로 ‘씨를 뿌리는 곳’)이라 부릅니다. 이것은 교사 교육 대학이 그룬트비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 주는 하나의 사례입니다. 물론 최근 들어 교사 교육을 대학에서 담당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있어 왔고 2008년부터 교사 교육은 ‘전문가 과정 대학'(professional high schools)이라는 새로운 기관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덴마크의 공립 학교 교사들이 “우리는 그룬트비의 나라에서 살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말이 덴마크 국민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교육적 유산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 말은 자유 학교와 공립 학교 모두에 대한 공통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습니다. 자유 학교와 공립 학교는 공히 한 개인이 실천적이고 유용한 지식을 함양할 수 있게 하고, 도덕적으로 성숙하여 사회와 공동체에 책임 있는 구성원으로 성장하도록 하는 교육적 책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학교와 교사, 학교와 가정, 학부모와의 관계에서 긴밀한 협력 관계를 가진 자유 학교의 전통은 약 20년 전 지역 공립 학교가 학부모 협의회 혹은 학교 운영 위원회의 설립과 기능에 관한 규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마지막으로, 교육이라는 영역에 사립과 공립 기관이 공존하는 것은 서로 간의 경쟁을 가능하게 하고,(힘없는 소비자를 길러 내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생산자’를 양성하도록 상호 간 경쟁과 격려) 교육에 대한 독점 가능성을 배제함으로써 덴마크 사회에 바람직한 방향으로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구체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이러한 방식을 통해 자유 학교는 공립 학교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덴마크 사회의 역사적 발달 과정에 자유 학교가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는, 1850년부터 1920년 사이에 있었던 덴마크의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변혁기에 시민 대학의 노력과 성과가 중대한 기여를 했던 사례를 꼽을 수 있습니다.

덴마크 국민, 국가의 부흥과 미래에 대한 그룬트비의 아이디어와 비전에 매료된 독일 킬 대학교(Kiel University)의 덴마크어 및 덴마크 문학 교수였던 크리스천 플로(Christian Flor)는 그룬트비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한 저작 및 강연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이러한 노력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1844년에 덴마크의 첫 번째 시민 대학을 설립합니다. 또한 ‘농민 고등 학교’ 교장이었던 크리스텐 콜에 의해 이후의 시민 대학의 모델이 되었던 교육 기관이 세워지게 되고, 뒤이어 1860년대에서 1870년대를 거쳐 1880년대에 이르기까지 농촌 가정의 젊은이들을 교육하기 위한 학교들이 전국 각지에 세워지게 됩니다.

시민 대학에서는 덴마크와 세계의 역사, 수학과 같은 교과에서부터 실천적 성격의 농업 기술 혁신이나 체육과 같은 다양한 교과가 다루어졌습니다. 학생들의 정신을 일깨워 그들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활발한 토론이 이들 교과에서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룬트비에 의해 소개되고 번역된 북유럽 신화 이야기 같은 특별한 교과들을 다룸으로써 학생들이 시민 대학에서의 교육을 마치고 나면 긍정적인 사고와 용기, 실천적 의지를 지닐 수 있도록 했습니다. 시민 대학은 조국을 섬기고 이웃과 그들 자신의 물질적 정신적 상황을 개선하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교육을 마치면 학생들을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하였습니다.

시민 대학을 졸업하고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간 학생들은 그들의 이상을 현실로 옮기기 위해 민주적인 자치 정부를 기반으로 한 야간 학교, 독서 동아리, 지역 도서관, 자유 학교, 자유 중등 학교, 계몽 학교, 농업 아카데미, 공작ㆍ가사 학교, 자유 수도회, 체육 동호회 등을 조직하여 운영였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경제적인 측면에서 그들은 협동조합, 유제품 공장, 도축장, 가축의 먹이나 농장 관련 기계 등을 사고파는 조직, 농산물 수출 기구, 은행, 신용 조합, 보험 회사 등을 설립하였습니다.

  그룬트비의 사상과 비전, 시민 대학에 의해 영향을 받은 농촌 지역 사람들의 사회, 문화, 경제적 성장은 전국 각지에 자유당 혹은 자유 민주당을 형성하게 하였고, 이는 좌파 정당에 정치적 힘을 가져다주면서 결국 1901년 정권을 창출하기에 이릅니다.

요컨대, 자유 학교 운동의 발전은 전제주의로부터 민주주의 사회로, 과거의 초기 농경 사회로부터 근대 산업 사회로의 이양에 기초를 수립한  문화, 사회, 경제, 정치적 변혁 운동에 중요한 동력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나라의 일반적인 상황과 달리, 덴마크 정부는 자유 학교에 대한 재정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일까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850년에서 1920년 사이 자유 학교 운동이 대중들로부터 신뢰와 인정을 받게 되면서 사회적 필요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지원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자유 학교법에 이러한 지원의 원칙과 실제에 관한 내용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20여 년 동안, 사회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고 특별히 최근 세계 경제 위기와 맞물려 주(州)에서 자유 학교를 지원하고자 하는 경향이 감소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교육계와 교사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학교 방문차 한국에 왔을 때 한국의 초기 경제 성장 시기(1960~1980년대)에 덴마크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특히 1866년 덴마크의 히스 공동체(Danish Heath Society) 설립자 중 하나로 관료이자 엔지니어였던 E. 달가스의 영향이 있었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히스 공동체가 농경지 증대, 농업 기술의 발전, 생산량 증가를 위해 노력한 것이나, 달가스가 덴마크 발전에 사회, 문화, 경제적으로 기여한 바를 한국에 소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덴마크인 입장에서 볼 때 상당히 과대평가되고 잘못 전달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실수가 있었거나 설명하기 곤란한 의도가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몇몇 박식한 한국 교사들로부터 한국 사람들에게 있어 달가스는 본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선구자요 본보기가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나는 그룬트비에 대해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알고 있고 그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덴마크 사회의 발달에 그룬트비와 그의 사상이 미친 영향력과 중요성에 대해 한국 사람들은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았으며, 심지어 저는 “그룬트비는 일종의 사회주의자가 아닌가요?”라는 질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달가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룬트비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달가스가 한국 사회의 창조적인 발전과 번영에 기여한 바가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 칭찬받기에 충분한 일이겠지요.

만일 오늘날 한국의 교육계가 직면한 어려움을 개선하고 발전시켜 나가고자 한다면, 나는 한국의 교사와 학교 관계자들이 그룬트비와 콜이 가지고 있었던 교육에 대한 생각과 아이디어를 고민해 볼 것을 추천합니다. 물론 그룬트비가 가졌던 비전과 아이디어는 덴마크의 미래에 대한 염려로부터 나왔고,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특별한 상황과 환경에서 출발한 그의 생각이 오늘날 한국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룬트비와 콜의 교육 철학과 이를 바탕으로 오늘날 그들의 사상을 실천하고 있는 덴마크 자유 학교에 대한 연구가 한국의 교사들에게 귀한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인터뷰를 정리하며 그가 많이 그리웠다. 많은 말보다 지난 탐방에서 함께했던 분들의 고백을 담는 것이 좋겠다.

“일평생 자유 학교의 교사로서 또 자유 학교 교사를 길러 내는 교수로서 교육의 본질과 아이들의 영혼을 붙들고 씨름했던 교수님 부부의 삶이 참 아름답게 다가왔다.” (좋은교사운동 대표 정병오)

“교수님의 인생 이야기를 들으며 마치 교수님이 살아 있는 그룬트비요, 콜처럼 느껴졌다. 교수님 같은 분들이 그룬트비와 콜의 정신을 이어 가고 있기 때문에 덴마크 교육이 더욱 발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협동학습 연구회 전 대표 김현섭)

“교수님의 말씀 중 알묘조장(揠苗助長) 고사를 인용하시면서 학생들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삶으로 가르치라는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GT 손경춘)

“얼굴에 흐르는 부드러움과 인자한 미소는 평생의 삶에서 새겨진 아름다운 곡선이다. 인자한 미소도 강의를 할 때는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보면 바른 교육에 대한 기대와 안타까움을 가지고 계신 것 같다.” (기윤실교사모임 정철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