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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습니다

[인터뷰 : 홍순명] 사람을 심는 사람

홍순명 (前 풀무학교 교장)

1937년 강원도 횡성에서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동네 서당 훈장을 하던 유교 가정에서 태어나 책을 통해 김교신, 함석헌, 노평구 선생 같은 분들을 접하게 되면서 깊은 영향을 받았고, 1960년부터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에서 가르치다가 2002년 정년을 맞아 퇴임했다. 현재 2001년 세워진 주민 풀뿌리 대안 대학인 풀무환경농업 전공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쓴 책으로는 《들풀들이 들려주는 위대한 백성 이야기》(전3권), 《홍순명 선생님이 들려주는 풀무학교 이야기》(첫째 묶음) 등이 있다.

사람을 심는 사람

  - 좋은교사 2010년 12월호 수록된 글 -

인터뷰 및 사진 홍인기

 

 홍순명 교장 선생님을 처음 뵌 건 2004년이다. 예비 기독 교사 아카데미를 담당하면서 아카데미에 참석한 학생들과 함께 대안 학교들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풀무학교를 방문하고 저녁에 유기농 센터에서 숙박을 하면서 교장 선생님을 만났다. 교장 선생님 이야기 덕분에 유기 농산물에 대한 나의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올 봄부터 여러 번 교장 선생님께 인터뷰를 요청하였으나, 선생님께서 사양하셨다. 가족과 함께 휴가를 떠난 여행길에서 다시 부탁드려 겨우 교장 선생님과 인터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교장 선생님을 만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에 인터뷰 내내 마음이 더욱 애절했다.

선생님 인터뷰를 하면서 풀무학교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풀무학교를 열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부탁드립니다.

군대 가기 전에 교사 경력이 3년 있었습니다. 초등학교에서 2년, 고등학교에서 1년을 가르쳤습니다. 교사가 되기 전에 김교신, 함석헌 선생님의 책을 읽고 그분들의 세계관과 교육에 관한 생각에 많은 공감을 했습니다. 그런데, 현직에 나가 보니 내가 생각하는 교육과 괴리가 컸습니다. 군대에 있을 때 홍성에서 학교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1960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학교에 와 보니 초가집에서 학교를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학교 설립자들이 생활에 본을 보이고, 교육에 대한 이상이 뚜렷했습니다. 젊은 마음에 많이 감동되어서 학교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50년 동안 학교에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2001년에 정년을 마쳤지만 이후에도 전공부와 고등부에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거의 평생을 풀무와 함께 지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가르치던 학생들이 지금은 할아버지가 되었고 3대가 학교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사는 평민이라는 정신이 3대에 걸친 가르침을 통해 형성되고 있다는 희망과 기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풀무학교를 설립하신 분은 이찬갑, 주옥로 선생님이시지만, 실제 풀무의 정신을 발현시키고 학교를 이끌어 오신 분은 홍순명 선생님이라고들 이야기합니다. 선생님께서 소중하게 여기며 추구해 왔으며, 지금도 풀무를 풀무되게 하는 근본 정신은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닙니다. 저 혼자 한 건 더더욱 아닙니다. 제가 설립자보다 학교에 오래 있어서 그런 이야기를 듣습니다만 풀무학교에는 여러 가지 배경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삼국 시대부터 마을 교육이 있었고, 이 지역도 조선 시대에 서당이 있었고, 이찬갑 선생님은 일제 강점기에 오산학교에 계시면서 민족주의, 기독교 학교, 농촌 교육을 해 오신 분입니다. 주옥로 선생님은 이 지역에서 해방 때까지 주민들과 함께 ‘현광학원’을 운영하셨던 분입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다 같이 신념으로 삼았던, 김교신, 함석헌 선생님의 사상이 있었습니다. 학교를 운영하기 위해 교사들이 외국의 사례를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같이 만들어 온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학교의 목표에 집약해서 ‘더불어 사는 평민’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잘 압축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을 실현하고, 개성을 실현하는 개인이 공동체와 어떤 상호 관계를 유지할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는 것입니다. 교육은 자기를 실현하고 공동체에 기여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생명, 평화, 생태 친화적인 삶을 살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갈등을 조성하지 않으며 평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소외층과 약자 계층과 더불어 사는 것은 교육과 사회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평민’은 어떤 지식이나 지위나 경제력과 관계없이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가치관과 인문 교양과 실제적 능력을 갖춘 국민의 대다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자신의 개성을 존중하고 남을 존중하는 것이 평민입니다.

더불어 사는 것과 평민의 개념은 상호 침투적인 것입니다. 우리나라 교육은 순기능도 있었지만, 중앙 집중적이고 노동을 경시하며 입신양명 중심의 역기능이 있었습니다. 최근 이런 역기능이 시장주의와 합쳐져서 더 강화되었습니다. 전통 교육이 주는 역기능을 극복해야 합니다. 21세기 시대 과제가 생태, 생명을 존중하고 평화를 실현하는 것인데, ‘더불어 사는 평민’ 속에 이러한 정신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내가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이라고 하면 물질적인 것을 생각하는데, 정신적 생명이 진정한 바탕입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위해 오셨습니다. 모든 갈등, 차별 대립을 극복시키려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학교생활, 교육과정, 자치 활동을 통해 배워 가야 합니다. 남을 지배하기 사람을 기르기보다는 사회 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민을 건전하게 하는 것이 교육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풀무학교는 학교를 넘어 지역 공동체의 중심이 되었고, 홍성은 유기농 농업의 구심점이 된 것 같습니다. 학교가 어떻게 지역 사회를 변화시켰는지 이야기해 주세요.

이찬갑 선생님은 오산학교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며 민족주의 교육을 하신 분입니다. 독립할 자격을 갖춘 국민을 기르기 위해 애쓰시던 분입니다. 학교, 기독교, 농촌을 일원화해서 파악하시던 분입니다. 초창기부터 기숙사와 더불어 지역의 여러 농촌 시설을 많이 개설하셨습니다. 공장, 의료 관계 시설 등 어떤 이상향을 만들 계획을 가지고 추진하신 일들이었는데, 일제 말 좌절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자신의 이상을 홍성 지역을 통해 실현하려고 하셨습니다. 1958년 공판장을 통해 생협을 운영하면서 학생들이 실질적인 것을 배우도록 하셨습니다. 학생들이 졸업 후 지역에서 여러 조직을 운영하도록 하셨습니다. 학교와 지역은 상호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학교가 지역의 활력을 주어야 합니다. 풀무학교는 태생적으로 지역과 연계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1975년에 일본에서 기독교 자매 학교 교장 선생님께서 학교를 방문하셔서 일본의 역사적 잘못을 사죄하고 유기농을 권장하는 강연을 하셨습니다. 유기농에 관한 이야기는 한국 역사에 처음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며 마을이 학교이고 학교가 마을이어야 교육에 충실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찬갑 선생님이 학교에서 생협을 처음 시작했습니다. 이후 생협, 신협, 지역 신문으로 발전했습니다. 학교에서 시작해서 지역에 있는 졸업생들에게 넘겨주는 방법으로 여러 조직이 만들어졌습니다. 지금은 30개 정도의 주민 조직이 생겨났습니다. 장구한 세월을 두고 지역을 움직여 온 것입니다.

유기 농산물은 생산자뿐 아니라 소비자가 선택하고 소비해야 합니다. 제가 유기농으로 마음을 돌린 결정적 이유는 선생님께서 제자들 중에 유기농 때문에 돌아가신 분들도 있다고 하시는 이야기를 듣고, 이것이 부자들의 사치가 아니라 목숨을 건 운동이구나 하고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혹시 저희 회원들 중에도 유기농은 부자들의 사치라고 생각하는 분들을 위해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30년 전에는 일반의 이해가 낮고 기술도 확보되지 않아서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이 실험하면서 배우면서 시작했습니다.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김을 매야 하는데 노동력이 많이 들어갑니다. 벌레가 먹으면, 도시에서 그것을 사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힘들고 경제적으로 지친 끝에 한 사람이 돌아가고, 다른 한 사람은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그래서 논에다 그 사람의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팀이 되어 일하면서 기술적인 교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리 농법을 통해 오리가 제초, 제충 기능을 하게 됩니다. 소비자들과 잘 연결되는 문제도 한살림, 생협 등이 생기면서 해결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1인당 평균 60~70㎏ 정도의 쌀을 먹는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예전의 절반 수준입니다. 유기농 쌀이 두 배로 비싸다고 해도 한 사람이 한 달에 2만 원쯤 소비합니다. 그렇게 비싼 편이 아닙니다. 문화비보다 쌉니다.

유기농은 건강을 지키면서 환경을 살리는 일입니다. 농민들이 고령화되고 농촌이 붕괴되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농업이 붕괴되어 외국에 의존하게 되면 안보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생물 다양성이 파괴되면 사람도 생존하기 어려운 조건이 됩니다. 농업은 생명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농약을 치는 농업은 정말 위험합니다. 생명을 생각할 때 유기농 없이 어떻게 생명이 살리는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유기농을 통해 농촌이 살아나며, 농촌이 가지는 활력을 통해서 사회 평화도 확보됩니다. 생태와 평화가 지속 가능한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자본과 기술을 통한 공업적인 생활과 농업적 생활이 조화되어야 합니다. 연대와 공생이 필요합니다. 유기 농산물을 소비하는 것은 건강과 건전성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개인의 간단한 지출 문제가 아닙니다. 운동 차원의 문제입니다.

선생님께서 쓰신 《신 흥부전》에 보면 선생님께서 꿈꾸시는 이상 사회가 잘 드러나 있는데요. 지역 사회의 독자적인 화폐 발행 이야기까지 있더군요.

옛날이야기는 시대에 따라 바뀌어야 합니다. 작위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만 옛날 것을 늘 현실에 맞게 고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는 시대성과 아픔을 담아야 하기 때문이죠. 같이 아파하면서 개선해 가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어떤 생각을 준다는 의미에서 교육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매우 큽니다. 홍동에는 30개의 주민 조직이 있습니다. 구체적인 하부 조직이 있다는 것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개선되어야 할 부분들이 많습니다. 학교가 마을의 여러 조직의 출발선이었습니다. 하지만, 학교도 새롭게 계속 거듭나야 합니다. 학교가 예전에는 경제적으로나 학생 숫자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안정되었지만, 안정이 또 다른 위협입니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지나치게 외국을 모방합니다. 그래서, 획일화되고 중앙 집중적이고 지적인 면만 강조합니다. 교육이 정말로 우리들의 체질에 맞는 교육과정의 운영을 갖기 위해 연구와 실천이 필요합니다. 이 시대와 사회의 요구에도 부응하여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앞으로 주민 조직 간의 소통과 활발한 상호 작용이 중요합니다. 농촌의 고령자가 많습니다. 도시의 젊은이들이 비정규적으로 있을지언정 농촌으로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농촌의 과도한 노동을 두려워합니다. 노동력을 절약하고 재정적 안정 문제도 해결해야 합니다. 농업이 시스템적으로 확립되려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합니다.

1990년대 중반 우리 사회에 대안 교육 운동이 한참 일어났을 때, 풀무학교는 대안 학교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는 교본이자 필수 방문지였습니다. 당시 선생님은 이 분들에게 어떤 말씀을 해 주셨는지요? 또 10년이 지난 지금 대안 학교 운동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1994년에 대안 학교 모임을 처음 열었는데, 짧은 시간 안에 우리 교육의 한 부분을 차지할 만큼 에너지가 있었고, 여러 시도들도 있었지요. 이것은 대단한 저력이고, 앞으로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대안 학교들에겐 시대적인 과제와 요청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안학교는 우리의 전통 아래 우리 시대의 과제에 답하는 학교가 되어야 합니다. 교육이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대안 학교가 수시에 많이 합격한다, 좋은 학생들이 많이 온다, 특활을 좀 더 많이 한다 이런 이야기는 무의미합니다. 시대를 앞질러 대안 사회를 만드는 교육이어야 합니다. 페스탈로치나 존 듀이나 덴마크나 모두 시대를 앞서 가는 교육을 할 때 그 나라의 고유한 교육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시대적 과제를 가지고 국민들에게 대답하는 교육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조선 시대 교육처럼 입신양명, 노동 기피, 중앙 집권적인 교육이 됩니다. 대안 학교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학교가 운영되는 상태에 안주한다면 자기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며,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시장주의, 국가주의, 친기업적인 지금 체제는 문제가 있습니다. 지속 가능한 생명과 평화가 존중되는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대안 학교는 여기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까 하는 방향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역사와 전통에 뿌리내리고 시대의 문제에 대답하는 학교가 되어야 합니다. 대안 학교가 우리의 주류 교육에 대한 안티로서의 대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대안 학교에서의 종교 교육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종교 교육을 안 하는 것이 종교의 자유가 아닙니다. 존 듀이가 종교 교육을 하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행복과 사회 통합, 정서적 안정을 위해 종교 교육이 필요한데, 다만 종교가 다양하기 때문에 서로 간의 충돌을 막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누구나 받아들이는 것은 생명을 존중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정신입니다. 기독교에서는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작품이고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평화가 있고 생명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은 존 듀이가 언급했던,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기독교 외에도 불교나 민족 종교에도 있습니다. 보편성을 가진 종교를 존중하는 방법을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넓게 보면, 선생님도 한 사람의 교사로서의 삶을 사시면서 해방 이후 한국 근대 교육의 역사와 함께하셨습니다. 현재 우리 교육이 어디에 와 있고, 어디에서 걸려 있고, 어떤 문제를 풀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나라 교육은 혁신은 하지 못하고 만들어진 제도를 뒤치다꺼리만 해 온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동안 교육이 일제 식민 정책에 앞장서고, 군사 독재에 앞장서고, 반공 이데올로기, 수출 중시, 기업 친화적인 경제 교육 그리고, 어린 학생들을 청소년 시기에 불행하게 만들어 놓은 점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교육은 총체적인 반성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환경 문제, 격차 문제, 평화 문제는 정치가가 해결할 수 없습니다. 교육자가 고민하고 학생들에게 10년 후의 사회 모습을 예측하고 대비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학생들이 현실을 통해 배우고, 현실을 통해 자신의 장점을 찾게 하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학생들을 자꾸 서열화하면 오히려 정신 질환 현상이 많이 나타나게 됩니다. 교육이 학생들에게 점수 강박증을 갖게 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자기 자신을 성장하는 데 의미를 두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교육의 본질은 사회의 아픔을 교사들이 먼저 느끼고, 사회를 치유하는 쪽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교육의 역할은 시장 경제를 뒷받침해 주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혁신하는 기반이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안 학교도 학생들에게 자유를 준다는 차원이 아니라 지속 발전 가능한 사회를 만들 힘을 기르고 변혁하는 에너지를 갖도록 교육해야 합니다.

요즈음 떠오르는 생각은 학교 교사뿐만 아니라 지역에 있는 주민도 교사가 되고, 지역이 현장 교실이 되어야 지역에 대한 책임도 생기고 학교 교육도 충실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역과 유리된 별도의 공간인 학교가 아니라, 학교 자체가 마을이 되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관리하기 쉬운 큰 건물과 운동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건물을 작게 짓고 학생들도 교사들도 구내에서 사는 것입니다. 학교 안에 여러 생태적 시설을 만들고 식량도 자립하도록 도모해야 합니다. 교육과정에 있어서도 지역의 교육 내용을 소재로 하는 모둠 학습을 위주로 하고, 학생들이 지역의 주민들에게 직접 가서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학교는 지역와도 상호 작용을 해야 합니다. 지역을 통해 세계를 볼 줄도 알고, 지역을 통해 어떤 일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도 해야 합니다. 학교를 마을이 되게 하고 마을을 학교가 되게 하는 것이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교육의 실마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풀무학교 교장 퇴임 후 ‘농업 전공부’를 설립하시고 지금까지 여기서 근무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선택에는 한국 농업뿐 아니라 우리 사회가 가야 할 방향에 대한 나름의 고민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본과 기술을 생각하면 농업이 가치가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과 평화의 입장에서 보면 더불어 사는 기구나 운동은 가치를 가집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일을 위해 다 같이 노력해야 하는데, 농업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가치가 큰 것이지요. 생명과 평화의 가치에 있어서 농업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더불어 사는 가치를 가르치기 위해 종교도 자기의 역할을 해야 되고 정당, 언론, NGO, 사회적 기업, 조세 정책, 대안 무역, 협동조합도 가치가 큽니다. 더불어 사는 쪽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격차가 벌어지고 환경이 파괴됩니다. 지금은 융합하는 시대입니다. 교육 따로 농업 따로가 아니라 농업의 교육력을 교육에 도입하면, 학생들을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교육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농업의 교육력을 활용하여 지역과 학교가 공생하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근세 학교가 도입되기 100년 전에는 가정과 지역을 통해서 청소년들이 행복하고 건강하게 성장해 온 사실이 있습니다. 몇 천 년 동안 교육되어 온 이 방식을 현대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처럼 계속해서 학생들이 경쟁 속에 있으면 스트레스, 신경 쇠약, 학교에 대한 혐오, 동료에 대한 신뢰 부족 등의 부작용이 생깁니다. 생태적이고 지역적인 인간 관계 속에서 청소년들을 키워야 합니다.

유기농은 생태의 법칙을 바탕으로 하는 것입니다. 생태의 법칙은 경쟁이 아니라 다양성, 상호 의존, 순환, 개체 속에 전체가 있다는 생각, 균형, 내부적 발전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생태도 경쟁으로 파악하고 교육도 경쟁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생태의 원칙에 따라 농사를 지으면 건강한 농산물 건강한 생태 순환이 됩니다. 축산의 분뇨를 발효시켜 대지에 다시 투입함으로써 건강한 순환 관계가 이루어지고, 소농이 협력해서 순환 체계에 참여하고, 1차 산업인 농업뿐만 아니라 가공과 유통, 서비스 산업에 참여하여 중간 유통 마진을 없애고 농민과 소비자가 함께 이익을 배분하는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지자체에서는 유기농 급식을 통해 청소년들을 건강하게 키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개별 학교는 교육청의 지시를 쫓아가지 말고 개성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협력하는 방법을 지속적으로 개발해야 합니다. 더불어 사는 것이 생활의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더불어 살지 않으면 생태가 망가지고 부동산 투기를 통해 경제가 극단적으로 금융 자본과 수출 자본에 의지하면서 국민생활에 위협이 됩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풀무학교는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고자 했던 김교신 선생님의 영향 하에 세워졌고, 기독교가 가진 영적 정신적 유산을 교육을 통해 이 땅 백성 가운데서 나눠주고 섬기는 역할을 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 현실 가운데, 기독교 학교들과 기독 교사들은 기독교의 어떤 영성과 정신을 붙들어야 할까요? 그리고, 어떻게 이 땅 백성의 곤고한 삶을 개선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까요?

성경을 교리로 보지 말았으면 합니다. 반 고흐의 그림 중에 이사야가 펼쳐진 성경 옆에 에밀 졸라의 조그마한 문학 책을 그려 놓은 그림이 있습니다. 성경이 옛날의 책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를 진단하고 현재를 구원하는 것이라는 뜻을 담은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함석헌 선생님나 김교신 선생님을 좋게 생각하는 이유는 ‘옛날 성경 말씀에 이런 것이 있다’가 아니라, 성경을 통해 현실을 읽으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큰 교회보다 작은 교회에서 성경을 통해 현실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함께 고민하는 모습에 생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알기로 실지로 작은 교회에 진지하게 고민하고 진실하게 애쓰는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나라가 기독교를 처음으로 받아들일 때, 실학자 선배들이 서학을 읽고 소화하고 유교 이데올로기와 맞서서 선교사가 오기도 전에 기독교 신앙에 도달했습니다. 그들은 지상의 정치 제도 이상의,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원리로서 하나님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평등, 평화를 실천했습니다. 초창기의 선배들과 같이 진지하게 연구하고, 깨달은 바에 목숨을 걸고, 실천하는 모습이 지금 우리에겐 부족합니다. 개혁은 언제든지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150년 전 한국의 초대 교회, 그때 그들의 생활화하는 신앙이 우리가 돌아가야 할 정신적 원점입니다.

우리 교육이 잘하고 있다는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기독 교사들의 사명이 큽니다. 페스탈로치, 피히테, 덴마크와 같이 자기 나라의 교육을 가진 나라는 밑바탕에 사상성과 종교성이 있었습니다. 핀란드 방식이 가능하려면 대학 교수와 택시 운전사가 모두 똑같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핀란드의 경우 80%에 달하는 개혁 교회의 전통 아래서 누구나 똑같다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였습니다. 기독교적 가치관을 제대로 확립하고,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고, 시대를 앞서서 고쳐 나가고, 작은 데서 시작해서 연결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교육이 제대로 확립되어야 진정한 통일도 됩니다. 이 상태로 통일이 되면 인권과 자유와 평등이 넘치는 사회는 불가능합니다. 그것에 대해 통절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여생 동안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고등부나 전공부가 젊은 후배들에게 승계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어린이집 이사장, 학교 생협 이사장 등의 동네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자유로운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성경을 보면, 젊은 사람은 꿈을 가지고 늙은 사람은 비전을 가진다고 합니다. 젊은 사람보다 늙은 사람이 더 큰 꿈을 가지라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제게 주어진 일을 감당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본심으로는 자유로운 시간을 가지며 책을 읽었으면 하는데,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제가 필요한 일에 그때 그때 판단해서 해야 할 일을 하며 살 뿐입니다.

교장 선생님께서 쏟아냈던 수많은 말씀도 감동이지만, 태풍이 휩쓸고 간 마을 어귀 넘어진 나무를 톱으로 잘라 정리하는 선생님의 어깨에서, 손마디에서 더 큰 감동을 받는다. 선생님께서 사시는 곳에서 50m 정도를 걸어가면 마을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헌책방과 마을에서 생산한 빵과 농산물이나 가공 식품을 파는 매장을 만날 수 있다. 매듭 공예를 하는 공방에서 딸아이와 아내는 목걸이를 샀다. 아내의 얼굴에는 당장이라도 이곳으로 이사 오고 싶은 마음이 쓰여 있다. 선생님의 신념과 노력은 허공에 메아리치는 것이 아니라 풀무학교의 담벼락에도 남자 기숙사 기와집 처마 끝에도 제자가 운영하는 식당의 냉면 육수 맛에도 살아 있었다. 문득 영화 <나무를 심는 사람>이 생각났다. 선생님은 충남 홍동면에서 평생을 인재를 심고 가꾸셨다. 모두들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농촌에서 가능성의 공동체를 만들어 내셨다. 한 학교에서 3대를 가르쳐 변화를 일구어 내신 선생님이야말로 신실한 하나님 일꾼이시다.